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90
00393 393화
두 사람은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노천 커피숍에 자리했다. 아무래도 대학교 근처다 보니 음식점도 많고 활기가 넘치는 거리였다.
지나가는 대학생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엔도르핀이 돌 만한 좋은 위치였다.
잠시 후, 태수와 고정환은 음료수를 앞에 놓고 서로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태수가 먼저 물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시고 찾아오셨습니까?”
“카프레네 박사님의 추모 행사 때 멀리서 봤습니다. 그리고 이래저래 수소문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고요.”
“절 어떻게 아시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신문에서 처음 이름을 봤습니다.”
고정환의 대답에 태수는 외려 더욱 짙은 의아함을 느꼈다.
“혹시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아, 제 소개가 짧았군요. 전 LA한인타운에 위치한 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명함을 받아 든 태수는 조금 놀랐다.
“병원장님이시군요.”
“직함만 그런 겁니다. 아직도 일선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존대해 주시는 건 감사한데 좀 부담스러워서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태수가 권유했지만 고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초면에 그러는 건 실례지요.”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건 좀 아닌데요.”
고정환도 난처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런 실랑이가 몇 번 이어진 후였다.
결국 태수가 승리했다.
고정환은 태수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최 선생 말대로 편안하게 이야기하지.”
“아, 이제야 제 마음이 편하네요.”
“재미있는 친구야.”
“그보다 절 찾아오신 이유가 있으실 거 같은데요.”
태수가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내자 고정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내가 말을 돌리는 재주가 없어서…… 바로 물어봐도 되나?”
“그게 저도 좋습니다.”
“그럼…… 신문에 난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인가?”
고정환의 물음에 태수가 멍한 표정으로 변했다.
“뭐라고 났는지 정확히는 모르는데요. 제가 미국에 온 후로는 관심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음, 잠시만.”
고정환은 휴대폰을 꺼내 몇 번 뒤적이더니 태수에게 화면을 내보였다.
거기엔 한국 신문사의 인터넷 신문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휴대폰을 받아 든 태수가 기사부터 확인했다.
동성종합병원에서 어떤 수술을 집도 혹은 어시스던트했는지 집중적으로 조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태수에게 수술받은 환자들의 인터뷰도 실려 있었다.
환자를 가족같이 대해 주고 꼼꼼하게 살펴봐 주는 훌륭한 의사란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태수가 멋쩍은 얼굴로 휴대폰을 다시 고정환에게 건넸다.
“너무 좋은 이야기만 다뤄진 기사 같습니다.”
“사실이라고 생각해도 되나?”
“…….”
태수는 대답 대신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고정환은 아차 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 봐.”
“그런데 사실이라면 뭐가 달라집니까?”
“음, 내가 찾는 의사가 맞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확인한 거니까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태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고정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마음을 굳혔는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LA에 한인이 대략 60만 정도라는 걸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요.”
“우리 병원은 그 한인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병원이야. 그런데 최 선생도 알겠지만 미국의 의료 제도로는 아파도 병원에 오기가 힘들지.”
“그건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뼈저리게 느꼈기에 태수도 공감했다.
그러자 고정환이 용기를 내 말했다.
“그런 사람들을 수술해 줄 실력 좋은 의사가 필요해서 찾아오게 됐어.”
“혹시 무료로 수술하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아. 당연히 수술을 한 수고비는 챙겨 줘야지. 그런데…….”
고정환이 다시 어려워하자 태수가 말했다.
“시원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그런데 UCLA같이 거액을 줄 수는 없어. 최소한의 수술비는 보장해 주겠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는 이야기야.”
“그렇군요.”
태수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고정환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가만히 생각하던 태수는 고정한의 이야기에 몇 가지 궁금한 게 생겼다.
일단 그걸 물어보는 게 순서 같았다.
그 마음으로 태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LA의 한인들 중에도 의사들이 있을 텐데, 저에게 제안하시는 이유가 조금 궁금합니다.”
