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693
693화. 유서
성건우가 노부흥의 편지를 읽는 동안 장목화는 뜻밖의 상황을 경계하며 배낭 속 문서와 자료들을 꺼냈다.
일부는 색이 노랗게 바랜 데다 바짝 말라 쉽게 찢어질 듯했으며, 일부는 약간의 곰팡내가 풍기긴 해도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전자는 노부흥을 비롯한 이들이 인혜 병원 식물인간 재활 센터에서 찾은 문서, 후자는 생존자들이 남긴 유서였다.
유서 중 편지 봉투에 담긴 것은 없었다. 편지 작성자들은 가지런히 접은 편지에 수신인의 이름만 적어두었다.
그것들을 슥 훑는데, 장목화의 눈에 익숙한 이름 하나가 걸렸다.
「성영희」
곧장 신경이 쏠린 장목화는 또 한 줄의 글을 확인했다.
「우베이 변경 거점, 성영희 앞.」
‘……이건 기강호의 유서인가?’
지금 이 소식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 안타까워해야 하는 걸까.
사실 장목화도 기강호가 인혜 병원 식물인간 재활 센터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걸 잘 알았다.
기강호는 그냥 연구자에 불과할 뿐, 각성자도 아니고 실력이 출중한 전사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구세군에서 매해 열두 살에서 예순 살 이하의 구성원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격투와 사격 훈련에 참여한 것이 전부일 터였다.
설령 기강호가 엄청난 행운으로 이상하게 과묵해지지도 않았다고 한들, 강제로 특정 방에 들어간 게 아니거나 혹은 위험성이 높지 않은 방에만 들어가 목숨을 건졌다 한들,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후에 고고학팀이 분열되어 격전을 벌이는 과정 중에도 살아남아야 하고, 인혜 병원 식물인간 재활 센터 밖으로 도망쳐 나오기까지 해야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버티며 유서까지 남겼다.
기강호에겐 당시 행운의 여신이 동행했던 모양이었다.
다만 행운의 여신도 그를 타이 시티에서 탈출시켜주거나 무심병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이제 그가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아내의 앞으로 보낸 이 편지 한 통뿐이었다.
장목화는 본인의 능력과 군용 외골격 장치의 종합 경보 시스템으로 사방을 감지하고 곁눈으로 주위 상황을 관찰하는 동시에 왼손으론 기강호의 편지를 툭 털어 펼쳤다.
편지는 여러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목화는 빠르게 그 내용을 살폈다.
「영희야, 아마도 이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네 이름이겠지.
난 이미 무심병에 감염됐어.
머리가 점점 몽롱해져 가. 아직 초기 증상이나 증세가 심해지진 않았지만 내 동료들이 보인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어. 내가 무심병에 걸렸다는 걸.
내가 이 편지를 적고 있는 지금도 벌써 세 명이 발병해 그 자리에서 처리됐어. 만약 내가 최후의 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나도 그렇게 끝을 맺을 거야.
내가 너한테 말했던, 몇 달간 빙원에서 한 구역을 탐측하는 임무의 어려움이라는 건, 사실 어마어마한 폭설이나 우베이를 몇 배나 능가하는 혹한이었어. 이런 계절에 이런 임무를 맡으면 순직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잖아. 내가 처음에 걱정했던 것도 그런 거였고.
근데 상황의 변화는 내 상상을 초월하더라고. 여긴 기이하고, 피비린내 나고, 광기 어리고, 절망적인 일들로 가득해.
우리는 전에 두 번이나 지나쳤는데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도시를 발견했어. 그리고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듯한 어느 건물에 들어가기도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말 못 해. 보안 유지 수칙 때문이기도 하고, 네가 이 얘기를 듣고 악몽을 꾸거나 남은 평생을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내 복수를 하는 데 쓰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내가 너한테 알려줄 수 있는 건, 이 사건의 원흉은 이미 그 건물 안에서 죽었다는 거야. 그는 팀이 갈라진 후 발생한 격전 중에 목숨을 잃었어. 내 유일한 의문은 그와 그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한 이유야.
걱정하지 마, 그건 조직에서 조사할 거니까. 우리한텐 그럴 능력이 있어.
어릴 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구세군 건립 초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거든? 난 사실 그 시대에 사랑했던 부부가 전란과 재난, 조직의 명령으로 갈라진 후 그 사랑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게 사실 잘 이해가 안 가더라고. 근데,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
영희야, 다시 한번 네 이름을 불러본다.
이 유서 뒷장에 내가 쓴 신청서가 있어. 널 우베이로 전근시켜 달라는 신청서야. 순직자한테 이 정도 자격은 있거든.
우베이로 돌아오면 우리 부모님께 한번 찾아가 줘. 부모님께는 유서를 남기지도 않았고, 조직에서 통지하는 것도 바라지 않아. 나이가 있으시니 충격받으실 것 같아서.
네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내가 순직했다는 걸 은근히 암시하다가 부모님께서도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됐다 싶으면 그때 알려 드려.
영희야, 우베이로 돌아가면 다른 사람을 만나.
넌 워낙 아이를 좋아하잖아. 우리 미래를 얘기할 때마다 네 눈이 얼마나 반짝거렸는지 아니. 네가 날 좋아하게 된 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한 아이의 장난감을 고쳐줬기 때문이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나. 지금까지도 그때 네 모습이 눈에 선해. 네가 얼마나 예쁘게 웃고 있었는데.
