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87
제586화
괴로움은 끝이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바람이 불면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에 견딜 수 없이 아파야 했다.
아프잖아… 제기랄…
너무 아파…
나는 작다.
우주는 그에 비해 무척 크다.
우주 안의 나는 작다.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
가치 없고, 쓸모없어.
아니!
아니야!
나는 위대하다!
이 별들보다도! 은하보다도!
이것 봐! 거대해지잖…
어… 추락한다.
…떨어진다고!
“푸하아아아악!”
여인이 고개를 처박고 물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하아… 하….”
숨을 고르고 난 후에, 그녀의 입에 구속구가 채워진다.
철컥…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상태.
‘…아.’
고문을 받던 도중이구나.
그 어떤 사실이나 정보도 누설할 수 없는데도.
알고 있는 게 없으니까.
그녀를 고문하는 자들 역시 그 사실을 깨달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고문은 계속되었다.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고양감을 일으킨 후, 다시 우주의 먼지보다 못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하는 고문.
실로 무서운 것은, 앞으로도 재차 그런 공포를 마주하리라는 미래가 그려진다는 것이다.
떨어트린다면 더 높은 곳에서.
헤로잉에 투옥된 자 중에서도 지극히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만 행해지는 고문이다.
“죄수 번호 1072291. 마지막 재판이다. 넌 이제부터 재판장으로 호송된다.”
“…….”
올 것이 왔다.
최후의 재판.
그녀가 저지른 끔찍한 일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저지른 일이 큰 반향을 불러왔는지, 제법 귀한 자들이 재판을 맡았다.
우주 평의회.
그녀가 죄수의 신분임에도 몸단장을 하고 몸에 밴 악취를 제거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후우우우우우우웅…
다수의 호위함과 함께, 호송선에 실려 이동하는 그녀.
전이는 불가능했다.
평의회가 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공간 좌표는 비공개.
그녀는 그렇게, 재판장 안으로 들어선다.
“죄수 번호 1072291의 우주 질서 교란 외 다수의 죄목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겠다. 착석.”
재판이 진행된다.
죄인의 입을 틀어막은 구속구.
움직일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눈동자뿐.
답답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평의회의 의원들은 그녀의 처우를 결정하는 오늘까지도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창세 이후 계속되어 온 평화에 잔물결이 일은 정도.
그녀를 변호하는 이는, 변호를 포기했다.
재판에 넘겨진 그녀는 식탁에 올라온 맛 좋은 요리다.
포크와 나이프에 분해되어 평의회의 선전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아마 우주에서 가장 질 나쁜 범죄자로 묘사될 테지.
죗값을 치르는 건 억울하지 않았다.
“…….”
그녀가 텅 빈 눈으로 평의회를 노려보자, 평의회가 지시했다.
“죄수의 구속구를 풀어줘라.”
‘하지만’이나 ‘그렇지만’이라는 반발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평의회의 뜻은 절대적.
누구도 항명하거나 의견을 표할 수 없었다.
꽤 고리타분한 질서다.
철컥…
풀려난 건 하관의 구속구뿐.
잔뜩 떠들며 잘못을 비는 걸 기대하는 눈치다.
“아… 아아… 흠흠… 존경하는 평의회 어르신들. 반갑습니다. 쟈넷이에요.”
쟈넷.
그녀는 무한 탄생을 위해 승부를 걸었고,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꼴이 좋군.”
“건방이 하늘을 찔러 저지른 죄 아니더냐.”
“그곳에서 용서를 구하는 게 네게 주어진 운명이다.”
씨익…
“제게 묻고자 하시는 거라도?”
“재판이 끝나면 넌 헤로잉 심층부에 처박힐 거다. 경험한 그 어떤 고문보다도 더 괴로운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지.”
“무서워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심판관이 벽에 기댄 채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후회하라.”
“…….”
“충분한 시간을 줄 터이니… 반드시 후회하라.”
쟈넷의 눈빛에 불경이 깃들었다.
“너희는 자유라는 헛된 가치를 좇으며 우주의 질서를 무너트리려 했다.”
“과연….”
“우주의 질서는 곧 진리나 다름없다.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그 자리엔 혼돈만이 자리한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혼돈인가? 운명의 전능함을 부정하는가?”
쟈넷이 깔끔하게 답했다.
“부정합니다.”
“…뭐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음.”
평의회가 불쾌감을 표했다.
그녀의 고문을 맡았던 자는 아마 모진 고초를 경험할 것이다.
“어째서냐? 그토록 패하고, 나동그라졌는데도 말이지. 지금의 네 모습을 보아라.”
평의회를 올려다보는 낮은 위치.
“그게 너의 위치다.”
“모르면서….”
“…똑바로 말하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정 짓지 말라고.”
“…….”
평의회의 얼굴이 굳었다.
쟈넷이 계속해서 토해냈다.
“탄생한 순간부터 전부 가지고 있었던 너희들은 몰라… 너희는 너희 존재의 정당성을 운명이라 말하며 너희가 손에 쥔 지배의 권한 역시도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마치 그것이 전능하다는 듯이! 조금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는 악마처럼 말을 멈추지 않았다.
“좁은 곳에 울타리를 세우고 우리를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는다. 이 역시 운명이라 말하며. 너희가 세운 울타리를… 우주의 전부라 말한다.”
“그것이 옳은 일임을 부정하려는 건가? 질서를 위한 길이다.”
“질서… 질서… 질서어어어!”
그녀가 점차 과격해짐에 따라, 심판관을 비롯한 신들이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너희가 말하는 질서는 안정된 상태가 아니다. 그저… 멈췄을 뿐이야. 마지막 남은 저항의 의지조차 짓밟은… 꿈틀거리지 않는 상태일 뿐이지.”
“…어찌하겠는가, 그것이 지배받는 것이 너희의 운명임을.”
운명, 질서.
지배자의 뜻대로 갖다 붙여지는 근거.
씨익…
평의회가 웃는다.
그 웃음에 아름다움은 없다. 오직, 추악함 뿐이다.
저들은 지배하기 위해 살아가는 동물, 그 외의 가치는 없다.
쟈넷이 불쑥, 다른 이에게 질문했다.
심판관, 그대의 생각도 같은가?
“…….”
“내게 물었잖아. 맞지?”
– 내가 존재하는 이곳보다 더 완전에 가까우며 위대한 우주가 존재한다면, 혹은 우리를 지배하는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 그대들은 어찌할 텐가?
그가 쟈넷에게 물었던 말.
또 그는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 나는 그것을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거머쥘 것이다.
“너 역시… 운명을 손에 넣길 바랐을 뿐, 그저 두려워할 뿐인가.”
지배하기만을 원했으니, 지배자에게 맞서지 않는다.
다음 지배자가 되기 위하여.
지배는 계속될 뿐이다.
“그것을 부수는 자는… 나타나지 않는가.”
쟈넷이 읊조리자, 평의회가 말했다.
“후회하라, 그대의 선택을.”
“그것이 속죄하는 길이다. 그대로 인해 더럽혀진 질서에게.”
저항한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어. 선택은… 너희가 강요했을 뿐이야.”
그녀가 몸을 떨며 뒤로 돌았다.
좌중이 그곳에 있다.
“있잖아요, 여기 있는 여러분… 누구 제 판결에 이의 있는 녀석 없어?”
“…….”
“…….”
“잘못됐잖아!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침묵한다.
평의회의 눈 밖에 난다는 건 곧 그녀와 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기에.
절망적인 상황.
그러나 비로소, 쟈넷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큭… 큭큭큭큭….”
배를 부여잡으며 웃었다.
“으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성대가 상하도록, 웃었다.
“켈룩… 으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미치광이다. 미친 듯이 웃어 재낄 뿐이다.
대체 왜.
“…있잖아. 마지막 기회였어.”
“…기회?”
“내가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미치기라도 한 건가? 네게 구원은 없다.”
이곳은 차원의 틈.
숨겨진 우주.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선 평의회가 구축한 모든 경계망을 뚫고 와야 한다.
설령 그러한 움직임이 있더라도 아마 그들이 재판장에 도달하기 전에, 그녀의 재판은 모두 끝이 날 것이다.
그녀는 기적을 믿는 것인가.
구원을 바라는 것인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머나먼 우주에, 신비한 마법이 탄생했지. 우리만의 비밀, 조용한 대발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실성했군. 판결을 내리겠….”
“기억한다면. 언제고 찾아올 수 있다네.”
조네.
위대한 마법사.
당신의 마법은, 우주마저도 상상한다.
“그래, 기억한다면….”
치지직…
치지지지지직…
재판장에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직-!
파지지직-!
재판장에 존재하는 모든 전등이 깜빡였다.
“무슨… 무슨 일이냐!”
“죄, 죄송합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뭔가가….”
“보고받지 못했거늘!”
킥킥…
“여기… 압도적인 세계가 있다.”
“…뭐?”
“기대하지, 너희의 입장이 뒤바뀌지 않기를.”
스으윽…
그녀가 손바닥을 앞으로 향해 내밀었다.
그녀의 한쪽 손바닥에, 기괴한 문양이 생기기 시작했다.
입술 자국.
강설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새겼던 흔적.
그녀는 염원하고 바라지 않는다.
오직, 준비할 뿐이다.
