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Rank Supporting Role’s Replay in a Prestigious School RAW novel - Chapter 1104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04)
125. X (4)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겼어!’
외적과의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흑호는 은호에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받았다.
은호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백호 형님을 보내 외적의 주의를 끌 거예요. 그사이에 흑호 님은 외적의 거점에 잠입해 주세요.”
“응, 알았어! 여기에 숨으면 되는 거지? 숨기만 하면 돼?”
“외적의 생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몸짓 뭐든 좋아요. 최대한 많이 기억하세요. 이틀 뒤에 다시 틈을 만들 테니 그때 도망치면 됩니다.”
흑호는 잡일 외의 임무를 맡게 된 건 처음이기에 매우 들떠 있었다.
흑호는 한 번도 전선에 나선 적이 없었기에 외적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흑호는 교활하고 잔인한 미지의 존재 사이에 숨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은호는 이 점을 상기했으나 들뜬 흑호의 귀에는 제대로 닿지 않았다.
“흑호 님께서 무사히 돌아오는 게 가장 중요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나서지 마세요.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세요. 아무 정보를 얻지 못하더라도 괜찮으니 계속 숨어 있어야 해요.”
“응, 알았어! 잘 숨을게!”
은호 외에도 친우들이 흑호를 걱정하는 말을 했으나 흑호는 그저 ‘많이 보고 듣고 기억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흑호의 설렘은 외적의 거점에 숨어 들어간 후에 끝났다.
‘기분 나빠. 근처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아파. 이상한 냄새가 나고 머리가 자꾸 울려.’
백호가 몸소 나서서 한 시선 끌기가 크게 성공하여 흑호는 외적의 거점 최심부에 숨어드는 데에 성공했다.
숨어들 때에는 기척을 죽이고 빠르게 이동하는 데에 집중하느라 알지 못했으나 외적의 거점은 몹시 역겨운 장소였다.
신인과 친우들의 곁은 늘 신령하고 청량한 기운이 가득했기에 흑호는 이를 더욱 크게 체감했다.
외적은 그냥 단순히 한반도 밖에서 온 침략자가 아니라 이 세계에 있어선 안 될 무언가였다.
흑호는 벌벌 떨리려는 손을 겨우 억누르며 외적을 지켜보았다.
‘수가 많아. 늘어나고 있어. 쟤들 대체 뭘 하는 거야?’
외적의 손아귀에 잡힌 것을 본 흑호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실종 혹은 전사했다고 알려진 호족과 웅족 그리고 침략당한 땅에 살던 인간들이 들려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도 있었지만, 가망이 없어 보였다.
외적은 시체와 시체에 가까운 자들을 관찰하고, 뜯어보고, 흉내 내고 있었다.
흑호는 대체 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거라곤 눈을 돌리지 않고 저들이 하는 행위를 기억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밤이 두 번 지나갔을 때, 은호가 약속한 대로 백호가 이끄는 전사들이 거점을 습격했고, 그 틈을 타 흑호는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
“으으…… 흐윽…….”
흑호를 맞이하러 온 친우들의 모습을 본 순간, 흑호는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흑호는 먼지와 사기를 뒤집어쓴 것 외엔 다친 곳도 없고 멀쩡했지만, 마음이 너덜너덜했다.
은호는 직접 깨끗한 천으로 흑호의 얼굴을 닦아 주며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말했다.
“흑호 님, 보고를.”
흑호는 다시 펑펑 울면서 횡설수설하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은호는 온화하게 이를 들었지만, 곁에서 같이 이를 듣던 친우들의 표정은 놀라움과 분노로 물들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듣던 이들 중에선 흑호의 말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방금 흑호가 거짓말을 한다고 떠든 새끼 나와. 외적의 지랄을 재현해 주마.”
“적호, 나도 같이하겠다.”
“순순히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이 몸이 몸소 찾아내 주지.”
“기왕 하는 거 훈련을 겸하는 게 좋겠어. 그런 것들이 신인을 노리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갑작스러운 재현과 훈련 일정이 잡힌 가운데, 은호는 흑호를 달래 주며 그 노고를 치하했다.
