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483
02486 2486화
태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런 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이자벨이 이곳에 있고, 팀원들이 아니면 봐줄 사람이 없기에 이렇게 함께 있는 거였다.
태수는 베르난도를 다시금 바라봤다.
그러다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입고 있는 낡은 옷도, 떡 진 머리도 바라보는 태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옷은 당장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씻는 건 별개였다.
태수는 베르난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우리가 꼭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따뜻한 물로 좀 씻는 게 어떠냐고 물어봐 줘.”
“……괜찮다고 하네요.”
“이자벨이 깨어났을 때 말끔한 오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까?”
태수는 이제 그냥 베르난도를 향해 물었다.
김동주도 자연스럽게 통역해 줬다. 그런데 베르난도가 거부하는지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갔다.
몇 번의 권유 끝에 베르난도가 마지못해 샤워장으로 향했다.
태수는 그 모습을 그저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이내 김동주가 혼자 돌아오자 태수가 물었다.
“뭐라는데?”
“왜 이렇게 잘해 주는지 모르겠다고요. 혹시 자신이나 이자벨에게 뭘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자식, 짧은 인생인데 정말 험난하게 살았나 보네.”
태수가 어이없단 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런 태수를 바라보는 김동주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가 조용하자 태수가 힐끔거리며 물었다.
“왜, 하고 싶은 말 있어?”
“……제가 베르난도 입장이라도 비슷한 생각을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사실 병원비만 해도 상당히 과했잖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
태수가 심드렁하게 답하자 김동주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에 르완다 가셨을 때처럼 안타까워서 도와주시는 겁니까?”
“내가 왜 안타까워해야 하지?”
“…….”
말문이 막힌 김동주에게 태수는 심드렁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 생각 없어. 말 그대로 아직 애들이야. 자립할 수도 없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아이들.”
“그건 맞습니다.”
김동주가 답하자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만약 이 일이 베르난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난 모른 척했을 거야.”
“감당할 수 없는…… 일이죠.”
“맞아. 그러니까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우리가 조금 도와주는 거야. 그런데 우리까지 외면하면 어떻게 될까?”
태수가 정곡을 푹 찔러 묻는 순간 김동주가 움찔했다.
“이자벨이…… 아무래도…….”
“그래. 이 세상에 베르난도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 이후에 베르난도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겠죠.”
“그보다 더하지 않을까? 내가 저 상황이면 세상을 원망할 거 같은데.”
태수의 확대된 해석이 절대 과하지 않는지 김동주가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거 같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야기될 걸 걱정해서 미연에 차단하자는 거창한 건 아니야.”
“…….”
“다만 베르난도와 이자벨이 어떤 세상을 살아가든 서로가 함께이길 바라는 거지. 가족을 잃은 절망을 이미 충분히 맛본 아이들이니까.”
태수의 대답에 김동주가 슬쩍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팀장님이나 다른 분들께서…….”
“다행스럽게도 모두 건강하셔. 하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만 봐야 했던 형을 알고 있지.”
“아…….”
“그저 형은 아무런 것도 못한 채 지켜만 봤어.”
태수가 그리운 눈빛으로 말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지 약간 몽롱한 시선도 함께였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떠올리는 순간마다 한쪽 가슴이 저릿했다.
가슴 아픈 이 느낌이 사실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저릿함이 사라지지 않길 바랐다.
항상 마음 한편에 미안함으로 남아 있는 그날을 떠올리자 태수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해 갔다.
그런 감정적인 태수의 모습이 살짝 낯설었는지 김동주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친구…… 분이요.”
“응. 눈이 참 맑고 예쁜, 그리고 어린 친구였어. 그 친구 때문일까? 아이들이 아프다면 나도 모르게 좀 민감해져.”
“그렇군요.”
“이것도 병이라면 병일 거야. 그런데 내 스스로 이 병은 낫지 않았으면 싶어. 그래야 내가 언젠가 다시 만날 그 친구의 얼굴을 당당하게 마주 볼 수 있을 테니까.”