으지지직…
입술이 짐승의 검은 치열로 변화한다.
찢어질 듯 아가리를 벌리는 손바닥의 짐승.
쩌어어어어억…
그 안에서 엄청난 양의 그림자를 토해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쟈넷의 광소는 좌중의 비명과 뒤섞였다.
“꺄아아아악!”
“무슨 짓이냐!”
“나가! 밖으로….”
평의회가 소리쳤다.
“심판과아아아안!”
심판관이 인상을 쓰며 쟈넷의 손바닥에서 나타난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 검은 남자가 서 있다.
“노, 놈들입니다.”
“속히 피하셔야 합니다!”
해방 전선, 장막.
그들의 등장에도 여전히 좌중은 소란스럽다.
“침묵하라.”
고요해지는 장내.
검은 남자의 한 마디에 소리가 사라진다.
해방 전선, 장막.
“침묵하라.”
“…….”
순식간에 고요해지는 장내.
쟈넷이 손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철컹…
투우우웅…
그녀의 손목을 묶은 구속구가 검은빛에 잘려나갔다.
“뻐근하네… 하하하! 인사들 하세요! 방금 내 밀린 외상값이 도착했으니까.”
“…….”
그녀는 말한다.
“시간을 줄게.”
쟈넷은 언제 어느 때고 위태로워 보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검은 남자의 곁에서 자유를 손에 넣었다.
“후회해도 좋아.”
“심판관! 나서라!”
저벅…
저벅…
심판관이 우주의 패자로서, 힘을 발휘했다.
기이이이이이이잉…
그의 검이 빛에 휩싸였다.
[심판관이 신성 절기 : 초신성을 사용합니다.]
……
그 순간.
휘오오오오오…
그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심판관과 평의회가 방금 벌어진 일을 확인하고 검은 남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무한(無限)의 대제(大帝).
그의 영역에 발을 들인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그곳엔 규칙이 없다.
대제, 강설이 말한다.
“이 판결에….”
재판장이 얼어붙는다.
“이의 있다.”
쟈넷이 전신을 타고 오르는 해방감에 전율하며 말했다.
너희가 운명에 굴복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 말한다면…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그래, 바로 이 자가…
“그대들이 맞이할… 새로운 운명일지니!”
* * *
뭐야?
부스럭…
여긴 어디지?
난 지금까지… 강설을 보고 있었는데…
– 아아… 보여? 어이, 보이냐고.
…누구?
너흰 뭐야?
둥둥 떠 있는 저건 뭐지?
영혼?
– 제기랄… 발각됐다.
누가?
– 우리 말이야.
우리라니?
그럴 리가… 나는 너희를 모르는데?
– 쉿, 장막이다.
장…막?
“잡았다! 카하하하핫!”
화르르르르륵…
후우우우웅…
– 크아아아악!
후우웅…
– 커허어어어억…
뭐, 뭐야! 다 죽이잖아!
저 흰 머리 여자는… 요정… 넌…
후우우우웅-!
으악! 하지 마!
“응? 이 녀석… 저 녀석들이랑 색이 다른데?”
그래! 맞아!
나는… 아니야!
나는 그냥… 너희를 지켜본 것뿐이야.
제기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카렌.”
저벅…
저벅…
카루나!
네 누이를 말려줘!
“카루나, 이 녀석 말이야. 뭔가… 이상한데?”
“…유랑자인가 보군.”
“유랑자?”
“밀란에게 못 들었어?”
“…밀란이 나 빼놓고 무슨 말 했어?”
“밀란은 애초에 빼놓은 적 없어.”
“……다시 설명해줄래?”
“하아….”
그래! 뭔가 착각한 것 맞지?
그렇지?
“일단 데리고 가자. 대제가 오면 어떻게 할지 물어보면 되니까.”
팍…
기다려… 어디로 가는 거야?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
타다닥…
타닥…
“몸이 차가워, 불 가까이에 놓자.”
“말도 못 하는 것 같은데, 원래 그런 거야?”
“그렇게까지 자세히 듣지는 못했어. 유랑자를 만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정도만….”
“유랑자가 뭔데?”
“차원의 떠돌이. …아마도 이 녀석은 꽤 오래전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 거야.”
“으엑… 싫어! 너!”
잡지 마!
“언제부터 우릴 지켜본 거야?”
전부.
전부 다!
“음… 대답을 못 하네.”
“이곳의 영향 때문일 거야. 대제의 힘이 아직 장악하지 못한 곳이라.”
타닥…
타닥…
따뜻해… 잠이 든…
“여기들 있었군.”
“어, 왔어?”
쟈마드! 우르! 탄시아!
모두 있었구나! 걱정했잖아!
근데 너무 졸…
음…
음…
[…….]
음?
[…….]
뭐야? 뭐지?
무기나!?
“그래서, 넌 우리의 여정이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말할 셈인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점차.”
“헛소리! 우리가 어떤 일을 경험해야 했는지 잊었나? 그 모든 걸 탓할 셈이냐?”
“난….”
뭐지?
혜명?
너희 왜 싸우는 거야?
그것보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데?
“분명… 생명은 잘못된 선택을 했어.”
“결과가 나온 이후에 과정을 탓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다. 또한, 그 과정이 지금의 대제를 만들었다는 걸 잊었나? 과정이 그렇게 중요했다면, 이곳까지도 도달하지 못했어!”
“결과가 전부라고 말하지 마! 분명 대학살이 일어났음에도 그것을 당연시하는 건 잘못됐잖아!”
[당신은 영문도 모르는 채, 좌담에 휘말렸습니다. 훌륭한 결과를 위한다면, 그 과정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1. 결과가 중요한 거야. 좋은 결과는 결국 과정 또한 정당하게 해!
2. 결과에만 몰두하면 안 돼. 그 과정이 외면받았다면 결과가 좋더라도 무의미해.
3. 모두 착각하고 있어. 결국 상황에 따라 좌우될 뿐이지. 나쁜 과정이 꼭 좋은 결과만을 불러오지 않으며 좋은 과정이 꼭 나쁜 결과만을 불러오지도 않아.
4. 과정과 결과를 묶어서 생각하지 마. 과정이 좋더라도 결과가 나쁘면 결과에 대해 비판받아야 하고 결과가 좋더라도 과정이 나쁘면 과정에 대해 비판받아야 해.
……
이게… 뭐야?
“무기나, 그렇다면 넌, 생명을 위해 코돈이 몰살시킨 생명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고리!
“그래. 코돈이 없었다면 대제는 없었고 판데아와 지구도 멸망했겠지. 결국엔 배부른 소리야.”
“헤헤헤… 극단적이네! 뭐,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탈리아드… 그럴 거면 그냥 조용히 있어….
“난… 난, 코돈의 생각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너무 극단적이니까.”
아즈란! 역시 그런 거지?
코돈은 미치광이니까.
그래, 그런 거야….
“무기나에게만 너무 가혹한걸.”
뭐? 넌… 찰리?
“찰리, 네 생각은 다르단 거야?”
“무기나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너희와는 다르지.”
“어떤 부분이?”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정도?”
“무슨 소리지?”
“코돈은 한 시대의 인간들을 전부 절멸시킨 자야. 물론 위험하다는 건 동의해. 당연하지, 명백한 악처럼 보이니까?”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해.”
“그런데, 코돈과 비슷한 녀석들이 있잖아.”
“비슷한… 녀석?”
찰리…
“진, 그 녀석도 마찬가지였지.”
“…….”
“그리고 야차 유림 역시, 많은 인간을 살해했지만 결국 대제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줬고.”
“…그래, 맞아.”
“마지막으로… 비탄.”
이런…
“비탄 역시, 사람을 죽였어. 그것도 꽤나 많이.”
“…….”
“그러나 모두 자유를 위해 싸웠지. 모두 죄악을 짊어진 자들이야. 혹시 무기나를 비난하는 녀석 중에, 이 셋 중 누군가를 용서한 녀석도 있지 않을까?”
[당신은 누군가를 용서했습니까? 혹시 용서했다면 죄악의 크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관계의 애착 때문입니까?]
1. 종말론자 코돈. 녀석이 이 전쟁을 시작했지만, 녀석이 없었다면 전쟁에 승리할 수 없었어. 진정한 자유를 위해 싸운 투사지.
2. 태양 진 아우뎀 몬트라. 황제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결국 대제는 승천하지 못했을 거야.
3. 야차 유림. 유림은 대제가 가장 괴로워하던 시기에 큰 도움을 줬어. 시대 전쟁 역시 유림이 남긴 힘이 크게 작용했고.
4. 운명을 가르는 검 비탄. 비탄이잖아! 비탄은 나쁘지 않아! 비탄이 죽인 건… 뭐, 사정이 있었겠지.
“흐음… 그런가, 확실히 판단하기 어렵군.”
“어려운 얘기야. 그 얘기는 일단 미뤄두자.”
그래… 그러자.
다른 얘기를 하자.
“…우리는, 운명을 벗어난 걸까?”
아, 제발… 이번엔 또 누구야?
…밀란이구나?
“무슨 소리냐?”
“우주의 규칙을 부쉈지만, 대제의 존재는 진정한 자유에 도달한 게 맞을까?”
[당신은 생명이 진정한 자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1. 대제의 탄생은 또 다른 운명이었을 뿐이야.
