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18
318화
* * *
시현은 반박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단의 우려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표현이 극단적인 것이야 단이 평소 성질대로 평소 하는 소리를 한 것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이곳에 인류 몰살을 진심으로 획책하는 존재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세 번째 감람이 말했다.
“응. 역시 그렇지. 우리도 몰살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해.”
“아니. 전혀 낫지 않다.”
시현이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두 감람은 단의 의견을 더 고려하지 않고 저들 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곧 벽의 마력회로에서 차례차례 빛이 꺼지기 시작했다. 공동 중간의 기둥도 하나씩 빛을 잃었다. 그때마다 쿵 쿵 주위가 진동했다.
천장의 조명을 제외한 모든 장치가 정지하자 첫 번째가 일행 곁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언제 인간들이 이 장소를 발견할지 모르니까 세 번째의 기결과 함께 이곳의 회로를 전부 불태워 버릴 거야. 여파가 있을 테니까 보호막을 칠게. 내 주위로 모여.”
시현이 물었다.
“기결을 태운다니, 괜찮은 건가?”
“안 괜찮지. 하지만 너희가 요구했잖아.”
첫 번째는 팔에 찬 패를 조작했다. 발밑에 푸른 빛의 법력진이 생겨나면서 첫 번째와 세 사람을 감쌌다.
세 번째 감람이 빛이 꺼진 네 개의 기둥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가 마치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대지와 연결되어 거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나는 내 많은 부분을 포기했는데, 이제는 또 그 연결을 끊느라고 온통 박살이 나겠군…. 뭐 좋아. 어쨌든 이미 결정한 거니까.”
그가 제 배 오른쪽에 손을 얹었다. 호란은 그 위치가 그의 기결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이 덮은 곳을 중심으로 그의 상반신에서 힘이 터졌다. 돌로 된 몸이 수 갈래로 금 가며 주홍색 불티가 의복을 뚫고 나왔다.
다음 순간 꺼져 있던 마력회로 전부가 한꺼번에 불꽃과 열을 뿜었다. 공동 전체가 당장 무너질 것처럼 요란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첫 번째가 펼친 법력진 안에는 바람 하나도 끼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진동이 사그라들고 껌벅이던 천정의 조명이 돌아왔다. 벽면은 깊게 파손되어 마력회로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네 개의 기둥도 중간이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그 사이로 세 번째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아…. 정말 기분 별로다….”
그가 불타서 너덜너덜해진 긴 겉옷을 벗어 땅에 떨궜다. 안에 입은 상의도 구멍투성이였다. 타서 뚫린 자리 아래로 보이는 상체에는 굵은 금이 가 있었다. 금 간 틈새에서 약하게 빛이 솟고 있기는 했으나 그 빛은 다른 돌 인간들이 죽기 전보다도 약했다.
호란이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괜찮지 않고, 아프지 않아. 이제 다음 할 일을 하자. 인간의 마법을 보여줘.”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시현은 마력석이 든 대련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첫 번째가 손을 저었다.
“아냐. 그렇게 조그만 기운을 압축하는 건 약간의 참고밖에 안 돼. 최대한 큰 기운을 최대한 작게 압축하는 걸 보여줘.”
“하지만 그리 큰 기운이 어디 있느냐. 세상에서 법력을 거둬간 건 너희이고.”
“왜 없어? 내가 있잖아.”
첫 번째가 자신을 가리켰다.
“내 기결을 풀어서 그 기운을 너한테 줄게. 심산에서 실리카랑 다른 애들이 했던 것처럼. 그걸 써서 마법 시전을 보여줘.”
시현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건…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자아는 어떻게 되는가.”
“자아야 소멸하겠지만, 괜찮아. 여러 번 말했듯이 그건 나한테 죽는 게 아니고, 연구는 세 번째가 이번 대절멸 끝나고서 할 거니까.”
“하지만….”
첫 번째 감람은 시현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띠었다.
