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930
02934 2934화
“이 자식이 사람 놀리나.”
“……네가 그랬지, 내가 천재라고.”
“그래. 내 주둥이가 원망스럽지만 내가 그랬어.”
“그러니까 책임져라.”
엉뚱한 말에 태수는 이제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좀 알아듣게 말해.”
“너만 알아봤다면 넌 내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안다는 거잖아. 그때까진 적어도 난 너에게 쓸모 있을 거고.”
“…….”
“그러니까 곱게 모시고 다니라고.”
어느새 이기준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젠 끝까지 함께 간단 의미로 한 말이 분명했다.
태수도 바라는 바였다.
그런데 의외로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인드면 오래 같이하긴 힘들겠어.”
“…….”
“난 쓸모 있는 이기준보다 친구 이기준이 더 필요하니까.”
“……훗, 그럼 내가 백번 양보해서 계속 친구 해 줄게.”
이기준의 엉뚱한 반응에 태수도 입꼬리를 들썩거렸다.
“어이없긴. 그나저나 다 까발려서 어쩌냐?”
“일부러 그런 거라니까. 그래야 연성병원장 똥줄이 타겠지.”
“살살 목을 조이려고?”
“내가 왜?”
“……엥?”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이기준이 쓴 얼굴로 말했다.
“내 연성은 여기야. 아버지가 꿈꾸던 연성도 여기에 있다고 했잖아.”
“그랬지.”
“가짜 연성? 신경 쓸 필요도 없어. 껍데기에 집착하는 인간들 신경 쓸 시간에 수술 연구하는 게 더 보람되니까.”
“보람이라…….”
태수가 말꼬리를 잡자 이기준이 덤덤하게 덧붙여 말했다.
“그거 은근히 중독성 있더라.”
“훗, 그래. 확실히 중독성 있지.”
“그럼 난 보람 찾으러 가야 해서 이만 실례.”
뜬금없이 인사한 이기준은 바람같이 진료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힌 소리에 정신이 든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쟤는 왜 왔다 간 거지?”
너무 화제 전환이 빨라 무슨 말을 나눴는지도 선명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해 태수는 다 지우고 하나만 남겨 뒀다.
‘더 많은 보람을 느끼고 싶다.’
이젠 뿌리를 완전히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태수는 백번 환영이었다.
이기준이 천재라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천재가 아니더라도 피나는 노력으로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갖춘 써전이야 많았다.
태수가 이기준을 환영하는 건 따뜻한 마음씨 탓이었다.
차갑게 자신을 포장했지만, 하나씩 들춰 보면 정반대의 성격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따뜻함은 분명 희망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닿을 터였다.
그래서 이기준은 희망병원에 필요한 인재였다.
이기준의 기사는 의외의 파장을 가져왔다.
특히 스미스가 인터뷰를 통해 직접적인 지원사격을 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유명세 싫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물론 반대적인 태수와 몇몇 대표적인 이들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자신이 알려지는 걸 바라고 또 원했다.
문제는 세상에 공짜가 없단 점이었다.
세상이 어떤지 알고 있는 의사들은 스스로 할 일을 찾아갔다.
그건 바로 실력 향상이다. 무턱대고 책을 파는 의사들도 있고, 수술 영상 같은 자료에 의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빠른 길을 찾길 원했다. 그 답을 알고 있는 인물로 크게 제임스, 스미스, 그리고 태수를 꼽았다.
당연히 3명 중 그나마 만만한 태수에게 가장 많이 몰려왔다.
가장 편하단 이유도 있지만, 이기준의 잠재성을 알아봤단 이유가 더 많이 작용한 결과였다.
“최 팀장, 이번 환자가 말이야…….”
“최 팀장, 전에 말했던…….”
“태수야,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환자의 문제로, 순수한 열정으로, 혹은 친분을 들먹이는 등 다각도로 접근해 왔다.
