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85
00688 688화
점점 조니 워커 병이 비어 갈 무렵이다.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잉.
그 바람은 태수의 귀를 간질였다.
그 자극에 태수의 머릿속에 각인된 카프레네의 충고가 떠올랐다.
-환자를 무서워해야 돼. 두려워하고 손발이 떨리는 공포도 느껴야지. 언제고 어느 때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올 거야. 그땐 지금을 떠올려. 환자가 의지할 사람은 자네 한 사람뿐이라는 걸 말이야.
문득 떠오른 그 이야기가 태수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 느꼈던 느낌, 그리고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너무도 달랐다.
전에는 그저 의사로서 최고의 충고를 해 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보고 듣고 느꼈다.
그 충고.
그게 바로 의사다.
카프레네가 평생 일궈 낸 참의사의 길이었다.
카프레네는 세상을 떠난지 많은 시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태수에게 가르침을 줬다.
뻔히 아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와 닿는 정도가 달랐다.
태수는 또 한 번 그 충고를 마음에 새겼다.
최근까지 어딘지 모르게 나약해졌던 자신이 다시 조여지는 듯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순간 태수는 정신을 차렸다.
더 이상 과거의 편린같은 슬픔으로 자신을 옭아맬 순 없었다.
털어 내고, 또 털어 내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또다시 일어나야 했다.
이 순간이 태수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사로서 또 한 번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이미 가슴속에 품은 원대한 계획이 있다.
앞으로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만날 터였다.
이제 카프레네를 기리며 붓기 시작한 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뭔가 자신의 결심을 말하고 싶었다.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되겠다고 이야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건 무의미했다.
카프레네는 저 위에서 지켜볼 거라 믿었다.
지금까지 지켜봤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럼 보여 주면 된다.
구차하게 자신의 마음을 늘어놓는 것보다 확실하게 볼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털어 버리고 난 태수가 땅에 흐르는 호박빛 술을 가만히 바라봤다.
모든 걸 털어 낸 그의 얼굴에는 슬픔도, 안타까움도, 미안함도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은은하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태수의 입이 자그맣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 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의 위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
카프레네의 삶의 시작과 끝.
그리고 태수의 삶에도 시작과 끝이다.
아니 의사라면 평생 기억해야 할 신조같은 선서였다.
태수가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마지막을 읊조린 순간이었다.
뚝.
조니 워커도 기다렸다는 듯이 마지막 한 방울을 떨궜다. 태수는 곧바로 미련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메고 뒤돌았다.
스스로 내뱉은 약속대로 이젠 떠나야 할 순간이다.
저벅 저벅.
태수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태수의 어깨는 더 이상 축 처져 있지 않았다.
걸어가는 걸음에도 힘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태수의 얼굴에는 슬픔이 아닌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산을 내려온 태수는 차를 몰고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후, 태수가 도착한 곳은 산과 가까이 자리한 119구급대였다.
순간 감개무량했다.
몇 년 전 카프레네의 시신을 병원까지 함께 옮겼던 구급대원들이 근무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동안은 일부러 이쪽으로 발길도 돌리지 않았다.
어쩌면 여기에 다시 오면 또다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서인지도 몰랐다.
물론 이젠 아니다.
산에서 마음을 많이 정리하고 가다듬었기에 찾아올 수 있었다.
“있을까?”
작은 기대감이 떠올랐다.
들어가기 전 잠시 멈춰 선 태수는 옷매무새부터 정리했다. 그리고 가볍게 미소 짓는 연습도 했다.
아무리 산에서 마음을 털어 내고 내려왔다고 해도 밝은 미소를 짓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던 탓이다.
노력에는 장사가 없었고, 한 번 다잡힌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어느새 태수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휴대폰으로 잠깐 얼굴을 확인한 태수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흠흠.”
목소리까지 가볍게 가다듬은 후에야 태수는 119구급대 문을 열었다.
끼익.
안으로 들어가자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구급대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태수가 들어서자 가장 앞에 있던 구급대원이 물었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예전에 북한산 부왕사 근처에서 시신을 운반해 주신 구급대원분들을 찾아왔는데요.”
“부왕사 근처에요? 거기서 그런 일이 있었나.”
어리둥절해하는 구급대원의 모습에 태수가 정중하게 좀 더 설명을 곁들였다.
“6년 정도 된 일입니다.”
“아, 제가 여기에 오기 전인가 보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때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요.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태수가 차분하게 이유를 말하자 조금 긴장하고 있던 구급대원이 얼른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었나 해서요.”
“아닙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때 그분들이 계시는지, 아니면 만날 수 있는지 확인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양해를 구한 구급대원이 얼른 사무실 안쪽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태수는 조금은 초조했다.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나 그 구급대원들이 혹시라도 없을지도 모른 탓이다.
한편, 사무실에 자리한 구급대원들은 태수를 보며 수군거렸다.
“누구야?”
“6년 전의 일로 찾아왔다는 거 같은데. 저 사람도 어지간하네. 언제 적 일로 찾아와.”
“그래도 고맙다고 찾아오는데 뭐, 나쁠 건 없지. 그보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 얼굴인데.”
“아는 사람이야?”
“모르지.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단 말이야.”
구급대원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계속 태수를 힐끔거렸다.
태수는 그런 시선을 느꼈지만 담담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게 1분 정도 지났을까?
전과 다른 구급대원이 태수를 향해 다가왔다.
