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08
108====================
지저의 다르바드
“그래서 우리가 뭘 해주기를 원하나?”
– 게이트 하나를 더 열어줄 테니, 지원군을 좀 불러와줬으면 좋겠는데…… –
힘의 균형을 깨버릴 또 다른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다른 둘을 밀어버릴 생각인가?”
– 그건 최후의 방법이지. 이쪽의 힘이 확연히 강하다는 게 확인되면, 그 친구들도 최소한 대화의 여지는 마련해주지 않겠나. 나는 우리 샬란들이 다른 종족에 의해 죽는 상황을 바라진 않네. –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물론 서로를 완벽하게 믿을 수 있다는 가정 하의 일이다.
세현이야 리오론도 왕가의 서클렛이 있으니 파트릭의 말을 진실이라 믿을 수 있지만, 그는 대체 무슨 근거로 세현 일행을 믿는다는 걸까.
“몰려온 우리가 당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는데?”
– 그럴 수도 있겠지. 서로에게 비극이 될 테지만……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다른 둘이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기도 하고. –
“그럼 당신은 도박을 하는 셈이로군.”
– 글쎄, 그럴 수도. 다른 둘이 나보고 노망이라도 났냐 하더군. –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자네가 그렇게 비열한 협잡꾼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하지만, 그래도 지배자로서 만약을 대비한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군.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직후 추레한 퇴물처럼 보였던 파트릭의 존재감이 한순간 크게 타오른다. 무림의 고수들이 외기를 통해 기세를 뿜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여태껏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청중처럼 있던 시노부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 우리를 얕보진 말게나. 진짜 힘은 티끌만큼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멀쩡한 아군을 위협적인 적으로 둔갑시키는 바보짓을 하진 않을 것이라 믿겠다. –
“명심하지.”
여유롭게 대답한 세현이 중요한 다른 것을 질문했다.
“다른 게이트를 열어준다 했는데, 그건 어디로 연결되는 건가?”
– 자네들이 들어왔던 입구와 연동시킬 수 있지. –
“이용 인원 제한 같은 건?”
– 그런 건 없네. –
부산의 바다 길드성에 있는 권태수와 2전단을 불러오면 될까. 아니면 신소진의 3전단을 불러올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서로 동맹을 맺을 관계라면, 파트릭이 경고를 했던 것처럼 이쪽 역시 확실한 경고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쪽이 더 ‘좋은 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력시위를 위해 추가병력을 데려올 수 있느냐 물었지.”
– 그렇…… –
말을 하던 파트릭의 눈이 커졌다.
마주 앉은 세현의 눈이 선명 자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가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 어떻게…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
혼란에 빠진 그를 보며 세현이 웃었다.
“나 하나로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듯한데, 어떤가?”
@
파트릭은 곧 세현의 눈동자가 에레도스 시스템에서 부여하는 색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밤색 눈동자가 단지 힘을 끌어올렸다는 이유로 사용자가 아닌 시스템에 구속된 존재들처럼 보라색으로 변할 리는 없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치였다.
허나 이전에 당한 게 워낙 많아서 잠시 공황장애 비슷한 것이 온 모양이다.
파트릭은 보라색 등급 괴물들에 의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산 증인이었다. 세현의 눈동자 색을 보고 크게 당황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물론, 원래부터 사용자가 아닌 보라색 등급의 괴물이 눈동자 색을 감추고 사용자인 척 접근한다는 가정도 가능하겠지만, 파트릭은 그런 경우의 수는 곧장 배제했다.
그는 마법사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동안 스스로의 변해버린 눈동자 색을 감추거나 바꿀 수 있는지 여러 실험을 해봤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했다.
물론 그가 모르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세현이 그런 식으로 접근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파트릭의 의도를 미리 알지도 못했을 존재가 사용자인 척 위장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그는 간신히 혼란을 수습했다.
하지만 또 다시 크게 당황해야만 했다.
세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 위로 떠올려보인 보라색 룬 때문이었다. 크로나드를 죽이고 얻었던 보라색 룬이다.
“나 혼자 직접 죽인 존재에게서 얻은 룬이다.”
