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3
013화
* * *
타호가 담을 넘어 들어가 대문을 열고 일행을 들였다.
한돌에게 시현 곁을 지키게 한 후, 다른 일행을 이끌고 저택을 둘러보러 나섰다.
저택에서 가장 크고 좋은 건물은 앞쪽에 있는 사랑채였다.
가운데에 커다란 주대청을 두고 좌우로 부부가 각각 쓰는 좌사랑과 우사랑이 있었다.
“일단 여기부터 청소해서 나리님을 모시자. 땅님들이 더 피난 오실 거니 최대한 깨끗하게 치워야 해.”
타호가 결정한 다음 모두에게 할 일을 분배했다.
청소가 가장 급했고, 우물이 말라 있어 물도 길어 놔야 했다. 할 일이 많으니 시간도 금방 갔다.
추선의 인도로 경재와 피난민 한 무리가 완씨 별택에 다다른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시현이 대문까지 달려가 모친을 맞았다.
“어머니!”
“시이야! 무사했구나!”
경재는 시현을 끌어안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다친 데는 없어 보였지만 백은색 관복 여기저기가 피로 물든 것이 사람을 치료하다 온 듯싶었다.
시현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어머니, 남운관은… 남운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해가 끝이 없다. 다들 사방으로 피난하고 있다.”
“아버지는….”
“총령께선 성한 하늘족 대열을 이끌고 북쪽으로 후퇴해 진을 쳤다. 나도 따라가려 했으나….”
경재가 피가 묻어 있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법술을 쓸 수 없어 상처를 싸매는 게 고작이니 반민 의원들만치밖에 도움이 안 되더구나. 총령께서 너를 찾아 후일을 의논하라 하셔서 이리로 왔다.”
경재는 선보와 부부 사이였으나 경재가 대의약사이자 대군의로서 자리를 갖고 있어 직위에선, 특히 전시 상황에선 선보의 아랫사람이었다.
위아래로 보나, 고집으로 보나 선보가 피난하지 않겠다 하면 경재가 말릴 길이 없었다.
“마님, 많이 지치셨습니다. 안으로 드셔서 잠시라도 몸을 누이소서.”
추선이 목 멘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경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쉬려 한들 쉬어지겠느냐? 뜨락에 불을 밝혀라. 파수 세울 이만 남기고 모두 주대청으로 가자.”
경재는 주대청 위에 높은 의자 둘을 놓도록 하고 시현과 함께 올라가 앉았다. 그 아래 뜨락에 사람들이 모여 섰다.
일행에는 땅인과 하늘인, 반민 시종이 섞여 있었다.
경인이 명했다.
“내가 부상자를 돌보느라 전체 상황을 알지 못하오. 시문께서도 마찬가지니 각자 아는 대로 보고하시오.”
대청 아래 사람들이 보고하기 시작했다.
“남운관 남쪽을 막았던 하늘족 대열은 태반이 흩어졌습니다.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늘족 대장과 머리들을 많이 잃어 대열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껏 쳐들어온 돌들은 거지반이 수원과 우물 위에 자리를 잡고 물막이돌이 되었습니다. 놈들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아무도 치울 생각을 못 합니다.”
“장군석만은 멈추지 않고 시 곳곳을 부수고 다니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사방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습니다. 근처의 광산촌이나 혜원읍성으로 가는 것 같은데, 그곳이라고 무사할지는….”
끝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비보에 모두 넋을 놓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십칠 열의 동요는 더 컸다.
시 남쪽은 먼외측이 방비하는 구역이었다. 남쪽 대열에 특히 피해가 컸다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호란은 추선을 향해 열심히 시선을 보냈다.
혹시 다른 대열 동료들이 어찌 되었는지 눈짓으로라도 알려줄까 싶어서였다.
추선은 평소처럼 아랫것들에겐 눈길 하나 안 주고 경인 나으리 뒤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납처럼 무거웠다.
호란의 앞에 섰던 내측 몫꾼이 타호에게 몸을 기울이더니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속삭였다.
“너네 아웅 대장이 전사했다.”