2. 대제의 탄생까지도 갈 것 없지. 코돈의 탄생부터야.
3. 운명, 운명! 언제까지 운명 타령만 하고 있을 셈이야? 운명은 진작 깨졌어! 대제가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로 만들었다고!
4. 보이는 적만을 쓰러트렸을 뿐이야. 만일 더 위험한, 더 은밀한 존재들이 조율하고 있다면? 어쩌면 운명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아, 머리 아파.
“근데, 그 녀석은 뭐냐?”
카-잔.
나? 나 말하는 거야?
“아, 이 녀석은….”
“대제가 오고 있어.”
저벅…
저벅…
숨이 막혀…
저게, 무한의 대제….
스으윽…
“유랑자인가.”
“맞아! 내가 찾아냈어.”
“…….”
왜 대답하지 않는 거야?
근데… 대제의 눈, 공허해 보여.
착각…인 거지?
파지지지직…
“영역을 손에 넣었다. 주변의 운명은 밀어냈다.”
“좋았어!”
아, 그래!
그렇구나!
방금까지 내게 보인 건, 운명이었구나.
대제는 여전히 싸우고 있구나….
“이 녀석을 어떻게 하기 전에, 너희들과 이 녀석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핀, 무슨…
“이 여정은 그대들에게 무엇이었지?”
쟈마드, 너부터 말하는 거지?
“투쟁.”
카렌, 카루나!
너희도 답해줘.
“슬픔.”
“내겐….”
쏟아지는 수많은 답이, 재밌네.
각자가 다 다르잖아?
“…유랑자.”
아아!
나는 말하지 못해!
“네가 누군지 알 것 같다.”
나를 안다고?
스으윽…
눈! 그렇게들 쳐다보지 마!
부담스럽….
“네게 묻지.”
좌담은 실컷 나누었어!
네 동료와!
“이 이야기는, 네게 무엇이었지?”
스으으으으으으으…
어…
어라?
너희들 어째서 모두 사라지는 거야?
그림자로 되돌아가는 거지?
…그런 거지?
왜,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거야?
그럴 리가… 전부 되살렸잖아.
그런 거잖아?
…혹시 아니라면, 대제의 공허한 눈은…
“모든 걸 지켜봤겠지. 우리의 여정을.”
대제.
아니, 강설.
…맞아. 모든 걸 지켜봤어.
“답해줘.”
강설!
“아… 아아….”
말이 나온다.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됐어.
그 전에, 되묻고 싶어.
“…네게는?”
웃는다.
웃어준다.
“모든 것.”
…그럼, 나 역시 답할게.
“난….”
강설, 이 답은 네가 원하는 답이었을까.
“그런가….”
강설, 나는…
“떠나라….”
…뭐?
“광기여.”
– 完 –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왕모찌입니다.
이 글을 붙잡은 지 2년이 지난 후에야 온전한 제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저는 글을 쓰는 동안은 작가라는 존재가 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존재가 글에서 드러나면 독자 여러분들이 몰입을 방해받고, 저라는 필터를 거쳐 사고하실까 염려해서입니다.
글에서 펼쳐지는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어느 작가가 쓴 글이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독자는 작가의 생각을 우선하게 되니까요.
아무튼, 이 글과 관련된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글은, 부정과 싸운 제가 담긴 글입니다.
리메이크는 안 돼, TRPG? 주인공이 수동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으니 안 돼, 보상에 대한 즐거움 그리고 대리만족을 충족하기 위해선 다양한 감정을 넣어선 안 돼, 독자들에게 생각하게 만들면 안 돼, 뒤에 올 이야기를 위해 앞의 이야기를 써서는 안 돼.
뭐, 등등이 있습니다.
전부 무시하고 썼습니다.
이는 상업작가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원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돈이 되는 글을 쓴다.
심지어 두 번째 원칙마저 어겼습니다.
돈이 되지 않는 글은, 얼른 쓰고 치운다.
굳이 이런 기행을 벌인 이유는, 꽤 예전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처음 작가가 되길 결심했을 때, 처음 쓴 글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검은 왕의 회고록.’
웹소설의 형식과는 맞지 않은, 상당히 오만한 글이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검은 사람이 지나온 일을 떠올리며 과거의 이야기를 해주는 형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혼자서 이 글을 5000자 분량으로 100화 정도를 썼습니다.
연재처에 연재했었는데, 딱 10명 보셨었습니다.
무려, 제가 포함된 수치라는 게….
검은 왕은 그렇게 차마 얘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제 가슴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작가가 되고 난 후, 글을 쓰는 종종 검은 왕이 찾아왔습니다.
가시처럼 박혀서 제 글을 검게 물들였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 작품의 이야기가 그 가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당시 성적으로는 더 끌고 가기 어려운 글이었는데도 끝까지 부여잡은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가시를, 이번에야말로 뽑아내겠다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한 번에 뽑히는군요.
가시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죠.
이번엔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상업 소설로써 벼려진 글은, 일체의 불필요한 것들을 거세해 독자 여러분들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선사하는 글입니다.
이 글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글을 못 써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신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부정하겠습니다.
하나, 꼭 예를 들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악역 혹은 범죄자에 대한 미화가 아니냐라는 의문.
놀랍게도 아닙니다.
작 중에서는 점점 위험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시작은 군트.
마을을 병들게 하죠.
어렸을 적 불우한 일을 겪었다지만, 그는 확실히 악처럼 보입니다.
비탄.
꽤 많은 인간을 죽였습니다.
야차 유림.
주인공과 감정적 교류를 했지만, 그녀 역시도 극악무도한 살인귀였죠.
태양 황제 진도, 코돈도 전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자들입니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들은 이 중에 어느 한 캐릭터쯤은 이미 마음속으로 용서하신 분이 있지 않나요?
그리고 그 대상은 이 중에 가장 작은 잘못은 저지른 존재인가요?
아니라면, 굉장히 재미있네요.
의견이 갈렸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쓰기도 했고요.
작품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종종, 벅차오르시는 분들이 있는 반면 또 어떤 분들은 굉장한 거부감을 느끼셨습니다.
이는 의도한 바입니다.
제발 한 명만이라도 거부감을 느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쓴 글이니까요.
그러면, 선택이라는 게 드러나니까요.
같은 글을 보더라도 다른 판단을 내리다니… 이는 정말로 선택에 딱 맞는 글이 아닐까요?
글의 성적에는 오히려 해가 되는 기행이었지만, 꼭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제 글은 단지 제가 적는 하얀 창이 아닌 플랫폼의 댓글 창까지.
또한 독자 여러분의 가슴까지 확장하니까요.
자, 막간을 이용한 작품의 해설은 이쯤.
다음으로는, 최근 제 의문에 대한 것들입니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괴로운 현실을 잊게 하는 글은 분명 좋은 글일 겁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며 한 생각은 괴로운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글 역시 좋은 글이 아닐까입니다.
주제넘게도 제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누가 슬쩍 제 머릿속에 들어와 사실 이 작가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대 하고 소문이라도 내줬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모든 것은 독자 여러분들이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담고자 했던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에 대한 부분입니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사람은 작아집니다. 타인의 시선, 사회, 우주.
그리고 자신.
가장 괴로운 건 끝없는 자기혐오, 그리고 그로 인해 실패를 두려워하게 될 때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건 자신.
자신을 가장 불신한 것 역시 자신.
이 글의 끝까지 온 독자 여러분들이라면, 부디 다른 결말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처음 알을 깨고 깨어났을 때, 10명도 읽지 않았던 제 소설을 이제는 많은 분과 나누고 있는 왕모찌처럼요.
저는 전보다, 성장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검은 남자는 찾아옵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31번째 말이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마칩니다.
겨울에 피어난 글을 겨울에 두고 갑니다.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왕모찌였습니다.
에필로그 1화
– 어라?
– 보… 보인다!
– 이 순간만을 기다렸지!
초월자 강설의 의지로, 그의 우주에서 광기가 차단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천 년이 흘렀다.
그들은 다시, 단절되었던 우주에 발을 들였다.
광기에 오염되지 않은, 부정으로 젖어 들기 쉬운 순수의 우주가 그들을 맞이했다.
하나,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어째서 광기는 다시 이 우주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강설의 힘이 약해졌기에? 그가 이제는 광기의 침습을 막아낼 힘조차 없을 정도로 쇠락해졌을까?
그러나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누가 광기를 이 우주로 불러온 것일까?
* * *
끼이익…
끼이이익…
철컹.
정리가 깔끔하게 된 연구실에서 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인가. 결국엔 완성했군.”
새하얀 머리에 안경을 쓴 냉철한 인상.
우르였다.
“시답지 않은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에게 이런 의문문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먼저 확신하고 행동하는 자였기에.
그럼에도 우르가 의문을 가진다는 건, 보통 그가 처리해야 하는 일을 할 때가 아닌 스스로의 감정에 치우친 일을 할 때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완성된 기계 장치에 ‘미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미련이란 그가 우습게 여기는, 인간이 범하는 잘못 중 나름 상위권에 자리한 감정.
우습게도 그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이 장치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다.
“…뭘 기대하는 건지.”