그런데 아쉽게도 태수의 몸은 하나였다.
모든 수술 연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기회만 노리고 접근해 온 의사들이 그렇게까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끌려다닐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태수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오늘부터 외과를 시작으로 레지던트들을 집중적으로 단련시키란 병원장님의 오더를 진행할까 합니다.”
아예 컨퍼런스에서 공표를 했다.
그 자리에는 백성현 병원장도 자리해 있었다.
당연히 백성현 병원장은 태수의 손을 들어 줬다.
“레지던트들의 역량이 곧 다가올 우리 희망병원의 미래입니다. 최 팀장, 고되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그 말인즉, 태수를 괴롭히지 말란 의미였다.
확실히 백성현 병원장의 발언은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태수는 한결 한가해진 주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백성현 병원장의 오더에도 굴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유병태였다.
“도끼만 신경 쓰고, 난? 나는 왜 내버려 두는 건데?”
“그동안 안 보여서.”
“안 보이다니, 네가 신속대응센터에 내려가 있으라며!”
유병태가 버럭 따지자 태수가 멈칫했다.
“아, 그랬지.”
“두 달을 거기서 언제나 불러 주려나 하고 기다렸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고?”
유병태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깜빡한 건 태수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빠져나갈 타개책도 준비돼 있었다.
“……흐흠,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입원한 ‘외과’ 환자에게 적합한 ‘담당의’로 누구를 세워야 할지 도통 모르겠네.”
“태, 태수야?”
“아, 그래. 유 선생이 있었네. ‘외과’에 없어선 안 될, 환자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는 그런 유 선생이 있었지.”
태수가 미안함을 감추려 더욱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유병태도 눈치채고 있지만 목에 힘 줄 때가 아닌 터라 부드럽게 답했다.
“팀장이 맡겨 준다면 이 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환자를 위해 헌신할게.”
“그건 내가 믿지. 그런데 환자 병이 조금 독특해.”
“뭔데?”
“그러니까…….”
태수가 속삭이자 유병태가 크게 동요했다.
“이, 이런!”
“수술이 좀 어렵긴 할 거야. 정 선생이 서포터 해 줄 거고, 그래도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역시 우리 팀장은 화끈해. 아주 뜨거운 남자라고.”
“뜨거운 남자……. 뭐, 아무튼.”
태수가 뭐 씹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유병태는 책임감 가득한 얼굴로 굳게 말했다.
“그럼 팀장님, 전 환자분부터 뵙고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휙!
몸을 돌린 유병태가 씩씩하게 멀어져 갔다.
태수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자식이 적당히 시간 지나면 좀 올라오지.”
자유분방한 성격이지만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성격이다.
그런데 그 말이 유병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좌우간 한시름 놓은 태수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태수는 레지던트들을 바짝 조이기로 결심했다.
그 방법으로 아주 적절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묻고 답하기’였다.
때마침 복귀한 황경석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레지던트들을 모아놓고 위로부터 건넸다.
“오프……. 에휴, 아니야. 팀장님이 절대 무리한 질문은 안 하시니까……. 그래도 병원 밥이 맛있어서 다행인 거 같다. 고생들 해라.”
“저, 황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레지던트들 중에 가장 오프를 오래 못 나가신 분 기록이 어떻게 됩니까?”
“자유와 힙합을 사랑하신 그분은 투철한 반항심으로 무려 10개월 오프 금지란 업적을 세우셨지.”
“……진짜 10개월 동안 못 나갔던 건 아니죠?”
누군가 용기를 내서 묻자 황경석이 천천히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치프, 아니 최 팀장님은 한다면 하시는 분이다. 부디 새로운 업적을 세우는 일이 없도록. 이상.”
“말씀 감사…….”
“아아, 잠깐. 그거 내일부터 한다고?”
“네.”
양정한이 대답하자 황경석이 진지하게 조언했다.
