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3
033화
* * *
“발하라! 더욱 발하라!”
“네 본령이 되어라! 강하하라!”
시현의 목소리가 거듭하여 전장에 울렸다.
그때마다 거석과 대장석이 픽픽 쓰러졌다.
목표삼은 대장석을 다 끝장낸 호란도 종횡무진 날뛰기 시작했다.
원래 하늘인들은 적은 수의 큰 대장석보다 많은 수의 작은 거석 상대에 강했다.
가장 골치 아픈 상대를 시현과 호란이 처리해주니 대열 운영도 수월해지고 사기도 살아났다.
하늘인 대열이 차차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거석의 수도 뚜렷이 줄었다. 승기가 보일 것 같았다.
다만 호란은 마음껏 활약하면서도 약간 낭패를 느꼈다.
대열과 얽히지 않으려면 따로 떨어진 거석을 노려야 했다.
그러다 보면 시현이 올라서 있는 대장석 잔해와 점점 멀어졌다.
여차할 때 시현을 지키려면 거리가 너무 벌어지면 안 되었다.
그때 전열 한쪽에서 몫꾼들의 공격에 거석의 팔 하나가 박살났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커다란 돌 파편 하나가 시현 쪽으로 날아갔다.
호란은 황급히 돌아가려 했지만 시간에 맞출 것 같지 않았다.
그 순간 시현 앞으로 그림자 하나가 솟구쳤다.
수리였다. 번개처럼 움직여 파편을 걷어차 버린 그가 호란에게 외쳤다.
“큰몫꾼은 호위 따위 쪼잔한 데 신경 쓰지 마! 우리 애들한테 맡겨!”
“쪼잔한 일 아니거든! 큰몫이거든!”
호란은 반박하면서 다시 전장에 뛰어들었다.
시현은 걸낭을 치켜 잡았다. 이미 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다.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여기서 치풍관군에게 힘을 실어주어 전장을 단번에 밀어버릴지, 아니면 괴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여력을 비축해야 할지.
시현의 고민을 끊어준 건 괴인 자신이었다.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쪽에서 무서운 기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시현은 곧바로 머리 위에 힘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위쪽에서 기운 넘치는 거체가 쏘아지듯 달려드는 걸 느낀 순간 시현은 힘껏 외쳤다.
“맞서라!”
직선으로 돌진해온 거구가 기운의 장벽과 충돌하며 쾅 하는 파열음을 냈다.
그가 훌쩍 뛰어 멀찍이 물러섰다.
모들은 보이지 않았다. 거구 혼자였다.
시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나타났느냐. 아직 마력석이 꽤 남았다. 매번 도망치는 걸 보면 너희는 법술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느냐.”
“너, 시간 끄는구나. 남은 개수가 넉넉하진 않은가 보지.”
거구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모들과 함께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순한 태도를 보이던 거구였지만 지금 그의 기운은 살기로 흉흉했다.
동료를 공격한 탓일지도 몰랐다.
시현은 새 마력석을 쥔 채 적을 살폈다.
법술에 꿰뚫렸던 왼팔은 겉보기엔 완전히 멀쩡해져 있었다. 상처도 흠집도 없었다.
그러나 왼팔 내부의 기운이 곳곳에서 끊어져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것을 시현은 느낄 수 있었다.
등허리께에도 기운이 크게 흐트러져 있었다.
아마 모들에게 마지막으로 쐈던 법술을 대신 맞았을 것이다.
모들을 공격했을 때 이미 눈치챘다. 이들은 결코 다른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닐뿐더러, 굳이 말하자면….
거구가 땅을 찼다.
수리와 몇몇 하늘인이 그를 막으러 달려들었지만 일순조차 발을 묶지 못했다.
시현이 황급히 마력석을 들었다.
“발하라!”
거구의 정면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며 불길과 폭음을 흩날렸다.
그러나 거구는 타격을 아랑곳 않고 온몸으로 폭발을 받아내며 전진했다.
불길을 뚫고 나온 그가 시현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새 주문을 완성할 시간이 없었다.
공성추로 들이치는 듯한 호란의 발차기가 거구의 팔꿈치에 꽂힌 건 그때였다.
