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05
105====================
지저의 다르바드
모든 것이 세월에 바스라진 그곳에서, 썩어 무너지기 직전의 책상 위에 단 하나의 물건이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래시계였다. 놀랍게도 안쪽의 황금빛 모래가 아직까지 사락사락 떨어지고 있었다.
크기는 대략 한 손으로 쥐기에 벅찬 정도, 안쪽의 모래와 유리를 제외한 재질은 은빛과 푸른빛이 회오리치듯 뒤섞인 기묘한 금속이었다.
[회상과 지배의 모래시계(전설적): 사용자가 직접 처치한 적 있는 수장급 존재 하나를 소환하여 부린다. 지속시간은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질 때까지로 약 5분 정도이나, 소환한 존재가 강할 수록 모래가 더 빠르게 떨어진다. 파손시 최대 일주일에 걸쳐 스스로 복구된다.– 시간의 수호자 메어비의 장신구. 용족의 성지 메 헤브아 스툰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수백 년에 걸쳐 임무를 수행하던 그가 은퇴를 선언하며 유일하게 후임자에게 건네주지 않은 물건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비극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 ]
땡 잡았다.
세현이 모래시계를 집어들고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들고 있는 방향과 상관없이 무한한 듯한 모래는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모래시계를 뒤집어도 그랬다. 마치 아래에서 위로 치솟아 달라붙는 듯하다.
“무슨 물건입니까?”
세현은 별 고민 없이 그것을 시노부에게 건네 옵션을 살피게 해줬다. 덕분에 모래시계의 가치를 알아본 그가 살짝 침음성을 흘렸다.
“그건 내가 가져야 겠는데.”
세현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시노부는 멈칫거리는 기색으로 모래시계를 돌려주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여전히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 시노부에게 세현이 물었다.
“설마 내 나침반으로 발견한 물건에 소유권을 주장할 셈인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발견하는 모든 물건들을 전부 가지실 겁니까?”
“글쎄.”
“그건 너무 불합리합니다. 이럴 거면 애초에 합동 조사단을 꾸린 이유가 무색해지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대일 길드는 결코 구경이나 하자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물론 이번 경우는 경우가 좀 다르다. 굳이 다른 것을 들먹이지 않아도 세현은 할 말이 있었다.
“전부 다 내놓으라는 게 아니다. 이번 경우는 어딜 봐도 내 덕이 컸지. 이곳을 나침반 없이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마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짧은 시간 고민하던 시노부가 한숨과 함께 모래시계를 내밀었다.
“……확실히 타당하군요. 이번은 양보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에 대해선 충분히 논의한 후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다시 제 손으로 돌아온 모래시계를 챙긴 세현이 재차 주위를 살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나침반 역시 잠잠해졌다.
“더는 없는 듯한데, 이만 가지.”
“그러지요.”
시노부가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미묘한 눈빛의 세현이 따랐다.
@
조사단은 중앙에서부터 출발했다. 나침반이 있으니 굳이 샅샅이 뒤지지 않아도 대략적인 탐사가 가능했기에 택한 동선이다.
특이하게도 외곽으로 갈수록 더 많은, 더 강력한 괴물들이 등장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노란색 눈동자를 가진 괴물들이 수십 마리나 출몰했을 정도였다.
물론 정예로만 이뤄진 조사단에 위기가 닥칠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세현이 나설 것도 없었다.
대일 길드원들은 류한의 전투력, 특히나 김유린과 박수진의 전투력을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신소진이야 딱 봐도 강해보이는 인상이라 그리 놀라지 않은 듯하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의 김유린이나 박수진은 아주 예상외였던 모양이다.
그때쯤 날이 저물어 조사단은 하루 숙영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은 마침내 두 번째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신기한 구조물이군요.”
시노부가 그렇게 평했다.
인공적인 느낌이 확연히 전해지는 구조물이다. 피라미드의 절반을 모서리에 맞춰 뚝 잘라놓은 듯한 삼각뿔 모양의 구조물로, 가장 넓은 면에 문자로 추정되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게다가 세월의 흐름에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그 흔한 이끼나 덩굴식물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방금 전까지 관리된 듯한 모습이었다.
나침반은 이 구조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세현이 손으로 그 구조물을 만지거나 살펴도 은빛 글자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부에 뭔가가 있는 건가.”
계속해서 진동하는 나침반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가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시노부가 깜짝 놀라 묻는다.
“설마 이걸 부실 생각이십니까?”
