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582
베니스 (2)
지축을 따라 한 바퀴 회전하고 나니, 추락하던 우리의 몸은 흰색의 벽돌로 들어찬 신전에 옮겨졌다.
신전은 거대했다.
한 쌍의 횃불이 타오르는 입구 너머에는 커다란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감각을 최대한 키웠다.
‘마력이 짙어.’
이 넓은 공간을 포화해 가득 채우고 있는 마력.
이 던전은 정령이 살아가기 위해 대기 중의 마력이 바깥보다 풍부한 편인데, 이곳은 그보다 훨씬 많은 마력이 잔존하고 있었다.
꽃이 마력을 잡아먹는 걸까?
종(種)이나 형태가 불완전한 꽃들이 바람에 뒤채며 흔들린다.
“후우….”
베니스는 아직도 하늘을 날던 여운이 남아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짜릿한 쾌감에 웃고 있었다.
“일어나.”
“일으켜 줘.”
두 손을 활짝 펼치며 아이처럼 떼를 쓰는 베니스.
여기서 한 마디 툭 던졌다간, 몇 분이나 귀에 딱지가 앉을 수 있어 요청대로 해주었다.
베니스의 손을 잡고, 확!
번쩍 일어난 녀석이 내게 찰싹 달라붙으며 뺨에 키스공세를 해왔다.
“어휴.”
“흐흐흐. 그래서, 마지막 관문은 뭘까?”
난데없는 키스에 질색을 하자, 내 엉덩이를 톡 치고 지나가선 안에 들어가더니 탄사를 뱉는 베니스.
“오~ 예쁜데.”
녀석의 말마따나. 주변 환경이 깨나 신비로웠다.
-웅, 웅!
방울처럼 맺혀 진동하는 꽃들. 햇빛 한 점 없는 신전에 꽃들이 광원이 되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네온 사인처럼 각양 각색으로 번쩍거리고.
심해의 해파리처럼 두둥실 떠다니기까지 한다.
“조화일까? 아니면…. 이런 종류의 생화가 있는 걸까.”
“몰라.”
이 세계는 몇 차례에 걸쳐 문명의 멸망과 탄생을 기록해왔다.
마력이라는 변수를 고려하면, 이 던전이 만들어졌을 시기에는 이런 꽃들이 존재했을지도 모르겠다.
-저벅.
꽃길을 따라 신전의 중심으로 향한다.
우리의 걸음걸음에 꽃들이 함께 고개를 꺾었고, 이윽고 중앙에 솟은 건축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상(Fantasy)이라는 단어에 적합한 장소.
옷장을 타고 다른 세계로 갔을 때 보이는 광경이 이러하지 않을까.
우리의 상상력을 마구 자극하는 장소였다.
“무덤?”
꽃밭을 건너 중앙에 도착하니, 가운데엔 높게 솟은 종교적 건축물과 한 줌의 흙이 그 밑에 쌓여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
거기에는 석판이 놓여 있었는데. 나로서는 읽을 수 없는 글자였다.
가만 그 석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내 옆에 있던 베니스가 그 언어를 뇌까렸다.
【 정령술사. 아비. 】
【 우리의 위대한 영웅. 】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우리는 이 장소가 마지막 구역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 오셨어요? ]배후에서 갑작스레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개나리색의 머리에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소녀.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녀는 한 발자국 다가와 우리의 면전을 훑었다.
[ 여기 왔다는 건, 제가 마련한 어려운 시련을 전부 격파했다는 거겠죠.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 저는 모르지만, 좋은 경험을 얻어갔으면 좋겠어요. ]수수한 머리에 사람 냄새.
꽃향기와 풀 비린내가 덕지덕지 붙은 순진한 시골 처녀의 모습.
파란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꽃다발을 쥔 손은 자그맣다.
전쟁 영웅이라 불리었던 정령술사의 모습이라기엔 무척이나 여리고 어려 보였다.
“아비. 이 던전을 만든 여자, 맞아?”
베니스가 내 뒤에서 중얼거렸다. 아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비는 말을 이어나갔다.
[ 이곳은 정령산. 정령술사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에요. 혹시…. 제가 여길 만들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있나요? ]“몰라.”
[ …네? ]“알 턱이 있나.”
던전 자체의 능력으로 아슬아슬하게 통역은 되는 모양이지만, 만약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했으리라.
“네가 살던 세계는 무너진 지 오래야. 던전만이 남았고, 후세에게 넘겨졌지.”
좋은 의도로 만든 던전이겠지만, 여러모로 이용당했다.
