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 * *
단과 가족의 삶이 부서진 데에는 너무 많은 이유가 얽혀 있어서, 단은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문제의 시작이 어디였는지는 안다.
근본적인 문제는 단이 배우는 걸 잘하고 좋아하는 아이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이 나고 자란 공방 거리는 단에게 최고이자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곳에서 단은 부모가 가르쳐준 설계와 주물 외에도 온갖 기술을 다 건드리고 다녔다. 그는 물질에 형태를 부여하고 기능을 갖게 하는 모든 작업을 좋아했다.
동네 장인들은 걸음마 할 때부터 공방 구경을 오던 단에게 마냥 물렀다. 몇 주 일손 돕는 대가로, 가끔은 그냥 일을 가르쳐주었다. 대뜸 이것저것 시켜 보고 빨리 배우더라며 이야깃거리로 삼는 게 은퇴를 앞둔 늙은 장인들의 사소한 도락이었다.
단은 자랄수록 아는 것이 많아졌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고 호기심과 탐구심이 끝없이 커졌다.
그것은 반민으로 태어난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적절한 특성이 아니었다.
최소한 대운관에서는 결코 미덕이 아니었다.
목공, 야장, 연마, 세공… 기술이란 이름이 붙은 거면 아무거나 다 찌르고 다니던 단이 유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열다섯 살 때였다.
이유도 그야말로 시시했다. 안경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단에게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그 정도 이유면 충분했다.
유리도 어렵지는 않았는데 배우는 데 벽이 하나 있었다. 대운관에서 큰 판유리 만드는 기술은 관속 유리 장인들만 갖고 있었다.
단은 생각했다. 저걸 배우려면 관속 장인으로 들어가야 하나?
그럼 들어가면 되지, 뭐.
단은 열다섯 살까지 손 써서 일하는 데서 거절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세상에 무서운 것도 없었다.
관 유리 공방에서 일 도울 보조 구한다는 공고를 봤다. 아버지 허락만 받고 바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채용이 되었다.
지원은 유리 공방에 했는데, 단에게 주물 기술이 있는 걸 안 장인들은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하더니 단을 주물장으로 보냈다.
단은 처음에는 실망했다. 하지만 관 공방의 주물은 아버지 공방과 다른 데가 있어서 그거대로 재미있었다.
단이 일하는 걸 본 장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했다. 저 나이에 이렇게 잘하니 금방 보조를 벗겠다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줄만 잘 닿으면 군기감도 갈 수 있겠다는 말도 나왔다.
그것도 괜찮았다. 군기감은 단의 누나 권영이 일하는 곳이었다. 누나와 같이 일할 것이 기대되었다.
집에 와서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지고, 주물 장인들 사이에서 저를 본 누나가 새파래졌을 때도 뭐가 잘못된 걸 몰랐다.
관속 장인은 민간 공방하고는 또 다른 세계였다.
기술직이라도 관직을 얻는 것은 반민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선에 가까운 위치였고 나름의 정치가 치열했다. 단은 상상도 못 했지만 어머니에게도 적이 많았다.
단이 관에 얼굴을 들이민 순간부터 공기서가 들끓었다.
문정이 주무직에 오르더니 위로 치고 올라가려고 작정을 했다. 딸만이 아니라 아들까지 군기감에 넣어서 세를 키우려고 한다. 아들이 그렇게 숫자에 밝다던데, 공기서 장부나 회계를 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아무 사람이 아무 말을 했다. 그게 다 사실인 양 되었다.
단이 모르는 곳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고 단이 알기도 전에 전부 끝났다.
어느새 어머니가 관 장인을 총괄하는 공기서의 주무직에서 내려와 설계와는 관련도 없는 사기장 찰직으로 돌려졌다. 군기감에서 일 잘 하고 있던 누나가 화기도감으로 이동됐다. 단 역시 주물장 일을 그만두고 화기도감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까지도 단은 그게 다 자기하고 무슨 상관인지 몰랐다. 누나와 같은 데서 일할 수 있어서 좋다고만 생각했다.
화기도감 발령이 이름만 거창하지 해고에 가까운 좌천이란 걸 누나의 분노에 직면하고서야 알았다.
이동 명령을 받고 간 화기도감 관사에서, 누나 영은 단을 보자마자 화를 터뜨렸다.
“너는 어차피 아버지 공방 이어받을 거였잖아! 왜 관 장인직 욕심까지 내서 나까지 이 꼴을 만들어!”
다른 장인들이 출근도 안 해서 텅 빈 화기도감 관사에 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단은 억울한 기색을 숨기며 어깨를 움츠렸다.
“욕심이 아니라. 난 그냥 판유리 배우려고….”
“유리는 무슨 유리! 군기감 간다고 했다며!”
단은 흠칫했다. 분명 다른 부서 장인이 지나가다 들러서 군기감 가는 얘길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단은 아무 생각 없이 가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그거 한마디로?