“너는 내 자아에 애착을 갖기 시작했구나. 이건 내 본질이 아니고, 언젠가는 풍화되고 변성될 자아인데도.”
“그건… 다르다. 애착 같은 것이 아니라.”
“그럼 뭐야?”
시현이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말했다.
“너희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안다. 너희의 삶도 우리 인간의 삶도 네게는 먼지보다 하잘것없이 여겨진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너와 여러 번 이야기를 했고, 도움을 주고받았고,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고….”
시현의 말은 그답지 않게 점점 두서가 없어졌다. 하지만 호란은 시현의 기분을 알았다. 감람이 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시현에게 있어 그 일은 제 손으로 감람을 죽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시현이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가? 운모가 했던 것처럼 시간을 두고 기운을 모으거나, 너희가 세상에서 가져간 기운을 되돌려서 쓸 수도 있지 않은가.”
“어려워 보여. 지금 세 번째의 몸 상태론 오랜 시간 기다리기가 힘들고, 후자는 모들이 펄펄 뛰고 반대할 거야.”
“그래도 아예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시도는, 무언가 모색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있기야 하지. 하지만 괜찮겠어? 다시 만날 때 너는 멀쩡한 상태의 나하고 싸워야 할 테고, 너나 네 동료가 죽을 수도 있는데.”
감람의 말투는 시종일관 여상했다. 적의도 불안도 없었다. 그래서 시현은 반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대는 결국 모들과 금강의 편을 들 생각인가. 인류의 절멸에 손을 보태겠다고.”
“응. 난 심산에 있을 때와는 기분이 또 달라졌어. 난 역시 별이 끝나는 걸 원하지 않아. 내 자아가 사라지는 건 괜찮지만 내 본질이 멸실되는 건 두려워. 말했듯이 세 번째가 연구를 성공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전에 인간이 별을 멸망시키게 놔둘 순 없어.”
시현은 감람을 잠시 바라봤다.
전부터 이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돌 인간이 별의 존속을, 그 이전에 돌 인간들 자신의 존속을 바라는 한 그들은 인간과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시현은 감람에게 부채감이 있다. 이제 그 부채는 더 커질 것이고, 그것을 갚거나 해소할 길은 영영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적인 감정이었다. 자신에겐 의무가 있었다.
감람이 제 코앞에 빌듯이 두 손을 모았다.
“이해해 줘. 다른 방법이 없잖아?”
시현은 감람이 사과하는 흉내를 내는 것을, 혹은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최악의 상황이 되기 전에 우리 인간들이 뭔가 할 수도 있다.”
“뭘 하게? 너희가 스스로 인간의 수를 줄일 방법이라도 있어?”
“…….”
이번에도 돌아오는 것은 수를 줄인다는 말뿐이었다.
시현은 잠시 침묵한 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고민하는 것으로 오해했는지 단이 시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야. 기분은 알겠는데 무슨 방법 같은 거 고민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대안을 찾아보겠단 말은 더 하지 말고. 내가 말했지? 땅인 하늘인은 놔두고 반민 숫자부터 줄일 궁리 할 거 눈에 선하다고.”
“그래도….”
단과 시현이 말하는 것을 듣던 첫 번째는 어째선지 알쏭달쏭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세 번째에게 몸을 기울이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쟤들 아까도 그 말 하던데, 반민이 뭐야?”
속삭여 봤자 바로 앞이라 어차피 다 들렸다. 단은 좀 어이가 없어졌다.
돌 인간들의 안중에 반민이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인간이 숫자가 많아서 문제라고 하면서도, 제일 숫자가 많은 반민에 대해서는 한 번 입에 올린 적도 없었다. 늘상 땅인 타령뿐이었다.
