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110
인식 변화 (1)
토너먼트가 끝나고 맞이한 휴일의 마지막 날.
“자 우리 딸 이리와. 이거 한 번 맞춰볼래?”
“삐익?”
“여기 있는 걸로 이 안을 가득 채우면 돼.”
시바를 불러 저번에 사두었던 장난감을 보여주니, 시바는 고사리같은 손으로 퍼즐 블록을 맞추기 시작했다.
블록의 모양을 맞추어 사각형을 만드는 간단한 퍼즐.
“삐? 삐?”
옳지 거기. 사각형 먼저 채워 넣어야지.
머지않아 완성된 퍼즐을 보며 시바가 밝게 울었다.
“빠아!”
“아이구 잘했다!”
시바는 무려 세 차례의 시도 만에 퍼즐을 완성시켜 버렸다. 나무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애가 굉장히 똑똑하다. 팔불출이 아니라 정말로. 말도 못 하는 녀석이 벌써부터 놀이란 놀이를 다 섭렵하고 다니는데, 누가 천재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주관적인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도 시바는 천재가 맞았다.
“뺘아~ 삐히히.”
시바는 내 품에 안겨 볼을 마구 비벼댔다. 마치 그게 칭찬을 더 해달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더욱 볼과 머리를 헝클이며 칭찬했다.
“잘했어! 우리 딸 최고~ 하버드 가겠네~!”
우리 기숙사의 천사는 오늘도 맑음이다.
-끼익.
울려오는 문 소리. 문 너머로 걸어온 백도가 이곳을 흘겨보았다.
심통에 찬 백도는 그날 밤 이후 얼굴을 비칠 때면 항상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침부터 웬 지랄이냐?”
말도 상당히 사나워졌다. 어떻게 잘 풀었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게 제대로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 애 교육이요.”
“애들 교육은 무슨…. 산만하기만 하구만.”
삐쭉. 입술을 내민 백도가 침대에 대충 누워 눈을 감았다.
굳이 무어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서로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언젠가는 풀릴 일이니까.
백도가 나처럼 지나간 일을 대충 넘기려는 스타일이라는 건 이미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백도보다 황도.
나와 백도가 술을 나누었던 그날 밤 이후 황도는 이상하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두 눈에 하트를 뿅뿅 띄우고 시바를 껴안곤 하는 그 황도가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르겠다.’
백도에게 사실을 들켰다는 게 충격인지. 아니면 실은 자는 척 하면서 그날 밤의 일을 전부 눈으로 본 것인지.
어느쪽이던 말이 되기도 하고…. 몸 안에 숨어있는 이상 툭 까놓고 대화도 못 나누니 답답할 지경이긴 하다.
-벌떡.
그때 자고 있던 백도가 돌연 상반신을 일으켰다.
주홍색으로 바뀐 머리카락. 그새 의식이 바뀌었는지. 천도는 눈을 비비며 시바를 안고 있는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이좋은 부녀로구나.”
“사이야 항상 좋죠. 스승님도 시바 안아 볼래요?”
“…….”
-끄덕.
조용히 두 손을 뻗는 천도에게 안고 있는 시바를 옮겨 주었다.
내 쪽으로 팔을 뻗는 시바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일전의 경험으로 이 상황에 적응한 듯 어쩔 수 없이 천도에게 안김을 허락했다.
포옥- 커다란 가슴에 안긴 시바. 천도는 시바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포근하구나.”
오리 주둥이를 삐쭉 내민 시바와 그걸 껴안고 있는 미모의 여성. 화보를 찍으면 몇만 장은 거뜬히 팔려나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흐뭇한 풍경이었다.
얼마 뒤.
천도는 시바를 내려놓으며 헛기침했다.
“크흠 아무튼…. 할 말이 있다.”
“일어나자마자요? 식사는 하시고 하시지.”
“되었다. 일단 이걸 전하는 게 먼저이니.”
