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028
01031 1031화
박성민도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럴 거였으면 내가 그때 나이트에서 있는 옥수수, 없는 강냉이 다 털어서 직접 꼬셔 온 여자들이나 좀 어떻게 해 보지 그랬냐. 다 너 좋다고 그랬잖아.”
“그거랑은 다른 문제죠.”
“다르기는. 여하간 딱딱한 놈들은 꼭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가 생긴다니까. 너 인마, 그 여자들이 품은 한에 벌 받는 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너무 순탄하면 재미없잖습니까.”
태수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김혁권과 박성민이 서로를 바라봤다.
“중증이네.”
“중증이야.”
비슷한 말을 내뱉은 두 사람은 똑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태수와 신혜미는 약속대로 비장비대증 환자를 두고 아침저녁으로 마주했다.
수기로 작성한 차트를 펼쳐 놓고 여러 대화들이 오갔다.
“이 수치들로 보면 확실히 감염에 의한 건 아닙니다.”
“혈액 질환 쪽도 아니에요.”
“그럼 역시 대사이상인 거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닥터 슈미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런데 다른 점은…….”
신혜미는 생각보다 강단이 있었다. 전문의 연수로 따져도 태수가 한참 선배였다. 그러나 환자에 관해서는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태수는 그런 점에 더욱 호감을 느꼈다.
물론 일을 할 때는 절대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건 태수의 철칙이었다.
반면, 신혜미도 태수와 대화하는 사이 유심히 살폈다.
진짜 환자 이야기만 했다. 한 마디의 실수도 없었다.
태수에게 처음 고백을 받은 후 솔직히 단둘이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일에 있어서 철저한 모습을 보이니 그 부담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한편으로는 이토록 무심한 모습이 섭섭하기도 했다.
‘좋아한다면서.’
그저 말뿐인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았다.
환자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남의 기회가 잦아진 두 사람은 쉴 때 가볍게 차 한잔 마시는 정도로 발전했다.
사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도 태수는 신혜미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았다.
저녁 무렵, 무너진 담장에 일정 거리를 두고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태수가 하늘만 바라보고 있자 신혜미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태수가 먼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셔서요.”
그 말에 태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닌데요. 며칠 전하고는 좀 다르신 거 같아서요.”
“왜 이젠 고백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거 같은데요.”
“…….”
태수의 추측이 맞는지 신혜미가 침묵했다.
반응을 확인한 태수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순간이 좋아서요.”
“네?”
“전 그냥 좋네요. 커피도 맛있고요.”
태수가 이젠 미지근해진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신혜미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분위기 있게 느껴졌다.
멍하니 태수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얼른 커피로 목을 축인 신혜미도 이내 하늘을 올려다봤다.
쏟아질 듯이 펼쳐진 별들.
매일 보는 하늘인데도 조금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태수는 그렇다고 신혜미에게만 모든 정신을 쏟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는 수술 스케줄을 착실하게 소화했다. 이 스케줄을 모두 소화해야 제임스를 데리고 나갈 수 있다.
환자들을 수술하는 중간중간 태수는 박성민과 함께 제임스의 상태도 확인했다.
오늘도 하루 수술 일정을 마무리한 후 제임스를 살피는 중이었다.
청진기를 귀에서 뗀 태수가 말했다.
“신장은 많이 좋아지셨네요.”
“소변도 충분히 나오고 있고, 피로감도 많이 줄어들었어. 손발을 움직이는 것도 큰 거부감이 없고.”
“이제 일어나도 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지금도 움직일 수는 있지.”
제임스의 말을 태수는 반박하지 못했다.
아마 세상 모든 환자들 중에서 가장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환자일 터였다.
그래도 할 말은 있었다.
“일어나서 거동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직 진료를 본다든지 무리한 일을 하시는 건 안 됩니다.”
“그건 잘 판단하도록 하지.”
