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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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劍神)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뤄진 장례가 끝난 후, 어떤 면으로는 그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는 파티가 열렸다.
각양각색 고기 요리들과 부산에서 바다낚시와 갯벌에서의 채집을 통해 얻은 해산물 요리들, 소주와 맥주를 비롯한 각종 양주들, 심지어 크로나드 숲의 열매와 약초로 직접 담근 술까지 나왔다.
모두가 웃고 또는 울기도 하며 파티를 즐겼다.
자신들이 해낸 업적과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 소중한 전우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앞으로는 더욱 강해져야겠다는 다짐까지,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이들은 물론 참가하지 않았던 이들까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파티였다.
오크들과의 전쟁은 각 개인 뿐만이 아닌 길드 전체로도 커다란 경험적 자산이 됐다.
그리고 다음 날.
대부분의 인원들이 숙취로 고통받을 때 쯤, 세현은 아엘라의 옆에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하얀색 알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었다. 24시간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알을 안고 다녔다. 흡사 새가 알을 품는 것처럼, 덕분에 그녀의 체온을 나눠받은 알은 항상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현은 아직도 자신의 힘을 통해 알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
이전이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아이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고 상태를 살필 수 있을지 모른다. 다른 벡스들에게 듣기로 알은 외부의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조심해야 한다 했지만 세현이라면 그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뜻 시도하지 않는 것은 만약의 만약을 우려한 아버지로서의 걱정 때문이었다. 또한 어쩌면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상심을 기피하기 위함일지도.
둘은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둘 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으나 세현은 아엘라가 언뜻언뜻 걱정스런 기색으로 알을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끊겼다.
자연스럽지 않은 정적이 흐르길 잠시, 아엘라가 고개를 숙였다.
– 사실은…… 각오하고 있어요. –
“각오? 무슨 각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모를 수가 없다. 그녀의 빛을 잃은 듯한 눈동자가 그때까지도 품에 안고 있던 알을 향했으니까.
– 정상적이지 않아요.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요. 흔들리거나 진동이 느껴지지도 않고…… 이런 건 정말로 정상적이지 않잖아요. –
“……”
–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아이는 태어… 태어났을 때부터…… –
떨리는 목소리는 채 끝맺어지지 못한다.
처음 알을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으나 이제는 한계였다.
특별하다는 말로 포장하기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정적이 너무나 무서웠다.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볼을 따라 한 줄기 눈물이 떨어진다. 마냥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녀 역시 한 종족을 여기까지 이끌었던 수장이다. 희망만을 바라보기엔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확실한 건 없어 아직.”
세현의 말이었다. 물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 하루종일 알을 안고 다니는 건 아엘라다. 그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와닿지 않을 것이다.
결국 선택의 시간이 왔다.
세현은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살펴봐도 될까?”
그냥 살펴본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기를 사용해 알 안쪽의 상태를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짧지 않은 시간을 고민하던 아엘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네. –
그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후 아엘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듯 앉아서 알 위쪽으로 조심히 손을 올렸다.
곧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하는 그를 보던 아엘라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갖가지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인다.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갖가지 감정과 생각들에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그녀 인생에서 이토록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란 적 있었던가.
배가 불러올 때부터 태어날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떻게 키우고 돌봐줄지, 무엇을 가르쳐주고 어떤 이야기를 해줄지, 자장가로는 무엇을 불러줄지 하나하나 준비했다. 아이가 차츰 성장해 커나가는 모습을 상상했고, 때때로 투정을 부릴 때는 어떻게 달랠지도 생각해놨다.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느낌에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온종일 기분이 붕 떠 있었다. 그녀를 보좌하는 다른 벡스들에게 아이를 위한 옷가지 등을 선물받으며 그것을 입은 그녀의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언젠가 생겨날 다른 아이가 아닌, 바로 그녀가 품고 낳은 이 알 안에 있을 아이를 위한 것들이었다. 이후 그녀가 다시 임신할 수 있을지라도 결코 그것이 이 아이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토록 간절한 것이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무사하기를.
상상했던 대로, 그보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품에 안겨 방긋 웃어주기를.
아엘라의 간절함을 느끼며 세현은 더 없이 신중하게 기를 운용했다.
파고들 틈 하나 없이 매끈한 알의 껍질을 전체적으로 감싸 혹시나 불안요소가 있는지를 체크한다.
이윽고 잠시 후, 더 없이 섬세한 조절과 함께 희미한 자색빛 내공이 알 안쪽으로 침투했다. 실제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세세하게 내부를 느낀 세현의 한쪽 눈썹이 한차례 미약하게 떨렸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살아있었다. 걱정했던 것과 정 반대로 아주 건강한 상태였다.
또한 알 속에는 세현조차 놀랄 만한 어마어마한 기운이 잠들어 있었다. 이 기운을 가둬두기 위한 대단한 성질의 알 껍질이었으니, 그간 외부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혹시 이상이 있을까 한참을 더 살펴봐도 별다른 것은 알아낼 수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아무것도 건들지 않는 것이 상책, 결국 그는 조용히 기운을 거두고 알에서 손을 거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무거운 분위기를 단번에 거둬내는 말을 던졌다.
“아주 건강해.”
– 저, 정말로요? –
“정말로.”