시바는 뽈뽈대며 다시 내게 달라붙었다.
할 말이라 함은 분명 이번 토너먼트의 결과에 대한 것이리라.
“숲지기 선발전에 대한 소식은 머지않아 들어올 거다. 이미 확정된 생도들도 있지만…… 너 같은 경우에는 추가 선발에 뽑히겠지.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한다. 이유는 알겠지?”
“네.”
고개를 주억인다. 천도는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었다.
“네가 예상에 어긋나는 행동은 했지만. 끝난 이야기니 그것의 옳고 그름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지금 너는 여러 길드에서 떠오르는 인물이다. 아니…적어도 아카데미 안에서는 너만한 기삿거리가 없겠지”
사실이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순간조차, 인터넷의 메일함에는 길드의 러브콜이 갱신 되고 있을 테니까.
내 잠재성을 아주 높게 평가한다며. 절대 푸대접을 하지 않을 테니 길드와 계약을 해달라, 뭐 그런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
그들 중에는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협회 역시 존재했다.
협회는 특이하게도 나와 연이 있는 별을 통해 뜻을 전달해왔고. 일단은 거부해두었다.
물론 길드만이 나에게 접근해온 것은 아니다.
[안녕. 나 XX인데. 혹시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할래?] [저번에 도움받은 사람인데. 사례라도 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경기는 매우 재미 있었습니다! 일단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까?]최근에는 대화 몇 마디 나눠 본 적이 없는 생도의 연락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참 이상해.’
그전에는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던 놈들이 이제 와 말문을 연다는 게.
뭐라 표현하기도 애매한 그런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개중에는 나에 대한 험담을 했던 녀석도 있었다. 내가 그걸 옆에서 들었는지 모르나 보지.
‘그리고 도움을 받았으면 그날 아니면 다음 날에 사례하러 왔어야지… 한참 지난 이제 와서 사례를 왜 해?’
이놈들은 배알도 없나?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도 살려고 발버둥 치던 놈이 여유가 생겼다는 게 이제야 실감 나기도 했다.
원래 성공하면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한 놈들이 전화해오지 않는다는가.
다른건 몰라도 확실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괜찮네요.”
“그래. 괜찮지. 지금까지는 말이지.”
천도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띄우고, 새로운 주제의 문을 열었다.
“이제 숲지기 선발전에 맞게 너를 훈련 시켜야 한다.”
일이 끝났으니 다시 노력해야지?
천도는 얄궂게 웃으며 내게 그리 고하고 있었다. 최근들어 웃음이 늘어난 천도다.
“이제는 실전에 맞춰야지.”
“그 말이 무슨 의미죠?”
“연옥 같은 곳이 아닌… 평범한 던전을 깬다는 소리다. 물론 어쭙잖은 던전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언제부터요?”
“수련회가 끝나고 나서부터.”
대충 2주 뒤인가.
“그 훈련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은 헤어진다.”
날짜를 가늠하고 있으니 돌연 천도가 그리 선고해왔다.
“갑자기요?”
“그래. 할 일이 많이 밀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지당한 말이었다.
언제나 제자 뒷바라지 해주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걸 바라는 거지.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니 솔직하게 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쉽네요. 그럼 언제 또 만납니까?”
“아마 숲지기 선발전이 끝나고 나서부터겠지. 어쩌면 그 뒤일 수도 있고.”
‘숲지기 선발전이 끝나는 거면.’
숲지기 선발전은 거진 1학기를 소모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이니만큼, 꽤 오랜 시간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오~ 드디어 동거에서 해방입니까?”
“그런 셈이다.”
천도는 시원하게 말하는 나를 미덥잖은 눈길로 보며 답했다.
일이 어찌되었던, 이제 온전한 시바와 나의 보금자리가 생긴 것이다.
그래도 갑자기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씁쓸했다.