단은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대체 뭔데. 단이 넌 무기 만드는 거 싫다고 전부터 그랬잖아. 군기감 소리는 왜 한 건데?”
영의 목소리가 울 것 같이 떨렸다. 단은 조금씩 상황을 실감했다.
뭐가 정말 잘못되긴 잘못됐구나.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
하지만 대체 뭐를? 뭘 잘못한 건데?
단은 어깨를 움츠리며 누나를 올려다보려고 했다. 그것조차 잘 안 됐다.
어릴 때 항상 손을 붙잡고 올려다보며 쫓아다녔던 누나가 어느새 자기보다 키가 작았다.
누나는 관속 장인이 된 후 집에도 잘 안 들어올 정도로 뼈를 갈아가며 일했다. 줄 잘 서서 군기감 들어갔으니 승진만 남았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랬던 누나가 지금은 절망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누나랑 같이 일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다 소리는 도저히 안 나왔다.
단은 조심스럽게 다른 말을 했다.
“다시… 군기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여기서 열심히 일하면 그렇게 될 거야.”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은 다시 말했다.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잖아. 아버지가 항상 그랬잖아. 장인은 실력이 다라고.”
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 같은 재능이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
그가 단을 보지 않으려는 듯 아예 몸을 돌렸다.
“그래. 너라면 어디 가서 처박혀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끌어올려 주겠지. 근데 나는 아니야. 나는 보통 사람이야. 한 번 미끄러지면 다시 못 올라가.”
“그런 게 어딨어….”
“평범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 너는 평생 몰라.”
아홉 살이나 많은 누나가 저를 그렇게 질투하고 있었는 줄 단은 그때야 처음 알았다. 세상에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다.
화기도감에는 일이라 할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영과 단은 화기도감을 그만두지도 못했다. 좌천되었다고 바로 그만두면 어머니가 더 곤란해진다는 이유였다.
어쨌든 남매는 풀 죽는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퍼져 있는 성격이 못 되었다.
영은 다른 부서 일을 돕고 끊어진 줄을 이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단은 방치된 화기도감의 청소를 시작했다.
둘 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관사와 창고를 쓸고 닦고 정리하면서 단은 실물 화포를 처음으로 보았다.
관리가 안 되어 녹슬고, 누가 철물을 많이 빼돌렸는지 장부와 하나도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있는 것은 있었다.
보다 보니 관심이 갔다. 정리하는 김에 문서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서는 봉인되어 단이 볼 수 없도록 총령부의 관리하에 있었다.
명색이 화기도감이면서 관련 서적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문서라곤 화약과 화기가 얼마나 쓸모없고 위험한지 폄하하는 내용뿐이었다.
제일 심한 건 화약 제조법이었다. 거기 써진 것만 보고 화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인은 아마 모래 수렁에서 물을 뽑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화약이 쓸모없다 말하는 문서는 사고로 피해가 막대했다 말하는 문서와 말이 모순되었다. 모호하고 뻔한 말밖에 없는 문서가 누구의 눈을 피하듯 책장 뒤편 깊은 곳에 숨겨져 있곤 했다.
정리를 해가는 사이 천천히 윤곽이 드러났다.
실패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성공하는 방법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고나 피해 보고처럼 보이는 문서들은 엄격하게 계산된 실험 기록이었다. 사방에 흩어진 기록을 모아놓고 비교해 보면 어떻게 폭발을 통제하는지, 어떤 조건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화약을 가장 통렬하게 비판한 보고서 하나는 더 발전된 제조법을 숨기고 있었다.
단의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기록 속의 화포는 돌을 깨고 성벽을 쪼개고 하늘을 진동시켰다.
땅님의 마법이 아니라도, 하늘인의 주먹이 아니라도, 온전히 사람의 손과 기술로 만들어낸 물건으로 이만한 일이 가능했다. 이거라면 세상의 골칫거리인 거석도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석을 해치우는 무기를 만들면 땅 위에 더 없는 큰 공이다.
만약에 누나랑 같이 이걸 해내면 누나가 군기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더 좋은 데도 갈 것이다.
해낸다면 자기 잘못을 만회할 수 있었다.
단은 희망에 찼다. 화기도감에 와서 풀 죽은 게 언제였냐는 듯 열의와 자신감이 솟았다.
할 수 있다. 자기라면 할 수 있다.
아버지 말은 항상 맞다. 끈기를 갖고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는 화포 연구를 정리하는 데 푹 빠져들었다.
이전에 근무한 장인들이 왜 기록을 여기저기 흩어놨을까?
왜 보고 내용을 숨기려고 했을까?
왜 제조법을 암호처럼 적어놨을까?
조금만 생각해봤으면 알 수 있는 일인데 그때 단은 어찌나 멍청했는지 제가 무슨 보물찾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 * *
일이 윤곽을 갖추어가자 단은 제일 먼저 누나인 영에게 이야기했다.
영은 처음에는 미심쩍어했지만 단이 정리한 자료들을 보고는 표정이 바뀌었다.
