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23
823화. 교류
미약한 빛은 점차 밝아지다가 하나의 가로등으로 응집됐다.
회색 제복을 입은 성건우는 바로 그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살려주세요!”
성건우가 웃으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장목화는 흠칫 놀랐다.
“왜! 왜 살려달라고 하는 거야?”
두꺼운 장벽으로 격리돼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작게 전달됐다. 이에 장목화는 목청을 높여 방금 한 말을 한 번 더 반복해야 했다.
성건우가 웃었다.
“염호 성대모사에요.”
“⋯⋯.”
장목화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신 상태는 아직 괜찮은가 보네.”
그녀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물었다.
“어때, 우리 추측이 맞았어?”
단, 장목화는 구체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누군가 ‘금지어’를 포착하고 성건우에게 피해를 입힐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구세군 내 신세계 비밀을 폭로하려던 강자들의 결말은 그리 좋진 못했다.
“네.”
성건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세계에 이른 각성자는 목표한 인간 의식을 취함으로써 스스로를 보충할 수 있었다.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바꿨다.
“신세계에도 무심자가 있어?”
“아직은 못 봤어요.”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그럼 그 좀비 같은 무심자들은 현실의 신세계에만 존재하는 건가? 그럼 난 혼자서라도 그 안에 잠입해 정탐하는 수밖에 없겠네.’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신세계 비밀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어딘 것 같아?”
“저 탑이요! 달지기들은 다 저기에 산대요!”
성건우가 흥분해서 말했다.
‘달지기들이 신세계 탑 안에 산다고? 그럼 현실 신세계의 탑 안에는?’
장목화의 머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빠르게 돌아갔다.
이때 성건우가 말을 이었다.
“이곳과 현실 신세계는 많이 달라요. 탑이 훨씬 높고, 곳곳에 불빛이 있고, 건축 스타일도 다 달라요. 레드리버풍의 고전적인 건물도 있고, 애쉬랜드의 합원(合院)도, 구세계의 고층 빌딩도 있어요.”
현실 신세계 건물들은 구세계 파괴 1~20년 전의 스타일로 통일돼 있었다. 고층 빌딩 같은 것은 없었다.
“음.”
장목화는 지금으로서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건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곳의 불빛은 각각 상응하는 각성자 정신과 의식을 대표해요. 죽지 않는 한 그 불빛은 꺼지지 않죠.”
이 대목에서 그는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알겠다! 그때 염호가 있던 그곳 빛이 엄청 미약했어요. 꼭 어둠에 파묻힌 것처럼 보인 건 염호의 의식이 이미 거의 쇠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구나.’
장목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일단 염호부터 찾아서 얘기를 들어보려고요.”
이어진 성건우의 말에, 장목화가 미간을 팩 구겼다.
“염호는 누군가한테 갇혀 있어. 가둔 사람 분노를 살 걱정은 안 돼? 그건 어쩌면 어느 달지기일 수도 있어. 일단 플로라와 버나드 같은 우호적인 신세계 강자를 찾아. 그 사람들한테 상황을 파악하고 앞으로 계획을 세우자.”
그녀는 성건우에게 이유를 댈 기회도 주지 않고 본인 의견을 제시했다.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전 그들이 어딨는지 모르는데요. 하지만 염호가 갇힌 곳은 추리할 수 있어요. 신세계 공간 구조가 정상이기만 한다면.”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플로라와 버나드 위치도 추리해볼 수 있어. 그때 네가 그랬잖아. 커닝미스의 달지기 아들이 살던 곳은 탑과 어느 정도 중첩돼 있었다고. 그걸 참고하면 그들이 있던 카페가 신세계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음, 그러기 위해선 중첩이라는 현상이 다른 모델이 아닌, 종이 2장이 겹친 것에 가깝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만.”
성건우는 게네바와 두 번째로 커닝미스에 진입해 달지기 아들이 살던 호화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탑의 허상을 보지는 못했었다.
탑의 모든 층, 모든 방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것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를 첫 번째로 방문했을 당시의 경험과 결합해 본다면 기본적인 추리를 할 수는 있었다.
그들이 그 전에 커닝미스에 진입해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는 것을 감지했을 때 호화 아파트가 자리한 곳에서는 흐릿한 탑이 나타났었다.
또한 신세계에서 모든 층이 빛을 발하고 있는 건 탑밖에 없었다. 그 외의 다른 건물들에는 많건 적건 어둠에 잠긴 창문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한 가지 문제를 알렸다.
“근데 버나드, 플로라가 매시 매초 거기서 커피를 마실 리는 없잖아요.”
장목화가 위로했다.
“우리한테 시간은 충분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수 있어. 게다가 카페 안에는 사장도 있고 다른 손님들도 있을 거야. 그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봐.”
성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신세계 각성자 대부분은 우호적이지 않아요. 더러는 심지어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족족 잡아먹으려 할 정도로 굶주려있기도 하고. 친구를 사귀려 해도 상대가 혼자 남길 기다려야 해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까.”
장목화가 답했다.
“응, 플로라와 버나드는 친절한 편이었으니 그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카페에도 기본적인 질서는 있을 거야. 그곳 사장과 접촉해보는 것도 방법이겠지. 아무튼 네가 그 현장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 수밖에 없어.
일단 최대한 빨리 신세계에 진입한 후 육신을 어떻게 할지부터 알아봐. 만약 그 육신도 신세계에 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내가 지금 널 제8 연구원 밖으로 옮겨뒀어. 하지만 여기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되돌릴 수 없는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성건우가 흠칫 놀랐다.
