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 * *
“걔 아무래도… 그, 철이 아들놈 아녀?”
“철이? 철이가 누구야?”
“아이고, 목소리 좀 줄여. 왜 예전에, 장오거리에서 주물공방 하던 권철이 있잖아…. 왜 그….”
여자는 주위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바싹 줄였다. 태도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호란은 시선을 다른 데 두고 귀를 세웠다. 말소리가 작고 띄엄띄엄해서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크게 놀랐다.
“어어?”
무심코 큰 소리를 냈던 남자가 황급히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들은, 그때 안 죽었어?”
여자가 소곤소곤 말했다.
“안 죽었지. 가족이 다 죽고 친척이니 직공들까지 전부 잡혀들어갔는데 딱 걔 하나 못 잡았어. 왜 기억 안 나? 수배령이 3년은 붙어있었는데.”
“아…. 이제 생각나. 권철이 아들애가 그 일 잘하고 똘똘하기로 동네에 소문났던 애잖아. 그 권… 권… 권단이.”
“그래. 권단이.”
탁자에 잠시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남자가 말했다.
“에이…. 아니겠지. 걔가 그때 고작, 열다섯인가 열여섯인가 안 그랬나? 도망가서 살았을 리도 없고, 살았어도 여길 어떻게 돌아와?”
“글쎄 걔가 맞다니까는. 크니까 더 잘 알겠네. 턱이랑 입 주위가 지 애비 젊었을 때랑 똑같은데.”
듣고만 있던 제일 나이든 여자가 낮지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에 정말 걔가 맞으면, 그런 얘기 하면 안 되지.”
처음 말 꺼낸 여자가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곧바로 말을 뒤집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하니까 아닐지도 모르겠어. 별로 안 닮은 거 같아.”
“그래. 아닐 거야.”
“가자. 우리 셋 다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세 사람은 음식이 남았는데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을 갹출해서 서둘러 계산을 하고는 객주를 나가 버렸다.
곧 호란에게도 점원이 주문한 음식을 담아 주었다.
호란은 방금 들은 이야기로 무엇을 섣불리 넘겨짚지 않으려고 애쓰며 위층으로 올라왔다.
단은 객실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지치고 퀭한 얼굴에 눈빛만 뚜렷했다.
음식을 받으려고 일어난 그가 호란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물었다.
“왜 그래?”
호란은 방문을 꼭 닫고 문에서 떨어졌다. 방 안쪽으로 들어온 뒤에야 호란이 주저하며 물었다.
“혹시, 혹시 단 성이… 권씨야?”
단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누가 날 알아봤어?”
“1층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주물공방 하던 권철 아들이라고….”
“제기랄. 장소 옮기자.”
단은 서둘러 두루마기를 걸치고 짐을 다시 챙겼다. 호란이 말했다.
“다들 못 본 걸로 하자고 했어.”
“그래도 옮겨야 돼. 말은 그렇게 해도 누가 찌를지 몰라.”
단은 무척 급한 기색이었지만 호란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야? 여기가 단이 살던 고향이야?”
“나한텐 고향 같은 거 없어.”
“단 가족들이 다 죽었다는 게 정말이야?”
“그 얘기, 지금 안 하면 안 될까…. 나리님 일이 먼저잖아.”
단은 초조한 낯빛으로 호란을 지나쳐 나가려고 했다.
호란의 속에서 무엇이 차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단을 가로막듯이 하며 물었다.
“누구야? 누가 그랬어?”
단은 우뚝 섰다. 심장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누가 그랬는가. 그거야말로 단이 수년을 매달린 질문이었다.
매달리고 또 매달려서 마지막에 도달한 답이 위교연이었다.
당연히 교연이다. 달리 누구겠는가.
온 세상이 합심하여 그랬노라는 답만은 도저히 인정할 수도 견딜 수도 없으니 결국에는 교연이었다.
그가 얼굴을 쓸고 방문을 열며 말했다.
“장소 옮기자. 일단 옮기고…. 그다음에 얘기하자.”
호란은 잠자코 단의 뒤를 따랐다.
거리로 나온 단은 잠시 고민했지만 곧 빠르게 길을 잡았다.
객주거리 동쪽은 반민 거주지였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흙집과 널집이 어깨를 맞대고 촘촘히 늘어섰다.
더 가니 반민 거주지 안에서도 꽤 버젓한 집들이 선 동네가 나왔다.
이쪽에 사는 사람들은 제법 재산이 있는지 길도 한결 넓고 집도 컸다. 지붕에는 기와가 올라가고 크거나 작거나 다 뜨락이 딸려 있었다.