던전에는 오류가 생겨 베니스라는 희생자도 낳았다.
아비는 덤덤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 그렇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괜찮다고?”
[ 이곳은 인간과 정령이 서로 부딪히지 않았으면 해서 만든 곳이니까요. 다음 대의 정령술사에게 기회가 되어준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당신들처럼요. ]아비는 싱긋 웃으며 나와 베니스를 바라보았다.
베니스가 이 던전에 서식하는 정령이라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걸까.
아비를 바라보는 베니스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 우리는 너무 싸워왔어요. 사람과 정령은 사실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생명체인데도요…. 아 그래. 당신이 사는 세계에서 정령은 어떤 존재인가요? ]아주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힘.
정령과 친구가 되니 뭐니, 솔직히 들어본 적이 없다.
정령을 다루는 방식은 정령술사마다 제각각이었으니까.
[ ……. ]아비는 조금 슬픈 듯 눈썹을 기울였다. 그래도 괜찮은 지, 꽃다발을 떨어뜨리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하지만, 이 던전을 깬 당신들이 있네요. 당신과… 저분. 제가 보기에도 아주 진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엄청난 유대를 쌓은 거겠죠. ]“도움이 되긴 했어.”
짧게나마 베니스와는 아주 진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할 수 있다.
아비는 상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세상에 나쁜 정령은 없어요. 당신이 다가가 준다면, 서로 이해할 수 있죠. ]“그래.”
아직까진, 아비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팔짱을 끼고 어디까지 말을 하나 기다려보았다.
[ 많은 경험이 되었길 바라요. 여러모로 알려주고 싶은 게 많지만… 저는 보다시피 시체라. 바깥에 함께 갈 수는 없네요. ]정말로 아쉬운 듯 눈썹을 팔자로 하더니, 박수를 치며 ‘아!’ 눈을 빛내는 녀석.
[ 새 시대의 영웅님이 어떻게 시련을 헤쳐왔는지, 함께 볼까요? ]아비가 말을 꺼내자마자 공중에서 거대한 스크린이 펼쳐졌다.
베니스와 내가 움찔거렸고, 아비는 순수하게 웃으며 우리의 이야기가 기대되는 지 어깨를 달싹이고 있었다.
【 첫 번째 관문 】
[ 첫 번째 관문은, 정령과 계약을 하는 시련이죠. 두 종족이 어떻게 가까워지는지 배울 수 있는 시련이에요. 영웅님이 얼마나 정령과 어울리는지…. 보고싶어서 기대가 되네요. ]이윽고 스크린에서 빛이 펼쳐지더니, 두 남녀의 살이 튀어나왔다.
-낑!… 끼잉! 낑!!
-가만히 있어.
토끼로 님프를 유인해, 잡아먹는 모습.
거대한 내 성기가 화면을 뚫을 듯이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님프를 제압해버린다.
[ 아? ]벙어리가 되어버린 아비.
아비의 순진한 파란 눈동자에, 내 육봉이 반사되어 비쳤다.
[ 어, 어… 어어어? 꺄아악!!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눈을 가린 아비.
[ 저, 정령한테 시발 무슨 짓을 하는거예요!! ]“푸흡.”
아비가 소리치자, 베니스가 빵 터졌다.
조금 기분이 상한 것 같았는데, 난데없는 상영에 웃음이 터지고 만 것이다.
베니스는 낄낄대며 내 허리를 감싸안았다. 나를 애정어린 눈길로 보더니 님프를 먹는 광경을 보며 박수를 쳤다.
“역시 내 친구야.”
낑낑이와 밍밍이.
두 정령이 내 성기를 핥고 있으니, 아비가 공중을 날아 스크린을 손으로 마구 휘저었다.
[ 아니, 안돼! 안돼!! 이런 식으로 친해지는 건 용납 못해요! ]“그것도 하나의 방식이지. 안 그래?”
[ 이건, 가, 강간이잖아요! 어떻게 정령을 강간할 생각을…. ]베니스의 딴지에 아비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나를 보는 아비의 눈길엔 혐오가 가득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순수하고 귀여운 시골 처녀는 아무래도 이런 과정에 익숙지 않은 모양.
[ 다, 다음! 다음 관문이에요. 마을에서 어떻게 정령과 어울리고 사회를 꾸려 나가는지! ]이윽고 다시 나타난 스크린.
-자지 맛있슴미다!
[ 꺄아아아아악!!! ]눈을 뒤집은 아비가 말을 절며 바닥에 넘어졌다.
-츄릅, 츕…. 우웅…. 웅! 제 안에 가득 싸주심시오….
