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525
쏟아져 나온 청탑산 무리의 수는 오륙백 명 가량 되어 보였다.
그들 중 일부는 쓰러진 척회왕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갔고, 나머지 대부분은 기수에게 덤벼들었다.
달려 나오면서부터 은혈대법을 끌어올린 것은 주군의 원수가 얼마나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기수에 대한 원한이 극에 달해 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오늘을 위해 애써왔던가.
이제 황궁까지 점령하고 마지막 남은 한 단계인 진짜 황제 죽이기만 완수하면 자신들의 세상이 펼쳐질 것인데, 그 마지막 순간에 기수가 모든 것을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척회왕이 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들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과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기수를 죽여 그 한이라도 풀려고 했다.
그러나 기수의 뒤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청탑산 패거리가 뛰어나오자마자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 중 가장 빠른 사람은 조민, 조현, 그리고 혈천제였다.
그 외에도 성 아래 내려와 있던 고수들이 전부 다 몰려왔고, 성 위에서 황제를 호위하던 공주와 기린궁 여인들도 성벽을 뛰어내려 싸움에 가담했다.
청탑산 패거리 중 선두는 무방비상태인 기수에게 바짝 다가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조민과 조현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두 여인에게 순식간에 칠팔 명이 제압당하자 그들은 민첩하게 합격진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 위로 난데없이 강기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 발 늦게 도착한 혈천제가 합격진 위에 비폭대라수를 내리꽂은 것이다.
기수가 길고 긴 장소성을 모두 그치고 고개를 원래 위치로 되돌렸을 때는 이미 주변에 미녀들로 장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탁지연이 자루 부러진 청강대도를 기수에게 내밀었고, 기수는 가볍게 미소 지은 후 그것을 들고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청탑산 무리는 황제 쪽 무림인들에 비해 그 수가 대여섯 배나 많고 모두 은혈대법을 시전한 상태.
그러나 기수가 대도를 휘두르며 나서는 것을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의 칼 앞에는 합격진도 소용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민, 조현, 혈천제, 자영, 공주 등이 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살초를 펼쳐내니 수적 우위가 금세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국 살아남은 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등을 보인 자들은 여지없이 기수의 파천강기에 뒤통수를 관통 당했다.
기수는 척회왕 무리를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작정하고 나선 기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일부 앞서 나간 자들은 금군이 가로막고 나섰다.
그들은 척회왕이 죽는 순간 어떻게 해야 자기들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 알아차렸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의 진정성을 입증하려면 지금이라도 태도를 분명히 해야 했다.
앞은 길이 막히고 뒤에선 기수가 쫓아오니 청탑산 무리는 결국 전멸당할 수밖에 없었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황이 정리되자 성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승리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그때, 주일비가 손에 핏덩어리 하나를 들고 성 위로 올라와 황제에게 바쳤다.
바로 척회왕의 머리였다.
죽인 사람은 기수인데 머리를 잘라 온 사람은 주일비라 약삭빠르게 군 면은 있지만 황제는 어쨌거나 통쾌한 마음으로 사촌형의 수급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
그는 좌우 무관들에게 명령했다.
“북경과 황궁, 왕부로 군사를 보내어 일당을 모조리 체포하라!”
“명에 따르겠사옵니다!”
무관들도 신이 났다.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이제부터 남은 일은 거저먹기였다.
그러면서도 공을 세울 기회는 널려 있으니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토벌을 마친 기수가 귀환하자 황제는 성 아래까지 내려가 그를 반겼다.
기수가 부복하자 황제는 직접 그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대가 나를 살리고, 황실을 지켜주었도다!”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폐하.”
“아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저 흉악한 척회왕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황제는 오늘 승리의 핵심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부하 문무 관원들을 사방으로 파견하여 환궁 준비를 하도록 하면서도 기수에겐 특별히 연회를 베풀어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모두들 바삐 움직이는 중에 단둘이 벌이는 축하연.
황제는 기수를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즐거이 술잔을 나누다가 물었다.
“그대 소원이 무엇인가? 말해보라.”
“저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황제는 약간 섭섭한 눈치였다.
“내가 무엇이건 다 들어줄 테니 너무 겸양하지 말고 말해보라.”