타호가 일순 휘청했다. 다른 십칠 열도 등줄기에 힘이 풀리는 것이 다 보였다.
호란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하란이는 어찌 되었을지 속이 지글지글 탔다.
경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선연했다.
“이곳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데려오도록 하자. 곧 종들이 식량을 가지고 도착할 터이니….”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누가 째지는 소리를 지르며 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경인 나리! 추선아!”
허둥지둥 달려들어 온 것은 황선이었다.
비단옷은 어디 갔는지 속적삼 차림에 머리와 수염은 산발이고 얼굴에는 멍까지 있었다.
“아이고! 큰일 났습니다! 큰일입니다!”
황선은 사람들을 헤치고 주대청 앞에 나아가 경재 앞에 꿇어앉았다.
“짐과 식량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놈들이 전부 가져갔습니다!”
경재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놈들이라니?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
“하늘족입니다! 하늘족 놈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아아!”
경재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추선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황선이 울먹이는 소리로 마저 고했다.
“오는 길에 하늘족 놈들이 떼로 나타나 호위를 죽이고 짐을 빼앗았습니다. 놈들이 지껄이기를 지금 시내 중심가가 불바다가 됐고, 하늘족이 나리님들 저택을 습격해서 식량과 재산을 빼앗고 있다고 합니다.”
경인이 부르짖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것들이 그리할 줄 알았어!”
대청 아래에 있던 땅인 한 사람이 황급히 황선에게 물었다.
“놈들이 여기 위치를 아느냐? 이곳까지 쳐들어올 셈이더냐?”
“그, 그것은….”
황선은 저도 모르는지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굴렸다. 경재 뒤에 있던 추선이 대청 아래로 내려와 물었다.
“오랍, 지도를 어디서 뜯었소?”
“응?”
“내가 지도를 봉하여 주면서 소로 유전에 다다를 때까지 뜯지 말라 당부하지 않았소! 혹시 지도를 미리 뜯어서 누구와 함께 보았소? 행선지가 어디라고 입 밖에 낸 일이 있소?”
“행선지는 애초에 누이가 안 알려주지 않았소…. 이런 데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황선이 입을 비쭉이며 저택을 둘러보았다.
추선은 경재와 시현 앞이라 차마 목소리는 높이지 못하고 얼굴만 벌게져 다그쳤다.
“지도를 언제 뜯었느냐 말이오!”
“…….”
황선이 대답을 못 하자 경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자의 눌언을 들어주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저택에 켜둔 불을 모조리 끄고 중정에 등 하나만 낮추어 달아라. 대문을 걸어 잠그고 중문은….”
말을 하던 경재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대문만 잠그도록 하여라.”
경재의 얼굴엔 좌절감이 가득했다.
어차피 하늘인이 작정하고 쳐들어온다면 문이니 담이니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시현이 타호에게 말했다.
“경인께서 명하신 바를 따른 후 저택의 사람을 모두 모아오도록 해라. 문지기까지 빠짐없이 불러라.”
곧 저택의 불이 모두 꺼졌다.
그사이 추선이 황선을 데리고 뒤꼍에 갔다가 돌아왔다. 황선의 얼굴에 멍이 늘어나 있었다.
“지도를 본 것은 세 놈인데, 두 놈은 습격을 받은 직후 죽었고 한 놈은 글이니 문서를 제대로 볼 줄 몰라 자세한 위치를 모를 것이라 합니다. 당장은 한시름을 놓았습니다.”
땅인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람이 모이자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인들이 땅에 엎드리려고 했으나 시현이 막았다.
“비상시니 잡다한 예를 폐하겠다. 이제부터 너희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고 말할 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시급할 때는 예를 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다.”
문이 폐례를 선언했으니 다른 땅인에 대한 예도 모두 폐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불만을 표할 엄두를 못 냈다.
시현이 이어 말했다.
“소란이 컸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았을 것이다. 남운관은 쑥대밭이 되었고 위와 아래가 뒤집혔다. 선무 총치총령과 그대들의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생사조차 모른다. 이러한 때에.”