그 단호한 확답에 아엘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마치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크게 지쳐보였다. 세현이 알에 집중하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극도로 긴장했던 탓이다.
허나 이내 더 없이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상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 듯, 크게 감격한 것처럼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현은 자신의 신경을 미세하게 자극하는 알 수 없는 감각을 느끼며 허공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눈치 챈 아엘라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왜 그래요? 혹시…? –
“아니, 아이에 관련된 거 아니야.”
이게 무슨 느낌이지?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정신 어딘가를 자극하는 기이한 감각이었다. 갇혀 있는 답답함, 지금 뛰쳐나와야 하는 듯한……
그러던 어느 순간 세현이 직감적으로 무한의 주머니를 열었다. 동시에 튀어나온 것은 지금껏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잊혀져 있던 전설 아이템 ‘불사조의 깃’.
그것은 처음엔 이전과 같이 반투명한 모습으로 허공에 나타났다. 그러나 눈 한 번 깜짝일 사이 급속도로 색채를 되찾으며 찬란하게 빛나더니, 형체를 잃고 한줄기 불꽃으로 화해 아엘라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막으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마치 놀라지 말라고 달래는 듯한.
자신도 모르게 알을 꼭 안으며 경계하는 아엘라의 근처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느리게 한 바퀴 돈 불길이 이내 알쪽으로 움직였다.
– 마, 막아야 될까요? –
“아니.”
세현에게 그것의 감정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고도의 지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허나 주인을 가리는 신수의 깃이라 그런지 약간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결코 해로운 쪽이 아니었다.
잘 될 것이다.
“전설 아이템이야. 불사조의 깃, 알지?”
– 네. 전에 보여주신 적 있으니까요. 그럼…… –
“주인을 찾은 모양이지. 해가 되진 않을 거야.”
그런 확신이 들었다.
결국 아엘라는 품에 안은 알에 그 환영같은 주홍빛 불길이 닿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알 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췄다.
긴장된 두 쌍의 시선이 알을 주시한다. 그러길 잠시, 하얗던 알의 껍질이 차츰 연한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파지직-
금이 갔다.
놀란 아엘라가 돌처럼 굳어버리고 세현 역시 화들짝 놀라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다시 내부를 살피기도 전에 균열은 급속도로 확장됐다. 이윽고 세네 조각으로 부서진 껍질 사이로 새 생명이 눈을 떴다.
아엘라와 세현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못박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얗고 보드라워보이는 아기 특유의 피부,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났다고는 볼 수 없는 비단실처럼 길고 부드러운 느낌의, 아엘라를 꼭 닮은 은빛 머리카락이다. 선명한 자색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보석처럼 빛나며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세상이 멈췄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오감이 차단된 그 기묘한 경험 속에서, 세현은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멍하니 자신의 아이를 쳐다봤다.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다른 이들의 아이를 본 적은 많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를 본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들과 지금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살아있는 기적을 본다.
자신과 아엘라가 만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작은 생명이 거기 있었다.
“아우우… 우으?”
아이가 손을 뻗는다.
세현을 쳐다보고 아엘라를 쳐다보고, 몇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제 어미를 향해 안아달라는 것처럼 두 손을 뻗었다. 미약하게 떨리지만 더 없이 조심스럽고 신중한 손길로 아엘라가 아이를 안았다.
인간의 아이처럼 태어났을 때 탯줄을 자르거나 엉덩이를 때리고 씻겨줄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리한 것처럼, 이미 깨끗한 상태의 아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옹알이와 함께 제 어미의 가슴팍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더듬거렸다.
본능적으로 뭔가를 찾는 움직임이다. 아엘라가 허둥지둥 입고 있던 옷의 앞섭을 풀어 젖을 물렸다. 아이는 생전 처음으로 하는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간신히 말을 꺼낸 세현에게 아엘라 역시 커다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 유르미아…… 유르미아요. 저희가 있던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별 이름이에요. –
아엘라의 풀네임은 아엘라 슬 벡케스.
여기서 이름은 아엘라 슬이고 벡케스는 족장을 나타내는 명사에 가깝다.
“그럼 유르미아 슬이 되는 건가? 자라서 족장 자리를 이어받으면 유르미아 슬 벡케스가 되고?”
– 네. 벡스 종족의 규칙에 따르면요. –
벡스 종족은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에 아버지의 이름을 따지 않는다.
배우자로 삼는 이가 종족이 제각각이라 이름 역시 이질감이 심한 경우가 많고, 또한 아이에 대한 양육을 벡스 쪽에서 온전히 책임지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그걸 세현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이름은 원하는대로 지으라고 말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자신의 성, 이름 한 글자라도 넣고 싶어졌다.
이 아이가 자라며 평생을 불릴 이름에 자신의 이름 역시 남기고 싶었다.
– 유르미아 슬 한으로 해요. 어차피 벡케스의 호칭은 이제 유명무실 해졌으니까요. –
그런 세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엘라가 슬며시 제안한다.
당연히 세현은 거절하지 않았다. 이후 여전히 식사에 열중하는 아이, 유르미아의 머리카락을 일부분만 소심하게 만졌다. 행여나 방해가 될까 싶은 마음이었다.
============================ 작품 후기 ============================
긴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어렸을 땐 마냥 즐기기만 하면 됐는데 지금은 이것저것 할 일이 많네요. ㅋㅋ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