호란을 무시하고 시현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던 거구는 예상외의 위력에 자세를 허물어뜨렸다.
시현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발하라!”
호란이 공격한 반대쪽, 왼쪽 어깨와 상완에서 다시 한번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발이 일었다.
거구는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시현도 그 틈에 거리를 두었다. 호란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주문에 맞은 거구는 의복이 너덜너덜해지고 상체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피부 위, 명치를 중심으로 문신 같은 문양이 퍼져 있었다.
주황색과 녹색으로 얽힌 그 무늬는 생긴 것만 보면 거석의 나선무늬와 똑같았다.
“너, 정체가 뭐야? 거석하고 무슨 관계야?”
호란이 물었다. 거구가 냉정한 눈으로 호란을 보았다.
“하늘인, 방해하지 마. 넌 약해.”
“어쩌라고? 넌 죽었어.”
호란이 뛰쳐나갔다.
그는 자신이 힘과 속도에서 상대에게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여러 번 마법에 맞았다. 타격이 없을 리가 없었다.
거구가 호란을 향해 휘두른 주먹을 호란은 두 팔로 아슬아슬하게 쳐냈다.
뼈가 부서질 것 같은 위력이었지만 버텨냈다.
호란의 생각대로였다. 거구는 다쳤던 왼팔에 제대로 기세를 담지 못했다.
호란은 치고 빠지며 항상 거구의 왼팔 사정거리 안에서만 움직였다.
거구의 움직임에 초조한 기색이 늘어났다.
그의 불리한 점은 또 있었다. 호란과 싸우면서도 그의 신경은 온통 시현에게 쏠려 있었다.
호란은 생각했다. 멍청이, 신경 써봤자 제가 어쩔 거야.
시현이 또렷이 말한 것을 호란도 거구도 들었다.
“읽었다, 네 기결.”
거구의 눈이 커졌다.
“네 정수로 화하라. 쏘아져라!”
시현이 마력석을 놓으며 외쳤다.
강희아가 건넨 색동 끈이 불타오르며 가운데로부터 굵은 빛줄기가 뻗었다.
광선은 크게 반원을 그리며 거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명치 왼쪽 아래, 두 색의 무늬가 교차하는 부분이 정통으로 꿰뚫렸다.
“억!”
거구가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호란은 두 발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거구의 꿰뚫린 상처에서 주홍색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산 자라면 누구나 불길하게 여기는 거석의 빛과 같은 색이었다.
“호란, 쳐라!”
시현이 외쳤다. 호란은 이미 거구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콰앙 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커다란 몸뚱이가 풀썩 나가떨어졌다.
호란의 주먹이 격돌한 곳에서부터 거미줄 같은 금이 뻗어 있었다.
거구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순식간에 빛깔과 형태가 빠져나갔다.
머리칼, 이목구비, 피부와 골격을 빚어내고 있던 모든 것이 모래와 자갈이 되어 부스러져 내렸다.
남은 것은 누더기가 된 천 조각과 흙더미뿐이었다.
기괴한 광경에 놀란 것도 잠시, 수리가 손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이, 이겼다아!”
주변의 하늘인들도 함성을 올렸다.
호란도 시현을 향해 웃으려고 했다.
그리고 호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위를 보았다.
호란과 시현만이 아니라 모두의 안색이 변해 있었다.
느껴본 적 없는 불길한 기세가 전장을 뒤덮었다.
“아- 아- 아- 아-”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섬뜩한 목소리가 서쪽 절벽 위로부터 울려 퍼졌다.
절벽 위를 올려다본 수리는 흠칫했다.
절벽에 진 치고 있었을 우군의 깃발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북소리도 함성 소리도 없고 몫꾼들이 움직이는 모양도 보이지 않았다.
절벽 가장자리에 사람 하나만 서 있었다.
“아- 아- 아- 아—-!!!!”
소리지르고 있는 것은 모들이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누구의 피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암장아! 암장아아! 아아아! 내가 잘못했어어어!”
그의 절규와 함께 전장에 남아 있던 거석들의 움직임이 차례차례 멎었다.