하지만 걸으면서 호란은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다른 관성의 반민 동네는 담이 없거나 있어도 나지막한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집집마다 호란의 키를 넘도록 담이 높았다. 서로 뜨락 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단은 호란을 이끌고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소박하지만 깔끔한 기와집이었다.
호란은 마당에 들어서서 단이 가르쳐준 대로 물었다.
“여기가 방직공 윤한네 집이야?”
대청에 앉아 돌배기 아기를 어르던 여자가 이쪽을 보았다. 처음 보는 하늘인의 방문에 놀라는 기색이었다.
여자가 반려를 부르는 사이 호란은 일단 돌담 밖으로 나갔다.
곧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주춤주춤 밖으로 나왔다.
“절 찾으셨습니까, 나리….”
남자는 괜스레 두려운 기색이었다.
돌담에 바짝 붙어 있던 단이 몸을 세우며 호란 곁으로 나왔다.
“한이 형. 나 알아보겠어요?”
남자의 얼굴이 죽은 사람을 본 것처럼 굳어졌다.
그가 몇 걸음 물러섰다가 단의 얼굴을 보려는 것처럼 다시 한 걸음을 디뎠다.
한이라 불린 남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설마, 단이… 단이냐?”
단이 피식 웃었다.
“아, 정말 다들 알아보잖아. 큰일 났네. 5년이나 됐는데. 그렇게 얼굴이 안 변했나.”
“네가… 네가 어떻게…. 여긴 왜….”
한이 더듬대는데 단이 입구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길에 이렇게 세워둘 겁니까? 남들 눈에 띄면 서로 곤란할 건데.”
한의 낯빛이 변했다. 그는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입구를 가로막았다.
“안 된다. 우리 집엔 못 들여….”
“그래요? 그럼 건이네 갈까요? 가는 길이 다 아는 동네라, 누가 또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단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와서 내가 잡히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려나요. 전번엔 어떻게 도망갔는지부터 묻지 않으려나.”
한은 파르르 몸을 떨더니 뛰듯이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단은 호란에게 들어가자 턱짓을 하고는 제가 먼저 뒤를 따랐다.
한의 집은 뒷마당이 넓었다. 그가 뒤꼍에 선 큰 광의 문을 열고 둘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어서, 어서….”
“또 광이야?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요.”
단이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느긋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면 한은 무척 서두르며 단과 호란의 뒤로 따라 들어와 문부터 닫아걸었다.
벽에 걸린 유등을 켜자마자 그가 단에게 따지듯 달려들었다.
“절대 돌아오면 안 된댔지! 누굴 죽이려고 여길 도로 왔어! 네가,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아? 우리가 그때 어떻게 너를 피신시켰는데….”
단이 광 안을 둘러보며 뚱하게 말했다.
“어떻게는요. 빚까지 붙여서 제일 악질 같은 상단 놈한테 떠넘겼지. 일 참 편하게 하십디다. 그 급박하던 차에 돈 아낄 정신까지 있고.”
한이 움찔했다. 그가 한풀 꺾여 말했다.
“그건, 나도 급전이 안 나와서…. 어쨌든 그래서 너는 산 거 아니야!”
“예. 형 덕택에 저 혼자 살았죠. 그래서 내가 형을 못 잊고 있다가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단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에게서 뭔가를 느낀 한이 얼어붙었다.
단이 큰 키를 한에게 기울였다. 어둠 속에서 유등 빛을 받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단이 물었다.
“한이 형. 그동안, 5년 동안, 형은 내 생각 해본 적 없었어요? 궁금하지 않았어요? 내가 정말 살긴 했을까? 살았으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렇게 사는 걸, 정말로 내가 은혜라고 생각할까?”
단의 입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음성은 어둡고 험한 기색을 띠었다.
한은 낯빛이 새파래져 꼼짝도 못 했다. 호란도 놀라 입을 열 수 없었다.
한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우린 그땐 그 수밖엔 없었어. 그래도 난 너를 살리려고 그런 거야. 도와주려고 그런 거야….”
단이 몸을 뺐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네. 저도 알죠. 그러니까 이왕 돕는 거 이번에도 좀 도와주세요. 괜찮죠? 형은 내 매형 될 뻔했던 사람이잖아.”
“뭘…. 내가 어떻게….”
“별거 없어요. 몇 가지 소식 좀 알아봐 주시고 때 되면 나랑 여기 하늘인 나리 밥술이나 챙겨주세요. 음식 안 가리니 그거는 걱정 말고.”
단은 낮은 목소리로 한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다. 한은 난색을 표하고 우는 소리를 했지만 단은 그가 물러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한이 나가려고 할 때 단이 그 뒤에 대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 주세요, 한이 형. 수 틀어졌을 때 내 입에서 누구 이름부터 나올지 생각하시구요. 내가 아무 얘기 막 가져다 붙이는 재주 있는 거, 형은 여러 번 봐서 알죠?”