기수는 솔직히 지금 혼자 있고 싶었다. 신과 대화를 하고, 엄마를 만나고 싶은 생각 때문에 황제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백성들은 저마다의 본분에 충실하고 나라엔 환란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기수는 그냥 대충 대답한 것인데 황제는 기분이 좋은지 큰소리로 웃었다.
“국태민안이라… 하하하!…. 과연 경은 배포가 남다르도다. 하하하!…”
황제는 나라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기뻐 상당히 취할 때까지 연달아 술을 마셨고, 내내 기수를 놔주지 않았다.
결국 기수가 풀려난 것은 밤이 깊은 뒤였다.
기수는 혼자가 되자마자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갔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우를 살펴 혼자가 된 것을 확인한 기수는 심호흡을 한 후 신을 불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으와아!~ 너 정말 예뻐 죽겠다. 어쩌면 좋으냐!]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어흠! 체통을 지키십시오.]
[하하하! 정말 훌륭하다. 그런 굉장한 대결은 처음 봤다. 하하하!…]
[제가 원래 좀…]
[안다. 천재 맞다, 맞아. 내가 사람 하나는 진짜 잘 골랐지.]
[얘기가 방향을 잘 못 잡고 있네요.]
[그래, 그래. 네가 잘 나서 이렇게 된 거지. 하하하!…]
[그렇게 기쁘십니까?]
[기쁘다마다. 내가 형을 이긴 게 이번이 처음이다! 하하하!….]
신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기뻐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기수도 기분이 좋아졌다.
기수는 잠시 신의 칭찬 연타를 즐긴 후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럼 이제 저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보죠.]
[얘기해볼 게 뭐 있겠느냐.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는 방법? 가르쳐주마.]
[고맙습니다. 하핫!]
[물론, 방법을 안다고 실제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전에 얘기했었지?]
[예. 에너지가 없으면 실행은 안 된다고 하셨지요.]
원자폭탄 설계도는 인터넷에 널려 있지만 우라늄을 구하지 못하면 결국 폭탄을 완성시키지는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당장 가르쳐주마!]
[아! 그건 좀 나중으로 미루고요… 제 귀환 문제는….?]
[그건 네 마음에 들 거다.]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이곳의 여인들을 현대로 데려가면 적응을 못 할 거고, 네 어머니를 모셔 와도 심심해하실 거라 걱정했지?]
[예. 그렇습니다.]
[내가 특별히 네게 특권을 주겠다.]
[어떤 특권입니까?]
기수는 기대감을 잔뜩 품었다.
[네가 지정하는 두 지점을 자유롭게 오가도록 해주겠다.]
[두 지점이라면….]
[그러니까, 현대의 어머니 집과 이곳에 정한 너의 집 사이를 원하는 대로 오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말이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하하하! 그렇다.]
[하지만…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대가 완전히 다른데…]
[시간과 공간은 본래 하나다. 따로 떨어트려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아! 물론 네게 권리를 준 만큼 의무도 따르게 된다.]
기수는 미녀들도 챙기고 어머니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잔뜩 들떴다.
[그게 뭡니까? 말씀해보십시오.]
[시간대를 앞뒤로 하는 두 개 시공간을 오가다 보면 인과율에 의해 엄청난 뒤틀림이 생길 수도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나중 시대의 문물을 이전 시대로 가져가선 안 되고, 이전 시대에 대한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한다.]
기수는 노트북 가져오고 싶다고 말했던 것 때문에 신이 그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 자유롭게 갈 수 있다면 인터넷도 없는 세상에 노트북을 뭐하러 가지고 오겠는가.
[그건 걱정 마십시오. 아무 것도 이쪽 세상으로 옮기지 않겠습니다. 하핫!… 그런데 뒤틀림이란 게 뭘 말하는 겁니까?]
[예를 들어 네가 이 시대에 살다가 조선에서 온 관리를 만나 네가 아는 역사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현대로 돌아갔을 때 세상이 미묘하게 변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아! 그런 식으로요…]
얘기를 듣고 보니 조선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국이 강대해지는 걸 돕는 것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고국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을 봐도 자기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놔두면 되겠네요.]
[바로 그거다. 네가 간여하면 현대에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될 수 있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거운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녀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혹시 이동 횟수엔 제한이 있습니까?]