마법을 쓰는 땅인이나 완력이 강한 하늘인에 비해 아무 위협이 안 되니 없는 취급 당하는 것도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무슨 일로 분쟁이 나든 누가 표적이 되든 덤으로 쓸려나가는 신세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변고가 일어난 후로, 아마도 그전에도 돌 인간이 일으킨 재해와 공격으로 가장 많이 죽은 것은 반민이었다. 없는 취급을 당한다고 정말 없는 건 아니었다.
단의 표정이 나빠지자 첫 번째는 금방 눈치 보는 얼굴이 되었다. 그가 대답을 채근하듯 세 번째를 찔렀다.
기결의 대부분을 태운 이후 내내 맥없이 서 있기만 하던 세 번째가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느릿하게 말했다.
“난 잘 몰라. 지금 시대 인간 문화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두 번째한테 줘서. 혹시 반쪽짜리 말하는 건가?”
“반쪽짜리는 또 뭔데?”
“그건 욕이야. 하늘인들이 땅인을 욕할 때 그렇게 불러. 한 사람 몫을 못 한다고.”
호란이 이상한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아니, 아닌데. 반쪽짜리가 몫 못 하는 사람을 욕하는 말인 건 맞지만 그건 땅님한테 쓰는 말이 아니야. 힘 약한 하늘인한테 쓰는 말이야.”
“참나. 뭐가 그렇게 복잡해? 우리 보기엔 별로 차이도 없는걸.”
세 번째 감람이 투덜거렸다. 첫 번째 감람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 너희한테 그런 구분이 중요하다는 건 아는데, 우리가 그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알아보긴 어려워. 시대마다 바뀌어서 더 헷갈리기도 하고. 애초에 너희가 하는 구분은 우리한테 별 의미가 없거든. 우린 더 단순하게 구분해.”
그가 호란을 손가락질했다.
“너는 하늘인이고.”
다음에 그는 단과 시현을 차례로 가리켰다.
“너랑, 너는 땅인이고.”
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시현의 눈이 커지고 호란이 작게 입을 벌렸다.
돌 인간은, 특히 감람은 인간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의 말이 무슨 착오나 거짓이 아니란 것을 거의 직관적으로 느꼈다.
세 사람 중 아무도 무슨 말을 못 했다.
변명을 했는데도 셋의 얼굴이 더 굳어지고 침묵이 길어지자 두 사람의 감람은 의아한 기색이었다. 세 번째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아. 생각났다. 반쪽짜리 그거, 땅인 맞아. 땅인이 마법을 만들어내기 전에는 하늘인이 땅인을 무시해서 반쪽이라고 불렀어. 틀림없어.”
“마법이 생기기… 전이라고.”
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첫 번째가 말했다.
“응. 그때는 하늘인들이 땅인을 아주 사람 취급도 안 했지. 이름만 봐도 무슨 생각 했는지 알잖아? 오죽하면 하늘과 땅으로 나눴겠어.”
첫 번째는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허공을 보았다.
“사실 우리 입장에선 그 시절이 지금보다 나았어. 마법이 생기고서 땅인들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기 시작했거든. 땅인들하고 하늘인들 사이에 전쟁도 많이 하고. 그래도 그때 땅인들 처지가 우리 보기에도 너무 심했으니까. 인간들에겐 인간의 입장이 있었겠지.”
“자. 여튼.”
세 번째가 손을 저었다.
“나 슬슬 버티기 힘들어지는데. 빨리 정해. 마법 보여 주는 데 첫 번째의 기운을 쓸 거야, 아니면 모들하고 금강하고 협의하러 갈 거야? 두 번째는 추천 안 해. 너희들 실랑이하는 거 기다릴 여유가 나한테 없어.”
첫 번째가 시현을 보았다.
“그래. 어차피 너랑 나는 의견 차이를 못 좁혀. 한 가지 우리에게 공통되는 건 서로 싸우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시현은 짧은 호흡을 몇 번 뱉었다. 그는 이미 그 문제에 결정을 내린 뒤였으나 지금은 정말로 실행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실행하지 않으면 다른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단과 호란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감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알겠다. 네 기결을 쓰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