우르는 강설이 심판관에 맞서 싸운 결과로, 판데아와 지구가 시간 회귀를 거쳐 마침내 나름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부활하는 게 가능했을 리 없을 테니까.
다만 재밌는 사실은, 그는 윤회의 고리를 거쳐 영혼이 새롭게 태어난 다른 생명들과는 달리 그저 우르인 채로 부활했다.
전보다 더 강해진 채로.
그가 알기로, 천상의 투쟁 이후 이런 존재는 판데아에 딱 둘밖에 없었다.
아, 둘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미 작고한 존재인 늙은 트롤 마엘도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기는 했다.
다만, 그는 단지 강설을 기억할 뿐이었고, 수명이 다해 윤회의 고리로 들어간 지가 벌써 수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우르는 마엘에 대해 시간 회귀를 거치며 뭔가 몸에 이상이 생긴 건지, 트롤치고는 나름 오래 살아남기는 했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마엘이 숨을 거둔 이후, 강설을 기억하는 특별한 존재는 둘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을 본 지도… 오래되었군.”
우르 자신과 그가 칭하는 ‘녀석’은 시간 회귀 이후 깨어났을 때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세상 모두가 강설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르를 포함한 둘 역시 그를 잊는 게 맞다.
어떡해야 하는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르는 답을 내렸다.
– 지켜보겠다.
생명의 삶을, 지켜보겠다.
감시자이자 관찰자로서.
남은 한 명의 대답은 이러했다.
– 내가 돌볼 거야.
그, 아니…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둘은 가는 길이 달랐기에 흩어졌다.
아마도 천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천 년…
자그마치 천 년이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최초의 마도사에게 천 년이란, 단지 숫자일 뿐이지만 꽤 지루한 시간이었다.
생명의 삶에 너무 큰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봐 온 그는, 더는 그들에게 자신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다른 길을 간 그녀의 덕분이다.
이제 우르는 자유로워졌다.
세상 대부분의 일을 경험한 위대한 마도사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그 해답이 바로 이 기계 장치에 있었다. 아니, 마도 공학 장치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네, 모두 당신 때문이야.”
조네.
위대한 조디악의 전갈자리 대마법사.
초장거리 전이에 대한 그의 획기적인 발상은 인류의 도서관이나 마찬가지인 우르의 머릿속에 여전히 존재했다.
더 발전된 형태로.
“몰랐으면, 이런 짓도 안 했을 텐데.”
기억과 감정을 좌표로 사용해 전이한다.
더 흐릿한 기억일수록, 더 미약한 감정일수록 마력 조율은 까다로워지며 잘못하면 어긋난 공간에 떨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기계 장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그가 하려는 전이는 평범한 전이가 아니니까.
초원에서 강.
도시에서 도시.
국가에서 국가.
대륙에서 대륙.
그것을 넘어서는, 우주에서 우주로의 전이.
당연히 조네의 발상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도움이 된 또 다른 기억.
이 기억은 자신의 기억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다.
유리코와 아스모돈.
이 장치는 후에 코돈이라 일컬어졌던 그 시간과 운명의 마도사들이 머나먼 천상으로 눈사람을 보낼 때 사용했던 방법까지 참고한 다음에야 제대로 구동되었다.
좌표는 이미, 고정해두었다.
짜아아악-!
손뼉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빛기둥과 함께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가 향한 곳은 어디일까.
미련은 또 무엇일까.
* * *
환상몽.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 중 많은 이들이 겪는 증상.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갑자기 폭발적으로 생겨난 이 환상몽은 질병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묘했다.
환상몽은 그 어떤 꿈보다 선명하며 자각몽과는 궤가 달랐다.
마치,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영화처럼 보여 주는 느낌.
환상몽 환자의 공통점은, 모두가 비슷한 세계관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기에, 환상몽이 정신병 취급에서 벗어난 지는 오래다.
대신 꾸준히 이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환자들은 정기적으로 지정된 의료기관에 방문하여 상담하여야 한다.
“에… 그러니까, 오늘 꿈에서는 용이 나왔다고요?”
“…네.”
“날개를 파닥거리는… 용?”
“어, 그러니까 용은 용인데 뭔가 힘이 다해서 축 늘어진 느낌?”
“아, 아무튼. 그 용이랑 대화도 하셨다고요?”
“네. 분명히 대화했어요!”
“뭐라던가요?”
“그러니까….”
한소미는 흐릿해지려는 환상몽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냈다.
……
– 안녕, 한소미.
‘내 이름을 알아?’
– 알고 말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걸.
‘거짓말… 말도 안 돼.’
– 내 이름은 니에르라고 해.
‘니… 에르?’
첫 용 니에르의 이름을 한소미가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그 이름이 어쩐지 그리우면서도 익숙한 느낌이다.
그리고 한 가지.
지금까지의 환상몽과는 다르다는 걸 감지한 부분이 있었다.
그녀가 직접,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니에르, 왜 날 찾아온 거야?’
– 나는 이제 떠나야 해. 네 기억 속에 남은 잔향이 내 마지막 조각이야.
한소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용이 앞에서 무어라 말을 하고 있는데, 그저 놀라 뻐끔거릴 수밖에.
– 나는 너희들의 몰락과 번영 모두를 보았어. 그리고 그 슬픈 운명까지도. 니에르는… 아팠어.
‘…….’
– 아스모돈도… 유리코도, 원하는 걸 이뤘어. 하지만, 니에르는 아직 이루지 못했어. 그래서 널 찾아온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 난… 행복을 주고 싶었어.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행복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몰라. 그래서… 네게 맡기려 해.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꿈속의 한소미.
– 네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줄게. 내 마지막 힘… 첫 용의 힘이야. 무엇이든, 네게 기적을 이뤄줄 테니 이 힘으로….
용이 웃었다.
웃는 것처럼 보였다.
– 진정한 행복을 그 손으로 직접 거머쥐어.
……
“…라는 말씀이군요.”
“네, 용이 그랬다니까요? 정말이에요!”
“일반적인 환상몽은, 마치 필름처럼 지켜보는 입장인데… 직접 대화를 나눴다고요?”
“네!”
상담의는 난감해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스윽…
“에… 꿈이라는 게, 보통 자기가 간절히 소망하는 게 있다면 그런 쪽으로….”
“……아무튼, 그랬어요. 상담 기록만 남기면 되는 거죠?”
“…알겠습니다.”
안 믿을 줄 알았다, 뭐.
조용히 투덜거리며 진료실을 빠져나오는 한소미.
대기석에 앉아 상담을 기다리는 사람들 쪽으로 눈을 돌리다,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 언니!”
“응, 소미구나.”
“미라 언니가 내 다음이었구나.”
유미라가 웃었다.
“응, 네 목소리 엄청 크더라. 밖에까지 들렸어.”
“드, 들렸어요?”
“괜찮아.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아무튼, 나 이제 들어간다?”
“언니는 무슨 꿈 꿨어요?”
“똑같지 뭐.”
슉슉-!
유미라가 한쪽 팔을 위아래로 내리그었다.
“도끼로 사람 머리 쪼개는 꿈.”
“…전 가 볼게요.”
“그래.”
거리로 나온 한소미는, 잠시 군중 속에서 방황했다.
향수병.
태어나기를 이 나라에서 태어났건만, 꿈속의 세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라니.
아이러니했다.
“하아….”
정처 없이 걷는 모습이 꼭 그녀의 현재 삶과 닮아 있었다.
근린공원을 찾은 그녀는 이 공원의 탄생과 시작을 함께한 오래된 벤치를 찾아 앉았다.
삐거어억…
그녀는 뭔가 답답할 때면 이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쉰다. 벤치는 외진 곳에 위치해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았기에.
넓은 공간을 외로운 상념으로 채운다.
“하아아아….”
“…한숨에 땅이 꺼지겠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방금 말을 건 상대가 벤치에 앉아있다는 것도, 그가 앉을 때 오래된 벤치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도 인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에 의식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옆에 앉은 사내를 보았을 때 그가 긴 코트에 중절모를 썼다는 걸 알아보았다.
얼굴은… 보지 못했다.
아니, 보았어도 아까 전처럼 잊을 뿐이다.
한소미가 상대가 아닌 앞의 텅 빈 공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민이 있어서요.”
“고민? 털어놔 보지 그래.”
“그럴까요? 흠흠….”
한소미는 옆에 앉은 남자가 처음 본 상대임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어쩐지 이 남자와 함께 있다면, 어떤 순간에도 위태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행복하지 않아요.”
“…뭐?”
“노력해서… 원하던 것을 이뤘어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고 또… 남들 다 즐기는 평범한 대학 생활도 누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째서냐?”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 맞을까요?”
“…….”
“분명 원했는데, 돌이켜 보니 그저 남들이 바라는 삶을 따라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헷갈려요.”
“생각이란 건 바뀌기 마련이다. 과거엔 옳았으나 현재엔 틀릴 수도 있는 법이지.”
한소미가 축 처진 채로 사내의 얘기를 들었다.
“생각이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에 나는, 뭐든 혼자서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나… 지금에 와서는 그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스윽…
남자가 한소미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살아오며 모든 것을 이뤘다, 동시에 모든 것을 잃어보기도 했지. 자유를 찾은 지금, 나는 무엇에 얽매일까.”
씁쓸한 말을 내뱉는다.
