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81
181
본능
이성철은 몸이 뒤집힌 상태로 달렸다. 암기를 던지고 마법을 사용하며 검을 뽑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서 자신을 본능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자.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본능의 성인. 오직 본능의 성인만이 자신이 본능이라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다.
“‘왜 본능이?’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게 나도 참 짜증 나는 부분이거든.”
이성철의 공격을 모두 손으로 막아낸 소녀가 이번에는 그가 휘두르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성철이 든 검은 마유물, 마검이었다. 주인을 포함하여 닿는 사람의 체력을 빨아들이며, 빨아들인 체력에 비례해 검날이 날카로워진다. 검 자체에 걸린 저주는 베인 상처가 낫는 걸 방해한다.
그리고, 그다지 쓰이지 않는 기능이지만 마력 없이도 정령을 직접 베어낼 수 있다. 마검에 베인 정령은 최악의 경우 죽기도 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얻은 전리품 중 하나로 현을 노려 만들었다는 게 빤히 보이는 마검이었다. 수천 명의 체력을 빨아먹은 마검은 이성철이 가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소녀는 마검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검날을 손가락으로 잡는, 공수입백인의 수법과는 달랐다. 소녀는 손가락을 내밀었고, 강기에 감싸인 손가락 하나에 검이 막혔다.
소녀가 손을 당겼다. 검이 그대로 딸려갔다. 이성철은 검을 놓고 물러났다. 소녀가 흥미로운 듯 검을 살펴봤다. 상당한 체력이 빼앗기고 있을 텐데도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잡고, 날을 손으로 쓰윽 훑었다.
소녀의 수염이 움찔움찔 움직였다.
“4천 명 정도 빨아먹었나. 꽤 좋은 검이야. 강도가 약한 게 흠이지만.”
소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검이 그대로 부러졌다. 부러진 검이 검은 연기와 귀곡성을 뱉어내며 단말마를 질렀다. 소녀는 귀찮다는 듯 검을 뒤로 던졌다.
“안 덤벼? 그럼 규칙을 정해야겠네. 10초간 공격이 없으면 내가 한 방.”
오싹! 본능에 따라 이성철은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상대는 겨우 그 정도로 따돌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성철의 품으로 파고든 소녀의 주먹이 배에 닿았다.
배에서 시작해 전신에 퍼지는 충격에 이성철은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벽을 뚫고 날아간 이성철은 결계 벽에 부딪히고서야 멈췄다. 푹 퍼진 개구리처럼 결계 벽에 달라붙었던 이성철이 떨어졌다. 위산과 얼마 먹지 않은 식사가 역류했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이성철을 놀라게 한 건 소녀의 솜씨였다. 충격은 호신강기를 뚫고 내장까지 전해졌다. 그만한 충격을 받았는데 내상은 일절 없었다. 이성철이 입은 피해는 육체적 고통이 전부였다.
“10, 9, 8. 난 시험을 부탁받긴 했지만, 죽이지 말라는 부탁은 안 받았거든. 진지하게 안 하면 죽을 거야. 3, 2…… 그래야지.”
소녀가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보이지 않는 참격이 지나갔다. 이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이성철이 사라졌고, 소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며 소녀의 척추를 향해 송곳을 찔렀다.
송곳은 소녀의 몸에 닿기 전에 보이지 않는 방벽에 막혀 나아가지 못했다. 이성철이 눈을 크게 떴다.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쓰는 게 네 전유물인 줄 알았어?”
소녀의 몸이 빙글 돌았다. 회전을 실어 날린 발차기가 허공을 갈랐다. 이성철은 다시 그림자로 숨어들며 공격을 피했다.
콰과광! 소녀의 앞쪽에 있던 건물이 사라졌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우수수 떨어졌다. 결계 안이 한 번에 폐허로 변했다.
소녀의 손이 그림자로 향했다. 손이 그림자에 닿기 직전 이성철이 조금 떨어진 장소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왔고, 소녀의 손이 그림자를 헤집었다. 이성철은 방금까지 자신이 들어가 있던 공간이 공간째로 갈려버린 것을 알았다.
“재수 없는, 또 짜증 나는 사실이지만, 너를 가르치는 데 내가 적격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겠어.”