영희야, 이번에는 꼭 외부 파견직 말고 우베이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 봉급이 적은 건 중요하지 않아.
영희야, 전시의 인간보다는 평화로운 개로 사는 게 나아.」
‘전시의 인간보다는 평화로운 개로 사는 게 낫다라⋯⋯.’
장목화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때맞춰 성건우도 노부흥이 남긴 편지를 다 읽었다.
금속 골격으로 뒤덮인 오른손을 든 그는 편지를 쥔 그 손을 왼 가슴에 얹으며 장엄하고 엄숙하게 전방의 시신을 향해 예를 갖췄다.
“전 인류를 위해!”
그가 의식을 마치자 장목화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편지는 배낭에 다시 넣어. 돌아가는 길에 구세군에 넘길 거야.”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편지는요?”
장목화는 잠시 침묵했다.
“……기강호가 남긴 거야. 성영희 남편 기강호가.”
감정을 중시하는 성건우는 곧장 손을 뻗었다.
“저도 좀 볼게요.”
장목화는 기강호의 유서를 건네준 뒤 배낭의 문서를 간단히 훑어보려 했다. 혹시 뜻밖의 사건으로 자료를 잃어버릴 상황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딱 한 장으로 이루어진 유서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아들아. 네 아버지는 죽는다!」
순간 이 단 한 줄에 여태까지 먹먹했던 장목화의 감정이 다 달아날 뻔했다. 그래도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나머지 내용을 마저 살폈다.
「넌 이미 성년이 되어 직업을 분배받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이 아버지는 더 이상 너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안 한다. 배우자야 조직에서 알아서 소개해 줄 거고.
넌 항상 나보고 완고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물자를 되파는 고위층 친척을 매일 욕하다가 결국 부대에서도 변방으로 쫓겨났으면서 왜 몇 달짜리 임무에는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고, 왜 굳이 기후가 최악인 곳에 가서 탐측하려 하느냐고 말이다. 이제 네게 그 이유를 알려주마.
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수시로 하시던 구세계 말이 있다.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최대한 발휘하라고.
나쁜 짓 하고, 타락하고, 공적인 이름으로 사적인 욕심을 채우고, 주어진 임무에 열중하지 않는 건 그들의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욕하면서 어떻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한테 떨어진 임무를 피할 수 있겠어.
난 내가 전에 했던 맹세를 지켜야 했다.
그렇지만 너는, 나처럼 전 인류 구원이라는 이상을 갖기를 바란 적은 없다. 난 그저 네가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야. 그들과 어울려 타락하지 않고 근면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들은 계속 그렇게 살라고 둬. 다른 사람들도 안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다 보고 있다.
언젠가 너희 젊은이들도 한순간 욕심이 천년의 괴로움으로 돌아온다는 이치를 깨닫게 될 거다. 때가 되면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도 꼭 실현되겠지!」
편지를 다시 잘 접은 장목화는 배낭에 넣었다.
이후 문서를 꺼낸 그녀는 혹여 찢어질까 조심스럽게 넘겨보았다.
문서는 대략 네 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 주고받은 편지, 실험 노트, 상부의 명령, 의사의 기록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세 가지였다. 노부호가 표시해둔 덕분에 장목화는 시간을 대폭 아낄 수 있었다.
하나는 식물인간 재활 센터의 환자 중 3분의 1을 2호 기지로 옮기라는 명령이었다. 해당 명령을 내린 건 제8 연구원이었으며 그 시점은 구세계 파괴 일주일 전이었다.
다른 하나는 환자들의 뇌 상태와 신체 반응 등에 관련된 실험 노트였다. 이 기록에는 환자들에게 모종의 자극을 주었다고만 나와 있을 뿐 그 자극이 어떤 자극이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마지막 하나는 어느 의사의 기록으로, 한쪽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곧 신령의 금기 구역으로 통하는 계단에 오른다. 소위 신세계라는 곳이 눈앞에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2호 기지⋯⋯.’
속으로 그 말을 되뇌던 장목화는 문서들을 흑녹색 캔버스 배낭에 넣으며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내려가자. 자세한 건 타이 시티에서 나간 뒤에 살펴봐야겠어.”
기강호의 유서를 읽는 데 빠져 있던 성건우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헬멧 바이저 아래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장목화는 흠칫 놀랐다. 그야말로 성건우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모습인 이유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성건우는 감정을 중시하는, 정신 연령이 어린 성건우였다.
아마도 기강호의 유서를 보고 분명 자신의 아버지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성건우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혹시 자신과 어머니한테 남긴 말은 없었을지 궁금해졌을 듯했다.
장목화는 한숨을 내쉬며 성건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서는 내려놓고 이만 내려가자. 다른 집들에 있는 시신들은 구세군 사람들이 와서 수습할 거야.”
한 차례의 미사일 공격 이후, 가짜 타이 시티는 이미 사라졌으니 구세군 사람들도 진짜 타이 시티에 직접 진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알겠어요.”
빠르게 인격이 바뀐 성건우는 어느덧 웃으며 장목화를 보고 있었다.
책상의 컴퓨터 저장장치를 분해해 챙긴 성건우는 창문이 붉게 칠해진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주변에 굳게 닫힌 문들을 봤다.
그 나무 문들을 열려고 하진 않았다. 조용히 시선을 거둔 성건우는 흑녹색 캔버스 배낭을 든,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입은 장목화를 따라 아래로 향했다.
그들이 지프 근처로 돌아갔을 무렵, 용여홍, 백새벽도 복귀 신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