“전 팀장님이 이미 그곳 좀비들을 다 쓸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장목화가 못 말린다는 듯 설명했다.
“그건 좀비가 아니라 조금 이상한 무심자였어. 그중에 고등 무심자가 있는지, 있다면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어서 신중하게 굴기로 했어.
야, 그러고 보니까 내가 무슨 신선도 아니고 어떻게 혼자서 한두 시간 만에 그 많은 적을 다 처리하냐?”
“팀장님이잖아요, 팀장님이라면 가능해요!”
성건우가 격려했다.
장목화는 그냥 입씨름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화제를 틀었다.
“어쨌든 얼른 신세계 상황이나 파악해. 상황 파악을 마치면 약속했던 암호로 날 부르고.”
“네!”
성건우의 답은 굉장히 시원시원했다.
그런데 그가 문득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제 육신이 배고파하면 어떡해요?”
장목화가 전문가다운 태도로 말했다.
“정 안 되겠으면 호스를 꽂아 음식물을 넣어줘야지. 우리한테 영양제도 적지 않잖아. 한동안은 문제없을 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신세계 상황을 파악하고 앞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줘.”
그때, 한창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의혹을 드러냈다.
“근데 너, 애쉬랜드로 돌아올 수 없는 거야?”
성건우가 돌아서 어둠에 잠긴 거리 끝을 내다보았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해요. 들어왔던 곳으로 돌아가 그 대문을 통과하면 현실로 돌아갈 순 있겠죠. 음, 신세계 강자들이 수시로 애쉬랜드에 돌아오지 않았던 걸 보면 보이지 않는 제한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가 턱을 쓰다듬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팀은 전에 신세계 강자가 애쉬랜드로 돌아오려 할 때 일정한 양의 인간 의식을 연료로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한 적이 있었다.
성건우는 재차 고민에 빠졌다.
“제 육신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어떡하죠?”
“…….”
장목화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가 도와줄게. 전에 의사를 알려준다면 가장 좋기야 하겠지만.”
그럼 그녀는 성건우의 옷을 갈아입히고 빠는 번잡스러운 과정 없이 똥오줌만 처리하면 될 터였다.
아무리 봐도 야외는 사람을 보살필만한 환경은 되지 못했다.
“에이, 어떻게 그래요.”
성건우는 미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너만 믿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장목화는 잠시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대화를 본론으로 돌렸다.
“네 심령 방에는 들어갈 수 있어?”
“아직 시도 안 해봤어요, 이따가 한 번 해볼게요.”
성건우는 당장이라도 시도해보고 싶다는 양 의욕을 드러냈다.
“능력은 얼마나 강해졌어?”
이는 신세계에서 딱히 민감한 주제가 아니었다. 구조팀도 전부터 이를 알고 있어서, 장목화도 아예 대놓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성건우는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아직 확인 못 해 봤네!”
잊었던 사실을 떠올린 그는 수십 초 후에야 다시 반응을 보였다.
성건우가 오른손을 들고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사유 영역의 모든 능력을 장악했어요. 원래 가진 추리 광대, 사유 이식뿐만 아니라 단기 치매, 사유 혼란, 극단적 충동, 숫자 백치, 내부 간첩, 멍청한 아우라, 잠재의식 사유, 사유 판독⋯⋯.”
‘잠재의식 사유라⋯⋯.’
장목화가 흥미를 보였다.
“잠재의식 사유는 기억 일부에 특수한 상태를 부가해 열람자에게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그것도 응용법 중 하나에요.”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두형 선생도 장생 영역 각성자네⋯⋯.”
이 대목에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이번에 만난 이두형 선생은 진짜였을까, 가짜였을까? 아니면 이두형 선생의 본질은 사실 환영이나 의식 일부분인가?”
“모르겠네요.”
성실한 성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네 능력의 영향 범위는?”
장목화는 일단 이두형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려는 듯 애써 관심을 돌렸다.
성건우는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확인을 안 해봐서. 근데 신세계에서 모종의 압박을 받는 듯한 느낌은 들어요. 일부 능력은 여전히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곳까지 효과를 발휘하고 라디오 등을 통해 그 범위를 확대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능력은 뭇별 홀 레벨로 돌아간 것처럼 영향 범위가 10미터도 넘지 않아요. 구체적인 수치는 이따가 목표를 찾아 시도해본 뒤에 알려줄게요. 음, 애쉬랜드에서는 분명 킬로미터 단위일 거예요.”
장목화는 모종의 생각에 잠긴 채 대꾸했다.
“신세계는 달지기들에게 통제되고 있을 거야⋯⋯.”
그러니 갖가지 제한이 따르는 것일 터였다.
겨우 이런 이야기만 나눴을 뿐인데도 장목화는 이 교류 방식에 정신력이 어마어마하게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이에 그녀는 애써 대화를 끊고, 저녁 무렵에 다시 소통하기로 약속했다.
* * *
장목화는 뻗은 정신을 회수하고 한숨을 내쉰 후,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운전석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잠깐의 시간을 들여 몸 상태를 회복한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이 어두워지면 인간 의식을 숨기고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뒤 야간 투시 시스템을 이용해 저 현실의 신세계에 들어가 봐야지.’
그녀는 고성능 배터리가 지나치게 많이 소모될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제8 연구원에는 아직 전기가 통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