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767
01770 1770화
태수는 그런 정민수를 슬쩍 쳐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인마, 지금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그런데 진짜 불공평할까?”
“뭐? 이 자식이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이 지랄인데.”
이미 감정이 치솟은 정민수의 목소리가 곱지 않았다. 그래도 태수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갑자기 친구 보고 싶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좀 알아듣게 얘기해라.”
“박정균이라고, 기억해?”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러다 기억이 났는지 멈칫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너 치프 할 때 응급실에서 눈 감은 그 암 환자 말하는 거야?”
“기억하네.”
“내가 돌본 환자가 아니라서 한참 생각했긴 했지만, 좌우간 그 이름은 갑자기 왜 들먹이는데?”
정민수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태수가 허공에 중얼대듯 말했다.
“내가 그 친구에게 그랬거든. 죽으면 다 끝이라면 정말 불공평한 세상일 거라고.”
“너 뭐…… 종교에 심취해 있냐?”
정민수가 움찔하며 쳐다보자 태수가 힐끔 째려봤다.
“뭔 헛소리야?”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니까.”
“니가 먼저 불공평하다고 했잖아.”
“아, 그랬지.”
정민수가 어색한 미소를 짓는 순간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
“끝이 아니다라.”
정민수 표정이 심각해지자 태수가 속마음을 꺼냈다.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잖아. 남을 도와줘야 할 이유도 없을 거고.”
“음, 특별한 이유 없이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긴 하지.”
“그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나?”
태수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정민수가 미간을 좁혔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라도 만나면 물어보기로 하고. 좌우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내 나름대로 낸 결론이야.”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이 끝이 아니다?”
“네 생각은?”
태수가 반문하자 정민수가 바로 대답하려다가 말꼬리를 늘였다.
“그…….”
“너도 뭔가 느낌이 오겠지. 나만큼 너도 죽어 가는 사람을 많이 봤으니까.”
“…….”
정민수가 대답하지 못하자 태수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이 세상이 끝이 아니란 걸 다들 뭔가 느낌으로 알고 있으니까 도덕이라는 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거 말 되네. 도덕은 법이 아닌 양심이란 놈에 비춰서 행동하는 거니까.”
“양심이란 놈이 나쁜 놈은 아닌가 봐. 나쁜 짓 하면 찔리는 걸 보면 말이야.”
“맞아. 안 그러면 너무 억울하지.”
농담같이 대답한 정민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태수는 자연스럽게 난간에 등을 기대고 정민수를 마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양심은 그렇다고 치고. 난 말이야, 아직도 어떻게 사는 게 잘 살고 보람차게 사는 건진 모르겠어.”
“그래. 하루하루 재밌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아니면 겁나게 일 열심히 하는 게 잘 사는 건지는 모르지.”
정민수의 단순한 말에 태수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는 정리가 된 거 같아.”
“어떤 정리?”
정민수가 호기심 서린 얼굴로 묻자 태수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민수가 관심을 보이며 묻자 태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당장 가운을 벗는다고 후회할까?”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다. 당장 다 때려치우고 좀 쉬라고 하면 절이라도 할 거 같으니까.”
“바로 그거 아닐까? 스스로 만족한다는 의미가 말이야.”
“쉬라고 한 사람에게 절하는 거?”
정민수가 엉뚱한 반응을 보이자 태수가 울컥했다.
“이 자식이. 대화의 맥락을 몰라.”
“그럼 뭐, 인마?”
“후회하지 않는 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는 거 말이야.”
“…….”
“지금 당장 가운을 벗어도 아무렇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잖아.”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했지. 피 토하고 살 빠지고 뼈 깎고……. 그건 나도 누구한테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
“그런 과정들이 편하고 재밌었다면 말이 되겠어?”
태수 물음에 정민수가 울컥했다.
“미쳤냐? 진짜 환장하는 줄 알았는데. 괴롭고 짜증나고 화나고, 말도 못하지.”
“그렇게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당장 가운을 벗어도 후회하지 않겠지.”
“그건 당연하지.”
“웃기는 건, 그런데도 우리는 막상 가운 벗으라고 하면 절대 안 벗을 거야.”
태수가 반전을 걸자 정민수가 웃으며 화답했다.
“절대 안 벗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벗어. 앞으로 해야 하고 또 이뤄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벗겠어. 절대 못 벗지.”
“그래. 그런 마음으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우리도 김현진 환자와 같은 순간이 오지 않을까?”
“…….”
“내 마지막을 나만의 무대에서 마무리하고 싶단 생각 말이야.”
태수가 좀 더 차분하게 정리해서 말하자 정민수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마지막을 짓고 싶을 테니까.”
“그렇지.”
정민수가 인정하자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억지 수술인 건 너도 알 거야.”
“…….”
“그런데도 해야겠다고 말한 건 그 때문이고. 언젠가 나도 마지막이라는 게 찾아올 텐데, 그 순간 모두 반대만 한다면 정말 슬플 거 같았거든.”
“짐작은 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내가 장단만 맞추면서 아무 소리도 안 한 거고.”
정민수의 침착한 목소리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넌 그럴 줄 알았어.”
“이번 수술…… 솔직히 말해 봐. 회의하면서도 하지 못한 말들 말이야.”
“하는 흉내만 낼 거야.”
“음.”
“정작 중요한 부분들은 건드릴 수 없어. 건드리면 끝나……. 기껏 협착된 장기들을 분리하는 정도겠지.”
태수가 속에 담아 둔 말을 꺼내자 정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왜 김현진 환자에게는 장담했어?”
“시간을 벌어야 했으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더 몸이 좋아져야 마지막 공연이라도 할 테니까.”