“그런데.”
“좀 더 살펴보고 결정하는 건 어떻습니까?”
“살펴볼 게 더 있나? 나침반이 여길 가리키는데, 이 구조물이 아이템이 아니라면 답은 뻔하지. 안에 뭔가가 있는 거다.”
“저와는 생각이 다르군요. 저는 이 구조물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번은 저희에게 양보하시죠.”
시노부가 그리 말하며 완전히 몸을 돌려 세현을 쳐다봤다. 세현 역시 그런 시노부를 똑바로 쳐다봤다.
“모래시계는 양보했으니, 이번은 저희가 받아도 되겠지요.”
“하지만 나침반을 보면 분명 이 안에 뭔가가 있는 건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세현이 다시 나침반을 내밀었다. 침이 구조물 쪽으로 향한 채 거세게 진동하는 그것은 분명 구조물 내부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뭔지는 확인해야 할 것 아닌가? 만약 별 거 아닌 물건이라면 너희도 손해일 텐데?”
“저는 이 구조물 자체가 특별한 기능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혹시 이게 뭔지 아나?”
“저도 처음 보는 겁니다.”
거짓.
리오론도 왕가의 서클렛은 정말로 편리하기 그지없다. 세현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리 서로 솔직해지자고. 그게 협약 아닌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래시계를 얻었던 집, 사실 너희가 먼저 뒤진 적 있지? 지하실은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뭔가 오해를 하시는 듯한데, 그런 적 없습니다.”
물론 그 말 역시 거짓이었다. 표정연기가 제법이었지만 굳이 리오론도 왕가의 서클렛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미약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덩굴이 끊어져 있더군. 시험삼아 먼저 들어가라 했을 때도 손잡이 위치로 눈보다 손이 먼저 갔고. 일반적인 케이스와는 전혀 다른 곳에 붙어 있던데 말이야.”
“덩굴은 저도 모르는 일이고, 손잡이는 다가가며 미리 봤을 뿐입니다. 설마 그런 걸로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이건 어떤가? 나는 이것 내부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니 한 번 부숴보고, 만약 별 거 아닌 물건이 나오면 대신 모래시계를 주지. 물론 좋은 게 나온다면 합의해서 처리하고.”
“……한 번 결정한 것을 번복할 수는 없죠. 설사 이게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저희가 가지겠습니다.”
“그런가?”
세현이 웃었다.
“애초에 목적이 이거였군. 어쩐지 모래시계에도 별 미련이 없다 싶더니만.”
시노부는 말이 없었다. 양측의 조사단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대체 그 집에서 뭘 찾아냈기에 이걸 원하는 걸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절묘하게 감춰져 있던 그 집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땅을 최초로 탐사했을 풍신 길드가 모르고 지나칠 만도 했다. 그걸 어쩌다 대일 길드가 먼저 발견했고, 그곳에서 이 구조물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면 상황이 딱 들어맞는다.
세현이 조사단에 껴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것이다.
몇 번 정도 함께 이곳을 탐사하며 부산물을 나눈다. 이후 더 이상 뭔가가 없다는 결론과 함께 관심이 사그라들면, 그때 몰래 이곳을 방문하여 진짜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다.
혹시 모를 마찰과 의심을 피하면서도 상대방 몰래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점에서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 땅을 통째로 가져올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불가능했으니 상대가 먼저 제안한 합동 조사를 되려 이용해 관심을 떨쳐내려는 시도는 좋았다.
당연하지만 시노부는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행여나 발견하더라도 최대한 별 것 아닌 것처럼 넘어갈 생각이었을 것이고.
하지만 세현이 나침반을 이용함으로써 모든 게 틀어졌다.
어쩐지 탐사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수단을 제시했는데도 기뻐하긴 커녕 표정이 굳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다.
이어지던 침묵은 결국 시노부의 한숨과 함께 깨어졌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의혹을 떨쳐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이 땅이 누구의 것도 아닌 이상, 한 번 의혹이 달라붙으면 이곳을 독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싸움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나눌 수밖에 없다.
“사실은 정보가 있습니다. 눈썰미가 대단하시군요…… 속이려 들어 죄송합니다.”
“죄송한 걸 알면 당장 말해라.”
“이건 중립형 던전과 이어지는 게이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종의 관문입니다. 그 나무집에서 찾아낸 정보에 의하면 각종 광물이 넘쳐나는 곳이라 하더군요.”
“광물?”