“추억이다. 추억하는 것에… 삶은 중독되었다. 다시금… 모험을 떠나고 싶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게 바뀐 내 모습이다.”
쓸쓸하고… 외로운 말을.
“이제는 없는… 그때의 녀석들과 함께하는 걸 꿈꾼다.”
“모험이라….”
한소미는 그 말에 퍼뜩, 환상몽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 모험이라면… 꿈속에 나오는 그런 것들 말이네요.”
“…꿈?”
“가끔, 반복해서 비슷한 꿈을 꿔요. 제가 멋들어진 동료들과 함께 모험하는 꿈을.”
“그 꿈은, 즐거웠나?”
“꿈은 정말이지….”
어땠을까.
어떤 의미였을까.
그곳의 한소미는 마음대로 웃고 울었다. 그게… 정말로 부러웠다.
“행복해 보였어요. 저보다도 훨씬.”
“…한소미.”
“어?”
퍼뜩, 정신이 되돌아온 것처럼 기시감을 느꼈다.
“제 이름을 알아요?”
“그럼, 직접 들었으니까.”
“…내가 말했던가?”
기시감은 더욱 커졌다.
“작별할 시간이군. 더는 머무를 여유가 없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때 답을 듣지 못했으니 이번엔 듣고 싶군.”
남자가 물었다.
“…시간 여행의 소감은?”
“당연히 최고였어요! …어라?”
마치 미리 정해진 답처럼 툭 튀어나오는 말. 어째서일까? 시간 여행이라니…
그 순간, 한소미에게 엄청난 두통이 찾아왔다.
“으으윽… 머리가….”
영혼에 각인된, 특별한 기억과 함께.
– …그럼, 돌아가지. 이름은?
– 네?
– 이름, 네 이름 말이다.
– 하, 한소미요. 제 이름 모르셨나요?
– 이름은 상대에게 직접 들어야 그 의미를 지니는 거다.
“으으으으으….”
– 나는 변한다.
– 그게 나다. 네 충고를 받아들이지. 그리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렬한 기억.
– 내 이름은 우르, 시초의 마도사다.
우…르….
한소미가 하얗게 질려, 옆을 바라봤을 때 사내는 이미 없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공원 쪽을 바라봤는데 다행히 남자는 그곳에 서 있었다.
“당신….”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더군.”
“어떻게 여기에….”
“행복했으면… 하고 약소하게 바란다.”
우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먼 곳의 나… 그리고 이곳에 너도.”
파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아-!
빛기둥과 함께, 우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소미에게 후폭풍에 가까운 기억들이 쏟아졌다.
– 망치를 들어, 저 돌을 부숴라.
……
– …그래, 시간 여행의 소감은?
별무덤에서 보냈던 시간 여행의 기억도.
“으으으으….”
– 시대가 변한다. 난 몇 번이고 봐 왔던 것들이지. 날 둘러싼 주변인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대부분 죽었다. 그게… 여태까진 별로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
– 어쩐지 다음 시대에 네가 없다면 조금 심심할 것 같다.
……
– …쟈마드, 그녀를 다음 시대에 데려가줘.
“으흐으윽….”
숨이 벅차오르고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그때의 그 기억 전부.
다시 마주할 수 없는 추억은 흉터와도 같다.
그녀는 소망한다.
다시금, 그때로.
제발… 제발…
그 순간 떠오르는, 아침의 환상몽.
– 내 이름은 니에르라고 해.
그래, 네가 있었어!
– 난… 행복을 주고 싶었어.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행복이라는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몰라. 그래서… 네게 맡기려 해.
날 돕고 싶다고 말했지.
– 네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줄게. 내 마지막 힘… 첫 용의 힘이야. 무엇이든, 네게 기적을 이뤄줄 테니 이 힘으로….
네가 이 모든 순간을 예언했다면…
– 진정한 행복을 그 손으로 직접 거머쥐어.
“나를… 날 데려가줘!”
그곳으로, 다시금.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그녀의 손목에 새겨지는 용의 문양.
판데아에서 새겨졌던 문양과 일치했다.
니에르는 행복을 소망하는 용.
생전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 딱 한 사람만큼은 니에르의 날개 아래에 몸을 뉘인다.
[니에르가 신성 절기 : 행복한 용을 사용합니다.]
[여력이 되는 한 대상의 소망을 이뤄줍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빛줄기가 한소미를 감쌌다.
에필로그 2화
우르가 한소미를 만나고 판데아로 되돌아온 지도 벌써 한 달째.
그는 되돌아온 직후, 미련이라 이름 붙인 기계 장치를 부숴버렸다.
멍청이, 한심한 놈이라 투덜거리며.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다운 행동 같기도 했다.
그는 변했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쓸데없는 일에 매달렸더니 밀린 업무가 한참이나 있군. 그중 제일 급한 건… 이쪽인가?”
– 여기는 허구언날 전쟁만 하네.
– 인간은 추악하다! 우우우
– 쓰레기!
광기다.
그의 눈에 광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째서지….”
어째서 천 년 동안이나 방문을 허락받지 못했던 광기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을까.
이 우주에… 강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혹은… 누군가 또 광기를 이용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다.
스윽…
그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별 하나.
“에라곤… 징조도 없이 찾아온 것치고는 처음 보는 규모로군.”
저만한 별이 판데아에 추락한다면, 전례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막아야겠어.”
그가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선다.
* * *
판데아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다.
대륙 중심부에 자리 잡은 거대한 세계수, 흰 나무에 다가가면 저주를 받는다는 전설이.
전설은 이따금, 과장된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흰 나무의 전설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실제로 경고를 무시하고 그곳에 다가갔다가 변을 당한 자들이 수두룩하다.
나무 주변을 가로지르려 한 병단 자체가 큰일을 치른 적도 있으니, 여전히 건재한 전설이라 말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누구도 흰 나무에 다가가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 누군가 잊을 만하면 다시금 전설을 떠올리게 될 정도로 큰 사건이 발생해 계속해서 금지로 지켜져 온 장소.
지금 그 나무가 있는 곳에, 한 순례자가 다가가고 있었다.
수행을 핑계로, 흰 나무에 다가가려 했던 순례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몇십 년을 주기로 한 번씩은 있는 사건이었다.
저벅…
저벅…
순례자는 이곳에 그러한 전설이 있는지 아예 모르는 것처럼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저벅…
흰 나무는 그가 오르는 산꼭대기에 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오르면, 흰 나무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뚝…
누군가 순례자를 멈춰 세웠다.
– 더는 안 돼, 흰 나무에는 오를 수 없어.
순백의 수호자들이었다.
순례자가 묵직한 음성으로 그들에게 답했다.
“나는 이곳에 올라야만 한다. 비켜 주겠나?”
– 너는….
순례자의 입에서 회한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왔으니.”
수호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순례자가 누구인지, 그의 껍데기 속 영혼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스윽…
– …만나도록 해. 어쩌면, 이 역시 숙명일 테니.
순례자가 미소 지으며 그들을 지나쳐 올라갔다.
저벅…
저벅…
마침내, 흰 나무가 있는 산꼭대기에 다다른 순례자.
솨아아아아아아…
기분 좋은 바람이 떨어진 잎으로 작은 와류를 만들었다.
저주는… 없다.
그래, 이곳에 저주 따위는 없다.
흰 나무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일 뿐.
아침의 씨앗, 밤의 씨앗.
경이로운 흰 나무를 만들어 낸 두 존재.
흰 나무는 우뚝 섬으로써 이 땅의 모든 존재를 수호한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의 번영을 이끌었다.
순례자는 흰 나무의 힘을 탐했던 다른 침입자들과는 다르다.
그의 관심사는 흰 나무가 가진 힘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힘 따위, 원할 리가 없었다.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고,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는다.
“…때맞춰 왔군.”
그가 원하는 건, 흰 나무의 열매였다.
투둑…
쿠우우우웅-!
순례자가 힘을 조율하자, 흰 나무에 영근 두 개의 열매가 땅으로 떨어졌다.
저벅…
저벅…
열매에 다가가는 순례자.
후우우웅…
그의 손에 깃든 마력이, 열매의 껍질을 부쉈다.
쩌적…
쩌저저적…
콰지지지지직-!
열매의 껍질이 메마른 땅이 갈라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순례자가 잠시 침묵했다.
열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멍하니 부서진 열매를 바라보던 그에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에이! 재미없어! 놀라는 척이라도 좀 해야지!”
“누이… 그러게, 이런 장난은 안 먹힐 거라 했잖아.”
“뭐 어때! 오랜만이잖아, 그치?”
순례자가 서서히 뒤로 돌았다.
붉은 머리에 돋아난 흰 머리만 따로 왕관처럼 땋은 요정.
마찬가지로 푸른 머리에 돋아난 흰 머리를 왕관처럼 땋은 요정.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자들이 팔짱을 낀 채로 웃고 있었다.
“그래… 정말로 오랜만이잖아, 쟈마드.”
스으윽…
순례자가 후드를 벗었다.
툭 튀어나온 엄니와 험악한 인상.
그리고 거대한 덩치까지.
이곳을 찾은 순례자는 쟈마드였다.
오랜 수행을 끝으로, 과거의 기억과 힘을 되찾은 그다.
그가 옛 동료인 쌍둥이 기사를 만나러 왔다.