“그게 전부야?”
정민수의 날카로운 음성에도 태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보호자들도 납득할 수 있으니까. 미리 병을 알아채지 못한 자책감으로 가득한 그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줄 수 있으니까.”
“…….”
“마지막으로 우리 의료진들. 이후 어떤 환자가 와도 절망하지 않을 테니까.”
태수의 말이 끝나자 정민수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혹시 아까 씨암 돌린 후에 계속 모니터만 보고 있었던 거 말이야.”
“맞아. 이 생각 하느라 그랬어.”
“하, 자식. 너답다.”
“이번 수술 엄청 바쁘면서도 한가한 수술이 될 거야.”
태수가 예측하자 정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나는 겁나게 바쁘겠지. 다른 의료진들은 크게 힘들 게 없을 거고.”
“그래. 이따가 잘해 보자.”
“너야말로 어설프게 하다가 괜히 의심 사지 말고 똑바로 해.”
“협착된 장기들을 떼어 내겠단 건 진심이야.”
태수가 뚱한 얼굴로 쳐다보자 정민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알아, 인마.”
“슬슬 내려가자. 우리도 조금 쉬어야지.”
텅.
태수가 등을 튕기며 난간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는 사이 뒤에서 정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수야.”
“왜?”
“우리의 마지막은 어떨까?”
정민수의 물음에 태수는 생각할 것도 없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집도, 니가 어시스던트, 혁권 씨하고 송 간호사님이 각각 보조해 주시겠지.”
“뭐야, 머리 허연 사람들끼리 수술하자고?”
“그 이상 그림은 안 그려지는데?”
“이야, 진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붙어 있어야 되다니. 피곤하다. 벌써부터 피곤해.”
턱.
어느새 다가온 정민수가 어깨동무를 했다.
말만 피곤하다고 했지, 눈빛은 그 모습을 상상하는 듯 부드럽고 또 아련했다.
태수는 옅게 미소 짓고는 걸어갔다.
머릿속엔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서로 여유로운 미소로,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모든 열정을 불태울 그 순간을 태수는 마음속 깊이 담았다.
오전 10시.
수술 1시간 전이 되자 회의실이 다시 의료진들로 채워졌다.
어제 참가했던 공우혁을 대신해 지금은 김아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아름은 의료진들의 주목을 받으며 EMR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똑 부러지는 말투와 명확한 의사 전달까지 한번에 해치웠다.
화이트엔젤 내과 전문의들 중에서도 떠오르는 다크호스란 별명이 괜히 나온 건 아니었다.
“……그렇게 새벽까지 경과를 지켜봤어요.”
“그래서 김 선생은 수술을 진행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태수는 조용히 물었다.
밤새 환자를 지켜본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겠단 의미이기도 했다.
김아름은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는지 정리해 놓은 노트를 몇 장 뒤적인 후에 말했다.
“다빈치 수술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대신 수술 시간이 짧았으면 좋겠어요.”
“이유는?”
“전신마취라서 수술 자체는 걱정 없다고 해도 깨어난 후에 회복 기간이 더뎌질 가능성이 높아요.”
“서 선생님 생각은요?”
태수가 시선을 돌려 묻자 필기하던 서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 선생이 정리한 걸 참고하면 길어야 3시간? 가급적 2시간 정도. 아마 그 정도가 적당할 거 같아.”
“그렇군요.”
“나야 마취 시간을 조절하는 건 가능한데, 수술 과정을 줄일 수 있겠어?”
서영우의 물음에 태수가 곧장 대답했다.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이번 수술의 목적은 완치가 아니니까요.”
“그렇겠지.”
“자, 그럼 대충 마무리된 거 같습니다. 정 선생하고 김 선생만 남고 다들 수술 준비하러 가시기 바랍니다.”
태수가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그릉.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김혁권이 태수 옆으로 다가와 속삭이듯이 물었다.
“수술 시간은 얼마든지 줄어도 상관없는 거 아닙니까?”
“음.”
“닥터 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부담 갖지 말라고 말하는 거고.”
“그렇군요.”
“이따 봅시다.”
툭.
김혁권은 태수의 어깨를 정감 있게 다독이며 멀어져 갔다.
다들 나가고 나자 태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변했다.
“다 알고 있었네.”
“뭘?”
“이 수술이 환자의 생명에 큰 영향력이 없다는 걸 말이야.”
“눈치들은.”
정민수가 힐끔거리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대충 할 생각은 없어.”
“그건 말도 안 되는 거고. 우리 사전에 대충은 없어. 어떤 환자가 온다 해도 말이야.”
“당연하지. 자, 우리도 일어나자고.”
태수의 말에 정민수와 김아름도 같이 일어났다.
세 사람은 그길로 김현진에게 향했다.
드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이성혁을 비롯한 레지던트들이 이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총감독하는 건 공우혁이었고, 보호자로는 이성진만 자리하고 있었다.
태수는 공우혁과 가볍게 눈인사만 했다.
그사이 정민수와 김아름이 태수를 스치듯 지나 병상으로 다가갔다.
텅 빈 태수의 옆으로 이성진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네. 혼자 계시네요?”
“다들 사우나 보냈습니다. 가지 않겠다고 아우성치는데 대부님이 다녀오라고 한마디 하시고야 조용히 갔죠.”
이성진의 말에 태수가 빙그레 웃었다.
“환자분이 무서우신 모양입니다.”
“무섭고 또 존경하죠. 아니, 존경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우리 나이에 무섭다고 할 거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이성진의 말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도 50대가 훨씬 넘어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어쩌면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일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봐도 어디서 무시당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현진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