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91
기수의 지도를 살펴본 무림 명숙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주일비는 개방 방도들이 보고한 첩지를 일일이 비교해보면서 거듭 놀랐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가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군요.”
기수는 절정의 경공능력과 기감을 지니고 있는 만큼 청탑산 무리의 근거지까지 바짝 접근하여 정밀하게 정찰을 할 수 있었다.
그에겐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개방 방도들이 피상적으로 수집한 정보와는 차이가 나는 곳이 많았다.
기수는 세부 작전 수립의 주도권을 주일비에게 맡겼다.
무림맹이 중심이 된 조직이니까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어차피 프리 롤로 자유롭게 움직일 거라서 작전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었다.
신이 난 주일비는 석초와 장철까지 불러놓고 작전을 짰고, 최종안을 기수에게 설명하며 허락을 청했다.
“맹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믿고 따르겠습니다.”
기수의 대답에 주일비의 입이 더 벌어졌다.
그렇게 공격전술이 짜이고, 날이 어두워지자 먼저 무림맹 군웅들이 움직였다.
목표는 청탑산 무리에 대한 기습공격.
무림맹의 전력으로 봤을 때 청탑산 고수 60여명을 일거에 제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수가 앞장서서 기습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일비는 기습의 장점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기수가 장원의 남쪽으로 들어가고, 적이 움직이자마자 개방, 소림, 무당이 각각 지휘하는 세 부대 병력으로 디귿자 형 포위망을 치기로 했다.
도망치는 놈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기수는 포위진형이 원거리에서 갖춰지기를 기다려 청탑산 무리가 머무는 장원으로 들어갔다.
깊은 밤. 낯선 남자가 다가오자 문을 지키던 병사가 어깨에 기대고 있던 창을 내려 겨누려 했다.
그러나 동작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잔백지에 눌려 쓰러졌다.
그들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진 것과 장원의 정문이 굉음을 내며 박살난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웬 놈이냐!”
깜짝 놀라 뛰어나온 첫 번째 청탑산 고수가 이마에 구멍이 뚫려 뒤로 넘어갔고, 기수는 그림자처럼 빠른 신법으로 장원을 누비며 다음 상대를 찾았다.
자신의 정체를 늦게 드러낼수록 적은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침입자를 막아라!”
“으악!…….”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면서 청탑산 무리는 하나 둘씩 목숨을 잃어갔다.
그들은 은혈대법을 끌어올려도 기수의 현재 무공수준을 따라갈 수 없었다.
고작 할 수 있었던 것은 불꽃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뿐이었다.
기수는 그 신호를 보고 미소 지었다.
일이 원하던 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청탑산 고수들은 나중에야 비로소 합격진 형태를 갖추었지만, 그때는 이미 30여명 밖에 남지 않은 상황.
기수는 합격진을 공격하다가 에워싸인다 싶으면 빠른 경공으로 물러나는 식으로 싸움에 임했고, 어렵지 않게 적을 한 명씩 제거할 수 있었다.
숫자가 계속 줄어들자 그들 중 한 명이 기수에게 물었다.
“도, 도대체 넌 누구냐!”
“혈매궁주.”
짧은 한 마디였지만 청탑산 무리의 얼굴엔 극도의 공포가 드러났다.
기수는 공세를 더욱 강화했고, 결국 견디지 못한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퇴로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무림맹 군웅들에 가로막히고, 뒤에선 기수가 쫓아오자 결국 단 한 명도 살아서 장원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무림맹 군웅들은 환호성을 질러 승전을 자축했다.
“와아아!….”
청탑산 무리 60명을 이렇게 쉽게 일망타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기수가 처단하고 무림맹 손에 죽은 적은 10여명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만 하더라도 엄청난 전과였다.
만륙현에 배치된 적의 병력 중 가장 강한 자들을 모두 제거했다는 점이 특히 고무적이었다. 이제 무림맹 수준에서 버거운 상대는 없는 것이다.
기수와 무림맹 군웅들은 우선 장원 안에 있는 지도나 문서 등을 뒤졌다.
그리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 매복한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기수는 슬그머니 딴생각을 했지만 아쉽게도 오래지 않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불꽃 신호를 보고 삼황맹과 반군이 몰려온 것이다.