정확히는 크로나드에게서 나온 게 아닌, 에레도스 시스템이 준 보상이었지만.
– 말도 안 돼! –
그렇게 외치긴 했으나, 눈앞에 보라색 룬이 둥둥 떠 있는데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세현의 무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납득했다.
때문에 파트릭은 곧바로 작전을 변경했다. 무력시위를 통한 대화의 물꼬를 트기 보다는, 세현의 존재를 언급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들을 설득해보기로.
그래서 다른 두 지배자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파트릭의 거처를 방문했다.
그들은 파트릭과 비교하면 굉장히 젊은 외양이었다.
각각의 짧은 이름은 멜그소와 뷰리앙, 멜그소는 여성이고 뷰리앙은 남성이다. 외양이 젊다 뿐이지 실제 나이는 둘 모두 70이 넘는다고 들었다. 그 말을 해준 파트릭이 85살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세 지배들의 연배는 대충 비슷한 셈이다.
샬란 종족은 삶의 황혼녘에서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되는 걸까.
세현이 파트릭에게 들은 정보들을 되새기며 잡생각을 하는 사이, 그와 시노부를 소외시킨 세 지배자는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 저놈들을 어떻게 믿고? –
– 보라색 룬은 대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군. –
– 직접 잡았다지 않은가. 그만 있다면 어쩌면…… –
– 그걸 믿나? 파트릭, 몸이 늙어가며 마음이 약해진 건 알겠지만 사리분별은 제대로 해야지. 여기 바깥에 있던 인간들은 전부 약해 빠졌던데, 하물며 집단도 아닌 혼자서 잡았다고? –
– 혼자서 잡았다는 말은 나도 반신반의하는 중이지만, 어쨌든 보라색 룬은 진짜였네. 우리는 그들과 협력해야 해.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
– 희망은 무슨…… 어떻게 저 약해빠진 놈들을 믿고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생각을 할 수 있지? –
– 약해빠졌다는 건 자네 생각일 뿐이고, 미래를 생각해야지. 언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어만 있을 건가? –
– 그러니 더더욱 저들을 믿을 수 없다는 걸세. 자네야말로 미래를 생각하고는 있는 건가? 그냥 죽기 전에 뭐라도 해보고 싶은 욕심은 아니고? –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
반 시간이 지나도록 대화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처음엔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여유있게 기다리던 세현이 점점 찾아오는 지루함에 하품을 삼킬 때였다.
여성 지배자인 멜그소가 별안간 세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 거기 너 인간, 이리로 오라. –
듣기 거북한 명령조 말이다.
물론 세현의 위치를 모르고 아직 불신하는 상황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해서, 그는 별다른 불만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라색 룬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부른 목적은 십중팔구 그것일 테니.
하지만 멜그소가 이어 보여준 태도는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 이 놈이……하등한 종족 주제에, 감히 대답도 없이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와? –
“뭐?”
반쯤 다가가던 세현이 눈썹을 꿈틀하며 자리에 멈췄다.
– 누런 피부의 추악한 놈아, 당장 엎드려 빌지 않으면 사지를 찢어주마.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 건방지게 구는 것이냐? –
“……”
황당해진 세현이 파트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골치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더니 멜그소에게 말한다.
– 멜그소, 그는 현재 이종족의 대표일세. 말을 조심하게. –
– 대표? 대표가 아니라 사기꾼이겠지. 아무리 봐도 마력도 별 없는 하등한 녀석 같은데, 고작 저따위 놈에게 놀아나 우릴 부른 건가? 정말로 노망이라도 들었어? –
– 말 조심하라고 했네. 오늘따라 언사가 거칠군. –
파트릭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허나 멜그소는 코웃음만 쳤다.
– 저 하등 종족과 대화하기 전에 먼저 버릇을 들여야겠어. 그러면 파트릭 자네도 진실이 뭔지 깨닫겠지. –
그러더니 다시 세현에게 고개를 돌린다.