한 번 그림자에서 손을 뺐던 소녀가 다시 그림자에 손을 넣었다. 이성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소녀의 손이 이성철의 발목을 잡았다.
이성철이 눈을 부릅떴다. 발목을 잡혀 놀란 게 아니었다. 소녀가 보여준 기술, 그건 이성철이 사용했던 것과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았다. 완전히 똑같은 무공이었다.
“어떻게…?”
“무공이 있다면, 그 무공을 만든 사람도 있겠지? 젊은 시절의 치기로 딱 하나 남긴 비급이 다회차 회귀자의 손에 넘어갈 줄은, 나도 예상 못 했지만.”
이성철에게는 놀랄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소녀가 손을 당기자 발이 그림자에 빠졌다. 이성철이 발을 빼려는 사이 한걸음에 거리를 좁힌 소녀가 발을 휘둘렀다.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이성철이 날아갔다.
***
첫 번째 암살을 완료한 현은 두 번째 목표를 향해 이동하던 중 이변을 알아차렸다. 도시 중심을 기준으로 남동쪽. 현이 있는 북동쪽의 아래에 해당하는 부분에 결계가 펼쳐졌다. 결계에 사용된 기술은 현도 기원을 읽을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현은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놨던 양자폰을 확인했다. 사소한 일이라면 몰라도 저런 큰 변화를 에이네가 놓칠 리 없었다. 예상대로 양자폰에는 문자가 와 있었다.
현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에이네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보낸 그게 전부야. 관측 기기도 안 통하고 나노 머신을 눈으로 보고 부수는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정보를 수집하란 거야.
“관측 기기가 안 통한다고?”
현은 인지도를 보는 능력을 떠올렸다. 하지만 에이네가 그걸 부정했다.
-권능은 아니야. 그냥 관측하는 순간 반대되는 파장을 만들어 관측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과학끼리 정보전을 할 때 쓰는 방법인데, 수인이 어떻게 그걸 아는 거야.
“나한테 물으면 내가 아냐.”
일단 결계 앞에서 에이네와 만나기로 한 뒤, 현은 전화를 끊었다. 광학미채 망토를 쓰고, 고글까지 썼다. 다른 광학미채 망토를 꿰뚫어 보는 건 물론이고 양자폰과 연동해 다양한 디스플레이를 실시간으로 표시해주는 에이네의 역작이었다.
준비를 마친 현이 결계로 향했다. 결계 근처에 사람은 없었다. 간부가 살던 집에 결계가 생겼다. 결계를 깨기 위해 사람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사람이 없는 건 이상했다. 현은 조심히 결계에 접근했다.
에이네가 도착하고, 두 사람이 결계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사람이 모일 기미는 없었다. 반대로 결계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물러나고 있었다.
관측이 불가능해도, 위치 추적 정도는 가능하다. 에이네에 따르면 이 안에는 정체불명의 수인과 이성철이 함께 들어가 있다.
현은 결계의 강도를 짐작해보았다. 그냥 때려서는 깰 수 없다. 결계 전체를 짓누르는 일격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최강의 딜러가.
“아스…….”
“그만.”
마력이 담긴 말이 음공이 되어 현을 때렸다. 가벼운 충격이었지만 정령 소환을 막는 데는 충분했다.
결계가 열리고 안에서 소녀가 걸어 나왔다. 볼에 수염이 달려있고, 쥐처럼 커다란 귀를 달고 있는 갈색 피부를 가진 소녀였다.
소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마력은 어마어마했다. 전성기 현에게는 못 미쳐도, 성체 드래곤은 우습게 웃도는 양이었다.
입이 바짝 마르는 압력에 현은 언제든 주문을 쓸 수 있도록 대기했다. 한발 늦게 눈치챘지만, 소녀는 광학미채를 두르고 있는 현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볼 일이 있는 건 안쪽에 있는 저놈뿐이거든.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응?”
현은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망토과 고글을 벗어 따로 챙겼다.
“너는 누구지?”
“본능.”
“…… 본능의 성인이 여긴 왜?”