동거도 처음에야 어색했지 이젠 없으면 안 될 수준이고. 이 세계에서 가족같은 존재가 천도와 황도, 백도였다.
백도와는 지금은 사이가 좀 틀어졌는데. 강제로라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밀린 일은 뭡니까?”
“도원향의 일이다. 밥이랑 로시… 섬피 녀석을 불러 밀린 일을 처리하겠지. 왜. 배우고 싶나? 암살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면 가르쳐주지.”
“……사양하겠습니다.”
천도는 그럴 줄 알았다며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아직 같이 있기에는 거슬리는 날파리가 너무 많으니 말이다.”
“네?”
“너의 곁에도 한 명 있더군. 날파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뭐 비슷한 아해다.”
아해… 날파리.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전에 천도가 침대에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니 그때까지 해야할 일이 있다면 빨리 끝내두도록. 여자관계든 뭐든지 말이다.”
“해야 할 일이라. 아 맞다. 스승님.”
“무어냐.”
“그럼 프릭큐어나 보러 가실래요?”
천도의 얼굴이 굳었다.
“너는 때를 가리지 않고 농담하는군.”
바로 쏘아붙이지만 나만이 안다.
이 여자가 그 애들 만화를 좋아한다는 걸.
“아님 말고요.”
“…….”
흐지부지 넘기니 천도는 눈을 감은 채 거실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어째선지 그 모습이 싸늘해 보인다. 나는 킥킥대며 말을 덧붙였다.
“아 안되겠네요. 역시 봐야겠어요. 프릭큐어는 시바가 좋아하기도 하니까…. 그냥 갑시다.”
-우뚝.
천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미간을 짚더니, 깊은 한숨을 쉬는 척했다.
“……에휴. 어쩔 수 없구나.”
“오늘은 사복으로 가실래요? 가는 길에 백화점 한 번 들립시다. 제가 좋은 옷 추천해드릴게.”
“마음대로 하거라.”
꿀맛같은 휴일 날.
울어대는 핸드폰을 두고, 며칠 남지 않은 기간을 알차게 즐겼다.
*****
카페 안.
붉은 머리의 여성이 테이블에 앉아 남자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며 웃었다.
“정시우 생도. 축하해요.”
이사벨라.
숲지기 선발전의 일부 결정권을 양도받은 여성이자, 4대 세계수 중 하나인 번영의 세계수 최초의 여성 주교.
동시에 목인교에서 굉장한 지지를 받는 차기 성녀.
가슴에 달린 초록색 휘장이 그녀의 숭고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때 왔을 땐 이름이 이렇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요.”
“후후후. 사람 이름이 뭐가 중요하나요. 어쨌건 제가 이 자리에 올라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게 중요하죠.”
어느정도 안면이 있기에 정시우는 편하게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수녀였을 적에 만났건만 언제 저렇게 컸는지.
가끔 보면 숭고하다기 보단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열망이 더 돋보이는 여자였다.
“아무튼….”
이사벨라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숲지기 선발전에 ‘가장 먼저’ 후보로 낙찰 되신 걸 축하해요. 아. ‘가장 먼저’라고 말했었나? ‘가장 먼저’에요. 잘 들어요. 꼬맹이일 때 봤는데 참 많이 큰 것 같지 않나요?”
“하하….”
정시우는 테이블에 놓인 편지를 받아들었다.
숲지기 선발전.
현세대의 최강이라 불리는, S급 헌터들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더없는 기회의 장.
예전이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무대였다.
정시우는 말없이 편지의 씰 만을 매만지며 그것을 열기를 머뭇거렸다.
“뭐해요? 안 열고.”
보다 못한 이사벨라가 한마디 했지만. 정시우는 여전히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수녀님. 저랑 수녀님 사이라서 묻는 건데. 저 말고 지금까지 붙은 사람이 몇 명이죠?”
“흐으음~ 이거 극비 비밀인데요.”
“…….”
“뭐, 나중에 필요하면 도움 한 번 주는 거로 알려는 드릴게.”