-아앙! 앙! 그렇게 젖꼭지만 괴롭히면… 님프 이상해짐미다!!
베니스가 킥킥대며 아비에게 물었다.
“이것도 강간으로 보여?”
지금 보는 게 정말일까. 내가 의자에 앉아있고, 베니스가 내 옆에 안겨. 여러 님프들을 돌려먹고 있다.
마흔 마리의 님프가 줄을 서서 내 성기를 받기 위해, 눈을 반짝이는 모습.
[ …아, 으아. 으아아…. ]아비가 고장났다.
이윽고 이어진 세 번째 관문.
-한 판 만 더 하자. 응?
정령에게 명령하며 싸우는 시련.
베니스가 내게 달라붙어 텐트를 치고 덮친다.
[ 이 던전은 여관이…아닌데…. 대체 바깥에는 무슨 일이… 아아아! ]어느덧 소심해진 아비는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분노와 상실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물을 짓고 있었다.
네 번째 관문은 사쿠.
보다못한 아비가 스크린을 꺼트리며 우리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 이, 이게 무슨 짓인가요! 서, 성스러운 던전에서… 무슨 짓을! ]“다들 즐겼는데, 문제 있어?”
베니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비에게 물었다.
아비는 잔뜩 성이 나선 뿔이 난 얼굴로 말했다.
[ 문제가 많아요! ]“무슨 문제.”
막상 소리치고 보니, 할 말이 없다.
사쿠까지 전부 봤다면 모르겠지만. 그 전까지는 사실 대부분 좋아하는 얼굴이었으므로.
아비는 우물쭈물 눈물 지은 얼굴로 씩씩댔다.
[ 이건… 제 후세를 위해…. 평생을 바쳐서 만든, 정령술사를 위한 시련의 장인데….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너?”
[ 네? ]“나도 여기 정령이야. 네가 만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비.
[ 설마…. 아니, 각 정령들은 관문을 넘을 수 없을 텐데. ]“던전은 노화함에 따라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지. 네가 날 태어나게 했고, 나는 몇 번이나 죽었는지 몰라. 이 던전은 날 죽어도 죽어도 살아나게 만들잖아?”
[ ……. ]베니스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기어코 알아들었는지 오싹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아비.
“수천 년을 죽길 반복했어. 너무 억울하고, 정신병도 걸리고…. 그래서 얼굴 좀 보자고 온 건데. 쯧.”
베니스가 내 옆에 붙었다.
“나에 대해선 기억도 안할 줄이야. 하긴, 범죄자로 설정한 엘프가 이성을 되찾을지 누가 알았겠어?”
[ 그, 그럴 줄은…. 몰랐. ]“됐고. 이거 어떻게 갚을 거야?”
당당한 자세로 쏘아붙이자 아비가 할 말을 잃었다.
[ 전, 이미 죽은 몸이라.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이럴 줄은 몰랐다고 사과하는 방법밖에는…. ]“사과하면 다야?”
가불기를 걸어놓더니, 나를 슬쩍 흘긴다.
베니스는 어디 한 번 지켜보고 있으라는 의미로 내 허리를 꼬집어 배시시 웃었다.
아비는 죽을 상이었다.
[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요. ]“아니 왜 없어.”
베니스를 바라보는 아비.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다.
생각보다 얘가 너무 착하다. 기가 완전히 죽어버린 모습이었다.
베니스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더니 아비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비는 힘없이 끌려나왔다.
“봤잖아. 너. 우리가 여기까지 뭘 하면서 왔는지.”
[ 웃…. ]나를 손으로 가리키더니 음험하게 웃은 베니스.
“벗어 이년아.”
[ …저, 시체인데. 저분도 원하지 않을 테고- ]“내 친구는 시체도 따먹을 수 있다고 했어.”
내가 언제 그랬어.
“얘는 말이야 어? 남녀노소 전부 클리어 가능한 애야.”
아니다.
“특히 인간은 엄청 좋아하거든?”
그건 맞지만, 시체랑 하는 취미는 없다.
[ …시체랑, 한다고요? 어떻게 사람이…. ]나를 보는 아비의 눈이 더욱 혐오로 가득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즐거워 보이는 얼굴의 베니스.
던전 창립자에게 뭘 시키려는지, 연결된 선을 통해 흥미진진한 감정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최고다. 마음대로 해라.
[ 그, 그리고 마지막 시련이 있어서- ]베니스의 손길이 아비에게 다가간 순간, 아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력을 퍼뜨렸다.
[ 싫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