태수의 차분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린 후였다.
주변이 고요해져 갔다.
김동주의 뒷말이 들려오지 않자 태수가 힐끔 쳐다봤다.
뭔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태수는 그냥 놔뒀다.
지금은 태수도 아련함을 좀 더 간직하고 싶었다.
유병태와 최소현 간호사는 그런 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아득한 눈빛이 되는지 그들은 너무도 그리고 가슴으로 알고 있었다.
태수의 아픔을 꺼낸 김동주가 썩 달갑게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
“…….”
지금은 자신들이 끼어들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태수와 김동주의 대화를 마냥 듣기만 했다.
그렇게 응접 소파에 침묵이 이어질 때였다.
뭔가 생각을 마쳤는지 김동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사실 흠…… 좀 부끄러운데 고액 아르바이트 거리가 생겨서 좋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오해 아닌 오해를 좀 했습니다.”
“음, 어떤 오해인지 궁금해지는데?”
태수가 관심을 보이자 김동주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혹시 보여 주기는 아닌가 싶어서요.”
“보여 주기라. 어떤 부분에서?”
“사실 한국에서 의사라고 하면 고소득층 아닙니까. 그리고 응급의료대가 위험하다고는 해도 여러 수당이 붙는 걸로 알고 있고요.”
김동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태수가 아닌 유병태의 미간이 와락 좁혀졌다. 그동안 자신들이 노력한 일들이 그렇게 비쳐졌단 게 무엇보다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태수도 그런 유병태의 모습을 봤다.
요즘은 많이 누그러졌다지만 엄청 다혈질인 성격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무조건 해야 하는 성미였다.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었다.
스윽.
태수가 손짓으로 유병태를 만류했다. 그리고 아예 몸을 돌려 유병태를 등지고 김동주를 바라봤다.
자신이 대화하겠단 의미였다.
“흐으음.”
유병태는 그 뜻을 알아채고 들이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꼭.
최소현 간호사가 손을 잡자 그제야 강한 눈빛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변했다.
한편, 태수는 김동주를 향한 시선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그랬듯이 편안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소득층에, 각종 위험수당이라……. 뭐 그런 경향이 있지.”
“그리고 사실 유명하신 것도 맞고요. 제가 이탈리아에 5년 가까이 머물렀는데 저도 팀장님 이름은 몇 번 들어 봤을 정도로요.”
“여러 일들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명품 패션쇼에 참석하실 정도로 이젠, 음…… 뭐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김동주가 자극적이지 않은 단어를 고르는지 말이 잠시 끊어졌다.
태수는 여전히 덤덤한 시선으로 말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 알아서 잘 걸러 들으니까.”
“흠흠, 이제 본색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김동주는 눈을 꽉 감고 나오는 대로 말했다.
사실 자극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태수는 표정 변화 없이 부드럽게 권했다.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계속 말해도 돼.”
“사실 저와 친구들한테 전화로 통역 부탁하실 때도 다른 선생님들이 구매하시는 선물 양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나올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혹시 또 다른 이유가 있나?”
“네. 기사가 난 후에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상당히 안 좋은 반응들이 많습니다.”
김동주의 말에 태수가 싱긋 웃었다.
“그래서 이자벨을 이용해서 이미지 쇄신을 한다고 생각했단 흐름인데?”
“……그렇습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태수의 물음에 김동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기 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 봤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이상한 놈이죠. 한국 포털 사이트에서 여기 오시게 된 기사도 봤고요.”
“그랬구나.”
“화…… 안 나십니까?”
“내가 왜 화를 내야 하지?”
태수가 반문하자 김동주가 오히려 멈칫했다.
“안 좋게 봤다고 말씀드리는 건데요. 진짜 상당히 안 좋게 오해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리는 거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해.”
“네?”
“사실 난 남의 시선을 그렇게 의식하는 편이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게 바로 그거니까.”
