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224
로니에 (3)
너는 천재(天才)야.
어릴 적부터 귀에 박히듯이 들어온 그 말을, 그녀는 아직까지 돌이키고 있다.
‘저는 천재에요?’
그럼. 천재지. 네가 아니면 누가 천재겠어. 모두가 그리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됐으니까.
실제로도 그녀는 흔히 말하는 조숙한 천재였다.
Maronnier(말밤나무).
그녀의 가문인 마로니에는 프랑스의 상징이었다. 혁명의 시초요 첫 불길이었다. 모두가 깃대를 들 때, 그들이 절규하며 줄을 설 때, 피와 눈물로 혁명의 길가를 적셔나갈 때. 언제나 그 곁에 있는 것은 마로니에였다.
프랑스의 자체. 언제나 앞서서 그 명예를 책임지는 목인.
삼색기를 휘날리며 앞장선 모든 마로니에의 이름은 모두 같았다.
처음 혁명의 군단을 이끈 것은 마로니에였다. 그 혁명의 여운을 가라앉히고 성장시킨 것도 마로니에.
프랑스인들에게 마로니에란 흔한 조경수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매번 마로니에를 보며, 혁명의 향수를 느낀다.
마로니에는 그들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들에게 이름이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그 이름으로 불리어진지는 너무 오래 되었지만.
‘마로니에 블랑쉬(Maronnier Blanche) · 하얀 밤나무.’
블랑쉬에서 마로니에가 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본래 마로니에를 맡아야 할 언니가 실종되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훨씬 더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겨졌으니까. 고유한 능력이 존재했으니까.
국목은 국가를 등에 업어야 한다.
철저하게 교육받고, 그 국격을 상징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국목이란 그런 인물이었고. 언제나 외로우며. 쓸쓸하다.
그러나 그 티를 내지는 못한다.
과거의 마로니에와는 달리, 이번 마로니에의 잎은 이전보다 더 어둡고도 탁한 색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천재.’
마로니에는 자신을 천재라 생각했다. 모두가 그렇게 여겨왔으니까.
그녀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잘 읽을 줄 알았다.
우연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나이를 먹을수록 그 정확도가 올라갔다.
스무 살이 넘은 지금은 그 사람이 상상하는 모든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을정도로까지 성장했다.
그것은 쓸모있는 쾌거였다. 그러나 다른 국목에 비하면 그녀는 모자람이 많았다.
천재(天才)와 천재(淺才)는 달라서. 얕은 꾀로 부족한 것을 담아보려 노력해도, 먼저 앞서나가는 인물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말투는 날카롭게 변했다. 모든 국목이 그렇듯, 국격이 걸린 일에는 한없이 약해졌다.
그녀는 매일 밤 몇 번이나 되뇌곤 한다.
‘나는 왜 살까?’
목적이란 게 없다.
국가를 상징한다는 것, 원대한 일이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음에도 꿈꾸곤 한다.
평범한 아카데미 생도나 일반 목인의 생활. 다른 사람의 아이로 태어났을 때의 자신을.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자라갈까. 어떠한 토양에서 싹을 틔우고 그 꿈을 피워 나갈 땐 어떤 과정을 겪을까.
마로니에는 한 줌의 소망을 담아 콧노래를 부르곤 한다.
“……♬”
피리 부는 소녀.
상현 아래. 창틀에 앉아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소원을 노래하던, 짧은 여름밤의 추억.
허벅지 옆 고양이와 부드러운 털의 감촉.
아이들이 풋내나는 꿈을 향해 나아갈 때. 그 길잡이가 되어주는 존재인 국목의 뒷면. 그 암울하면서도 비참한 이야기.
모기에 물려 피부를 벅벅 긁어대며 부르는 초여름의 마로니에. 그녀. 나의 이야기.
저택의 메이드들은 그런 그녀의 노랫소리를 희망과 꿈으로 포장해 다른 이들에게 퍼뜨렸다.
인터넷에 떠도는 마로니에의 노래는 그렇게 그녀의 바람 없이 규명되었다.
프랑스의 행진곡.
그녀의 취미가 또 하나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 * * * * * *
‘내가 왜 이런 꼴을….’
마로니에는 속으로 인상을 구기며 앞장을 섰다.
스태프를 짚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러나 아까 패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속이 매우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숲이랑, 던전이 이 모냥 요 꼴만 아니었어도.’
진 것만으로 욕을 먹을 테지만 변명할 여지는 아직 있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쓸 생각이 아니었다.
중급 마법. 그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생도는 떨어져 나간다.