“전화할 곳 있으면 오늘 다 하고, 잘 거 오늘 다 자고, 먹을 거 오늘 다 먹어.”
“네?”
“그냥 내 말대로 해. 내일부터 너희들에게 여긴 병원이 아닐 거야. 분명 팀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거다. 그건…….”
황경석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태수는 앞에 줄지어 선 레지던트들을 진한 미소로 둘러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웰컴 투…… 헬.”
그 말을 끝으로 레지던트들에겐 정말 지옥이 시작됐다.
황경석이 미리 알려 준 그 말대로 똑같이 진행됐다. 알고 있다지만 레지던트들은 태수에게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지옥에 소리 없이 말라 갔다.
그 모습을 본 전문의들은 오히려 레지던트들을 부러워했다.
“차라리 저때가 좋지.”
“어떤 특혜를 받고 있는 건지 알려나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저렇게 구를 거야?”
누군가 묻자 다들 움찔했다.
아무래도 자신 없는지 서로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희망병원 내부에서 일어난 변혁은 크고 작은 성과를 만들어 냈다.
의학 잡지 기자들은 매일 출근해야 할 정도였다. 그들을 통해 매달 새로운 인물들이 의학 잡지에 소개됐다.
가끔은 해외 의학 잡지에도 실렸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주요 일간지에 실릴 정도의 성과도 나왔다.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와 레지던트들도 사진이 실리거나 독점 인터뷰 기회가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의료진들은 똑같이 말했다.
-우린 아직 멀었다.
모든 병을 정복하겠단 목표를 세우고 하루하루 정진했다.
그 속에서 환자와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는 등 기본적인 일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태수의 앞에 정관영이 자리해 있었다.
정관영은 항상 그렇듯이 사람 좋은 얼굴로 태수에게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이지? 요즘 너무 좋은 소식만 들려오던데 말이야.”
“선배님만 할까요. 레지던트 수료 후 최단기간 외과 차석 전문의가 되셨잖습니까. 축하드립니다.”
태수는 자신의 일보다 더 기뻐했다.
그 인사가 쑥스러운지 정관영이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기 부원장님하고 외과장님 덕분이지. 자리가 너무 비어서 운 좋게 올라간 거라고.”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수술 횟수부터 차이 난단 소문이 여기까지 들리는데요.”
“수술이야 뭐……. 아차차! 맞다, 이거.”
스윽.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내밀자 받아 든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무슨 비밀이 담겨 있을까요?”
“비밀은 무슨.”
“전화, 문자, 이메일, 기타 등등 너무 많은데 종이로 전해 주시니까 이상해서요.”
“그거 그 사람 전화번호야. 마우영 이사 비서.”
그 소리에 태수가 멈칫했다.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그때 태수가 나중에 보자고, 연락처 남기라고 했던 기억은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내내 조용하다가 이제 연락이 왔단 건 좀 의외였다.
그것도 희망병원이 아닌 동성에 연락처를 남겼단 점도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사락.
종이를 펼쳐 보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구봉수. 010…….
이름이 참 구수한 느낌이었다.
실제 성격이 그런지는 태수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건설계에서 이름 높던 기업의 비서실에 들어갔을 정도로 엘리트였다.
매칭이 약간 엇나가는 느낌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던 태수는 순간 눈을 굴렸다.
“이거……. 오호.”
“그래. 최 팀장도 눈치챘겠지만 약간 여우 스타일이야. 희망병원 이름이 여기저기 알려지니까 이제 연락 온 게 분명하다고.”
“그 정도 잔머리도 없으면 곤란하죠.”
“어?”
“후후,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태수는 당장 설명을 삼갔다.
어떻게 될지 결정 난 게 없는데 먼저 설레발 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자그마한 기대는 품고 있었다.
개보다 못한 마 이사 밑에서 사람으로서 꿋꿋하게 견뎌 낸 그 뚝심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기억 속 일들을 꺼내 재조립하던 태수의 미소는 점점 짙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