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36
236
* * * *
목욕탕을 성공시킬 방법.
양선구는 그 방법이 무척 궁금했으나, 강석은 부드럽게 대화를 일축했다. 양선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수염을 쓸었다. 강석이 입을 다물기로 결정한 이상, 유도질문은 시간낭비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말하지 않을 테지.
‘셰익스피어가 말이 적은 남자가 가장 훌륭한 남자라고 했던감.’
아마 셰익스피어가 강석을 본다면 훌륭하다 박수쳐주었을 거다. 강석의 말이 길어질 때는 오로지 작품과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뿐이니까. 뭐. 상관없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양선구는 강석을 따라 눈을 감았다.
강석은 금같이 침묵하는 것과 별개로, 언제나 타이밍을 잘 맞췄다. 알맞은 때가 되면 그는 입을 열어 모든 것을 설명해줄 터였다.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양선구는 벌써부터 궁금해서 근질거리는 마음을 무시하며 두손을 명치 위에 올려놓았다. 베네치아로 가는 길엔 직항편이 없다. 긴 여정이 될 테니 잠이 올 때 자두는 게 상책이었다.
잠이나 자자.
* * * *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는 환승을 포함해서 16시간에서 17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다만 베네치아는 한국보다 7시간 정도가 더 느렸다. 그래서 하루가 지났지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있었다. 어쩌다보니 아직도 9월 26일이란 소리였다.
양선구는 이 피곤한 셈법보다도 더 피곤한 날씨상황에 미간을 좁혔다. 새까만 밤. 잠을 자야만 할 것 같았다. 실컷 자고 나왔으나, 아직도 밤이었다. 으음. 양선구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위탁수하물을 찾은 뒤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륵드륵 거리는 소리가 양선구를 따라왔다.
‘잠을 잤는데도 피곤하구나.’
나이가 들수록 시차피로에 더 취약하다더니 저가 딱 그 꼴이었다.
물론, 같은 또래에 비해서는 신체회복력이 뛰어난 편이라 피로도가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었으나···양선구가 고개를 돌려 강석을 바라보았다.
강석은 아늑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쌩쌩해보였다. 젊어서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팔팔함. 시차적응이라는 것이 아예 필요없는 사람처럼 구는 강석이 양선구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잠을 평소에 충분하게 자지 않아서 비행기에서 몰아자는 게 오히려 체력보충으로 이어지는 건감?’
그게 뭐든 부러울 따름이었다.
양선구는 수염을 쓱쓱 쓸면서 강석을 따라 걸었다.
강석은 뒤에서 양선구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앞서 걸었다.
입국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강석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 사람을 훑었다. 베네치아로 출발한다고 했더니 이사벨라 리날디가 마중을 나오겠다고 연락을 해온 참이었다.
‘이 밤에 나오겠다니.’
이사벨라 리날디가 혼자 공항 입국장을 찾을 일은 없겠지만 강석은 난감함에 뒷목을 긁적였다. 길이 엇갈리는 없어야만 한다. 강석은 날카롭게 이리저리 더 시선을 움직였다.
4번 게이트를 통과하자 입국장에는 피켓문구를 든 외국인들로 바글바글 정신이 없어보였다. 오밤 중에도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비공개 입국 아니었는감?”
양선구가 강석의 옆으로 와 속닥거렸다.
“절 보러 온 게 아닐걸요.”
강석은 일정을 외부에 유출하고 다니는 걸 즐기지 않는다.긴 이동시간으로 줄어든 작업시간을 확보해야하는 강석으로선, 그런 화려한 입국을 즐기지 않는다.
아슈라 왕자 때야 안전이나 국빈 입국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알려야 했다지만 강석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런 늦은 시각에 입국장까지 찾아와주시는 기자들과 팬분들에게는 감사했지만, 이동시간이 늘어나는 건 강석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사벨라 리날디에게도 그런 강석의 입장은 전달해놓은 참이었다. 또 뭐든 준비해드리겠다는 호의적인 리날디에게 답장으로 강석이 건넨 것은 작업실 확보였다. 작업실 확보. 두번, 세번에 걸쳐서 입장을 전달해놓은 차이니 이사벨라 리날디가 강석과 계속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동네방네 소문냈을 리가 없다.
“그런감?”
양선구가 화려한 피켓을 들고 이쪽을 게슴츠레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가봐도 모자를 눌러쓴 강석의 얼굴을 엿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왔다!)”
“(여기 봐주세요!)”
“꺄아아아아!”
“(보고 싶었어!)”
시끄러운 함성소리가 강석의 뒤쪽에 걸어오는 인물에게로 쏟아졌다. 강석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화려하게 생긴 이목구비의 인물이었다. 연예인인가보군.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강석이 고개를 바로했다.
그리고 한쪽으로 쏠린 이목소겡 덩그러니 남은 두어개 중,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한국의 미켈란젤로 환영합니다]짧은 한국말이 삐뚤빼뚤 적혀져 있는 피켓을 향해 입꼬리 한쪽을 비죽인 강석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연예인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양선구에게 피켓을 향해 턱짓을 해보였다.
“저기 있네요.”
