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256
256화
EPISODE.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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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과 질리언이 마주하기 며칠 전.
브리타니아 황궁의 심처에선 두 사람 사이에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검은 로브로 전신을 두르고 두 눈에선 요요히 빛을 발하는 사내, 타나토스와 창백한 미청년의 인상을 지닌 전 황태자……아니. 지금은 새롭게 제국의 황제가 된 에드가 콘라드 4세의 대화였다.
딸그락, 툭, 데구루루…….
손안에서 체스 말을 굴리기도 몇 차례, 흥미를 잃고 내동댕이친 체스 말이 아무렇게나 판 위를 나뒹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콘라드 4세였다.
“시간이 필요한 일인 건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지루하군.”
하루에도 수천이 넘는 자국의 병력이 전장에서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해 제국의 영토 중 2할에 가까운 땅이 엔디미온의 아래에 넘어가기까지.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황제가 내뱉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감각한 음성이다.
그리고, 그 음성에 타나토스가 대꾸했다.
“첫 단계는 이제 거의 마무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을 하며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뻗었다.
체스판 위의 옆에 놓여 있던 제국의 지도 위를 가볍게 훑으며 몇 군데를 툭툭 두드렸다.
모두가 제국군과 엔디미온 군의 접전이 일어난 지역들이다.
그러자 그의 손끝이 스친 자리를 따라 붉은색 기운이 잉크처럼 요요하게 번져 나가고.
핏물이 떨어진 듯한 광경이 만들어지길 몇 차례, 이내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엔디미온의 천둥벌거숭이 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제국의 영토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고, 이 땅 곳곳에는 충분한 피가 뿌려졌습니다.”
본래라면 엔디미온의 대공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한 후, 그를 충동질 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할 생각이었지만 어쨌건 간에.
중간 과정이 틀어졌다 해도 결과 자체는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므로.
“그 외에 황권 다툼을 가장해 내전을 벌이며 피를 흘리고 제물을 쌓아 올린 곳들까지 더하면…….”
몇 군데 핏자국이 더 생겨나며 그 지역들을 잇는 선이 길게 생겨난다.
그리하여 완성되는 그림은 다섯 개의 꼭짓점을 가진 역오망성(逆五芒星).
제국의 반절 가량을 뒤덮은 핏빛 역오망성의 한가운데를 응시하며 그가 말을 내뱉었다.
“좌표설정은 모두 끝났으니……이제 남은 것은 강림에 필요한 제물과 죽음뿐일 테지요.”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죽음과 제물이 필요로 할 것인즉.
“곧 주인님께서 원하시던 때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 제물과 좌표를 이용해 『어떤 존재』를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목표였다.
타나토스의 말이 끝나고.
“그때가 되면, 나는 새로운 신의 사도로 거듭난다.”
황제, 콘라드 4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신화시대 이후, 몰락해버린 마계를 대신하여 이 땅에 ‘종말(終末)’을 가져다줄……새로운 신의 사도로 말이야.”
말을 마치는 그의 몸을 따라 무채색 절망이 흐릿하게 뿜어져 나왔다.
일반적인 사교들이 사용하는 흑마력과는 그 본질부터가 다른.
세상의 바깥쪽에서부터 흘러 들어온 『절망』이었다.
* * *
【─제국을, 그 심부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을 조심해라.】
질리언이 남기고 간 말이 괜히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와 함께 스스로 히프노스라 칭했던 사교도가 죽어가며 남겼던 유언 역시 함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아직 어둠은 끝나지 않았다던가…….’
그 후 밝혀진 사교도와 제국의 관계, 그렇다면 질리언이 말하는 ‘웅크리고 있는 자들’이란 사교도를 말하는 것일까?
‘당장은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만 …….’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정해두고 있어야, 의외의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나가는 사이, 러셀의 걸음은 이미 군영의 입구에 당도해 있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군영의 입구.
그런데 어쩐지 내부의 모습이 조금 소란스러워 보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누군가를 찾는 듯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보이고…….
“대공 전하께서 나가시는데 호위를 하나도 붙이지 않았단 말이냐!”
“그, 그것이 전하께서……!”
도노반 남작의 외침에 쩔쩔매는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물 중후반의 나이에 7써클을 넘어 8서클에 도달한 대마법사.
그 천재성과 강함을 위협할 만한 적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호위를 붙이는 이유가 꼭 대상을 보호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으니까.
“수행원도 데리고 나가지 않으시다니…….”
초조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발걸음을 놀리는 그의 모습을 일견하며 러셀이 작게 웃었다.
이어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괜찮다고 한 것이니 너무 책망하지 마십시오.”
작은 목소리가 마력과 함께 바람을 타고 도노반 남작의 귓가로 날아든다.
그에 정신을 번쩍 차린 남작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군영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러셀을 발견하곤 황급히 뛰어왔다.
“대공 전하!”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꾸한 군영의 내부를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소란스럽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그게…….”
잠시 뜸을 들인 도노반 백작이 이내 답했다.
“실은 대공 전하를 찾고 있었습니다.”
“……뭔가 보고할 사항이라도 생긴 겁니까?”
러셀의 물음에 도노반 남작이 턱 끝을 가볍게 주억였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본대로부터의 전갈입니다. 아무래도 제국 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본대.”
이번 전쟁의 총사령이자 자신의 스승인 다리아가 이끌고 있는 부대를 말하는 것이다.
본대로부터의 전갈, 그리고 제국 측의 수상한 움직임까지.
하나같이 중요한 것들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발 없는 말은 하루에도 천 리를 가는 법이고, 전장에서의 사기(士氣)란 사소한 소문 하나에도 좌우되는 법이었으므로.
도노반 남작이 목소리를 낮춰 말한 것 역시 바로 그 때문일 터.
