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94
94화
EPISODE.47
무도회(舞蹈會).
누가 뭐라고 해도 연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장이었다.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뤄,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고 눈빛을 교환하는.
연회에 참석한 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나 기대하는 자리.
무도회가 시작되기 무섭게, 궁정 악단이 다시 한번 음악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경쾌하면서도, 적당히 부드럽고 리듬감 있는, 춤을 추기 딱 좋은 음악이었다.
그 음악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일단의 무리가 러셀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한다.
각양각색의 드레스는 물론, 보석과 저마다의 향수로써 전신을 무장한 여인들.
바로 제 아버지나 조부와 함께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가의 영애들이었다.
러셀이 홀몸이 되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던 여타의 귀족들 역시 이 순간만큼은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을 테지.
무도회란 본래 그런 시간이었으므로.
“레이먼드 백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백작님. 괜찮다면 저와 한 곡-.”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온갖 귀한 대접을 받아온 그녀들이었다.
자존심이 높은 것은 물론 도도하기까지 한 것이 당연한 이야기.
그런 그녀들이 러셀을 향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러셀이라는 남자가 가진 가치는 그만큼이나 매력적이었으니까.
‘사실상 미래의 염탑주.’
‘레이먼드 백작만 우리 가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굳이 데릴사위로 끌어들일 필요도 없어. 맺어질 수만 있다면.’
적어도 그녀들의 가문은 한 단계, 혹은 두 단계 그 이상 도약할 수 있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제국과의 위태로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이 시국에서, 성공이 확실시되는 인물이다.
그 가치는 어떤 무가지보와도 견줄 수 없을 테지.
게다가 단정히 정리된 러셀의 외모가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것도 아니었다.
흑발과 어우러지는 붉은 색 눈동자는 묘하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기사 못지않게 탄탄한 몸을 갖추고 있기까지.
실력과 외모, 거기다 나이까지. 삼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지는 셈이라.
저만한 남편감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꽤 많은 여인들이 앨런의 옆으로 몰려든 것 또한 이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겠지.
‘음…….’
자신을 둘러싼 여인들 사이로, 미묘한 경쟁심이 흐르는 것을 확인하며 러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는 달리 능숙하게 대처하고 있는 앨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그에게, 이런 상황은 꽤 익숙한 듯 보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적당히 아무나 한 명 붙잡고 춤을 추면 나머지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이미 춤을 추기 시작한 앨런의 뒤쪽으로, 번호표를 뽑고 대기라도 하듯 영애들이 순서를 정해 일렬로 서 있는 것이 보여서였다.
이미 파트너를 정해 춤을 추고 있는 여인들 역시, 춤을 추는 와중에도 두 사람을 힐끔거리고 있었고.
‘이래선 끝이 없겠군.’
이대로 가다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여인들과 춤을 춰야 할지도 몰랐다.
그 생각에 러셀이 쓰게 웃었다.
원치 않는 여난(女難)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것일 테지. 그 상황에 러셀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의 시선이 러셀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단순히 노려보는 것을 떠나, 잡아 먹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따가운 시선.
‘왕녀 전하-!’
그 시선의 정체를 파악한 러셀이 속으로 기겁했다.
엔디미온의 왕녀, 헤카테 라트모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러셀을 주시하고 있었다.
.
.
“음.”
연회장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몸을 묻으며 헤카테가 침음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운 아미를 찌푸렸으며 몇 차례고 다리를 번갈아 가며 꼬기까지.
그런 와중에도 왕녀의 시선은 온통 일단의 무리에 집중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여인들의 무리 사이에 갇혀 있는 사내, 러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 모습에 그녀의 시녀, 시엘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오랫동안 헤카테를 모셔온 탓일까. 굳이 말로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직접 가셔서 춤을 청하시는 건 어떨는지요. 왕녀 전하.”
아무리 떠오르는 신성(新星)이라지만 왕녀가 직접 가서 춤을 청한다?
이는 대담을 넘어 파격적이기까지 한 행동이었다.
허나, 헤카테의 저돌적인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른 귀족들 역시 헤카테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을뿐더러, 당대의 국왕 역시 그깟 일로 왕녀를 책잡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고.
하지만, 잠시 후 들려온 헤카테의 대답은 조금 예상외였다.
“그럴까 했지만,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네.”
“전하답지 않네요.”
“음.”
조금 놀랐다는 듯 되묻자, 짧게 침음한 그녀가 말을 더했다.
“연하의 남자를 대할 때는 꼭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더군.”
“예?”
“연상이라면 능히 저돌적인 면모를 보여야 하나, 때론 조용히 기다려 주는 것 역시 좋은 덕목이라고 하던데.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런 연애론이라니. 예상치 못한 왕녀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것도 잠시.
“그런 말은 어디서…….”
시엘이 조심스럽게 물으려는 것 보다, 왕녀의 대답이 반 박자 더 빨랐다.
“네가 배게 밑에 보관해두었던 서책에서 읽었느니라. 제목이 분명 ‘여우 누이가 연하남을 사로잡는 법’이었던가-.”
“앗, 아앗…….
남몰래 숨겨두고 있던 은밀한 취미를 들킨 것만 같은 수치스러움.
새빨간 열기가 시엘의 얼굴을 타고 번져나갔다.