“이건 신장 때문이 아닙니다. 심장 때문입니다. 제임스, 스스로의 병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태수가 진중하게 조언하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환자 입장이니까 주치의 말을 잘 듣도록 노력하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제 예상보다 더 안 좋아질 경우에는 약속 취소하고 바로 모시고 나갈 겁니다.”
“날 위한 협박인가, 환자들을 위한 협박인가?”
“제 진심을 말씀드릴까요?”
태수의 물음에 제임스는 바로 거부했다.
“아니야. 들어 봐야 내 머리만 아플 거 같으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아깝네요. 좀 더 잔소리를 할 수 있었는데요.”
“나도 잔소리는 싫어.”
“그럼 몸 관리도 알아서 하실 거라 믿습니다. 여지저기 막 움직이시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시고요. 그 결과는 아실 테지요.”
태수의 말속에 아주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 있었다. 제임스도 그걸 알고 있기에 더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박성민이 나섰다.
“우선 저도 닥터 최랑 생각은 같습니다. 지금도 심장이 상당히 약해져 있는 거 같습니다.”
“pulmonary edema(폐부종) 증세는 많이 완화되었잖아.”
“그렇죠. humoral(체액)도 흘러나오지 않아서 드레인도 제거한 상태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너무 안 된다고만 하는 건 환자에게 좋지 않아.”
제임스가 근엄하게 말했지만 박성민은 고개를 저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한시라도 빨리 타머를 나가야 한다는 걸 저보다 더 잘 아시잖습니까.”
“음.”
“신장이 제 기능을 시작해서 심장에 무리가 덜 가는 것도 아실 거고요. 그래서 폐도 안정적으로 변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게 일시적이라는 것이 문제고요.”
“닥터 최보다 더한 잔소리꾼이야.”
제임스는 눈을 흘겼지만 박성민은 꿈쩍하지 않았다.
“앞으로 열흘. 제임스가 원하는 대로 저희가 그 시간을 채우려면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니까.”
“말씀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단 걸 너무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박성민은 그 말을 끝으로 손에 쥐고 있던 펜을 가운 상의 주머니에 꽂았다. 마치 그게 스위치라도 되는 듯이 진지한 표정이 바로 익살스럽게 변했다.
“제임스, 진짜 죽겠습니다. 하루에 수술을 몇 건이나 하는 건지. 우리 살려 주시는 의미에서라도 조금만 일찍 떠나면 안 됩니까?”
“진심인가?”
제임스 눈이 날카롭게 변하자 박성민이 얼른 꼬리를 내렸다.
“그건 아니죠. 외과 의사들이 회복할 때까지 수술은 우리 몫이죠. 그걸 미룰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진짜 걱정되니까 제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거 아닙니까.”
“걱정 끼치지 않도록 하지.”
“제발 좀요.”
박성민의 말이 짧게 끝나는 사이 김혁권이 옆에 도착했다.
“일단 추가하라는 건 다 추가했어요.”
“고마워요!”
“됐고요. 제임스.”
김혁권이 부르자 제임스가 푸근한 얼굴로 바라봤다.
“또 잔소리를 하려나?”
“그렇게 선수 치면 내가 뭐라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이미 여기 훌륭한 의사들에게 잔소리를 들을 만큼 들었으니까 내 귀도 좀 쉬고 싶어서 말이지.”
“참 할 말 없게 하네.”
김혁권이 인상을 구겼지만 제임스는 오히려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돌아가며 제임스에게 잔소리를 마쳤다. 이젠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할 시간이다.
그동안은 제임스가 회복을 해야 했기에 가급적이면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이젠 신장 기능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컨디션이 올라왔기에 못다 나눈 대화를 이렇게 짬짬이 나눌 수 있었다.
다들 제임스의 병상에 둘러앉았다.
제임스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병상 머리 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준비가 끝난 네 사람이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벌컥!
닥터 슈미트가 빠르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닥터 슈미트는 제임스에게 먼저 말했다.
