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93)
19
그 후로도 에단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뒤집기를 하고, 엉거주춤 서고, 아장아장 걷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짓들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가끔 사고를 치기도 했다.
가령, 에드릭의 목탄으로 벽지에 엉망으로 낙서해놓는다든가.-이때 알렉시스는 다양한 감각을 지녔다며 흡족해했다.-
아니면 로벨의 화장품을 엎질러 바닥을 난장판으로 만든다든가.-이때 알렉시스는 다양한 재능을 보인다며 흡족해했다.-
에드릭은 알렉시스만큼은 아니지만 에단의 장난에 항상 웃으며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한숨을 참기가 어려웠다.
“……하아.”
에드릭은 곤란한 눈으로 침소를 훑어보았다.
여태껏 로벨이 준 선물들이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침대 밑에 애지중지 보관하던 상자 속 물건들을 어떻게 찾아서 파헤쳤는지 놀라울 정도다.
에드릭은 반쯤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사탕 봉지를 들고서 절망했다.
“……이런.”
로벨이 처음으로 사준 사탕이라서 유독 아꼈던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열린 상자 옆에서 자는 아이를 깨워서 혼을 낼 생각은 없었다. 내일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리 로벨의 선물들이 중요하다 해도 아이만큼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에게는 아이보다도 로벨이 중요했다.
‘……로벨이 알면 속상해할 테니, 조용히 치워야지.’
다행이라면 로벨이 친정에 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녀들보다도 자신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고.
덴카르트 하녀들이야 입이 무겁다만, 로벨과 워낙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이니 언제 말이 새어나가도 이상치 않았다.
그렇기에, 에드릭은 조용히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치우는 내내 아들에게 놀라고 말았다.
구석구석 하나하나 빠짐 없이 얼마나 열심히 어질러놨는지, 몇 시간이고 꼼꼼히 살펴서 치워야 했다.
마침내 작은 종이 조각들까지 상자에 빠짐없이 넣었을 때, 에드릭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편지들은 멀쩡하네.”
다른 물건들도 소중했지만, 편지들은 유독 그랬다.
북부 세 거점에서 돌아오자마자 알렉시스에게 돌려받은 것들이었다.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로벨을 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충족되는 것 같았다.
상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드릭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로벨이 준 편지나 읽어볼까.”
달빛이 밝아 따로 등을 켜지 않아도 편지를 읽기에 좋았다.
결심한 에드릭이 수북한 편지들을 들고 창가에 비스듬히 앉았다.
에드릭은 종종 오늘처럼 그녀가 준 편지를 읽곤 했다.
당시에는 편지를 읽으면 로벨이 보고 싶어져서 흔들릴까 봐 참았었다. 받지도 않으려 했다.
맨정신으로도 살기 어려운 곳이니 그리 독하게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지금 여유를 가지고 다시 보면 기분이 남달랐다.
그리고 그때의 기분과 현재의 기분이 교차되어 묘한 감동이 들기도 했다.
‘…….’
어쩐지 시큰해지는 눈에 힘을 주며 에드릭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Dear. 에드릭 도련님
도련님, 저 로벨이에요. 잊으신 건 아니시죠?
농담이라도 잊었다곤 하지 마세요.
오늘 밤 꿈에 쳐들어가서 도련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던 이불 제가 다 빼앗아버릴 거니까요.
거긴 춥다는데 감기 안 걸리고 지내시려나 모르겠어요.
사실 동남부보단 수도가 더 춥긴 하네요. 겨울이 되니까 더 그래요.
시간이 갈수록 영지가 그리워져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도련님이 더 그리워져요.
보고 싶어요, 도련님.
그쯤 읽었을 때, 작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아버지.”
“…….”
언제 깼는지, 에단이 눈을 비비며 왔다.
감정을 추스른 에드릭이 배시시 웃는 아이를 안아주려 했다.
그런데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우러요?”
“……로벨리아가 보고 싶어서.”
“어머니가요?”
아이에게는 ‘로벨리아’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에드릭은 로벨을 아이의 엄마로만 지칭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로벨은 부끄러워했지만.
“시간이 늦었어. 이만 자자.”
“이거, 뭐야?”
에단이 작은 손가락으로 편지 하단부를 가리켰다.
사실 에드릭의 이름은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어서 아이의 눈에도 익은 것 같았다.
그러나 로벨의 이름은 비교적 보기 드물었다.
‘그래. 에단이 글을 배울 때도 되었지.’
열둘이 넘어 글을 배운 자신에 비해선 훨씬 이른 편이었다.
알렉시스가 말한 대로 여러모로 출중한 재능을 가진 것 같았다.
일단 호기심도 상당한 것 같고.
아버지로서 즐거운 일이라, 에드릭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가 알려줄까?”
“응!”
“잘 봐. 이건,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단어야.”
Lobelia
“로벨리아.”
과거 로벨이 알려줬듯이 철자 하나하나 정성껏 공들여 썼다.