웃음기 가득한 대화였지만, 사실 그 이면엔 다른 감정들이 존재했다.
슬픔과 그리움이다.
쟈마드가 양팔을 살짝 벌렸다.
“오랜 친구여.”
그가 히죽 웃으며 쌍둥이 기사를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으으윽! 허리 부러져!”
“놓으시길! …경고합니다!”
쟈마드는 마침내, 번뇌를 끝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편안해진 것이다.
그의 품에 들어온 쌍둥이 기사가 움직임을 멈추고 물었다.
“모든 게… 끝난 거지?”
“…그래.”
쟈마드의 말에 카렌이 눈물지었다.
“다행… 다행이다….”
“…….”
“전부, 잘 된 거구나.”
“힘든 싸움이 있었다. 하지만….”
쟈마드가 시원한 웃음으로 답했다.
“결국엔 이겨 냈지.”
“으으으….”
“해냈군요, 쟈마드. 그리고… 강설.”
강설의 이름이 나오자, 쟈마드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었다.
“…쟈마드?”
“그러고 보니, 강설은 같이 오지 않은 거야? 우리가 잠든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쟈마드는… 선 채로 굳어버린 것처럼 말을 잇지 못하다가 힘겹게 운을 떼었다.
“강설은… 떠났다.”
“…뭐?”
“그게 무슨….”
“모든 짐을 짊어지고… 생명을 운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우산이 되었다.”
그건 꼭….
“마치, 너희가 한 선택처럼.”
“…거짓말.”
“전부, 사실이다.”
“안 돼… 안 돼, 그럴 수는….”
카렌의 몸이 거세게 떨려 왔다.
온몸으로 오열하기 시작하는 그녀.
그녀의 울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럼 어째서… 우리를 깨운 거야, 쟈마드?”
“…….”
“녀석의 희생으로 전부 제자리를 찾았다며? 그런데 어째서….”
쟈마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얻게 된 건, 반쪽짜리 자유다.”
“…….”
“적어도 이 싸움에 끼어든 너희와 나에겐 그렇다는 얘기지.”
“그 말은….”
“싸울 것이다. 싸워야만 해. 녀석의 곁에서.”
그가 쌍둥이 기사에게 물었다.
“나는 투쟁을 이어 나가려 한다.”
“그게 모처럼 얻게 된 자유를 해치게 될 텐데도?”
“진정한 자유는 투쟁으로부터 비롯된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건 사양이야. 그리고….”
피식 웃는다.
“건방진 녀석이 이 몸을 깜빡하고 두고 갔더군.”
카렌은 이제, 울음을 그쳤다.
“날… 도와주겠나?”
쌍둥이 기사가 묻는다.
“…뭐부터 하면 돼?”
“언제 시작할 생각이죠?”
* * *
“좀 같이 가!”
“길이 좀 험하군요. 이런 곳에 살았던 겁니까, 쟈마드?”
그들은 먼 길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 와 있다. 그 여행길에, 쟈마드는 쌍둥이 기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에… 천상이라고? 가 보고 싶네.”
“이름만 천상이지 실제로 본 광경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야?”
“그런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이었겠지.”
말을 타고 여행하는 그들은, 여행 그 자체를 즐겼다.
비를 피하려 이동하는 도중에도 카렌의 장난기는 계속됐다.
그녀는 비를 맞으러 나온 개구리를 흉내 냈다.
“이거 봐, 여기 개구리! 부우-! 어때, 닮았어?”
“하나도 안 닮았군.”
“그거참 혹평이네!”
“노력에는 점수를 주도록 하지.”
“참 고마워라! 칫….”
카루나가 옆에서 개구리를 집어 들었다.
“누이, 이걸 봐.”
“응?”
“개구리. 부웁-!”
카루나가 그녀의 장난을 되받아쳤다.
“풉… 뭐야 그게!”
“큭….”
쌍둥이 기사가 놀라 쟈마드를 쳐다보았다.
“…웃은 거야, 지금?”
“웃으면 안 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쟈마드가 시시한 농담에 웃는 날이 올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생명의 영혼이란 건, 윤회의 고리에 들어섰더라도 마치 각인처럼 새겨져 있어 윤회 후에도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늙고 쇠락한 육체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몸을 얻게 되는 것.
생명은 단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윤회 자체를 새로운 탄생이라고 여긴다.
이와 대비하여 쟈마드, 혹은 그에 근접하는 초월자들은 수행을 통해 영혼에 새겨진 기억을 떠올렸기에 윤회 전과 다를 바가 없다.
즉, 쟈마드가 윤회를 통해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닌… 그 스스로 변한 것이다.
큰 사건은 큰 충격을.
큰 충격은, 많은 것을 바꾼다.
쟈마드에게 일어난 변화 역시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미리 말하지만, 쟈마드 너는 이런 거 하지 마. 안 웃어 줄 거니까.”
“…그건 좀 아쉽군.”
“히히… 아무튼, 날씨가 좋아.”
“…비를 피하고 있는 와중이다만.”
“그냥 좋아. 그냥….”
쏴아아아아아…
셋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지만, 해맑게 웃고 있었다.
“모든 게… 좋아.”
“…….”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이상한가?”
“아니, 이상하지 않다.”
“흰 나무에 잠들 때 생각했어.”
카렌이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깨어나면… 모두가 있을 거라고. 모두… 기다렸다고 말해 줄 거라고….”
“…….”
“뭐, 그렇다는 거지.”
쟈마드가 선두로 높이 올라선 후에 말했다.
“도착했군.”
“…전혀 안 듣고 있었어?”
“들었다, 다만 푸념보다는 현실에 집중하는 성향이라.”
“푸념은!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지.”
카루나가 쟈마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곳엔 왜 온 겁니까?”
“여기가 어디인 줄 아나?”
“당연히 모릅니다.”
“당연히 모르지.”
둘이 동시에 대답하자, 쟈마드가 설명했다.
“뾰족 바위산이다.”
“아… 그!”
“이곳은 대지의 어머니, 탄크리드를 섬겼던 나의 부족… 바위 어금니의 보금자리였다. 뭐, 과거의 이야기긴 하지만.”
“지금은 다르겠지?”
“다르지, 역사는 몇 차례 바뀌었으니. 이 산도 그만큼 자주 주인을 바꾸었다. 다만….”
쟈마드가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겼다.
“몇 번의 윤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난 이곳에 태어난 적이 있었다.”
“그게 왜?”
“재밌는 일이더군. 기억을 끄집어내 보니, 그 무렵에도 이 뾰족 바위산엔 대지의 어머니를 섬기는 부족이 자리 잡았었다.”
“쟈마드 너도 그 부족이었겠고?”
“그렇다. 당시엔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가던 카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게 왜?”
“부족엔, 하나의 의식이 있었다. 의식을 치러 그들의 보호자인 대지의 어머니를 부르는 것이지.”
“…가능한 일이야? 얼마나 멀리 있을 줄 알고?”
“그야 원래라면 그럴 테지만… 못할 것 없지.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빠른 존재니까.”
산의 정상에서 손을 휘젓자, 무언가 가루 형태로 흩날렸다.
처음 보는 주술에 카렌과 카루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
쟈마드가 웅얼거리며 의식을 치르자, 가루는 서서히 색을 띠며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스으으으으으…
“이건….”
곧, 밤하늘에 오로라가 펼쳐졌다.
“어디서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지.”
툭…
툭…
“…이런.”
갑자기,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이것도 의식이야?”
“아니,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는 비.
폭우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그때였다.
콰르릉-!
내리치는 번개를 바라보며, 하늘을 응시하는 셋.
그러나,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 어디에도 대지의 어머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의식, 잘못된 거 아니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부족의 일이라면 수백 년도 더 된 일일 거 아니야? 이 산의 주인도 그 와중에 몇 번이나 바뀌었을 거고.”
“네 말이 옳다. 하지만….”
쟈마드가 웃었다.
“그녀는 기억하겠지. 산의 주인은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콰르르릉-!
“대지의 어머니는 늘 한 명뿐이었다.”
후우웅…
후우우우우웅-!
산천초목이 떨기 시작했다.
모든 자연이 옆으로 물러나며 떨었다.
“이건….”
“그래….”
후우우우우웅-!
하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존재.
절벽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고룡(古龍).
전성기의 탄크리드와 비교해보아도 몇 배는 더 거대한 크기.
하늘의 별을 박아넣은 듯한 날개와 분위기에 셋은 압도당한다.
우르와 함께, 윤회에서 벗어난 유이한 존재.
천년을 살아온, 대지의 어머니.
“대지의 어머니여….”
“…….”
쏴아아아아아…
용은 무심히 쟈마드를 내려다볼 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탄시아, 실로… 오랜 침묵이었구나.”
“…….”
“모든 것을 떠올렸다. 너의 외로움은… 끝났다.”
그 말과 함께, 용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 우으으으으….
“함께 가자.”
거대한 용이 자그마한 아이로 변하기까지 숨 한 번 내쉴 시간만큼도 소요되지 않았다.
탄시아가 양팔을 벌린 쟈마드에게 폴짝 뛰어와 안긴다.
“으아아아아앙, 삼촌! 기억해줬구나!”
– 흠흠… 혹시, 내 이름을 아느냐?