때문에 겁을 주거나 내쫓을 용도로 사용했었다. 맞아서 탈락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상대가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는 점. 상상 이상으로 움직임이 재빨랐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화력에 치중된, 근거리로는 쑥맥인 초장거리 마법사였다는 점.
여러 요소가 맞물리며 일어난 사태……라고. 인터넷 기사는 말할 것이었다.
마로니에의 머릿속 세포도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에는 다른 세포가 나와 악을 쓰듯이 그녀를 다그쳤다.
[재능 없는 거 티내네. 블랑쉬. 근접전을 못하는 마법사라니, 국목으로서 그게 말이 돼? 재능이 있었으면 그것까지 해내야 하는 거 아니야?]새로운 세포의 잔인하기까지 한 발언에 마로니에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
마로니에는 도중에 멈춰서선,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러면 머릿속의 난잡한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뭐해?”
등 뒤의 남자가 말해오자 마로니에의 어깨가 확 떨렸다.
“아, 아니야.”
마로니에는 떠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 뒤, 마저 던전 공략을 진행해 나갔다.
가면을 쓴 무서운 남자.
엘 아카데미의 이시헌이라고 했었나. 꿈에 나올 것 같다.
배리어와 함께 자신마저 짓뭉개버릴 듯이 내리치는 스태프. 그거 맞았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꿀꺽.
왜 자꾸 침이 삼켜지는 걸까.
마로니에는 빙글빙글 도는 듯한 눈으로 주변을 잔뜩 경계했다.
그녀의 앞에 선 골렘이 이시헌과 마로니에를 감싸듯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키이잉.
때마침 석재 벽면을 타고 기어오는 거미들.
마로니에는 손을 뻗어 번개를 일으켜 즉시 놈들을 해치웠다.
-지지지직!
감전되어 벽에서 떨어져 갈라진 다리들을 마구잡이로 헤집다가, 체액을 뿜으며 즉사하는 거미.
이를 보며 마로니에가 생각했다. 그래. 본래였다면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고.
전기 마법의 속도는 특히나 빠른 편이다. 범인의 시력으로는 따라오는 것조차 벅차다.
위력보단 암살. 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력자들도 막는 편을 오히려 선호할 정도다.
헌데 그것을 유연하게 몸을 비틀어 피한다니.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도록 피한다는 게 눈으로 보고 가능한 건지.
‘절대 마법사 아니야 이 사람.’
엘 아카데미라고 했던가. 정시우가 있는 아카데미다.
대체 그곳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튀어나왔지?
이 사람이 쓰는 바람마법도 상상 이상이었다. 초급임에도 중급을 우습게 넘보는 위력. 무슨 현역 시절의 현자를 보는 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능란한 몸놀림.
‘……플라워?’
그녀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아찔하게 스쳐지나갔다.
‘그래….’
얼마 전에 그녀에게 교단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몇몇 사람들의 머릿속을 읽어내 달라고. 그리고 수상한 사람이 있다면 즉시 신고를 해달라고. 플라워가 있을거라는 추측이 있다.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땅에서 이런 인재가 솟아나진 않았을 것 아냐?’
이유 없는 의심은 나쁜 것이지만, 그러기엔 이 사람의 강함이 설명되지 않는다.
정시우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면 모를까.
이시헌이라는 이름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이다.
플라워 조직 비율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인간. 이로 미루어볼 때 목인이 아니라 인간인 이시헌이 플라워일 확률은 다른 이들에 비하면 현저히 높았다.
마로니에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이시헌을 바라보았다.
“…?”
가면 속, 무감정한 눈빛이 자신을 향해온다. 마로니에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러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부정맥? 드디어 죽을 때가 된 건가?
절대 애정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의 감정은 아니었다. 두 다리가 덜덜 떨리고 당장이라도 상대와 떨어지고픈 이 감정은… 아마.
[겁쟁이(C → A)]마로니에는 모르는 마로니에의 기질.
그 영문을 모르는 마로니에는 두려움에 몸을 떨 뿐이었다.
국목인데. 국목인데도.
그녀는 숨을 뱉는 것도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가 꽉 차고 나서야 겨우 숨을 뱉을 수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딘가 거동이 불편한 남자의 걸음걸이.
마로니에는 두 눈을 깜빡거리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본분, 교단의 부탁을 뒤늦게 돌이키곤 서서히 고유 능력을 발동시켰다.
심상 세계.
상대의 생각과 상상을 직접 눈으로 읽어내릴 수 있는 것.
그녀의 눈에서 희끗한 십자가가 생겨나더니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한 장면이 떠올랐다.
