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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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본격적인 전투를 앞둔 연설전에서 세현은 완승을 거뒀다. 공격대의 사기는 끝없이 치솟았고 대한 길드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이대로 가만 있으면 싸우지도 못하고 질 판이다. 이창규가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세현에게까지 들렸다.
“정신 차려라! 저놈들이 하는 거짓말을 들으란 말이다! 우리가 순순히 항복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무섭지도 않나! 이대로 항복하면 저항도 못하도 죽을지 모른다!”
대한 길드원 입장에선 세현이 거짓말을 일삼으며 싸움을 걸어오는 침략자다. 이창규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상대의 힘이 강하다고 순순히 항복하면,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목숨은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할 때도 있다. 이창규가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끝까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싸우겠다면, 우리 역시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내공을 담아 쩌렁쩌렁 소리친 세현이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성을 겨누며 외쳤다.
“성문을 부숴라!”
투콰아앙!
투쾅! 투콰광!
투콰아앙!
기다렸다는 듯 네 대의 전차가 불을 뿜는다. 그리고 포화에 휩싸인 성문이 그대로 박살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강력한 폭발이 성벽 전체를 울리며 진동한다. 위에 있던 대한 길드원들 중 일부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질 정도였다.
“공격-!!”
사자후가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뒤이어 그보다 더 거대한 함성과 함께 2000명의 공격대가 용감한 돌진을 시도했다.
공성전이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셈이다. 전투원이라고는 200명 정도가 전부인 대한 길드로서는 완전히 부서져버린 성문으로 밀려드는 공격대를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드물게 쏟아진 공격은 신성술사와 광휘술사들의 보호막에 가로막혀 모조리 스러졌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성문을 돌파해버린 공격대가 사방으로 퍼지며 눈에 보이는 대한 길드원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류한 길드원들이 있었다.
“제압이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좋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항복해라!”
김인환과 권태수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댔다. 자신들의 열 배나 되는 숫자가 들이닥치자 대한 길드는 파도에 휩쓸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럴 수는 없어!”
다가오는 완벽한 파멸에 눈이 돌아가버린 이창규가 창을 꼬나쥐고 눈에 보이는 공격대 중 한 명을 향해 돌진했다. 그래도 길드장이라고, 다른 이들보다 조금 수준이 높았다. 또한 공격한 대상이 어느 길드 소속이 아닌 평범한 영지민이었다.
그러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옆에서부터 짓쳐들어온 은빛 창날이 이창규의 공격을 후려쳐 튕겨낸 것이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충격을 받은 그가 휘청였다. 손에서 창을 놓치지 않은 게 용하다. 눈을 부릅뜬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김유린이 빙글빙글 웃으며 자리해 있었다.
“덤벼.”
“……이, 이 씹어먹을 계집년이!”
분노에 찬 포효와 함께 이창규가 달려든다. 제법 정제된 자세로 내질러오는 찌르기에는 그의 격렬한 감정이 그대로 실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법일 뿐, 세현에게 제대로 무공을 전수받는 김유린의 눈에는 헛점 투성이었다. 이보다 더 엉망일 수가 없다.
가볍게 휘두른 창날에 이창규의 공격이 튕겨져 방향을 잃는다. 제가 내지른 공격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안면으로 김유린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퍽!
“어억!”
숨 막히는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진 그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김유린은 이창규가 완전히 일어설 때까지 창대를 휘돌리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덤벼. 겨우 그 정도야?”
“이, 이런 썅…!”
극도로 분노한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진다. 살아 생전 자신보다 어린 여자한테 이런 식으로 굴욕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안 오면 내가 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적으로 그녀의 신형이 사라진 듯 보였다. 이창규는 엄청난 속도로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창날을 간신히 피해냈다.
갈라진 이마의 피부 사이로 피가 흘러 눈썹을 타고 흐른다. 하지만 놀라거나 분노할 시간이 없었다. 그를 가지고 놀듯, 김유린이 계속해서 창을 찔러왔기 때문이다. 매번 이창규가 간신히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언뜻 김유린이 이창규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되도록이면 이창규를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단번에 죽일 수가 없었다. 아직 팔팔한 놈을 단번에 제압하긴 조금 부담스럽고, 그렇게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 먼저 힘을 빼려는 생각이었다.