밤을 꼬박 새어가며 내용을 검토한 영이 다음날 도감에 온 단에게 말했다.
“될 거 같아. 아직 내용도 더 살펴보고, 윗사람들하고 이야기도 해봐야겠지만…. 잘하면 될 거 같아.”
“그렇지? 엄마 아빠한테도 이야기할까?”
단이 신이 나서 눈을 빛냈다. 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 또 엄마 끌어들이지 마. 지금 다음 해 공기서 예산 분배 얘기 나오는 중이란 말이야. 네가 벌려놓은 이거, 돈이 어머어마하게 드는 일이야.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또 정치 돼.”
“도와달란 게 아니라, 그냥….”
“자랑도 하면 안 돼.”
“누가 자랑한대?”
단이 얼굴을 빨갛게 했다. 영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누나가 좀 더 보고, 때 봐서 말 통할 사람들한테 얘기 꺼내 볼게. 그동안 넌 가만히 있어.”
“알았어.”
단은 누나의 반응이 좋은 데 만족해서 얼른 약속했다.
하지만 영도 단도 간과했던 점이 단은 가만히 있는 걸 잘 못 했다.
이젠 쓸고 닦을 데도 없는 도감에 앉아있으려니 금방 딴생각이 났다.
그래도 명색이 장인인데 문서랍시고 종이쪼가리만 가지고 얘기해서 말이 되나, 모형이라도 실물 하나는 있어야지.
사실은 그간 문서만 들쑤시면서 내내 손이 근질거렸다. 화포까진 무리라도 소형 총통 정도는 자기가 비슷하게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나의 ‘때를 봐서’가 길어지는 동안 단은 혼자서 주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관에서는 위의 명이 없으면 흙인형 하나도 맘대로 빚을 수 없었지만 어차피 재료는 집에 많았다.
그동안 본 자료들에서 화포 재료는 구리와 주석을 섞은 청동이 최선이라고 했다. 하지만 청동은 너무 비쌌다.
좋은 쇠를 쓰고 주조를 잘 하면 무쇠로도 된다는 얘기도 봤다. 그것도 집에 많았다.
이거다 싶은 주형이 완성되었을 때 단은 아버지의 공방에 갔다.
공방에 들어오도록 허락한 후로 아버지는 단이 쇳물을 써서 뭘 만들든 뭐라 한 적이 없었다. 다치지만 않으면 재료를 망쳐도 봐주었다.
직공들도 다 알아서 단이 정체 모를 주형에 멋대로 쇠를 붓고 있어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쇠가 다 굳은 뒤 단이 주형을 가져가려는데 아버지의 큰 키가 불쑥 공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지난주에 뒷목을 삐끗해서 휴식 중이었다. 의원이 두 주간 일은 물론 가마 들여다보는 것까지 엄금했는데도 뭐가 안 참아지는지 괜히 공방에 들락거렸다.
“단이 여기 있었구나. 뭐 만들었어?”
철이 짧게 삐져나온 흰 수염을 긁으며 물었다.
아버지는 금발이었지만 단보다도 머리색이 옅었다. 흰머리가 늘기 시작하니까 금방 머리칼과 수염이 백발처럼 되었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단이 주형을 들고 나가려고 하자 철이 투덜거렸다.
“이놈. 오랜만에 공방에 코 들이밀더니 저 만들 것만 만들고 쏙 빠져나가니? 이리 와서 뭐 귀여운 짓이라도 좀 해 봐라. 요새 집안 분위기도 영 별로고, 아버지 쓸쓸하다.”
철이 공방 가운데 의자에 걸터앉아 제 무릎을 두드렸다.
단은 질색을 하고 멀찍이로 물러났다.
“아 싫어요! 다 늙어서 왜 그래 진짜.”
“이 자식. 늙었으니까 그런다, 왜? 귀여운 짓 안 볼 거면 늦둥이를 뭐하러 낳아!”
철이 짐짓 화난 척 눈을 부라렸다.
“내가, 너 밤낮으로 일해서 남 좋은 일 시키는 꼴이나 보려고 낳은 줄 알아?”
“일해서 돈 많이 벌면 나도 좋고 아빠도 좋지. 왜 남 좋은 일이야?”
“안 그래. 지나고 보니까 안 그래.”
철이 혀를 찼다.
“에잉. 괜히 기술을 일찍 가르쳤어. 놀러 다니게 두면 쌩쌩 도는 머리로 사고 칠까 봐 그런 건데. 그냥 놀라고 놔둘걸. 애가 사고 좀 치면 어때서.”
동네 장인들이 다 치를 떠는 일벌레였던 아버지가 작년부터는 부쩍 이런 소릴 했다. 단은 일하는 게 제일 재미있었지만 아버지가 이러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가 해죽 웃으며 말했다.
“놀러 다닌다고 뭐, 아빠랑 노나? 친구들이랑 놀지.”
“아이고 저 상통. 아이고 저 얌통머리.”
공방을 빠져나가는 단의 뒤통수에 대고 철이 욕을 했다. 직공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