태수의 물음을 들은 고정환은 쓴 미소를 지었다.
“의사들은 있지만 대부분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해서 다른 병원으로 갔어.”
“그렇군요. 다음으로 여쭙고 싶은 건 제가 계속 미국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는 건 어떻게 되나요?”
“잠깐이라도 와서 한 명이라도 수술해 줘도 고마운 일인데, 어떻게 그걸 만류할 수가 있겠어. 그건 말이 안 되지.”
고정환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태수는 대화하는 내내 고정환을 유심히 살펴봤다.
이래저래 경험한 게 많아 달콤한 말에 홀라당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살펴보는 내내 고정환은 정중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솔함도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한인들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가 태수를 자극했다.
미국에 있어도 피는 당기기 마련이었다.
기왕이면 한국인을 수술한다?
슬슬 구미가 당겼다.
그 뒤로 몇 가지를 더 물어봤다.
고정환은 끝까지 조심스럽고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 태수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이른 오후 시간이다.
잠시 생각하던 태수가 결정을 내리고 고정환에게 말했다.
“이렇게 대화만 나누는 것보다 병원에 한번 가 봤으면 합니다만.”
“최 선생만 좋다면 나야 환영이지.”
“그럼 가시죠.”
태수가 결정을 내리자 고정환이 바로 일어났다.
고정환의 차에 올라 1시간 가까이 달리자 LA한인타운 월셔가에 들어섰다.
물론 태수는 봐도 모르기에 고정환이 중간중간 설명해 줬다.
“여기가 한인타운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거리야.”
“어쩐지 한국어가 곳곳에 보인다 했습니다.”
태수는 휘둥그런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기에 바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간판들 때문이었다. 한국어로 대문짝만 하게 적힌 간판들이 수도 없이 눈에 띄었다.
UCLA병원과 다르게 한국인들도 많이 보였다.
간간이 보이는 백인과 흑인이 없었다면 한국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태수가 두리번거리는 사이 고정환이 운전하는 차는 목적지를 향해 계속 달려갔다.
그리고 이내 차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태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역시 병원이었다.
-코리아종합병원
말이 종합병원이지, 건물은 노후되었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태수가 크게 둘러보는 사이 고정환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작지?”
“이 정도면 훌륭하죠. 제가 처음 동성종합병원 레지던트로 갔을때보단 훨씬 좋은데요.”
어쩌다보니 좋은 환경에서만 일하지 않은 태수였기에 진심으로 말했다.
사실이다.
동성종합병원을 떠나 카슈미르와 네팔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훌륭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까지는 아직 모르는지 고정환은 멋쩍어 했다.
“한인타운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한인 병원이라 좀 낡았어.”
“역사가 깊네요.”
“구닥다리지.”
고정환이 겸손하게 대답했으나 스스로는 뿌듯해하는 게 표정에서 느껴졌다.
태수도 겉만 휘황찬란한 병원은 관심 없었다.
이런 노후된 건물을 보니 고정환이 했던 이야기가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안을 구경해 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 이쪽으로 오게.”
고정환이 다시 태수를 안내했다.
얼마후.
병원을 한 바퀴 돌아본 태수는 병원장실에 자리했다.
따뜻한 원두커피가 테이블에 놓였지만 태수는 고정환에게만 시선을 뒀다.
“아무래도 한국분들이 많이 진료 받으시는 모양입니다.”
“진료비가 저렴하다 보니까 많이 몰려오는 편이야. 그중에는 흑인등 형편이 어려운 유색인들도 있고.”
“실례지만 병원 유지는 되는 거죠?”
태수가 묻자 고정환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운영에는 지장이 없는데 건물을 보수하거나 새로 올리는 건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형편이야.”
“그런데 왜 병원비를 저렴하게 받으시는 겁니까?”
“시대가 변해서 한인들도 이젠 LA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어. 하지만 모두가 잘된 건 아니야.”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고정환이 이어서 말했다.