“으음!”
다갈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지닌 단아한 인상의 여인이 피켓을 흔들었다. 여기에서 혹시라도 강석이라고 외쳤을 때 주목을 받을까 주의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리날디가의 아가씨가 꽤 센스가 있어보이는구나.”
“그러게요.”
원래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곱게 자란 소녀다운 기분을 맘껏 터트리는 여자였는데, 강석이 베네치아를 떠나있는 동안 리날디는 많은 것을 배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조금 빠르게 강석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리날디 주변에 서있는 장정들이었다. 인상착의를 가볍게 했지만 그 옷들 사이로 느껴지는 근육의 짜임새와 몸이 가진 윤곽들이 그들이 경호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역시 황금의 리날디.
리날디가의 아가씨가 직접 마중나왔다는 것보다 그녀가 데려온 경호원들이 더욱 든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할 것 같았다.
강석은 걸음을 조금 빠르게 이사벨라 쪽으로 다가갔다.
귓가에 바로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가까워져셔야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강석. 오랜만이예요.)”
“(오랜만이오.)”
경호원들의 시선이 잠깐 강석에게 쏠렸다.
생긴 것은 이사벨라 리날디 아가씨보다 젊게 생겨서는 그녀의 조부되는 바오르 프리모 리날디보다 더 나이 지긋한 말투라니. 오래된 고전 영화를 보고 이탈리아어를 배웠나?
경호원들이 짧은 의문을 가졌다가 빠르게 상념을 흐트러트렸다. 강석과 이사벨라 리날디는 잠깐 닿은 시선에 관심이 없다는 듯 서로 대화를 이어가며 움직였다.
“(시상식까지는 아직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해요. 제가 괜히 빨리 소식을 전달한 게 아닐까 저어되네요.)”
이사벨라 리날디는 메일과 문자로 소식을 전달하며 정확하게 시상식이 언제 진행되는지, 그리고 시상식 발표 일정으로 강석이 소화해야 하는 일정이 무엇무엇인지 적어놓았다.
이사벨라 리날디는 스스로가 그랬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석이 탄 항공권부터 머무는 호텔 숙박비를 모두 리날디가에서 지원받을 예정이건만, 그래도 이사벨라 리날디는 괜히 일찍 언급했다며 사과하고 들어왔다.
‘굳이?’
강석이 미간을 세모꼴로 좁혔다. 이사벨라 리날디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필요가 있나? 아무리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리날디가 총괄감독으로 맡은 한국관이 좋은 성적은 물론, 시상식에까지 언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굳이?
“(소화해야할 것들이 있어서 일찍 왔을 뿐이오. 너무 그렇게 나오지 마시게.)”
내가 되려 민망해지니. 강석이 그렇게 말하며 캐리어를 이끄려는데 경호원들이 도어맨처럼 캐리어를 받아들었다.
“(···호텔은 잡아놓았으니 제 차로 이동하도록 해요.)”
캐리어가 손에서 떠나는 순간, 이사벨라 리날디가 부드럽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음? 때문에 강석은 커다란 위탁수하물 두 개를 각각 한 명씩 농구공을 패스받듯 가져가는 것을 반 박자 늦게 쳐다보아야만 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되어요. 제가 안내할게요.)”
이사벨라 리날디가 캐리어를 돌려받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시야를 차단하며 손을 내뻗었다.
‘대체 뭐야?’
강석이 지나치게 극진한 대우에 눈을 깜빡였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었다. 그래. 아슈라 왕자가 인천공항에 입국했을 때 이랬던 것 같다. 정신없이 기자가 몰려있는 와중에도 덤덤하게 경호원들에게 수행받으며 걸어가던 아슈라 왕자가 떠올랐다.
자신이 걸어가는 왼쪽 방향과 반대로 걸어가고 있는 연예인으로 추정되는 저 사람보다 어떻게 보면 대우가 더 극진했다.
좌양선구, 우리날디를 대동하고 높은 사람처럼 모두에게 경호받으며 걸어가던 강석이 미간을 좁혔다. 그때였다. 가만히 듣고만있던 양선구가 넌지시 강석에게 말을 던졌다.
“생각보다 시상식에서 석이 네 지분이 큰 모양이구나.”
“지분이요?”
“꽤 큰 상을 받을지도 모르겠어.”
그거 하나로 그렇게 바뀌나? 강석이 짧은 의문을 표했지만 베네치아, 나아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리날디가의 이사벨라가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만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최근에 베네치아에서 반응할만한 일들은, 소더비나 아슈라 왕자 아니면 마레갤러리였는데 그 어떤 것도 황금의 리날디를 꿈쩍 할 수 있게 만들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한국관이 예상보다 큰 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고, 당연하게 생각한 적도 없다. 정확하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한국관이 큰 상을 받아봤자 개인의 영예는 아닐테니까. 그러나 막상 받는다고 생각하니 묘한 간질거림이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발 앞꿈치가 뻐근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강석이 생각을 멈췄다.
받는 줄 알고 있다가 안 받는다는 게 더 기분이 나쁜 법이었다. 솔직히 한국관을 떠나서 초청받은 작가로 덤벼들었다면 연작은 엄청난 대작이긴 했다.
