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92
92화
EPISODE.46
두 사람의 입장 시간을 맞추기 위함이었을까.
몇 차례, 왕도를 빙빙 돌던 마차가 왕궁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척-.
마차에서 내려 시종의 안내에 따라 연회장 앞까지 당도한 러셀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후.”
천천히 심호흡하며 다시 한번 옷차림을 돌아봤다.
“긴장을 풀게.”
툭툭, 그런 러셀의 어깨를 휴버트가 두어 번 두드렸다.
이어 두 사람을 안내해왔던 시종이 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두 분, 준비되셨습니까?”
“물론일세.”
“-예. 준비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드리웠던 긴장의 기색이 옅어지는 것을 느끼며, 러셀이 반 박자 늦게 답했다.
탁, 탁-, 탁.
두 사람 모두 동의하자 시종이 손등으로 문을 몇 차례 두드린다.
가벼운 손길, 그것이 신호였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회장 너머, 문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연회장 내(內)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덜컹-.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러셀과 휴버트, 두 사람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염탑 소속, 역사상 최연소 5써클 마도사이자 이번 승리에 있어 혁혁한 전공을 거두신 러셀 경께서 입장하십니다!”
“염탑 소속 6써클 마도사, 휴버트 경께서 입장하십니다-!”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에 안쪽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장 내에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저 청년이 바로…….”
“레이먼드 가(家)의 새로운 초신성인가.”
“으음, 이제 스물 언저리의 나이라고 들었거늘, 과연 소문대로 젊군.”
러셀의 등장에 몇몇 귀족들이 술렁였다.
왕도에서 화제가 되었던 친선경기와 전날의 국정 회의. 몇 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으로만 러셀의 이야기를 들은 귀족들이었다.
뒤이어 들려온 휴버트의 소개에 주목하는 이들 역시 몇 있었다.
“몇 년이 넘도록 5써클에 정체해 있었다더니, 결국 벽을 넘어섰는가?”
“6써클-, 염탑이 새로운 탑주 급 마법사를 품게 되었군.”
예전부터 휴버트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온 마법사들이었다.
“이걸로 탑주 급 마법사가 염탑에만 셋인가.”
“지금껏 보여 준 재능이 진짜라면, 저 청년 역시 십 년 안에 6써클에 들어서게 될 터…….”
누군가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한 마디에, 노귀족 몇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귀족이건 그렇지 않건.
오랜 시간 왕도라는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잔뼈 굵은 이들이다.
이들은 어떤 방식이건 권력의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경험과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허, 십 년 후의 염탑에는 탑주 급 마법사만 무려 넷이란 말인가?’
‘이변이 없는 한, 명실상부 이 시대 최고의 마탑은 염탑이 되겠어.’
‘나이와 장래성을 따져보면 다음 대는 이르더라도, 2대 후의 탑주는 저 청년이 되겠군.’
-지금 러셀이라는 청년이, 그야말로 폭풍의 핵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노라고.
눈치 빠른 귀족들 몇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개중 일부는 함께 온 가문의 여식이나 손녀에게 귀엣말로 무엇인가를 작게 속삭이기도 했다.
뚜벅, 뚜벅-.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러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걸음을 옮기며 든 생각은, 우습게도 ‘생각보다 견딜 만한데?’였다.
분명 얼굴이 화끈거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맞는 건가?’
도리어 뜨거운 눈빛들보다는, 담담한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이미 ‘맥라이 휴스’라는 소드마스터의 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적이 있는 러셀이었으므로.
그런 그에게 귀족들의 시선은 더 이상 대수롭게 느낄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숫자가 이보다 몇 배쯤 늘어나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졌겠지만.
“이보시게-.”
“잠시 이야기를…….”
“나는 블루엔 백작가의…….”
몸이 달아오른 귀족 몇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러셀을 둘러싸기라도 할 요량인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대귀족의 입장에서야 ‘귀족답지’ 못한 일이겠으나, 그들에게 있어선 권력의 중추에 다가설 기회였으므로.
하지만.
“왔더냐.”
한발 빠르게 그들의 움직임을 차단하는 이가 하나 있었다.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외모와 강력한 힘이 깃든 음성.
다리아 스노우화이트였다.
“스승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어 인사하자, 다리아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야 옷 태가 잘 받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러셀과 휴버트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도 꽤 괜찮아졌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연미복 밖으로 볼록하게 튀어나왔던 뱃살이 사라졌어. 남몰래 운동이라도 했던 것이냐?”
“예.”
스승의 말에 휴버트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가 하는 것에 자극을 좀 받았습니다.”
전날, 아카데미에서 러셀과 대화를 나눈 후부터 시작한 운동이었는데 이제야 조금 티가 나는 모양.
“잘했다. 마법사라고 해서 굳이 책을 붙잡고 먹물 냄새만 풍길 필요는 없지. 우리 같은 워 메이지라면 더욱더 그렇고 말이야.”
권장각 등의 체술이나, 근접 병기술을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다.
다리아가 그렇게 충고했고, 그때.
척-.
“이 친구가 바로 그 기린아(麒麟兒)입니까?”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세 사람에게 드리웠다. 연회장 높은 곳에 걸린 샹들리에 조명의 빛이 반쯤 가릴 정도의 거구.