시현은 말을 끊고 사람들에게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나는 너희를 지켜줄 힘이 없구나.”
“문이시여….”
내군 몇몇이 결국 꿇어 엎드렸다. 완씨 집 시종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어두웠지만 차분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각자 살길을 찾고자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먹기 전에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시현은 자신이 더그레 분지에 간 이유로부터 시작하여, 그곳에서 본 것 모두를 더함도 뺌도 없이 이야기했다.
모두 경악했지만 경재의 놀라움이 가장 컸다.
“사람이! 사람이 한 짓이란 말이냐 이 모든 변고가!”
“그자가 과연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법력을 없앤 것이 누군가의 술책이라면 되돌릴 방법도 필시 있을 것입니다.”
경재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유일한 희망이로구나. 유일한 희망이야….”
시현이 대청 아래 사람들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이제 나는 그 괴인을 쫓아 변고의 원인을 밝혀내고 세상을 원래로 되돌리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힘이 없고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너희 중에 나를 돕고자 하는 이가 있느냐?”
“따르겠습니다!”
“따르게 해주소서!”
“힘을 다하겠습니다!”
대청 앞의 땅인들이 먼저 엎드리고, 이미 무릎을 꿇고 있던 내군들도 땅에 머리를 댔다.
호란은 따라 엎드리면서 속으로 맹렬하게 자책했다.
일순 무리를 빠져 하란이를 찾으러 갈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은혜를 갚겠다 결심한 것이 엊그제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 시문을 저버려서 되겠는가?
더구나 시문께서 세상을 구하시겠다는데!
그러나 시문께 성심을 맹세하면서도 하란이 생각이 가슴에 칼처럼 박혀 왔다.
평시라면 호란이 몫을 다하는 한 무리가 가족을 지켜줄 터였다.
그러나 지금 남운관은 풍비박산이 났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호란은 남운관이 남매의 무리인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때 시현이 호란의 뒤쪽을 보며 말했다.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도 좋다. 다만 너희가 인정이 있다면 폭도와 함께 이곳으로 쳐들어오지만 말아다오.”
“용서하십시오, 문이시여.”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타호의 것이라 호란은 놀라 돌아보았다.
호란을 뺀 십칠 열 네 사람이 미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넷 다 떠날 모양이었다.
넷은 더 변명하지 않고 슬그머니 중문을 빠져나갔다.
당황한 호란은 자리를 뜬다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네 사람을 쫓아갔다.
“잠깐만! 타호! 채련아! 기다려 봐!”
호란은 저택을 나서는 넷을 붙잡았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 시문 님께서 변고를 바로잡으신다잖아! 대장의 복수도 해야지!”
“너야말로, 동생은 어떡할 건데?”
소앵이 날카롭게 말했다.
“정에 끌리지 말고 봐라. 저 무리가 건사될 무리냐? 땅님들이 다 몫을 못 하게 됐는데 식량은 적고 적은 많지. 나는 건사할 가족이 있어. 평소 우릴 버러지같이 보던 땅님들 지키자고 가족을 내버려둘 순 없다.”
호란은 말문이 막혔다.
채련은 한술 더 떠서 호란까지 데려가려 들었다.
“그러지 말고 너도 와라. 알아? 안에 남은 하늘인은 다 내군 중에서도 쭉정이들이야. 그동안 가추선이 가황선이 믿고 하도 못되게 놀아서 어디 갈 데도 없어진 놈들이라고. 하지만 호란이 넌 다르잖아?”
타호도 말했다.
“이런 위기엔 몫 제대로 하는 꾼들끼리 뭉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랑 같이 가서 무리를 만들자. 가족도 지키고!”
호란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대답이 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호란은 조그맣게 말했다.
“난 시문께 은혜를 입었어…. 이런 때 시문 님을 저버릴 순 없어.”
“동생은? 가족에 대한 책임은 저버릴 셈이야?”
“…….”
호란은 그냥 울 것만 같았다.
그때 한돌이 입을 열었다.
“내가 호란과 같이 남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