“죄송합니다, 닥터 제임스. 급한 일이라서요.”
“괜찮아. 그보다 급한 볼일이라면 응급수술을 말하는 건가?”
“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를 치우다가 발견된 환자들입니다.”
“환자들?”
“총 다섯 명이 발견되어 구조 중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로 구조된 환자가 방금 병원에 도착했고, 앞으로도 구조되는 대로 바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닥터 슈미트의 말에 제임스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건물에 매몰됐던 사람들이라면?
그것도 공습 후 한참 지나서 발견된 사람들이라면 경상보다는 중상, 그것도 생사를 오갈 환자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제임스의 우려 섞인 말문이 트였다.
“공습 후 오늘까지 5일이 지났는데.”
“예상하신 대로 지금 도착한 환자는 pyosepticemia(고름패혈증)으로 septic shock(패혈 쇼크)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름패혈증이라.”
“그렇습니다. 그 환자의 경우, 패혈증의 원인을 오른쪽 femoral(대퇴부) 파열이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닥터 슈미트의 말이 끝난 후였다. 더 시간을 끌 순 없었다. 제임스의 시선이 태수에게로 향했다.
“뭐하나?”
“안 그래도 가려고 했습니다.”
그릉.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임스에게 고개 숙였다. 그 옆에서 박성민과 김혁권이 똑같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마자 뛰어나갔다.
뛰면서 태수가 닥터 슈미트에게 말했다.
“닥터 슈미트, 가면서 자세한 상황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자고.”
닥터 슈미트도 바로 몸을 돌려 세 사람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힌 순간 제임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잔소리를 퍼부었냐는 듯이 응급 환자 소식에 태수는 물론 박성민과 김혁권은 눈빛부터 변했다.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제임스에게 기쁨을 주었다.
“아직 더 살아야 할 모양이네.”
이 순간 제임스는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 이르다는 걸 뼈저리게 절감했다.
병실을 벗어난 네 사람은 빠르게 복도를 달렸다.
속도를 높이던 태수가 닥터 슈미트에게 물었다.
“환자는 정확하게 어떤 상태입니까?”
“대퇴부가 파열된 상태로 너무 오래 방치돼서 패혈증이 온 거 같아. blood culture(혈액 배양)할 시간도 없어서 어떤 균인지 파악하진 못했어.”
“출혈은 어떻습니까?”
“다행히도 적은 편이야.”
닥터 슈미트의 대답에 태수는 물론 박성민과 김혁권도 의아하게 바라봤다.
“패혈증이 올 정도인데 출혈이 별로 없어?”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건 좀 이해가 안 되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닥터 슈미트가 말했다.
“일단 가서 보는 게 어떤가.”
“그게 좋겠습니다. 좀 더 빨리 가시죠.”
태수가 한발 앞서 빠르게 움직였다.
네 사람은 곧 수술실에 도착했다.
환자의 상태부터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일단 들어왔다.
이미 3명의 의료진들이 IV 연결 등 기본적인 처치를 진행 중이었다.
태수의 시선이 환자 얼굴로 향했다.
얼핏 보니 30대 후반 정도.
오랫동안 굶어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런데 그 마른 입술 끝에 피딱지가 보였다.
어딘가에 부딪치거나 터진 상처가 아니었다. 찢어진 상처였다.
그동안 목마름을 이겨 내기 위해, 또 고통을 참아 내기 위해 깨물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었다.
“으으으.”
환자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탈수 증세와 더불어 septic shock(패혈 쇼크) 증상도 보였다.
구조된 순간에 진통제부터 투여했기에 고통은 그나마 덜해 보였다.
태수의 시선은 바로 닥터 슈미트가 말한 허벅지로 향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야생동물에게 물어뜯긴 듯이 살점이 움푹 파여 있었다.
이미 꺼멓게 죽은 살점 곳곳에 출혈이 보였다.
이 정도면 뼈도 온전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