“부왕사 근처에서 시신……. 아! 그때 그분.”
구급대원이 태수를 손짓하며 살짝 놀랐다.
그 순간 태수도 그 구급대원을 자세히 바라봤다.
너무 경황이 없던 순간이라 명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계속 기억을 되짚은 태수도 이내 그를 기억해 냈다.
시간이 지나긴 했는지 눈가에 잔주름이 보였다.
태수는 얼른 그를 향해 깊이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너무 늦게 찾아왔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요. 이러지 마세요.”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런 태수를 본 구급대원이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어서 말했다.
“이거 이렇게 서 계실 게 아니라 일단 자리부터 좀 옮기시죠.”
“편하신 대로요.”
“제가 편한 게 아니라 그쪽 분이 편하셔야 하는데요. 일단 소파, 소파 좋다. 소파로 가시죠.”
태수의 급작스러운 인사로 정신이 쏙 빠진 구급대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안내했다.
응접용 소파에 자리하자 곧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가 다가왔다.
“이거 변변히 드릴 게 없습니다. 입에 맞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그보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반대편에 자리한 구급대원은 잠깐 사이 안정을 찾았는지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늦었죠.”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러고 보니까 제 소개도 못했습니다. 성규석입니다.”
“최태수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누던 사이였다.
성규석 대원이 태수의 이름을 듣자 눈을 굴렸다.
“최태수라, 정말 좋은 이름이시네요.”
“감사합니다. 성 대원님 성함도 멋지신데요.”
“아, 제가 좋은 이름이라고 한 건 저희 119구급대원의 은인인 의사분 중에 최태수란 분이 계셔서 그렇습니다.”
“…….”
태수가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성규석 대원의 눈이 점점 커졌다.
“혹시…… 제가 알고 있는 최태수 선생님이 맞으신가요?”
“이름이 같은 거겠죠.”
“에이, 그렇겠죠. 그분은 지금 강원도에 계실 텐데요.”
성규석 대원이 손을 내저을 때였다.
처음 태수를 맞이한 구급대원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그리고 태수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반색했다.
“맞네! 최 선생님 맞으시죠?”
“하하.”
태수가 멋쩍은 미소를 지을 때였다.
그 대원이 의아해하는 성규석 대원에게 얼른 말했다.
“이분이 그분 아닙니까. 예종혁 대원 수술해 주시고, 얼마 전에는 강원도 산에서 환자 살려서 내려온 그분이요.”
그 말에 성규석 대원이 다시 태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아아아, 아니.”
“이거 참.”
태수는 낯부끄러운 얼굴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자 성규석 대원이 얼른 물었다.
“왜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다른 최태수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진짜요?”
“알아봐 주신 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감사 인사를 드리러 찾아온 길입니다.”
태수가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성규석 대원은 그렇게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요. 안전! 반갑습니다. 진짜 반갑습니다, 최 선생님.”
“이러지 마십시오.”
“이거 이런 커피를 드릴 게 아니라, 누구 가서 아메리카노라도 좀 사 와.”
성규석 대원이 소리치자 태수가 얼른 만류했다.
“아닙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일들 보십시오.”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다들 뭐 해?”
“아니라니까요.”
태수는 계속 성규석 대원을 제지했다.
그렇게 구급대 안이 소란스러울 때였다.
끼익.
구급대 현관이 열리더니 3명의 구급대원이 들어오며 의아함을 보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사고가 터졌으면 몸을 움직여야지, 주둥이가 움직이면 되겠어?”
“다들 이렇게 시끄러울 일이 뭐가 있는 거야?”
궁금해하는 그들에게 근처에 있던 구급대원이 얼른 가서 이야기했다.
“최태수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최태수?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그, 있잖습니까. 대전하고 강원도에서…….”
“아아, 그 최태수 선생님. 그분이 여기를 왜?”
그가 궁금해하는 사이 성규석 대원이 크게 말했다.
“팀장님, 그리고 박 대원하고 송 대원, 이쪽으로 오세요.”
“저게 이젠 선배도 오라 가라 하네.”
타박하는 말투와 다르게 팀장이라 불린 구급대원이 먼저 움직였다.
이내 다가오는 구급대원들을 본 태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때 산길을 힘겹게 내려왔던 이들의 얼굴들이 차례로 기억난 탓이다.
그들이 곁에 온 순간 태수는 벌떡 일어나 고개 숙였다.
“이제야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그때 감사했습니다.”
“어어, 이게 무슨. 초면에 반갑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때 성규석 대원이 말했다.
“팀장님, 글쎄, 예전에 부왕사에서 낙상사고 환자 한분 모시고 내려온 적 있잖습니까. 그때 신고했던 그분이 바로 최 선생님이셨답니다.”
“뭐? 그 파랗게 질려 있던 청년 말이야?”
“네. 그렇다니까요.”
성규석 대원이 재차 대답하자 팀장의 얼굴도 멍하니 변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인연이.”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태수의 말이 들려오자 팀장은 깜짝 놀랐다.
아직도 태수가 깊이 고개 숙이고 있던 탓이다.
얼른 팀장이 태수를 일으켰다.
“왜 이러십니까.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염치도 없이 이제야 찾아왔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인사는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죠. 이래저래 저희들 때문에 고생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태수와 팀장이 마주 고개를 숙이며 깊게 인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다른 구급대원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슬며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