“그럼 그걸로.”
“낙찰~”
이사벨라는 턱에 손을 짚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한 명 한 명 이름을 꺼내었다.
“저 아프리카 쪽에 부족이 있는데. 진짜 정신 나가게 강한 여자 한 명이랑… 그리고 세계수 남편 후보인 그쪽. 남은 한 명은 실눈 뜨고 다니는… 멘헤튼 아카데미 수석.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이 셋이네요.”
실추한 정부와 붕괴 된 일부 국가로 야생이나 다름없는 아프리카 대륙. 그곳에서 마물과 전투를 하는 부족.
멘헤튼 아카데미는 엘 아카데미에 버금가는 곳이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진… 아 그래 왕자님 공주님들도 몇 명 정도 나오고요.”
가령 일본의 벚꽃이라거나….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정시우가 끼어들었다.
“그럼 아직 엘 아카데미 생도 중에는 저 말곤 없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근데 아직 뽑을 사람이 한참 남아서…… 왜 그런 걸 물어봐요?”
“아뇨. 한 명 정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아마 전 숲지기 선발전 못 나갈 것 같아서요.”
뜬금없는 소리.
“아?”
이사벨라는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뭐…? 못 나가요?”
“그렇게 됐네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는 있는 거에요?”
눈을 깜빡이며 이사벨라가 아연실색했다.
숲지기 선발전을 거부한다는 것은 보통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머리가 많이 다치셨나요?”
최고의 무인이 되겠다는 놈에게 만년설삼을 먹을 기회를 줬더니, 먹을 생각 없다고 되받아치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는가?
방금 정시우가 그러했다.
숲지기 선발전. 그것은 내로라하는 현직 헌터들도 쉽게 나갈 수 없는 무대였으니.
아직 육성 단계인 인물이라는 전제와, 세계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큰 거름망이었다.
“할 일이 있어서요.”
“……동생?”
-끄덕.
이사벨라는 한숨을 쉬었다. 대충이나마 그의 뒷사정을 알고 있기에 뱉을 수 있는 한숨이었다.
“마음은 알겠는데. 숲지기 선발전 후보가 된다는 건… 실상 세계수의 뜻과 같아요. 이걸 부정한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는 아시죠?”
세계수의 뜻을 꺾게 되는 것이다.
정시우의 자의는 분명 존중받겠지만 윗선의 노친네들이 좋은 반응을 보일지는 만무했다.
“남편 후보니 어느정도 면죄부가 되겠는데…. 아무튼 알았어요. 이 주제는 다르게 넘기고.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요?”
만약 시답잖은 놈이라면 사지를 분리해 버릴 테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속으로 품으며, 이사벨라는 시우에게 물었다.
정시우는 볼을 긁적이며 조심스레 그 세 자의 이름을 꺼내놓았다.
“……이시헌 아세요?”
“예? 예 뭐 잘 알죠. 유력한 후보기도 한데… 왜요?”
그때. 정시우의 음색이 바뀌었다.
“와, 아시는구나.”
“???”
“제가 검 붙여 봤지만 진짜 강합니다.”
평소 다른 사람을 띄워주는 것이 몸에 베인 정시우였지만, 오늘은 왜인지 칭찬을 의식하며 하려다 보니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상대하기도 진짜 까다로웠고요. 주먹으로 칼을 이긴다는 게 쉽게 말하기 어려운 거 아시죠?”
“예. 예예…. 근데 그런 성격이었나요?”
이사벨라의 당황한 반문을 무시한 채 정시우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아마. 저보다 강해요.”
그 한 마디에는 진심이 어려있었다.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은, 진솔한 추천. 이 인재는 꼭 선발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떄문에 고심 끝에 내뱉은 말.
그것은 최고의 인재에 손 꼽히는 정시우의 말이었고.
“그 말 진심인가요?”
결국 이사벨라는 이시헌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