현은 이성철과 같은 의문을 품었다. 근 200년 동안 모습을 숨겨왔던 본능의 성인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소녀는 머리 위의 귀로 손을 뻗어 귀를 긁적였다. 귀 끝에는 손이 닿지 않아 손을 쭉 뻗어서 손가락 끝으로 간신히 긁적여야 했다. 소녀가 참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너희들과 적대할 생각은 없다고 말해둘까. 목적이 비슷하기도 하고, 나라도 천마랑 마녀 여왕을 동시에 상대할 자신은 없거든. 지금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저 안에 있는 애송이 하나뿐이야. ‘시간의 세 번째 시험’ 이라고 하면 알아듣겠지?”
마치 현의 목적이 뭔지 다 안다는 투였다. 현은 경계심을 한 단계 더 올렸다. 만사 귀찮아 보이지만 갈색 눈동자는 어떤 감정도 나타내고 있지 않았다. 저건 다 연기다.
“그래도 싸우겠다면?”
“내 손으로 적당히 주물러줘야지. 내가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되겠어? 결계 근처에서 사람을 물린 게 누구라고 생각해?”
“…….”
“수지 안 맞는 일에 나도 심기 불편하긴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게임을 준비했지.”
소녀의 마력이 한 차례 출렁였다.
“야!”
“알고 있어.”
에이네가 외치기도 전에 현은 호신강기를 두르고 정령을 소환해 사방에 방패를 만들고 있었다. 수백의 인기척과 함께 사방에서 마법과 강기가 날아왔다.
“저거 뭐야?”
에이네가 물었지만, 반대로 현이 묻고 싶었다. 수인들이 나타난 장소는 분명 현의 탐지 범위 안이었다. 탐지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결계 앞에서 오히려 평소보다 공을 들여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수인들은 보란 듯이 현의 탐지 범위 안에서 나타났다. 에이네가 아무 말 않은 걸 보면, 과학의 탐지에도 걸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쏟아지는 공격은 화려했지만 위력이 강하진 않았다. 둘 다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냈다.
소녀가 마력으로 먼지를 쓸어 날리고는 말했다.
“흑사자를 포함해 이 도시의 모든 수인은 내 종족의 언에 종속되어 있어. 그들을 모두 쓰러뜨리면 결계를 풀고 애송이를 돌려줄게. 어때?”
“그놈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죽기 살기로 도시를 정리하라는 말로 들리는데.”
“딱 그 말이야. 궁금한 게 많지? 질문도 그때 받아줄게. 본능의 직관성에 맹세할 테니 열심히 해봐.”
현과 에이네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소녀에게는 둘의 심장 박동부터 미세한 근육의 변화들이 모두 보였다. 두 사람이 표출하는 감정에 썩 유쾌해진 소녀는 웃으며 다시 결계로 돌아갔다.
그녀는 기절한 이성철을 두드려 깨웠다. 이성철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거리를 벌리며 암기를 날렸다. 소녀는 마력만으로 암기를 막아냈다.
암기에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성철은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소녀의 공격에 대비했다.
“2차전을 시작해볼까. 그 전에 시간의 성녀로부터 전언이야. 다섯 개의 윤회를 기억하라.”
딱. 소녀가 손가락을 튕겼고, 수백 개의 마법이 이성철을 덮쳤다.
***
수백 명의 수인은 싱겁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둘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소녀, 본능의 성인이 남긴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다.
“나노 머신을 부술 때의 이야긴데, 내가 최후의 안드로이드라는 것도 알더라. 과학 쪽에서 새나간 흔적은 없고.”
에이네가 최후의 안드로이드라는 걸 아는 사람은 과학의 극히 일부, 그리고 현과 이성철이 전부였다. 소녀가 에이네의 정체를 알아낸 방법은 완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함선에서 돌아오는 반응도 극적이었다. 연산 장치 대부분이 투입되어 단서가 없나 데이터베이스 전체를 뒤지고 있었다.
“놀아나는 수밖에 없나.”
종족의 언을 얻을 정도로 본능의 영혼과 상성이 좋은 데다 본인의 무력도 초월자급. 어떤 권능을 쓰는지도 모름.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성인이 직접 맹세한 방법으로 대화를 하는 수밖에 없다.
후우. 현은 심호흡하며 마력을 점검했다.
‘간만에 고생 좀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