“일단은…….”
자신과 도노반 남작을 바라보고 있는 주변 병사들의 시선을 일견하며 러셀이 대답했다.
“자리를 옮겨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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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로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듯 참모진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모두가 밖에 나가 러셀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모양.
‘앞으로 잠깐 밖에 나갈 때는 보고를 하고 움직여야겠군.’
그랬다면 이 많은 인원이 자신을 찾기 위해 군영 내부를 동분서주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아무리 질리언의 시선을 의식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곤 하나, 미처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한 것은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다.
‘쯧.’
스스로의 부주의함을 자책하며 모여든 참모진들을 향해 러셀이 슬그머니 사과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자리에 앉은 참모진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개인적인 용무라 해도 가능한 말씀을 드리고 다니겠습니다.”
“허허…….”
러셀의 사과에 도노반 남작을 비롯한 참모진들이 멋쩍은 표정을 해 보였다.
‘가능하면 호위를 대동하고 다녀 주셨으면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그것까지는 무리일 터.’
게다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 해도 러셀은 엔디미온의 대공이었다.
그와 같은 직위에 앉은 이가 고개를 숙이는 것 역시 흔치는 않았던바.
‘이 또한 대공 전하만의 장점이라 여겨야 하는 건가.’
그리 생각하며 도노반 남작이 가볍게 헛기침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없이 외출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
진정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본대로부터의 전갈, 제국군의 동태였다.
“그럼 보고드리겠습니다.”
반 호흡 쉬어간 도노반 남작이 본대로부터 전해진 서신을 펼쳐 들었다.
“전방에 투입된 올빼미들의 보고에 의하면, 제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올빼미란, 적진 가까이 침투해 있는 엔디미온의 척후병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제국군의 움직임을 확인하며 보고를 해주는 이들.
“기존에 있던 지역에서 대부분의 군사를 물렸으며, 그렇게 물린 군사를 한자리에 집결시키는 중이라고 합니다. 또한 집결을 위해 이동 중인 군에는 저희와 대치 중인 병력 역시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집결이라면…….”
“한 번 제대로 회전(會戰)을 벌여볼 생각이겠지요.”
제국이라는 이름답게 브리타니아의 땅덩어리는 광활하기 그지없다.
같은 열강이라 해도 엔디미온의 크기는 제국의 6할에서 7할 정도에 불과할 정도.
땅덩어리가 그렇게 큰 만큼 인구수 역시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치러진 전쟁만 놓고 보더라도 제국군의 평균 숫자는 엔디미온 군의 1.5배가량.
‘거기에 사교도들과 손을 잡으며 더해진 언데드들까지 합쳐진다면…….’
그야말로 압도적인 병력 차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초인(超人)이라고 불리는 전력에서는 엔디미온 군이 앞선다는 점이겠지만.
‘수도를 지키고 계신 창탑주님까지 하면 8써클 마법사의 숫자만 무려 셋.’
제국의 유일한 8써클 마법사이자 암탑주라고 불리던 이는 사교도와 손을 잡은 황자에게 반발해 죽임을 당했다던가?
홀로 군단 단위를 폭격할 수 있는 고 써클 마법사의 숫자에선 확실히 우위를 점한 셈.
‘뿐만 아니라…….’
맥라이 휴스.
지아볼 니글.
헤이젠 백작까지.
벌써 몇 명이나 되는 제국 측의 초인이 러셀에게 당하거나 러셀과 엮여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었고.
‘변수라고 할 만한 건 역시 언데드인가.’
둠 나이트(Doom Knight).
데스 나이트를 넘어 초인에 필적할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최상급 언데드의 한 갈래.
러셀은 그를 제작하기 위해 제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을 직접 목격한 바가 있었다.
‘만약 둠 나이트가 완성되었다면…….’
몇 기나 되는 둠 나이트가 완성되었는지 역시 고민해봐야 할 문제일 터. 그렇게 생각하던 러셀의 콧잔등이 가볍게 씰룩였다.
‘아니, 문제는 둠 나이트만이 아니군.’
희박한 확률과 많은 제물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둠 나이트와는 달리, 놈들에겐 확실하게 최상급 언데드를 제작할 수 있는 시체가 한 구 있었으니까.
‘죽음을 맞이했다는 전대의 암탑주.’
8써클 마법사인 그를 아크 리치로 부활시킨다면,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일이 될 것인즉.
툭, 툭, 툭-.
깊어지는 고민과 함께 러셀이 손끝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때였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도노반 남작이 입을 연 것은.
“아레크스 경이 후방으로 빠지고, 창탑주님께서 전장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아레크스 경이 말입니까?”
“예.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보우 마스터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후퇴시키기 위해 혼자 남아 시간을 끄셨다고…….”
제국에 존재하는 보우 마스터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천궁(天弓) 보레아스의 원주인이자 자신의 손에 명을 달리한 필립 메이슨의 아버지.
‘─메이슨 후작.’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제국 측의 초인들이 비로소 하나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는지.
“본대의 결정은 어떻습니까?”
“총사령관님께서는……전면전을 원한다면 어울려 주는 수밖에, 라는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거침없으며 당찬 결정.
스승의 목소리가 절로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기에 러셀이 빙긋 웃었다.
어찌 되든 간에 이곳은 전장.
살아남은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규율이 가장 강하게 자리 잡은 곳이지 않던가.
또한 지금부터 전력으로 나오겠다는 제국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사교도 놈들 역시 모습을 드러낼 것인즉.
‘내가 메이슨 후작과의 원한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 놈들 역시 나와의 원한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
지금 제국에 똬리를 튼 놈들은, 히프노스와 한패가 분명했기에.
“우리도 군을 움직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퍼져나가는 복수심을 진정시키며 러셀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이동을 시작해 본대와 합류합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