기결에 빛이 꺼지고 형체가 허물어져 내렸다.
그게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 쪽으로부터 머리에 색 띠를 한 사람이 황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회의 때 보았던 별군 대장이었다.
그는 시현에게 커다랗고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군영에 있는 마력석을 전부 모아왔소! 이걸로 저자를 해치워주시오! 그대라면….”
시현은 주머니를 받아 들었지만 안색이 새파랗게 되어 있었다.
그가 급하게 소리쳤다.
“관성에 대피 신호를 보내라! 너희 큰머리를 피신시켜라! 어서!”
“무슨….”
뭔가를 깨달은 수리가 별군 대장에게 외쳤다.
“하라는 대로 해!”
“아——-!”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던 모들의 절규가 멈췄다.
대신에 산이 울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치풍관이 일어섰다.
수리는 그 광경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세상이 끝나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남쪽 성벽을 떠받치고 있던 암벽과 중군 후방이 진을 친 둔덕이 엎드린 사람 모양을 갖춰가며 서서히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쩌억 갈라진 지반 틈으로부터 괴괴한 주홍빛이 새었다.
정연하게 지휘를 따르던 대열 몫꾼들이 경악으로 아우성치며 흐트러졌다.
언제나 든든하게 성을 떠받치고 적으로부터 모두를 보호해주던 산정 암벽이었다.
그것이 이제 그들을 파멸시킬 재앙으로 화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다가 아니었다.
무너진 산정 한쪽에서부터 치풍담 호숫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장은 작은 물줄기였으나 곧 폭포가 되고 사태가 될 터였다.
수리는 무엇에 더 절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 죽을 것이다.
산다 한들, 치풍담을 잃으면 어차피 치풍관에 그 이후는 없다.
암벽은 이제 뚜렷하게 장군석의 형태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머리가 올라오고 상체가 비스듬히 섰다.
그 위에서 성벽이 과자 조각처럼 부스러지며 흘러내렸다.
수리는 한 번에 터져나올 호숫물을 보고 싶지 않아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수리가 본 것은 생각도 못 한 광경이었다.
점점 굵어지며 쏟아지던 물줄기가 보자기에 감싸인 듯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무너지던 지반이 도로 형태를 갖추며 물줄기를 밀어 올렸다.
물줄기는 순식간에 산정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수리의 시선이 저절로 시현을 향했다.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품에는 방금 별군 대장이 건넨 마력석 주머니가 꽉 안겨 있었다.
우르릉 소리를 내며 장군석이 일어섰다.
그 등 뒤로 남쪽 성벽이 완전히 사라지며 치풍관 성내가 그대로 드러났다.
내부는 지진이 난 것처럼 부서져 엉망이었다.
어디서 불이 난 듯 연기도 솟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지, 성곽에 진을 쳤던 별군이나 사비 큰머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그러나 물은 더 이상 쏟아지지 않았다.
치풍담을 가둔 산정은 불안하나마 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시현이 비틀거리며 땅을 짚었다.
그가 놓친 주머니에서 녹고 일그러진 마력석 갑들이 우르르 흘러나왔다.
거의 바닥에 엎드러지려 하는 시현을 호란이 붙잡아 부축했다.
“시문 님!”
시현이 핏기 잃은 입술을 열었다.
“괜찮다…. 기력은 금방 돌아올 것이다.”
시현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별군 대장을 불렀다. 그가 또렷하게 지시했다.
“어서 군대를 관성으로 보내라! 급한 대로 호숫물을 막았으나 장담할 수 없다. 당장 지반을 다지고 상한 사람들을 수습해라! 땅인 중에 토 과목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자를 찾아 땅을 다질 곳과 보강할 곳을 알려 달라 해라!”
“하지만… 장군석은….”
대장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새 완전히 일어선 장군석이 쿠웅 이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시현이 조금 기력을 찾았는지 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그는 그 거대한 형체를 올려다보았다.
“저것은… 나와 호란이 어떻게 해보마.”
어떻게요?
호란은 이 정도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질문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주먹을 쥐고 시현 곁에 섰다.
좋아. 어떻게 해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