“…….”
김동주는 동의하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태수는 그런 그에게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이어서 말했다.
“물론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지. 나 혼자면 상관없는데 여기 같이 오신 분들도 있고, 지금도 한국에선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네.”
“사실 패션쇼에 참가한 이유가 기사로 나온 건 내가 아는 기자에게 부탁한 것이기도 해. 필요 이상의 오해를 받기 싫어서.”
태수가 솔직하게 말하자 김동주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거기까지 대비하신 줄 몰랐습니다.”
“몇 번 이런 일이 있다 보니까 미리미리 대비를 하게 되더라.”
“그런 일이…….”
김동주가 살짝 놀랐으나 태수는 개의치않았다.
“그런데 이자벨은 알다시피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막말로 내가 아픈 애를 한 명 수소문해서 이미지 쇄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하긴요.”
“이자벨 일은 그냥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마무리됐으면 좋겠어.”
태수가 바람을 말하자 김동주가 멈칫했다.
“이렇게 됐는데 차라리 알리고 이미지 쇄신을 해야 좋은 거 아닙니까?”
“음, 유럽에서 오해를 많이 받고 있어서?”
“아무래도 지금껏 쌓아 온 이미지가 있는데요.”
“내가 만든 이미지는 아니야.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 하나도 없어.”
“…….”
김동주의 눈빛이 순간 갈 곳을 잃었다.
당연히 계산된 일들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태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오해가 깊어져서 다른 어디서도 우리를 찾지 않아도 상관없어.”
“지금까지 해 오신 게 아깝지…… 않으세요?”
“전혀.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변화는 없어.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쭈욱 우리 할 일만 할 거야.”
“…….”
“차라리 다 털어 버릴까? 그럼 이런저런 신경 안 써도 되는데.”
태수는 소탈하게 말했지만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자신이 이루고 키워 온 모든 걸 놓겠단 말이라 김동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래도…….”
“우리…… 아니, 적어도 나는 언제든지 처음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
“…….”
“존경하는 분이 그러시더라. 사람은 가진 걸 움켜쥐려는 순간 위만 본다고 말이야.”
예전에 황석찬 회장이 해 준 말이었다.
그 말이 가슴에 남아 지금 이렇게 내뱉을 수 있었다.
태수의 말에 동감하는지 유병태와 최소현 간호사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큼 미련한 짓이 없어.”
“맞아요. 그럼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으니까요.”
한 마디씩 거들기까지 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김동주만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변해 갔다.
그때 뒤에서 느닷없이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태수 말이 맞아. 내가 가진 걸 자꾸 확인하려고 들면 결국 두 손에 남는 건 욕심뿐이라고.”
“선배?”
깜짝 놀란 태수가 돌아보자 쉰다고 모습을 감췄던 박성민이 비닐 봉투 2개를 양손에 들고 다가왔다.
“후, 밀라노 시내를 두 바퀴는 돈 거 같네.”
“그것들은 다…… 뭡니까?”
“하나는 야식. 다행히 늦게까지 하는 마켓이 있어서 좀 사 왔어.”
“다른 건요?”
“이거? 애들 옷.”
착.
박성민이 소파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비닐 봉투를 내려놓았다.
태수는 물론 유병태와 최소현 간호사, 그리고 김동주도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중 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애들 옷은 어떻게 사 오게 되신 겁니까?”
그 질문이 끝난 순간 박성민이 아닌 김혁권의 대답이 들려왔다.
“애들 꼴이 저런데 그냥 놔둡니까? 씻기고 갈아입히고 해야지.”
“지금 11시 가까이 됐는데, 옷가게가 지금까지 열어요?”
“열 리가 있겠어요?”
“그럼요?”
“어째야 하나 하는데, 낮에 갔던 기념품 가게 주인이 야외 테이블에서 술 마시고 있더라고요. 가서 물어보니까 옆 테이블에 옷가게 사장이 있더라고.”
그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