도발이 통한 상대는 흥분해서 체력의 분배를 잊어먹는다. 동작에 군더더기가 많아지고 과도한 힘이 실린다. 또한 용암처럼 들끓는 머릿속 때문에 정신력 역시 급속도로 소모된다.
김유린은 계속해서 그를 도발하며 시간을 끌었다. 상대하는 이창규로서는 그녀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미쳐 날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김유린이 이창규를 상대로 시간을 끌고 있을 무렵, 공격대는 성벽을 완전히 장악하고 내부의 잔당 소탕에 들어가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차이가 너무 크다. 결국 항복하는 대한 길드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끝까지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는 이도 있었다.
“다 들어와! 이 개새끼들아!”
한 남자가 포효하며 손에 든 전투도끼를 사방으로 휘둘렀다. 죽을 때 죽더라도 굴복할 수는 없다는 나름의 신념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런 남자의 앞에 유령처럼, 박수진이 나타났다.
광전사 직업을 가져 분노에 몸을 맡기고 날뛰던 남자가 순간적으로 흠칫할 정도로,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다.”
“……으, 으아아아아악!!”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남자가 돌진한다. 애초에 여기서 항복할 거라면 이렇게 날뛰지도 않았다. 그런 남자를 무감정한 눈으로 쳐다보던 박수진이 가볍게 몇 발 움직였다.
그녀는 세현의 제자다. 김유린과 함께 가장 많은 관심과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유일하게 세현과 같은 검귀 직업을 가진 애제자.
그의 가르침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기억한다. 힘을 나눠준 스승이자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준 구원자, 그리고 때로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유일한 버팀목.
무엇이든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것이다.
기계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검술이 펼쳐진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가끔 악몽을 꿀 것 같은 밤에는 날이 샐 때까지, 굳은살 박힌 손이 터지고 또 터질 정도로 지독하게 연마한 검이 날아드는 전투도끼의 옆면에 거짓말처럼 달라붙는다.
이화접목.
재능이 없는 자는 평생을 수련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명실상부 순수한 검술의 최상급 기예 중 하나.
사람 하나는 그대로 쪼갤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던 전투도끼가 바람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엉뚱한 곳에 틀어박힌다. 그보다 더 빠르게 내질러진 반대편 장(掌)이 자세를 잃고 무방비해진 남자의 턱을 후려쳤다.
눈이 풀리며 그대로 쓰러지는 그를 피해 한 걸음 물러난 박수진이 싸늘한 시선을 돌려 다음 상대에게로 향했다.
지금까지 날뛰는 자들은 쉽게 제압하기 힘든,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자들이다.
공격대가 이들의 악행에 분노해 공격을 가하긴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사람이다. 무조건 사살이 아닌 가능한 생포를 최우선으로 둘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아직도 반항하는 대한 길드원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라면 어쩔 수 없이 죽이거나 힘이 빠질 때까지 시간을 끌며 기다려야만 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박수진이 나서면 그들은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모조리 기절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거짓말 같은 장면이 몇 번이나 펼쳐진다. 칼질 몇 번에 상대의 무기가 손잡이부터 절단나거나, 아니면 엉뚱한 곳을 공격하다 균형을 잃거나, 그도 아니면 방어구가 모조리 해체되어 겁에 질려 주저앉는다.
주변의 공격대원들은 그런 박수진의 무위를 보고 입을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전장의 중앙이 그녀가 지나치는 곳에만 정적이 내려앉았다.
결국 대한 길드는 순식간에 류한의 공격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끝까지 저항하던 이창규 역시 지쳐서 헉헉거리다 김유린의 창대에 턱을 얻어맞고 눈이 풀리며 쓰러졌다. 섬뜩한 소리까지 들린 것이, 아마 턱벼가 골절된 듯하다. 나중에 신성술사들이 손을 봐주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짧지만 치열했던, 공격대는 아무런 사상자 없는, 대한 길드는 아주 운 없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죽지 않은 완벽한 전투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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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대는 대한 길드의 전투원들을 포박해서 한 곳으로 모았다. 부상을 당했거나 정신을 잃은 이들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죄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끝까지 싸우려던 이들이다. 이 정도 대우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사실은 대한 길드원들은 류한의 공격대가 생각하는 그런 죄를 저지른 적 없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항변하거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패배한 마당이다. 혀를 잘못 놀리다간 괜히 독박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나중에라면 몰라도, 전투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지금은 확실히 아니다.