“개인 보험을 들지 못하는 한인들도 수두룩해. 병원이라면 최소한 그런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어 줘야 하지 않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이 되어 주고 싶어서 만들어진 병원이야. 뜻을 같이하는 의사들이 지금까지 일해 주고 있고.”
“그렇군요.”
태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눈으로 보고 대화를 나누니 이해가 훨씬 빨랐다.
고정환.
생각보다 더 신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젊어서 의사로 돈은 많이 벌었다고 했다.
나이 들고보니 회의감이 들어 세운 코리아종합병원이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를 추구한다.
그러나 가끔 일탈을 범하는 사람이 있는데 고정환도 그 범주였다.
몇 시간 후, 다시 호텔로 돌아온 태수는 테라스에서 야경을 내려다봤다.
-우리 병원에서 잠깐이라도 일해 줄 수 있을까?
고정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울렸다.
태수는 그 자리에서 대답하진 않았다.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결정이기에 조금 더 생각해 볼 마음이었다.
지금 테라스에 서 있는 건 근사한 야경을 감상하기보다는 그 제안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정환의 이야기를 들으니 교포들중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하긴 모든 한인교포가 잘 산다?
불가능한 일이다.
어려운 교포들이나 흑인등 유색인들에게 좀 덜 받고, 넉넉한 사람들에게 많이 받아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식으로 운영하는 모양이다.
LA한인협회에서도 그 뜻을 알고 적극 후원해주는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던 태수 마음이 슬슬 기울었다. 어차피 지금은 안면도 없는 서양인들을 수술하고 있었다.
기왕 수술하는 거라면 한국 사람이 더 좋지 않을까?
한가지 마음 편한 건 세계적인 유명세를 치루는 UCLA대학병원. 당연히 실력좋은 의사도 많았다.
자신 또한 그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수술하고 있지만 미국 의료시스템이 줄곧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면 코리아종합병원은 환자를 위한 병원이라고 했다.
태수가 직접 확인한 바로도 그러했다.
다시 태수가 초심을 되찾은 것과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돈?
어차피 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외과의사 위치에 올라가면 부와 명예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따라올 거란 걸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부터 돈에 안달복달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약이다.
그동안 UCLA대학병원에서 받은 수당만으로도 이번 미국행은 충분히 만족했다.
이런 제안을 받고도 UCLA 대학병원에 머문다면?
결국 미국의 의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탁.
테라스를 가볍게 내리친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하다!”
마음을 정리하니 바람이 매우 상쾌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오전, 태수는 일찌감치 리차드 외과장을 찾아갔다.
갑작스런 방문에 리차드 외과장은 태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필요한 게 있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기탄없이 말해 봐.”
리차드 외과장이 나름 호의를 보이자 태수도 어제 결정 내린 걸 이야기했다.
“잠시 다른 곳으로 갈까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나?”
“아니요. 월셔가에 있는 코리아종합병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실은 그쪽에서 남은 미국 생활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태수의 말에 리차드 외과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병원이라면 이름은 들어본 거 같은데, 혹시 우리보다 좋은 보수를 약속했나? 그런 거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조율해 줄 수 있네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돈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금전적으로 어려운 한인들이 수술을 받는 곳이다 보니 마음이 그쪽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금전적으로 어려운 한인들이 치료받는 병원이라.”
“갑자기 이런 말씀 드리게 된 건 죄송합니다. 저도 깊이 고민하고 결정을 내린 부분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태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리차드 외과장이 말했다.
“어차피 닥터 최가 정식으로 우리 병원에 소속된 건 아니니까 어디를 가든지 본인 자유야. 그런데 좀 섭섭하긴 하군.”
“이곳에는 실력 좋고 멋진 의사분들이 많습니다. 여기보다는 그곳이 더욱 절 필요로 하는 거 같아서 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만약 우리가 필요하다고 전화하면 올 텐가?”
“늦게라도 달려오겠습니다.”
태수가 시원하게 확답을 주자 그제야 리차드 외과장의 굳은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