[처음에 장소를 설정하는 데 약간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단 통로가 만들어진 이후엔 제한 같은 건 없다. 1초에 한 번씩 왕복해도 된다.]
[그럼 제가 시공간 이동법을 배운 뒤에 그걸 써먹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내가 물건 하나를 줄 테니까 그걸 이용하도록 해라.]
[어떤 물건 말입니까?]
그때 손가락에 약간의 중량감이 느껴져서 오른손을 들어보니 약지에 거무튀튀하고 가느다란 반지가 하나 보였다.
[바로 그거다.]
[이게 뭡니까?]
[사용법은 나중에 설명해주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디자인이….]
신이 침묵했다.
기수는 분위기가 식는 것을 느끼고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신님. 시간 이동이 쉽습니까? 공간 이동이 쉽습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공간은 하나다.]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시간이동이 쉬운지, 같은 시간 안에서 공간이동이 쉬운지는 구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원하는 게 무엇이냐? 빙빙 돌리지 말고 얘기해봐라.]
[그러니까… 현대의 한국을 오가는 통로에 추가로 소항산과 무림맹과 천마교 뭐 이런 식으로 중원 무림 안에서 공간만 이동하는 통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경공으로 오가기엔 번거로울 것 같았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뛰어넘도록 해주겠다는데, 그걸로 부족해서 공간이동 통로를 두 개나 더 만들어달라고?]
신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기수는 준 것까지 도로 빼앗을까봐 겁나서 반지를 왼손으로 꽉 움켜쥐고 말했다.
[마신에게 처음으로 이긴 기쁨! 그걸 생각하십시오!]
잠시 시간을 두고 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므흐흐흐…하하하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웃음소리였다.
[이왕 쓰는 김에 좀 더 너그러워질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헤헤…]
[좋다! 반지에 기능을 추가로 넣어주마.]
이렇게 쉽게 되다니… 기수는 뛸듯이 기뻤다.
[그럼… 지금 당장 사용법을 배워야 하나요?]
[왜? 바쁜 일이라도 있느냐?]
[아뇨. 집으로 가기 전에 사매들에게 인사라도 하려고…]
[그렇다면 시간을 충분히 가지도록 해라. 이젠 언제든 반지에 의식을 집중하면 나와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아! 이게 직통전화 역할도 하는군요?]
[내 염원을 이뤄줬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아! 물론 나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부른다고 항상 대답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알겠습니다. 꼭 필요할 때만 부르겠습니다. 하핫!]
[그럼 난 간다.]
신은 잔뜩 들뜬 목소리를 남긴 뒤 조용해졌다.
기수는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 무늬도 없는 무광 회색.
폭은 3밀리 정도 되고 두께도 얇은 편이라 외견상으로는 상당히 약해 보였는데 눌러보면 의외로 강한 탄력이 느껴졌다.
‘특별한 기능이 담겨 있다니까 못 생긴 건 특별히 봐준다.’
기수는 지붕에서 뛰어 내려가 사매들을 찾았다.
자기가 황제에게 붙잡혀 술 마시는 동안 혹시 황궁 되찾으러 가는 대열에 합류한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시종에게 물어보니 숙소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기수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민과 조현, 혈천제, 공주 등 정겨운 얼굴들이 보였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20명이 모두 한 방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핫! 웬 일로 여기에 다 있어?”
탁지연이 나서서 말했다.
“궁주님의 승리를 축하해드리기 위해 모였죠. 문 잠그세요.”
그리고 생긋 웃었다.
기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힘겨운 싸움을 치른 터라 아직도 흥분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은 상태.
황제와 술을 마시고, 신을 만나 반지를 받았지만 마음속에는 뭔가 미진한 욕구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여인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20명이 공식적으로 기수를 지원해주기 위해 대법을 시행해 주었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다.
즉, 천마교와 무림맹이 옛 원한을 잠시 미뤄두고 한 마음으로 한 장소에 모일 이유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명이 한 방에 다 모여서 자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것도 다들 꽃단장을 한 예쁜 모습으로…
승리를 축하해주기 위해서라는데, 과연 어떻게 축하해줄지 기대가 되어서 자꾸만 마른침을 삼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