공격대는 모든 전투원들을 제압한 후, 당연한 수순으로 ‘피해자’들을 구출하는 일에 착수했다. 혹시 숨어 있을지도 모를 적을 경계하면서 성 전체를 샅샅이 훑었다.
가장 먼저 구출된 것은 지하의 감옥에 갇혀 있던 최용선과 그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공격대의 질문에 최대한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상황을 잘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으로 구출된 것은 성의 2층 숙소에서 옹기종기 모여 떨고 있던 마흔 명 정도의 여자들이었다.
그 구출대의 뒤에는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세현이 자리해 있었는데, 그는 뒤에서 여자들의 몰골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곱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했던 여자들은 어디가고, 허름한 옷차림에 피곤한 기색 가득한 여자들만 있다. 심지어 몇 명은 얼굴이나 팔 등에 멍이 들어 있기도 했다.
무공이 경지에 올라 사람의 신체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세현은, 그 멍들이 생긴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물론, 다른 공격대원들은 그런 것까진 알 수 없었다.
여자들의 중앙에 있던 한 여자가 갑자기 들이닥친 공격대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살피며 묻는다.
“우, 우리를 어떻게 할 건가요?”
처연한 목소리에선 반쯤 삶을 포기한 듯한 처연함까지 느껴진다. 표정과 행동까지, 연기가 꽤 훌륭했다. 거기에 연예인 뺨치는 아름다운 외모까지 더해지자 효과가 막강했다.
수색작업을 지휘하던 자는 김인환이었다. 그는 아내가 있음에도 그 미인계에 휘말려 딱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 길드에 있던 여성분들, 맞습니까?’
“네, 네. 맞아요.”
“그럼 저희를 따라오세요.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닙니다.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겠습니다.”
뒤에서 웃음을 감추고 그들의 모습을 보던 세현과, 중앙에서 상황을 주도하던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마 그녀가 배신자 부길드장 김주영일 것이다.
그녀는 세현을 본 적 없음에도 그를 알아봤다. 미약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면 분명 그러했다.
제 안위를 챙기는 능력만큼은 인정해줄 만했다. 조직을 이끄는 입장에서는 가장 배척해야 할 인간 유형이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어중이떠중이보다 나은 듯하다.
구출대의 인도에 따라 성을 나선 김주영 무리는 이미 구출되어 상황을 살피던 최용선 무리와 마주쳤다.
최용선의 표정이 변했다.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는 대상을 바라볼 때의 느낌, 그러나 그 눈을 마주하는 김주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상황을 알 리 없는 공격대원들이 그들에게 간단한 먹을 것과 마실 것들을 나눠줬다. 여자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도 깨작깨작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최용선 무리에게도 같은 것이 제공됐다.
그렇게 ‘피해자’들의 긴장을 풀어준 김인환은 차분한 어조로 그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결코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먼저 심문을 시작한 대상은 당연하게도 여성들이었다. 그에 김주영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질문에 답했다.
그녀는 세현이 김혜빈을 통해 은근하게 흘린 제안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또한 임기응변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세현이 원했던 대답만 착착 튀어나왔다.
옆에서 그것을 듣던 최용선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러다 문득 웃고 있던 세현과 눈이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입을 다무는 것을 넘어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조용히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한다.
저들은 류한 공격대가 어떤 이들인지, 지금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른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힘을 가진 상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이야 애초에 자신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이들이니 괜찮을 것이다. 그녀들은 이곳 대한 길드가 여자들을 착취하던 나쁜 놈들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증언할 것이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바로 최용선 일행이었는데, 의사라서 그런지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아 일이 쉽게 풀릴 듯했다.
만약 눈치도 없고 의외로 무식했다면,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을 테지만 지금처럼 매끄럽게 흘러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피해자들의 심문까지 모두 끝났다. 대한 길드의 수장이자 이 모든 잘못의 주범인 이창규는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렸지만, 상황은 이미 완벽히 정리되었다.
============================ 작품 후기 ============================
뻥이 아니라, 12시에 올리려던 글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쉬프트+델리트가 습관인지라, 다른 걸 삭제하면서 함께…… 흐…… 그래서 다시 썼어요. 정말입니다. ㅠㅠ
부디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추천도 꾹!! 부탁드립니다. (__)
여담으로, 경기도 오산에 이은 율곡 이이 반응도 상당히 괜찮더군요. 보는 제가 다 흐뭇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