갑작스럽게 나타난 거구에 러셀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곰인지 사람인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덩치다.
이만한 체구와 근육이라면 ‘버밀리온’ 조차 한 수 접어줄 터.
그러한 거구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당장에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거대한 무(武)라.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맥라이 휴스에 비견 될 만한 강자-!’
직감만으로 내린 확신에 온몸의 감각이 경종을 울려댔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왕도 내(內)에 이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 자루의 검(劍)이 아닌, 열여덟 종에 달하는 병기를 다룰 줄 안다는 초인(超人)급 오러 수련자.
웨펀 마스터-.
“……길리언 펄슨 경.”
러셀의 중얼거림에 그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를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이야기가 편하겠어.”
그런 길리언의 배를 퍽퍽 두드리며 다리아가 낄낄거렸다.
“아이고 이놈아. 그 커다란 덩치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고블린도 너를 알아볼 게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던지라, 길리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머쓱한 표정으로 코 밑을 쓱 훑었다.
일견 무례할 수도 있는 다리아의 행동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이런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익숙하다는 말이겠지.
“러셀 레이먼드라고 합니다. 설마 웨펀 마스터께서 먼저 저를 찾아오실 줄이야.”
소요를 가다듬으며 러셀이 인사하자, 길리언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길리언 펄슨일세. 소문이 자자한 청년이 있다는데 궁금한 것을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그가 탐색이라도 하듯, 러셀의 전신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맥라이 휴스, 그 천둥벌거숭이 놈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줬다는 젊은 친구를 꼭 한번은 봐두고 싶었거든.”
어쩐지 겪어 본 적이 있는 반응이었다. 니콜로 때를 떠올리며 러셀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맥라이 휴스, 그자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응?”
러셀의 물음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그럼 왜……?”
“그냥.”
“?”
“예전부터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물론 제국의 놈 중에 마음에 드는 놈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그가 입술을 우물우물거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맥라이 휴스, 그 새끼는 본인부터 제자까지. 전부다 좆같은 새끼였지.”
이번엔 반대로 러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맞나 싶어서였다.
‘뭐 같은 이라고?’
회귀 전, 닳은 대로 닳은 용병 생활 덕에 욕설이 익숙한 건 러셀 역시 마찬가지다.
허나 왕궁 대연회에서 저리도 적나라한 표현을 듣게 될 줄이야.
다리아가 속 시원하다는 듯, 낄낄거렸다.
“그보다-.”
함께 낄낄거리던 길리언이 돌연 눈빛을 바꿨다. 러셀의 몸 이모저모를 다시 한번 살피며 중얼거렸다.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창술이라도 수련하고 있던 건가? 기초근육이 제법 잘 만들어졌군.”
열여덟 종에 달하는 병장기에 통달했다더니 과연, 근육의 발전 형태만으로도 자신이 창술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줄이야.
‘이게 무인(武人)의 눈이라는 건가?’
그 눈썰미에 속으로 감탄하며 러셀이 답변했다.
“예. 물론 기초 창술을 계속 반복해 익히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뭐, 기초라고 해서 꼭 나쁠 건 없네. 모래 위에 성을 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 내뱉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언제고 한 번 나를 찾아오게. 자네 스승님…….”
다리아의 눈치를 슬쩍 보며 첨언했다.
“……만 허락한다면 종종 지도해주도록 하지.”
“이놈아, 남의 제자를 탐내는 게냐?”
퍽퍽-.
“제자를 탐내는 게 아니라 지도편달입니다. 지.도.편.달.”
“그게 그거지.”
흥, 콧방귀를 낀 그녀가 러셀을 돌아보며 말했다.
“덩치에 비해 믿음직스럽지 못한 놈이지만, 배우겠다고 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수준까지는 가르쳐 줄 게다.”
웨펀 마스터의 지도편달이 그럭저럭 쓸 만한 수준이라니,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다리아밖에 없을 테지.
사실상 스승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러셀이 시선을 움직였다.
다시 한번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물론.”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손에 끼고 있던 두툼한 금반지를 풀어 러셀에게 건넸다.
“증표가 필요하다면 이걸로 하지.”
총 18종류의 무기가 반지의 외견을 따라 빼곡하게 새겨진, 그의 상징과도 같은 반지였다.
진심으로 한 제안이 아니고서야 건네줄 수 없는 물건이다.
“어째서입니까.”
“……응?”
“무엇 때문에 제게 창술을 가르쳐주시기를 결정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흠.”
러셀의 질문에 그가 턱을 벅벅 긁었다.
“글쎄?”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될성싶은 나무에 비료 한 번 더 주겠다는데, 그게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 일인가?”
“아.”
길리언 펄슨이라는 인간상을 짐작할 수 있는 한 마디였다.
‘귀족의 탈을 뒤집어쓴 야인(野人)이자 천상 무인(武人).’
그런 러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럼,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길리언이 껄껄 웃으며 러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아니더라도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 같으니 말일세.”
러셀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귀족들과, 그 여식들을 쓸어보며 몸을 돌렸다.
“이래서 인기남은 피곤한 법이지. 나 젊었을 때도 말이야 이곳저곳의 영애들이…….”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늘어놓으며 멀어지는 그의 모습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없는 아저씨.
그 자체였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