문제는-
“…어.”
그 고유 능력마저도 두 단계 성장한 상태라는 것.
[음란마귀 B → S]그리고 이시헌 역시, 간섭 불가능한 목령왕의 고유 능력과 기질을 제외하면. 두 단계 올라갔다는 점.
S급에 달하는 기질은 그 인간의 정체성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
마로니에의 고유 능력은 그 남자의 상상을 옆에서 겪은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쿵!
“…으급, 윽.”
마로니에의 귓속을 타고 환청이 들려온다.
더없이 실감나서. 정말 이를 꽉 깨물고 무언가를 견딜 때 내는 소리같다.
마로니에는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상 속? 대체 이게 뭐지?
이전 앞에서 보았던 표지판. 그 말이 정말이었는지 자신의 능력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 던전에 들어온 인물들에게 한 단계 성장할 빌미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번은 그 방향성이 좀 잘못된 듯 해보였다.
발을 뒤로 내딛자 느껴지는 석회 벽돌의 감촉. 상상 속이라지만 이렇게 실감나는 건 처음이다.
“오옥… 오호옥.”
아까부터 귀를 거슬리게 하는 목소리.
마로니에는 그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이이잉.
광경을 눈에 담은 즉시, 귀를 바늘로 찌른 듯 거대한 두통이 더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마로니에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추잡한 남녀가 살을 섞는 모습이었다.
남자의 두 팔에 허벅지를 올리고, 힘도 쓰지 못한 채 결박되어. 양 눈을 까뒤집은 채 흉물스러운 것으로 쑤셔지는 두 남녀의 정사.
“그망… 그만해 주세요….”
눈앞의 마로니에는 이보다 더 천박할 수가 없었다.
양 갈래로 묶은 푸른 머리는 풀어진지 오래고. 잔 머리카락은 땀에 절여져서 목덜미와 남자의 피부에 잘싹 달라붙어 있었다.
녹아내린 얼굴로 지껄이는 말은, 부정하는 본디 뜻과는 상당히 멀어진 어투였다.
“앙, 아아앙… 앙.”
자그마한 마로니에의 엉덩이를 꽉 쥐고 들어 올린 자세의 남자가, 이번에는 그녀를 석재벽돌 위에 제멋대로 엎드리게 한 후. 손으로 마로니에의 머리를 짓눌렀다.
마로니에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짐승같아.’
“…앙! 아앙! 자지 그마안… 아아아아앙!”
기분 좋은 듯 교성을 지르는 눈앞의 마로니에.
자그마한 엉덩이를 씰룩이며 자신의 색기를 눈앞의 짐승에게 드러낸다.
빨갛게 달아오른 허벅지를 때려주기를 갈망한다.
-조르르르.
던전 바닥을 적시는 소변. 멈추지 않고 쑤셔박는 남자.
몸이 약해서 무릎이 까지지는 않을까. 눈앞의 그녀는 쾌락에만 집중한 채, 고통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정말, 정말 저렇게 좋아하는 거야? 왜?
고작, 성행위잖아.
그런 육욕의 취미와는 동 떨어진 생활을 해온 국목이다.
그런 마로니에가. 자신이. 눈앞에서 처절하게 희롱당하고 있었다.
-꿀꺽.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역겨움이 치솟는다.
그 역겨움 속에 숨은 흥미가 오히려 짜증이 났다.
머리가 아프다.
-쿵!
심상 세계에서 튕겨나듯 빠져나온 마로니에.
그런 그녀를 이시헌이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본다.
“……허억, 헉.”
“왜 그래?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오는 남자. 정말, 저게 사람인가?
플라워, 그 보다 더 깊은 심연을 본 것 같았다.
마로니에는 아연실색해서 양 허벅지를 떨었다.
-꿀꺽.
방금, 머릿속을 읽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머릿속의 상상에서 그치고 있지만, 자기가 그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는 순간. 어쩌면 그 상상을 실현시키려 할지도 몰랐다.
국목을 상대로 야한 상상을 했다.
그만한 불경은 없으니, 이렇게 된 거 저질러보자.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어쩌면 생사결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모르는 척.’
모르는 척하자.
멋대로 남의 머릿속을 읽은 자신의 탓이기도 하니까. 현실로 이루어지지만 않는다면… 상상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얼굴이 너무 뜨겁다.
마로니에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애써서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빠, 빨리 공략하자. 공략.”
“그래.”
무덤덤한 남자의 목소리. 아까의 상상을 되새기며, 마로니에는 몸을 떨었다.
겁쟁이의 눈물이 한 방울 맺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