‘뭐. 그래봤자 베네치아에는 안 남겨놓을테지만.’
그래. 강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상식 이후, 비엔날레가 끝난 다음에 연작이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 조금 더 신경쓰느라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수도 있다.
하나의 좋은 작품이 가지는 홍보효과는 엄청나니까. 강석이 턱을 잠깐 쓰다듬으며 생각을 마쳤다. 이사벨라 리날디가 조금 떨어진 것 같은 강석과 보폭을 맞추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리날디 쪽으로 걸어가며 강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업실은 구해졌소?)”
“(준비해놓았어요.)”
“(호텔에 짐만 놓고 바로 갈 수 있는 곳인가?)”
생각이 복잡해질 때는 작업에 열중하는 게 최고였다.
이사벨라 리날디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강석을 바라보았다. 살짝 붉어진 뺨과 놀랐다는 듯 벌어진 입술과 커다래진 동공. 이제야 제가 아는 온실 속 화초같은 이사벨라 리날디였다.
얼굴 표정 한 번 눈치볼 일 없이 다 드러내놓고 살았을 평소의 이사벨라로 돌아온 리날디가 입을 뻐끔거리며 물었다.
“(지, 지금요? 방, 방금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으셨나요?)”
도착 예정시간을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 리날디가 경호원들을 돌아보았다. 경호원들이 서로를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도착한지 30분도 안되었을 거다.
양선구도 입을 금붕어처럼 다물지 못하고 강석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베네치아로 간다고 했을 때도 그렇고, 비행기에 출발하기 전에 배편을 통해 대리석을 잔뜩 실어 피렌체로 보내놓고는 위탁수하물에 정체 모를 뭔가를 실어오더니 이번에는 17시간 여정을 끝내자마자 작업실에 가겠다니.
신이 도대체 어떤 체력과 정신력을 강석에게 준 것인가. 아마 창조주는 강석이라는 존재를 만들 때 체력과 정신력을 콸콸콸 부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언제나 돌연변이는 있는 법이라지만···’
모두의 경악어린 시선에도 강석은 덤덤하게 이사벨라 리날디를 바라보았다. 이사벨라 리날디가 속눈썹을 떨었다. 그래서 작업실로 갈 수 있냐 없냐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이사벨라 리날디는 며칠 전에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겼다.
– ‘강석이란 작가는 크게 될 상이더군. 벨라, 그와 멀어지는 길을 최대한 경계해라. 예술이란 사용하기에 따라 많은 법 위에 설 수 있고, 가장 대중과 거리가 먼 것 같으면서도 대중과 가까이에 설 수 있는 편법이니. 우리 황금의 리날디는 돈으로 그 예술가의 옆에 서는 자들이다.’
바오르 프리모 리날디. 자신의 조부는 강석이 여태까지 벌인 일들을 잠깐 살피시더니 눈을 빛내며 충고했다. 예술가는 피식자와 포식자의 경계선에 선 직업군이다. 누군가는 피식자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누군가는 포식자들의 머리 위에 선다.
조부는 강석을 머리 위에 서는 자들로 보았다.
이사벨라 리날디는 잠을 조금 자야 한다는 충고를 하고 싶은 것을 목울대 깊이 눌러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바로 가시죠.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곳이라 언제든 상시 개방이 가능해요. 짐은 개인 차편을 통해 보낼테니 저희는 작업실로 가도록 하죠. 그리고 같이 오신 분은···)”
“(나는 석과 같은 곳에 머물고 싶으니 호텔만 안내해주시면 내가 따라가겠소다. 나는 체력이 석이와 달리 강철같지 않아 잠이 필요할 것 같으니.)”
이사벨라 리날디가 정상적인 반응에 반가워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면 동행자분은 저희가 안내해드리도록 할게요. 미스터 고리?)”
“(네. 제가 짐을 맡기면서 동행자분도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리는 빠르게 끝이 났다. 작업실로는 경호원 셋과 이사벨라 리날디, 그리고 강석이 향하고 나머지는 강석의 짐과 함께 호텔로 간다.
그렇게 양쪽으로 갈라지려는데 강석이 손을 들어 일행을 제지했다.
“(그럼 잠깐만 짐을 열어도 될까요. 캐리어에서 꺼낼 게 있어서요.)”
“(물론이죠.)”
오? 양선구가 캐리어로 다가가는 강석을 보며 수염을 쓸었다. 잘하면 목욕탕을 성공시킬 방법을 지금 보게 될 지도 모르겠군. 양선구가 기대감을 품고 강석을 따라 캐리어를 향해 다가갔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양선구가 짐을 푸는 강석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은 하얀것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하얀 것 사이에 놀란 것도 살짝 끼어있었다. 굉장히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이 비누인 듯 했으나···잔뜩 뭉쳐진 것을 바라보며 양선구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 옥에서나 볼법한 묘한 무늬. 뭉개지고 압축된 것 같은 자국. 직사각형으로 잔뜩 뭉쳐진 저것은···양선구가 오랜 세월 조각과 함께하며 몇 번 여행에서 보았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밀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