– 탄시아 님 아니십니까?
– …아직은 떠올리지 못했구나.
쟈마드의 기억 속 탄시아는 그를 여러 번 알은체 해왔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당시에 그녀를 떠올리지 못했었다.
쌍둥이 기사가 탄시아를 끌어안았다.
“탄시아… 탄시아였구나.”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탄시아.”
“으아아앙! 이제 어디 안 가는 거지? 나, 나… 이제 모두를 잃는 게 무서워!”
천 년이 흘렀어도, 그녀의 성정은 여전했다.
판데아의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대지의 어머니이지만, 셋에게는 그저 어린아이로만 느껴질 정도로.
마치 그때처럼.
그래, 그때처럼.
에필로그 3화(完)
일행이 에라곤의 예상 추락 지점에 도착한 지 3일.
아직, 추락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쟈마드는 이들에게, 앞으로 벌일 일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하고 있었다.
“추락하는 에라곤의 힘을 이용하려 한다는 거지?”
“그래.”
“흐으음… 불사가 생각나는 방법이네.”
에라곤.
시대 유성의 또 다른 이름.
불사는 한 차례, 에라곤의 힘을 이용해 멸망한 몬트라 제국을 부활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결말이 그려지지 않는걸? 에라곤이 그만한 힘을 가진 거야?”
“평범한 에라곤이라면, 전혀 그렇지 않지.”
쟈마드가 이어서 말했다.
“기괴하리만치 거대한 에라곤이다. 이 힘을 이용한다면 순간적으로 상식 밖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겠지.”
“그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부정하진 않겠다.”
“흐으음….”
카렌이 쟈마드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아직 징조도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이렇게 일찍 이곳으로 향한 걸까?”
“그건….”
쟈마드가 미소를 지었다.
“뜻밖의 만남을 기대해서겠지.”
“…설마?”
그의 예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 * *
며칠이 지난 후, 그들이 있는 장소에 누군가 방문했다.
“…이거, 곤란하군.”
4인을 바라보며 난색을 표하는 남자.
“우르!”
“여전하구나, 탄시아.”
우르에게 달라붙어 얼굴을 비비는 그녀.
우르는 굳이 그녀를 밀쳐내지 않았다.
그리고 쌍둥이 기사와 쟈마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한자리에 모였군. 그럴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우르는 은거했기에, 쟈마드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를 불러내면 그뿐이다.
에라곤의 이상 징후를 발견한 그가, 이 자리에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싱긋.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우르.”
“그래, 아주… 오래되었군.”
우르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우르, 입꼬리 이상해!”
탄시아의 말대로였다.
정말 놀랍게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이곳을 찾은 직후부터 은은한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음을 발견하고 조금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구제 불능이 되었군.”
쟈마드는 그와의 재회를 예상했지만, 정작 우르는 이들과의 만남을 예상하지 못했다.
늘 흘려보냈던 세월처럼, 이번에도 역시 홀로 시련을 견디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추억을 공유하는 그들이 이 시기에 한자리에 모일 줄이야.
“과연… 그래서였군.”
“무슨 말이야?”
“에라곤이 어째서 그토록 거대한 건지. 이제야 알겠어.”
판데아에 초월자들이 태동했다.
기괴하리만치 거대한 에라곤의 존재가 그들을 불러 모았는가?
사건의 선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쩌면 그들의 모임 자체가 에라곤을 거대하게 만든 이유일 수도 있으니.
“우르.”
탄시아가 우르를 불렀다.
“어째서 여기에 온 거야?”
“그야 에라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순간, 우르가 뭔가를 눈치챘다.
“…에라곤을 노리는 것이군.”
쟈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지? 그만한 힘을 가졌어도 힘이 부족한가?”
“힘을 원해서가 아니란 걸 알 텐데.”
“…….”
우르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측해냈다.
“녀석을… 찾을 생각이냐?”
이 자리에 없는 단 한 사람.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럴 생각이다.”
“불가능. 녀석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우르는 이 계획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설명했다.
“에라곤의 힘은 보존되지 않는다. 아마도 추락 직후, 혹은 추락 중에만 그 힘이 유지된다. 물론 그 힘은 평범하지 않지만….”
카루나가 물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강설을 찾는 건… 마력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녀석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카렌과 카루나는 천상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완벽히 아는 게 아니었기에, 쉽사리 예상하지 못했다.
“…녀석은 우리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을 거다.”
“…….”
“신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그보다도 더한 존재들과 싸우며….”
입술을 깨무는 우르.
“홀로 그 모든 책임과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과연 그럴까?”
쟈마드가 우르의 생각에 의구심을 품었다.
“녀석은 정말로, 그 모든 걸 홀로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건….”
“가능할 리 없다. 그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 건.”
우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알고 있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이면의 진실이었을 뿐.
“나는… 녀석을 절대로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우리의 도움 따위… 바라지 않을 텐데도?”
“그래, 설령 그렇더라도. 힘은… 팽창하기 마련이다. 처음에 녀석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듯, 우리 역시 언젠가 녀석에게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 그저…
함께하고 싶었다.
다시, 예전처럼.
모두가 그런 미래를 그린다.
“녀석이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안다는 것만으로… 견딜 수가 없다.”
“…….”
우르 역시, 언제가 되었든 그와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만 것이지.
“역시… 기각이다.”
“어째서지?”
“의도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방법 자체가 없다.”
우르는 일행에게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에라곤은 순수한 힘 그 자체. 강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면 힘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힘을 변환해야만 해. 그것도 추락 혹은 그 직후 짧은 시간에.”
“…….”
“그것이 가능할 리 없다. 그 누구도….”
그때, 갑작스럽게 이 대화에 끼어드는 자가 있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팟-!
순식간에 모두의 경계심이 극도로 치솟았다. 이 자리에 강설을 아는 자가 또 나타날 리 없을 거라 예상했었기 때문에.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저 가면.
두 개가 합쳐져 하나로 이어지는… 종말론자의 가면.
“넌….”
“코돈!”
시간과 운명의 제국 카곤이 만들어 낸 괴물.
그 끔찍한 형상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우르가 긴장을 유지한 채로 말했다.
“광기를 이 세계로 불러온 건… 역시, 너였나?”
“광기… 아아, 그것 말이군.”
코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아니다.”
“뭐?”
“나 역시 원인을 찾는 중이다. 광기의 재침습이 이뤄졌다는 건, 강설의 신변에도 이상이 생겼을 확률이 높으니까.”
코돈의 말은, 조금 이상하게 해석되었다. 마치, 이상이 생겼으니 그것을 막아야만 하는 사람인 것처럼.
“유리코, 장난은 그만.”
그때, 그의 뒤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말에 코돈이 가면을 벗었다.
“한창 재밌을 때였는데, 아스모돈.”
허탈함에 헛웃음을 흘리는 일행.
“그런가… 코돈은 이제 없는 건가.”
“코돈? 아아….”
콰지직-!
이 가면은 저주받은 가면을 흉내 냈을 뿐인 모조품.
“코돈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 사람이 부쉈으니까. 아니….”
중년의 유리코가 말한다.
“부숴줬으니까.”
“…녀석이 하나쯤은 이룬 건가.”
쟈마드가 읊조렸다.
“과거의 자신을 구원해내는 일은.”
“그래, 나와 아스모돈은 그에게 구원받았다. 그러니 이번엔….”
아스모돈과 유리코.
그들이 말한다.
“우리가 그를 구원할 생각이다.”
“아까의 물음으로 되돌아가지. 어떻게?”
“방법은 같다. 그러나, 그걸 실행할 사람이 달라지는 거지.”
우르는 즉각, 이 말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의 시선이 유리코에게서 아스모돈으로 옮겨갔다.
“…너로군.”
“우주에 거대한 공명을 만들어 낼 생각입니다.”
“미친 짓이다.”
“미친 짓 하려고 여기에 모여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난….”
우르가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초월자가 아닌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계획이 성공할 확률은 희박했다. 그러니….
“…돕겠다. 별수 없군.”
카렌이 웃었다.
“캬하핫! 그럴 거라 생각했어!”
* * *
우우우웅…
적색 광채가 뚜렷해지는 하늘.
시대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유성이 아무런 대비 없이 판데아에 곤두박질치는 순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계획을 다시 설명하지. 우선 에라곤의 추락을 막는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너희의 시대력을 아스모돈에게 전달한다. 아스모돈은 그 시대력과 에라곤의 힘을 끌어모아 변환한다.”
이제 예상되는 위협에 대해 설명할 차례.
“서로의 힘이 이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3초에서 5초 정도다. 5초 동안….”
우르가 경고했다.
“몸이 터져나가지 않도록 집중해라.”
“다른 위협은?”
“일단 살아남으면, 이후의 일에 대비해라. 어떤 일이 발생할지… 솔직히 예측 불가능한 수준이니까.”
집중력이 끊어져 5초 안에 몸이 터져나가지 않게 하는 것만 해도, 아마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일 것이다.
엄청난 힘을 순식간에 변환하여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 아스모돈은 물론이고, 초월자들의 힘을 자신의 몸에 축적한 후에 안정적으로 아스모돈에게 흘려보내야 하는 우르 역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가.
…이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 먼 곳에 도달한,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유리코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온다, 준비해.”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문장을 내뱉어 완성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으니까.