그러자 그 이름을 보고서 에단이 갸웃했다.
편지의 Lobel과 에드릭이 새로운 종이에 쓴 Lobelia를 번갈아 보았다.
“다른데…….”
아들의 예리한 반응에 에드릭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는 곧 추억에 잠겼다.
편지에는 쓰지 않았으나, 로벨은 분명히 알려주었었다. 그리고 그가 알아주길 내심 바라왔을 것이다.
지금 아내의 성격을 보자면 그러고도 남았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로벨은 애초에 본명을 알려주지도 않았을 테니.
한편 에단은 종이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가 왜 웃으시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다음 날, 에단은 친정에서 돌아온 로벨을 반겼다.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이거 써줬어요!”
“으응? 이게 뭐니?”
“어머니 이름이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단어래요!”
로벨은 종이 위의 이름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이번에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단어를 써볼까.”
Lobelia ♥ Edric
그걸 보며 에단이 볼을 불퉁하게 부풀렸다. 자기 이름만 빠진 게 서운했다.
하지만 로벨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에단이 곧, ‘아!’ 하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럼 에단은 할아버지랑 할 거예요!”
“그래, 그래. 잘 다녀오렴.”
로벨은 아이가 이미 떠난 자리에 손을 흔들며 웃고 말았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소중한 단어를 쓰기로 한 거니까. 애한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로벨은 조금은 쑥스럽게 웃었다.
***
“여보, 여보.”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에드릭은 의아한 눈을 깜빡였다.
로벨은 평상시에도 해맑은 편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그랬다.
생각해 보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그랬다.
‘……무슨 일이길래?’
한편, 에드릭의 크라바트를 능숙히 매주던 그녀가 물었다.
“있잖아. 오늘 기분이 어때?”
에드릭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로벨은 에드릭이 본 사람 중에 질문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것까지 물어보곤 했다.
도련님. 이 베개의 높이는 어때요, 창밖의 빗소리가 좋지요?, 약은 먹을 만하지 않아요? 등등.
그것은 연인이 된 후나 부부가 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벨만큼 에드릭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에드릭은 그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솔직한 로벨이기 때문에 그도 진솔한 얘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어쨌거나, 답은 해야지.
에드릭은 따뜻한 목소리로 답했다.
“좋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알지. 우리 만난 지 14년 9개월 27일째 되는 날이잖아.”
“…….”
……이게 아닌가?
에드릭은 침묵하는 로벨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웃는 얼굴이지만,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기억하기론 오늘은 플로르 식구들이 모이는 연례 모임이라든가, 딱히 중요한 날은 아니었다.
당장 아침부터 황성에 가는 일정이 있긴 하다만, 그다지 특별하진 않았다.
그럼 뭘까.
궁금해하는데, 로벨이 물었다.
“당신은 그걸 다 세고 살아?”
“……일부러 센 건 아니야.”
예전에야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습관처럼 세다 보니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말을 마무리 지으려던 에드릭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로벨이 에단과 피크닉 가고 싶다고 했지.’
양가의 어른들도 바라던 바였다.
때마침 날씨도 좋으니 다녀와도 될 것 같았다. 개인 일정에 내일까진 무리라도 그 이후로는 언제든 괜찮겠지.
그런 마음을 담아 일정을 넌지시 말하자, 로벨은 알겠다고 답했다.
“다녀올게.”
그리고 평소처럼 입을 맞추다가 에드릭은 멈칫했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동자에 어쩐지 불만이 서린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일은 무슨. 어서 다녀와. 기다릴게.”
딱딱한 목소리에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는 뉘앙스가 풍겼다.
하지만 에드릭은 더 캐묻지 않았다.
이 정도로 물었는데도 로벨이 답하지 않는 것은, 정말 싫다는 의사를 의미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쉬었다.
‘……다녀와서 물어봐야겠네.’
***
나는 에드릭을 배웅한 후,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사람이 이번에도 자기 생일을 몰라?”
예전부터 에드릭은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 고생을 하고서 이렇게 일궈냈으면, 좀 즐길 줄도 알아야지!
“어머니, 어머니!”
경쾌한 부름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장차 자라나면 남자든 여자든 제법 울리게 생길 예쁜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잘생겼다.
우리 어머니 말씀처럼, 나를 안 닮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었다.
“……어머니, 왜 손수건으로 눈을 닦아요?”
“먼지가 들어가서. 그나저나, 우리 에단, 잘 잤니?”
“으응. 아버지는 가셨어요?”
“벌써 갔지.”
에단도 며칠 전부터 아버지 생신, 아버지 생신, 하고 입버릇처럼 말한 터라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음 내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색이 확 폈다.
“깜짝 파티를 준비했단다. 준비해서 우리도 바로 수도로 가자꾸나.”
내 말에 아쉬워하던 에단은 들떴다.
아버님이 황성에 갈 때 함께 수도에서 며칠 묵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파티를 즐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에단이 들뜬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 지금 수도에 계시는 할아버지도 뵐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