충분히 욕심낼 만한 정보였다. 집단의 관점으로 본다면 어지간한 전설 아이템보다 더 가치있을지도 모르니까.
“지저의 다르바드, 그렇게 불리는 던전입니다.”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지, 시노부는 미간을 문지르며 그리 말했다.
@
조사단의 목표가 변했다.
더 이상 던전의 존재를 감출 수 없게 된 시노부는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총 동원하여 이 새로운 땅에 흩어진 단서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부분 알지 못하면 그냥 지나칠 만한 것들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닳아 없어지기 직전인 희미한 문자들이 새겨진 비석이라든가, 무언가를 묘사한 듯한 벽화 등이었다.
“바로 진입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 들어보니 던전에 대한 정보는 얼추 다 갖고 있는 모양이던데.”
“관문을 작동시키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것만 알면 됩니다. 이유는 몰라도 참 번거롭게 숨겨놨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두꺼운 책을 들고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해독한다.
책은 대일 길드의 문장사가 제작한 해독서였다. 만약 세현이 먼저 관문에 대한 정보를 발견했다면 이예슬이 비슷한 일을 맡았을 것이다.
그들의 문장사가 실력이 나쁘지 않았던 건지, 시간은 좀 걸렸지만 해독에 문제는 없었다. 결국 모든 단서를 모은 시노부가 세현을 쳐다봤다.
“그 원숭이 괴물들의 시체가 필요합니다.”
“많이 필요한가? 얼마 챙기지 않았는데.”
주황색 등급의 괴물이라 연구 목적으로 두세 구만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버렸다. 허나 다행히 다시 나무집 쪽으로 갈 일은 없을 듯했다.
“두 구만 있으면 됩니다. 작동 방법이 야만적이군요.”
“그럼 바로 들어갈 수 있겠군.”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인원이 50명에 불과하니, 서로 다섯 명씩 제외하도록 하죠. 서로 길드에 알려 추가병력을 데려오는 역할을 맡으면 되겠습니다.”
양쪽이 던전을 진입하려 하면서도 추가 병력을 데려오지 않는 이유였다. 한 번 열린 관문은 최대 50명까지만 이용할 수 있고, 일주일 동안 다시 가동하지 않는다.
신소진이 다섯 명을 골라 들어갈 인원에서 제외시켰다. 시노부 역시 다섯 명을 지목하여 제외했다. 그렇게 진입할 인원선발을 마친 후, 관문으로 돌아온 조사단은 곧장 진입 준비를 시작했다.
세현이 원숭이 괴물의 시체를 두 구 꺼냈다. 그나마 손상이 적은 것들이다. 대일 조사단의 부단장 쇼후쿠테이 소조가 직접 나서 시체를 들고 관문으로 다가갔다.
가장 넓은 면을 제외한 양쪽에 옴팍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곳이 어떤 용도인지 이제야 알 듯했다. 소조가 그곳 중앙에 부자연스럽게 돋아난 벽돌을 잡고 뽑아내자, 전혀 예기가 상하지 않은 기다란 회색 금속의 꼬챙이가 나타났다.
원숭이를 옴팍한 부분에 두고 꼬챙이를 다시 원래 자리에 찌른다. 지켜보던 몇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양쪽 모두 원숭이 시체를 꽂아넣자, 놈들의 시체에서 흐른 피가 제단의 홈을 타고 흐르며 스며들기 시작했다.
미약한 공명음과 함께 새겨진 각종 문자들에서 빛이 흘렀다. 그리고 한순간, 갑작스레 푸른빛이 폭발하며 입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세현이 크로나드 숲 던전을 생성하면 본 적 있는 장면 그대로였다.
키기기이이이이이잉-!
푸른색 빛줄기가 커다란 타원형을 그려내며 정신없이 회전한다. 공간을 찢는 듯한 기괴하고 거친 소리가 계속해서 터지며 타원의 안쪽으로 푸른빛이 퍼져나가더니, 어느 순간 물결 같은 일렁임과 함께 안쪽을 가득 채우며 빠르게 안정화됐다.
확실한 ‘포탈’의 모습이다. 건너편으로 은은하게 비춰지는 풍경이 굉장히 어두웠다.
지저의 다르바드, 어쩌면 독이 될 수도 있는 미지의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이 장면이 어찌나 그리 안 써지던지…… 무려 4시가 넘었네요. 혹시 기다리신 분들 계시다면 오늘도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ㅠㅠ
부디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추천도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