활짝 열린 정문으로 치고 들어온 그들은 객청 안에 시신 60구가 쌓여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무림맹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숫자로 따지면 여전히 반군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장원 내부에 들어와 있는 사람의 수로만 비교하자면 서로 비슷했다.
그 정도로는 삼황맹과 반군이 무림맹을 이길 수 없었다.
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계속 몰려왔다.
장원을 에워싼 반군의 수가 점점 늘어나 담을 완전히 에워쌌다 싶은 순간.
불꽃 신호가 하늘로 올라갔다.
청탑산 무리가 쏘았던 것과는 다른, 무림맹의 신호였다.
그리고 장원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장원에 불을 지른 것은 위치를 알리는 것과 동시에 조명을 비추는 의미였다.
30분 정도 지나 요란한 말굽소리와 함께 장철과 석초가 지휘하는 기병이 몰려왔다.
장원 밖에 있던 반군은 형편없이 무너졌다.
자기네들의 수를 믿고 장원 압박에 집중했다가 등 뒤로 적을 맞고 보니 오히려 협공을 당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동이 틀 때까지.
기수와 무림맹, 그리고 3천 기병은 반군을 주살하며 날을 새웠다.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장원 주변.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정경은 끔찍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시신들이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웠고 그들이 흘린 피가 도랑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일비는 군웅들을 독려했다.
“자! 다음 목표를 향해 갑시다!”
적의 병력을 무찌른 것도 큰 전과이지만 거기에 더해 적의 군량과 치중까지 노획한다면 완벽한 마무리라고 할 수 있었다.
위치는 이미 파악된 상태.
무림맹이나 기병 모두 밤새 격전을 치렀지만 승리의 기쁨으로 인해 피곤한 줄도 모르고 행군이 이어졌다.
본래 군대의 행군이란 그 속도에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경공을 펼칠 수 있는 무림인들과 경기병 3천으로만 이루어진 조합은 그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군량과 치중을 지키던 수비병들은 무림맹의 습격에 어느 정도 버티며 전투를 벌였지만 기병까지 나타나자 결국 모든 걸 놔두고 도망쳤다.
기수와 주일비는 협의 후 적이 버리고 간 군영을 차지하고 앉아서 밥도 지어 먹고 휴식도 취하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군량이고 치중이고 다 태워버렸겠지만, 지금은 경기병 3천이 딸려 있기 때문에 노획해서 병사들에게 나누어 가지도록 하는 게 현실적이었다.
다들 쉬는 동안, 기수는 주일비와 함께 각 문파들을 돌며 사상자 현황 등을 살폈다.
몇 번의 출정을 경험하면서 왠지 모르게 그것도 자신의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문파 고수들 입장에선 솔직히 문파를 위해, 무림맹의 명예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건데,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면 섭섭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기수가 직접 돌아보며 말을 걸어주자 사람들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감격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군웅들 입장에선 까마득한 존재.
무림맹주조차 설설 기는 천하제일 고수가 자기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다친 곳을 돌봐주고, 공적을 칭찬해주니까 어깨가 으쓱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다음엔 좀 더 열심히 싸우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그렇게 문파마다 모두 돌아보다 보니 쉬어야 할 시간을 모두 써버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무림맹 군웅들뿐만 아니라 기수도 뭔가 사기가 고양된 것이다.
따르는 사람들과 리더 사이의 관계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작용을 했다.
기수는 내친 김에 석초와 장철도 만나서 밤사이의 전투에 대해 칭찬을 해주었다.
장철은 알고 보니 좌군도독 장현의 아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황제의 금패를 가진 사람이 칭찬해주는 것은 또 달랐다.
콧구멍까지 벌름거려 가면서 좋아했다.
기수는 자신의 말 한 마디가 그런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 이런 게 사회생활이고 인맥이란 거구나.’
만약 자기가 이곳에 계속 산다면 천마교 사람들, 수로맹 사람들, 무림맹 사람들, 조정의 무관들까지…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기만 해도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업이나 해볼까?’
한 4~5년만 투자해도 십절금왕문이나 사해문을 능가하는 거대 사업체를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돈을 벌어봤자 페라리를 타거나 대형 LED TV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가는데 능소화가 멀찍이서 자기를 계속 쏘아보고 있었다.
제딴에는 전음을 시도한답시고 정신을 집중하는 모양이었다.
그 표정이 귀엽기는 했지만 기수는 편식을 싫어했다.