한은 귀신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광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단은 구석의 흙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이미 살기등등하던 기색은 간데없이 평소의 단이었다.
하지만 호란은 단에게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호란이 계속 서 있자 단이 한쪽을 가리켰다.
“왜 그러고 있어? 앉아. 정보 들어올 때까지는 할 일도 없어. 지금 쉬어 둬.”
호란은 단이 가리킨 쪽에 앉으며 물었다.
“저, 윤한이란 사람은….”
“관에 속한 방직공이야. 저 일하는 데도 있고 부모한테도 연줄이 좀 있으니까 당장 필요한 건 알아다 줄 수 있을 거야.”
“그게 아니라… 단이랑은 무슨 사이야?”
“저 사람 말하는 거 안 들었어? 나를 살려준 사람이야.”
단이 가벼운 투로 말했다. 하지만 단의 경우에 은인이란 말은 걸러 들어야 했다.
호란이 물었다.
“양곤호처럼?”
단이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방식이 좀 그렇긴 했지만. 저 사람도 수단이 얕아서 그런 거지 나쁜 맘으로 그런 게 아냐. 나한텐 진짜로 은인이 맞아.”
“그럼 왜….”
호란은 주저했다. 왜 그렇게 원수 대하듯이 협박했냐는 말까진 안 나왔다.
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대운관 놈들한텐 인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겁주는 게 확실하니까. 효율적으로 움직여야지. 나리님 생사도 모르는데 우리 지금 여유 없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호란은 단에게서 낯선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대운관에 온 이후, 어쩌면 그 전부터, 단을 둘러싼 벽은 점점 두꺼워지고만 있었다. 그리고 호란은 이제야 그 실마리를 조금 잡은 참이었다.
호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 대운관이 단의 고향인 거지? 내내 행동이 이상했던 것도, 대운관 사람은 아무도 만나기 싫어했던 것도, 다 그래서였지?”
단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맞아.”
“여행 초반에… 단이 가고 싶지만 혼자서는 못 간다고 했던 장소도, 대운관이었던 거지?”
“맞아.”
“그리고, 단의 가족이….”
“근데 그 얘기, 꼭 할 필요가 있을까?”
단은 호란을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우리가 대운관에 돌아온 건 나리님을 구하기 위해서잖아. 말했지만 우리한텐 시간도 없고 여력도 없어. 위교연이 나리님을 계속 살려둔다는 보장도 없고. 공연히 다른 일에 신경을 분산시키는 게….”
“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연히 지금은 시문 님 걱정이 제일 크지만, 그렇다고 내가 단한테 신경을 안 쓸 거라고 생각해?”
호란이 단의 곁에 바짝 다가붙으며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빤한 시선이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진짜로…. 차라리 다른 이야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호란을 피해 헤매던 단의 시선이 광 한구석에 가 닿았다. 단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미소를 짓고 그 쪽을 가리켰다.
“저기 봐. 저기 구멍 뚫린 거 보여? 옛날에 나랑 내 친구랑, 여기 숨어서 밤 까먹으면서, 저 구멍으로 한이 형이랑 우리 누나랑 연애하는 거 훔쳐보고 그랬거든.
할 거면 이야기는 많아. 이것저것 좋은 추억이 많으니까. 나는 대운관에….”
단은 말을 멈추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9. 점화
단은 제가 언제부터 기술을 알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단의 부모는 둘 다 대운관에서 손꼽히는 기술자였다.
아버지 권철은 실력 좋기로 대운관 바깥까지 소문난 주물장이었고, 어머니 문정은 관 공조서에 속한 설계장이었다.
날 때부터 주위에 항상 도구니 공구니가 널려 있었다.
무엇을 언제 처음 쥐었는지야 당연히 모른다.
기억 안 날 시절에도 항상 뭔가를 그리고 빚고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별시계 설계를 배우는 누나 옆에 끼어 앉아서 엉터리로 천구도를 따라 그리던 것은 기억한다.
쇳물 위험하다고 절대 공방에 안 들여보내 주는 아버지를 뚫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썼던 것도 기억한다.
가지가지 주형을 마흔 개 넘게 빚고,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도 못하게 공방 앞뜰에 늘어놓고 시위했던 것.
결국 손을 든 아버지가 공방 문을 열어주었을 때, 얼굴에 확 끼치는 가마의 열기를 받으며 세상이 열린 듯한 기분을 맛봤던 것도 기억한다.
그런 것이 다 행복이라면, 단은 행복이 무엇인지는 기억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