“저, 전하. 제…방에는 또 언제…….”
시엘이 더듬거리며 말했고 왕녀, 헤카테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뭐, 생각보다 재미있었을뿐더러, 꽤 유익하기까지 했느니라.”
쐐기를 박듯 한 마디를 보탰다.
“그리 좋은 것이 있었으면 함께 나눠봐야 할 것이 아닌가?”
여전히 이글거리는 시선을 러셀과 그를 둘러싼 여인들에게 고정한 채였다.
그때였다.
족히 십 수 명은 될 숫자로 몰려 있던 여인들이 갈라지며, 러셀이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은.
인(人)의 장벽을 해치고 나온 러셀이 일직선으로 똑바로 걸어왔다.
그 걸음이 향하는 곳의 끝에는 왕녀가 있었던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러셀의 모습이 퍽 만족스러운 듯, 헤카테의 입꼬리가 귀에 가 걸렸다.
시선을 러셀에게 고정한 채로 시엘에게 말했다.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느냐. 기다림 또한 연상의 여인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 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봐도 그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요.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던 그 말을 시엘이 가까스로 참아 넘겼다.
“왕녀 전하.”
그 사이 헤카테의 앞까지 다가온 러셀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청했다.
“괜찮다면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
.
. -. . ――.
경쾌한 음악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러셀과 헤카테가 손을 맞잡은 채 연회장 내부를 빙글빙글 돌았다.
왕국의 신성이라 할 수 있는 러셀과, 왕녀가 춤을 추는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왕녀가 입을 열었다.
곡의 삼분지 일(1/3)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러셀 경.”
“……?”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인데, 그렇지 않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에, 잠시 망설이던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러셀이 헤카테에게 춤을 청한 것은 단순히 상대를 누구로 해야 할지 망설여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것 역시 있었다.
“예.”
“그렇다면 묻게.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답해줄 터이니.”
박자에 따라 스텝을 밟으며, 몸을 회전시킨 헤카테가 눈웃음을 흘렸다.
여타의 여인들과 같이 드레스가 아닌, 기사의 정복과도 같은 새하얀 연미복을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이 아찔할 만큼 고혹적이다.
“음-.”
저도 모르게 귓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러셀이 머릿속으로 질문을 정리했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지난날, 저를 지켜보겠다 말씀하셨지요.”
“……?”
“왜 저인지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알아차리는 게 조금 늦긴 했지만, 러셀은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 무지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왕녀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역시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러셀이 알고 싶은 것은 표면적인 이유가 아닌, 그 내부에 깃들어 있는 속내였던바.
“흠.”
러셀의 질문에 왕녀, 헤카테가 침음했다.
나이에 비해 능력이 출중하니까.
부마(駙馬)로 들인다면 외척을 걱정할 필요 없이 왕권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 외에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들이 있긴 했다.
허나-.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5써클에 오를 만큼 똑똑한 사내지 않은가.’
그만한 두뇌를 지닌 사내가 저런 정치적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테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저와 같은 것들이 아닐 터.
‘진실 너머에 있는 진실이라.’
정치적인 견해와 입장을 걷어낸 후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속내.
‘그렇다면 응해주는 수밖에.’
그리 결정한 왕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 또한 경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네만.”
“……?”
“마음도 없는 사내에게 관심을 표하는 여인이 있다던가?”
보랏빛 눈동자가 러셀을 향한다. 한 점의 가식조차 깃들지 않은 시선이었다.
“혹여 그런 이가 있다 한들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아.”
단언하듯 그리 말한 왕녀가 발끝을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조금 키가 큰 러셀의 귓가에, 제 입술을 바짝 붙였다.
“다리아 경이 내 말을 자네에겐 전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오는 음성.
“-!?”
“경의 얼굴은 퍽 내 취향이라서 말일세.”
“윽-.”
얼마나 놀랐던지, 춤을 추던 러셀이 발끝을 삐끗하며 박자를 놓쳤다.
그 순간, 척.
헤카테의 손길이 러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이런, 아직 곡이 채 끝나지도 않았거늘.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긋났던 박자와 걸음을 제 자리에 맞춰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아카데미 시절 오래도록 1써클에 정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포기하지 않는 노력가라는 점이던가.
헤르만 장로를 비롯한 왕도의 마법사들로부터 전해 들은 품성과 인격에 관한 이런저런 평가라던가.
“-외견은 물론 내면까지. 어느 것 하나 크게 부족한 점이 없다는 점 역시 마음에 들더군.”
“…….”
어째서일까.
입장의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던 여러 귀족들의 시선 보다, 지금 왕녀의 눈빛과 목소리가 더욱 낯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대, 얼굴이 붉구나.”
빨갛게 달아오른 러셀의 얼굴을 확인하며 왕녀가 키득 웃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뿐이지, 그 답변까지 그대에게 강요치는 않아.”
마침, 연회장을 가득 채웠던 음악이 멎었다.
한 곡이 모두 끝난 것이다.
그렇기에 헤카테가 러셀의 손을 내려놓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허나 바라건대.”
이어 그녀가 남겨놓고 간 음성 한 마디가, 러셀의 귓전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부디 그대의 대답이 긍정적이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흐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는 시선이 한 쌍 있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