그리고 쉬는 사이에 적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개방 방도들이 수집하고 보고한 정보에 따르면 세 곳에서 기병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수는 즉시 주일비, 장철, 석초등과 함께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어떻게 이 정도로 신속하게 반격해오는 걸까요?”
석초의 말에 주일비가 대답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가 받은 첩보를 지도 위에 표시하자 기수는 어떤 원칙 같은 것을 보게 되었다.
세 곳에서 출발한다는 적의 기병은 거의 정삼각형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다른 쪽에도 이런 식으로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면…’
오늘처럼 한 방 얻어맞더라도 재빠른 반격이 가능할 것 같았다.
불의의 습격뿐만 아니라 관군의 어떠한 움직임에도 유기적으로 협공할 수 있도록 지형에 따른 배치를 참 잘 해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수적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장철이 말했다.
“여기 계속 머물러 있으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무림인들에 비해 행동에 제약이 있는 기병의 지휘관으로서 삼면의 포위에 위협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일비는 복잡한 표정으로 지도를 보았다.
큰 전공을 세운 다음이라 욕심이 나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기수를 봤다.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기수는 주일비와 달리 무림맹 뿐만 아니라 기병의 안전도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허창까지 최단거리로 퇴각합니다.”
기수의 결단이 내려지자 주일비와 장철이 각각 다른 의미가 담긴 심호흡과 한숨을 내쉬었다.
기수가 덧붙여 말했다.
“괜히 무리해서 점수를 깎아먹을 이유가 없습니다. 허창까지 돌아간다고 해도 이번 출정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습니다. 반군이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서 병력을 차출한다면 개봉에 대한 압박은 약해질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만륙현 쪽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겁니다. 우리는 그때 다른 쪽을 노리면 됩니다.”
장철이 말했다.
“말에 싣지 못할 군량과 치중은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령하겠습니다.”
주일비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최단거리라고 하면 적의 서쪽에서 오는 기병과 만날 것 같은데… 경로를 우회해서 갈까요?”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우회하면서 시간을 끌다 보면 무슨 변수가 또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니 중간에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최단 경로로 갑니다. 포위당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한 쪽 병력만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일비도 거기엔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기병이 힘을 합친다면 가능할 겁니다.”
“이번 퇴각을 잘 지휘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궁주님은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저는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일비는 궁금했지만 기수의 표정을 살핀 후 묻지 않았다.
대신 각 문파 수장들을 불러 퇴각준비를 지시했다.
기수는 최단거리 퇴각이라는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했다.
제갈세가가 안배해 놓은 병력 배치는 장기판의 말들이 조여 오는 것과 비슷했다.
괜히 미련 가지고 남아 있어봤자 외통수에 걸릴 가능성만 높아질 뿐, 득 될 건 없다는 판단이었다.
자기가 병법을 마스터해서 제갈세가와의 머리싸움에서도 이겼으면 좋겠지만, 단기 속성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시작한다 해도 늦은 일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제갈세가를 제거하면 된다.’
그들이 없으면 우회하여 개봉을 먼저 치는 양동작전도,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여 여러 부대가 동시에 협공하는 전술도 모두 무력화될 것이었다.
‘그놈들이 있는 상태로는 이 전쟁을 이길 수 없어.’
군대를 지휘하여 제갈세가와 싸우라면 자신이 없지만, 암살 미션이라면 얼마든지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 남겠다고 한 것이었다.
기병들은 저마다 안장에 실을 수 있을 만큼 군량을 자루에 담았고, 가져갈 수 없는 건 전부 태워버렸다.
그리고 즉시 남서쪽으로 출발했다.
기수는 장철과 석초를 전송했고, 이어서 떠나는 무림맹주와 군웅들, 그리고 여인들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모두가 떠난 뒤.
기수는 현장을 떠나 개봉으로 향했다.
적의 병력이 가장 많이 집결된 곳.
중요한 곳이니만큼 제갈세가 역시 그곳에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개봉까지 가는 동안, 기수는 거리와 마을의 참혹한 모습을 보았다.
반란군은 자신의 근무지를 벗어나면서부터 약탈자로 변신했고, 백성들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아예 마을 하나가 통째로 다 타버린 곳도 보였다.
‘허창으로 피난해 들어간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군.’
전쟁의 피해는 늘 약자에게만 돌아가는 것 같아서 마음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