“감사합니다, 흑호 님. 흑호 님 덕분에 귀한 정보를 얻게 되었어요.”
은호가 슬프고 미안해하는 얼굴을 한 건 잠깐이었다.
곧 수장의 얼굴을 한 은호는 웅족의 우두머리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다음 날, 호족과 웅족은 힘을 합쳐 외적에게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두 수장이 외적 건을 두고 천신께 자비를 청하자 말씀이 내려왔다.
[이것만을 먹고 햇빛을 100일 보지 않는 이에게 새로이 힘을 내려 주겠노라.]말씀과 함께 내려온 신령한 쑥과 마늘 스무 개를 본 두 수장은 호족과 웅족에서 각각 한 명씩 힘을 받을 전사를 뽑기로 했다.
그 결과, 호족 최고의 말썽꾼 적호와 웅족 최고의 기재 웅녀가 백 일의 시련을 치르게 되었다.
“적호가 백 일이나 참을 수 있을지 걱정이야. 웅족의 기재와 싸우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해서 청호, 네가 갈 생각은 없지 않느냐. 쑥과 마늘만 먹으면 질릴 테니 동굴을 나올 때 먹을 음식을 준비해야겠군!”
“나는 안 먹을 거다.”
쑥과 마늘만 먹다가 황호의 처참한 요리를 먹게 될 처지에 놓인 적호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흑호는 이를 부러워했다.
사실 흑호는 내심 저 시련을 치러 힘을 받고 싶었다.
‘쑥과 마늘처럼 맛없는 건 싫지만, 참을 수 있는데! 하지만 안 되겠지.’
흑호는 영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천신은 흑호의 색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괜히 흑호가 나서서 시련을 치렀다가 천신으로부터 힘도 받지 못하면 그 끔찍한 외적을 상대할 힘이 줄어드니 참아야 했다.
그리고 신인을 기특하게 여긴 천신이 자비를 베풀어 백 일의 기한을 삼칠일로 줄여 적호와 웅녀가 이르게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시련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굴 앞에 몰려든 호족과 웅족이 적호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달변가인 신인도 그 순간만은 말하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시련을 마친 적호와 대련을 한답시고 대검을 들고 있던 백호의 손에 실린 힘이 사라졌고, 황호가 직접 구운 맛없는 고깃덩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적호가 저런 말씨를 쓰는 게 걱정되고 무서워진 흑호가 은호에게 매달렸다.
“큰일 났어, 은호. 적호가 이상해졌어!”
“걱정 마세요, 나쁜 일이 벌어진 건 아니랍니다.”
은호가 흑호를 달랜 후, 밝게 웃었다.
“웅녀 님께서 붉은 천을 몸에 두르고 계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경악 속에서 적호와 웅녀가 맺어졌다.
모두가 변모한 적호에게 집중했는데, 흑호는 은호 쪽이 신경 쓰였다.
은호는 둘이 맺어진 걸 보고 기뻐하긴 했으나 놀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은호는 적호랑 웅녀가 서로 좋아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어?”
“두 분이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확신은 없었어요. 난관이 많아 보였으니까요.”
은호가 먼 곳을 보며 말했다.
흑호는 천기를 읽는다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했지만, 은호가 먼 곳을 볼 때마다 천기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만약 적호 님과 웅녀 님이 맺어지지 않았다면.”
“응?”
“저는 호족에 속한 누군가를 웅족의 수장과 맺어 주려 했을 거예요.”
“어? 왜?”
은호는 마치 변명을 하듯이 말했다.
“웅족의 수장은 맑은 혼을 지녔고, 지혜롭죠. 호족과 웅족의 사이를 공고하기 위해 누군가를 맺어 줘야 한다면, 저는 웅족의 수장을 택할 거예요.”
“그래?”
“네, 적호 님과 웅녀 님이 맺어졌으니 필요 없는 이야기이지만요.”