– 아직도 서 있다니 지능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아니면 배짱이 두둑하든가. 일단 그 쓸모없는 다리부터 자르고 이야기하자꾸나. –
동시에 허리춤의 완드를 뽑아들더니 세현에게 휘두른다. 누가 말릴 새도 없는 빠르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 멈춰! –
파트릭의 고함과 동시에 멜그소의 짧은 주문이 메아리쳤다. 한줄기 얇은 회색빛 칼날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가공할 속도로 날아든다.
“미친년.”
콰직!
그때, 짧은 냉소와 함께 세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동시에 멜그소의 안면을 검집으로 후려치며 다시 나타났다.
파트릭과 뷰리앙이 경악하는 표정, 안면이 뭉개지며 의자째 뒤로 넘어가는 멜그소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렴 펼쳐진다.
이전에 한 번, 류한 길드가 제대로 돌아가기도 전, 그는 김유린을 가르치며 ‘선’에 대해 언급한 적 있었다.
설령 상대의 시도가 전혀 위협이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이 관용을 베풀어야 할 이유가 되진 못한다.
“너는 내 다리를 거두려 했으니, 나는 네년의 그 방정맞은 손부터 뽑아주마.”
콰드득!
꺄아아아아악!
피가 흩뿌려지고 비명이 홀을 울렸다. 통째로 뜯겨진 완드 잡은 손아귀가 바닥에 떨어진다. 동시에 홀의 정문이 벌컥 열리며 조사단과 샬란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 모두 멈춰라!! –
쿠르르릉!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고 서로 싸움이 벌어지려는 순간, 파트릭의 고함이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 기사들은 당장 홀 밖으로 나가라! –
놀랍게도 그 명령에 샬란 기사들은 아무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곧장 허리를 숙이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야말로 완전한 복종이다.
물론 모든 샬란 기사들이 자리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부상당한 멜그소의 기사들만은 오히려 검을 뽑아들며 흉흉한 기세를 피어올렸다.
[키메시아 라 데파르 소브… 케데라 이메라니리이아……]어느새 뽑혀진 손아귀를 주워온 뷰리앙이 알 수 없는 주문을 길게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치료에 들어섰다. 연녹색 빛이 안개처럼 뿜어지며 멜그소의 부상당한 부위를 서로 이어 감싼다.
정신을 차린 멜그소는 살기가 철철 흘러 넘치는 푸른색 눈으로 세현을 노려보며 외쳤다.
– 완드! 내 완드! –
– 한 가지만 약속해주면 당장 돌려주겠네. –
그녀의 완드를 챙긴 파트릭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 더 이상 저들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주게. –
– 파트릭! 지금 상황을 보고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당장 내 완드를 내놔! –
“시작은 네년이 먼저 했지. 경고하는데, 다시 나를 공격하면 그땐 모가지를 뽑겠다.”
으르렁거린 세현의 전신에서 은은한 자색빛이 타올랐다. 눈동자 역시 같은 색으로 물들며 선명하게 빛난다.
– 보라색! –
비명과 같은 외침, 그리고 기세만 피워올리던 멜그소의 기사들이 일제히 세현을 향해 돌진했다.
아마도 주인의 위기상황이라 판단한 듯하다. 지금까진 두 지배자가 멜그소의 근처에 있었기에 주인의 부상을 보고도 차마 나서지 못했으나, 상대가 말로만 듣던 보라색 등급의 존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세현은 그들의 충정을 알아줄 이유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드는 수십의 기사들을 향해 손을 뻗자, 번쩍이는 자색빛과 함께 폭음이 터졌다. 기사들은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나가 벽에 처박혔다.
홀이 무너질 것처럼 진동하며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곳곳의 아름다운 장식품들이 쓰러지며 부서지기도 했다.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 짜증이 난 세현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파트릭, 셋 중 하나를 택해라.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잘 막든가, 아니면 내게 덤벼드는 이들 전부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든가, 그도 아니면……”
경악과 적대감 가득한 뷰리앙과 잠깐 시선을 마주하던 그가 파트릭에게 눈을 돌렸다.
“그냥 여태까지의 이야기 전부를 없던 걸로 치든가.”
============================ 작품 후기 ============================
성격 급하고 제 생각만 옳다 똥고집 부리는 사람이 꼭 있죠.
부디 잼있게 읽어주시길 바라며, 추천!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