시대 유성 에라곤이, 추락을 시작했다.
피유우우우우우우…
타오르는 유성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가속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
멈추는 것은, 유리코… 시간의 대마도사인 그다.
짜아아아악-!
[유리코가 환상 절기 : 시간이 멈췄으면 해를 사용합니다.]
[대상을 한정된 시간 속에 가둡니다.]
콰지이이익-!
드드드드드드드드…
에라곤은 적색 흉성.
거대하단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하늘을 집어삼킨 모습이었다.
끼기기기기긱…
유리코가 녀석을 잠시나마 멈춘 게 기적일 정도로, 포악한 힘.
“으으으아아!”
에라곤이 다시금, 서서히 추락을 재개했다.
툭-!
유리코는 실핏줄이 터질 만큼, 집중했다.
이는, 이 미친 계획에 동참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흐으읍!”
“으으으으으….”
휘오오오오오…
초월자들의 시대력이 우르에게로 이어졌다.
육체의 한계까지 앞으로 5초.
“아스모돈!”
콰아아아아아…
그 전율적인 힘을 전달받은 아스모돈이 서서히 추락하는 에라곤에 접촉하는 데까지 1초.
시간이 없다.
아.
붕괴하려는 정신을 다시 이어붙이는 데 또 찰나가 소모된다.
변환 시행.
– 강서어어어어얼!
[아스모돈이 신성 절기 : 악!을 사용합니다.]
[마력 소모량에 비례하여 넓은 범위에 언령을 전파합니다.]
– …서얼.
– ………얼.
성공.
에라곤의 힘을, 모두의 시대력을 이용해 단번에 마법으로 변환했다.
푸스스스스…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에라곤.
모두, 탈진한 채로 쓰러진다.
“허억… 허억….”
“하아아… 하아….”
목숨을 잃은 자는 없다.
하지만….
“캬하핫… 통쾌하게 실패했네, 우리!”
“…아무런 반응도 없군.”
“예상했던 결과다.”
아무런 응답이 없다.
온 힘을 끌어모아 신호를 보냈는데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닿지 않는 세계로 향해버린 것은 아닌지.
그는….
“그보다, 문제가 생겼다.”
“무슨….”
“저길 봐라.”
우르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붉은 별이, 우수수 생겨났다.
“…맙소사.”
“설마….”
우르가 말했다.
“모두 에라곤이다. 아무래도… 이 우주엔 강설을 싫어하는 자들이 많은가 보군.”
으드득…
유리코가 말했다.
“막아야만 한다. 우리가 벌인 일이니.”
“저 많은 숫자를 대체 어떻게 감당….”
그때였다.
하늘을 수놓은 붉은 별들이, 점차 줄어갔다.
“…어째서?”
“착각이었나?”
우르가 경악한다.
“아니… 아니다. 모두….”
부수고 있다.
모조리 부숴나가고 있다.
마치 단 하나의 에라곤조차,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누군가의 의지처럼.
그럼에도, 재앙은 초래된다.
살아남은 세 개의 에라곤이 판데아를 향해 강하한다.
여기 모인 이들이 저 많은 숫자를 동시에 막을 수는 없다.
탈진한 몸을 이끌고 비척거리며 일어서는 초월자들.
하늘을 본다.
붉은 별들이 하늘을 불태울 때, 조용히 내려앉는 밤을 본다.
촤아아아-
운명을 가르는 검이, 모든 에라곤을 일시에 무력화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밤이 찾아온다.
시간이 멎는다.
유일하게, 유리코가 더듬거리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아… 아아….”
무슨 말이라도 전해야만 한다.
당신이 나를 구원했어.
끝없는 심연에서, 나를… 그래. 당신의 과거를.
그러나, 전하지 않아도 전해진다.
“으흑… 으으….”
전할 수 있는 게, 울음뿐일지라도.
하늘을 걷는 이가 아래를 들여다본다.
이곳에 모인 이들을 바라본다.
“장막은….”
그리고 말한다.
또 다른 교차로에 모인 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이 순간까지도, 기다려 왔다.”
– 카곤은 이 순간까지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유리코는 알아챘다.
울분에 사로잡혀 외쳤던 과거의 그 말이, 강설의 답을 통해 차분한 울림으로 되돌아왔다는 걸.
비루했던 과거와, 쓸쓸한 미래가 맞닿는다.
비로소, 찬란해지는 과거와 쓸쓸하지 않은 미래.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로잡는다.
둘의 투쟁이, 전혀 의미 없지 않았음을 온 우주에 알린다.
우르는 깨닫는다.
“광기를 부른 건… 너였어.”
광기는 비극에 운다.
비극을 목격했기에.
광기는 희극에 웃는다.
희극을 목격했기에.
그들은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저, 본 것 그대로 말하는 자들일 뿐.
강설이 일부러 그들을 불러온 것이다.
자신이 건재함을, 운명에게 맞서는 그가 아직 쓰러지지 않았음을 말하기 위해.
광기가 그의 투쟁을 노래하게 만들기 위해.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자유는 언제나 반쪽짜리에 불과할 수도 있고, 운명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오직 투쟁하는 순간만이, 이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기에.
파직…
파지지직…
정적을 깨는 수상한 징조.
곧…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빛기둥이 떨어져 내린다.
그곳에, 누군가 손톱을 깨물며 서 있다.
“…어라?”
한소미, 늘 그렇듯 우연이 그녀를 새로운 모험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
모두가 이 황당함에 웃음 짓는다.
장막의 둥지로 새로운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모험은, 계속된다.
모험의 끝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 모험이 계속될 것이기에.
[그래요, 검은 이여. 당신의 모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예요.]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하니까요.]
일전, 교차로의 어둠에서 그를 안내했던 운명의 존재가 홀로 중얼거렸다.
* * *
그리고 여기에, 여전히 과거에 얽매인 여인이 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이 다시 넓어진 건, 단절된 세계에서 그녀의 의식이 확장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떠올린 추억이 설원을, 그곳에 지어진 나무집을 다시금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곳에 함께 숨 쉬었던 사람만큼은 거짓으로라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녀는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부자유 속에서 보냈다.
“으윽….”
“유림… 괜찮아?”
푸른 늑대가 그녀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이곳과 밖의 시간의 흐름이 다른지의 여부 역시도 알지 못한다.
유림이 지나간 시간을 헤아리는 것을 진작에 관두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괴로울 거라면, 멈추는 편이 좋을 텐데.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있으면 괜찮아져.”
그녀는 조금씩 붕괴하고 있었다.
그녀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되었든, 압도적인 시간 앞에서는 그 죄악을 저울에 올리는 것 자체가 무용했다.
어차피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용서받을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에.
그녀의 정신이 붕괴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공포를 낳는다.
언제까지고 이 기다림이 계속될 거라는 두려움이 마치 심해 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찾아온다.
늑대는 말한다.
“유림….”
그녀를 위해, 그녀를 죽이겠노라고.
“가면을 써, 유림.”
“나보고 다시… 야차가 되라는 거야?”
“…그 방법뿐이야.”
그녀를 이 지옥에서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가 다시 야차가 되는 것이다.
늑대는 설득한다.
“그는 오지 않아.”
“…올 거야.”
“야차는 강해, 유림. 널 이 지옥에서 꺼내줄 수 있어.”
유림이 이를 악물고 답한다.
“…맞아, 야차는 강했지.”
그녀가 이미 선택했음을 말한다.
“하지만 유림은 더 강해. 그러니까….”
억눌린 신음으로, 아픔을 토해낸다.
“견딜 수 있어.”
이 죽은 세계는 늘 겨울이고 늘 낮이다. 백야가 끝나지 않는 세계.
마치 그녀에게 망자의 삶을 강요하는 것만 같은 감옥.
–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언젠가는… 그가 신이라도 된다면?
– 에이… 그건….
– 믿어, 뭐든 해내던 사람이잖아.”
유림은 아득해져만 가는 정신을 억지로 지탱한다.
작별의 순간을 추억하며.
“…유림.”
“난… 난….”
“밤이야.”
“난….”
“유림, 창밖을 봐.”
유림이 늑대의 말에 스르륵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찾아왔다.
백야로 멈춰져 있던 세상에, 절대 올 리 없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설마…
그럴 리가, 설마…
끼기이익…
그녀는 삐걱거리는 문을 억지로 열어젖혀, 설원으로 나선다.
설원에, 있을 리 없는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녀의 발자국보다, 조금 큰 발자국.
절대로… 절대로 움직일 리 없는 세계.
그 세계가 서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스르륵, 설원의 눈이 녹아 사라진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다.
“으… 우으으… 으흑….”
늑대는 말한다.
“유림, 네가 옳았어. 정말로….”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가 찾아왔어.”
유림이 죽은 세계에 찾아온 손님에게 다가가 말했다.
“줄곧… 기다렸어, 설아. 우으….”
자신의 기다림을, 말한다.
“여기서… 한참 동안… 나는….”
이제 되었다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며.
“널 기다렸어.”
강설이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며 화답한다.
“나가자….”
각자의 선택은, 새로운 장으로 그들을 이끈다.
“유림.”
투쟁하여 쟁취한 새로운 결말로.
밤이여,
그리고 봄이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