둘이 맺어지고, 강력한 힘을 얻은 후에도 전황은 계속 급박하게 흘러갔다.
수많은 호족과 웅족이 외적 앞에 스러졌다.
호족이 잃은 건 전사만이 아니었다.
‘천신의 무녀는 수도 적은데, 이제 한 명밖에 안 남았다고?’
신인과 동행하여 반주하던 무녀가 또 전사하였다.
이 상황에 닥치자 무녀가 전멸하면 천신과 호족의 관계가 약해질 것을 염려한 은호가 무녀를 숨기기로 결정했다.
신인은 반주 없이도 노래하겠노라고 선언했는데, 그만큼 노래의 힘이 약해져 신인의 부담이 커졌다.
그리고 흑호가 할 일이 늘었다.
“흑호 님, 이 문양을 기억해 주세요.”
“이건 무녀의 문양이잖아!”
“네, 앞으로 신인 님께서 긴 노래를 부를 필요가 있을 때에는 흑호 님을 동행시킬 거예요. 이 문양을 땅에 새기고 가능한 모습을 감춘 채로 풀피리를 연주해 주세요.”
흑호는 잠입에 이어 신인의 노래에 반주를 하게 되었다.
은호는 흑호의 존재를 감출 생각이므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어지간해선 동행을 명할 마음이 없어 보였지만, 흑호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흑호는 무녀의 연주를 이해하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천신의 무녀는 거처를 옮겼기에 제단은 비어 있었고, 은호가 흑호에게 출입을 허락했기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초대 무녀가 신인과 영인의 어머니셨구나!’
흑호는 초대 무녀가 연주했다는 가락을 살피고, 그 가락이 부른 기적을 되짚어 보았다.
초대 무녀의 활약을 남긴 벽화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 연주가 아름다웠을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흑호가 그 가락을 풀피리로 연주할 수 있게 대충 편곡을 하고, 문양을 바닥에 그리는 연습을 할 때였다.
“흑호?”
침착한 목소리에 흑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운사였다.
다른 호족 친우들이 없으면 흑호에게 짓궂은 장난을 하는 풍백과 우사와 달리 운사는 늘 온화했다.
“초대 무녀에 관해 조사하고 있었어?”
“응, 나는 신인의 연주를 하게 됐으니까!”
“그렇구나. 은호는 네게 부담을 주려 하지 않으니 이런 걸 따로 시키지 않았을 텐데, 자진해서 온 거야?”
“응!”
운사가 기운차게 대답하는 흑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운사도 먹구름 같은 색의 기를 다루고 있어 천신이 좋게 보지 않았다.
비슷한 처지에 놓여서 그런지 운사는 흑호에게 더욱 다정하게 대했다.
“운사,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아니야.”
운사는 부정하고 태연한 척 굴었다.
이때 운사는 풍백과 우사의 진의를 두고 홀로 고민하고 있었다.
흑호는 운사가 고민하는 중이라는 건 알았으나 흑호의 말솜씨로는 운사의 속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운사는 여기 왜 왔어? 고민이 있어서 혼자 생각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냥 이 땅에 있는 기록을 살피고 싶어서 왔어. 풍백, 우사 그리고 저의 기록이 여기에 있잖아. 이곳에서 본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 궁금했어.”
무언가를 알아차리기 전, 운사는 흑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하지만 우리 기록보다 초대 무녀의 기록 쪽이 흥미로워. 하늘에서 관측할 수 없었던 활약도 남아 있는 건 몰랐어.”
“정말? 하늘에서는 다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응, 특히 천신께서는 그늘진 땅을 보는 걸 어려워하셔. 그래서 그늘에서 초대 무녀가 낯선 존재와 접한 걸 알았을 때, 뒤늦게 강림하셔서…….”
흑호는 운사가 하는 옛이야기에 푹 빠져서 그만 그의 고민에 관해 묻는 걸 잊고 말았다.
실컷 이야기를 들은 후, 흑호는 잠들기 전에 고민에 관해 떠올리고 아차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풍백, 우사, 운사의 전사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