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17
217
천상천하
뤼필은 눈썹을 찡그리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의 인상은 한 마디로 시계남이었다. 남자는 전신을 구릿빛 사슬로 감고 있었다. 하지만 몸을 감싼 사슬보다 더 눈에 띄는 게 바로 사슬 끝에 달린 여러 종류의 시계였다.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서로 다른 크기, 서로 다른 재질의 시계들 앞에 남자를 감싼 사슬은 사소한 문제였다.
남자의 뒤에는 거대한 시계가 리센을 감싸듯 나타나 있었다. 마력은 아니었고, 환각도 아니었다. 권능으로 만들어진 실체였다.
“시간이 무슨 일이죠?”
그녀가 남자를 노려봤다. 차랑차랑.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사슬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울렸다. 사슬로 감싼 몸에서 남자의 눈과 입만은 드러나 있었다.
“이쪽이 원하는 건 완전히 죽지 않은 시신뿐이다. 싸울 의사는 없다.”
“… 그를 모독하는 건가요?”
살기를 띤 마력이 뤼필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정신력을 상당히 소모했지만, 마력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시간이 까다롭다곤 하나 그녀 또한 까다롭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조율의 성인이다.
충분히 적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여기서 더 힘을 사용하면 권능 폭탄의 여파를 수습하는 데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보다 리센의 시신이 모욕당하는 것을 더 참을 수 없었다.
뤼필이 공격을 결심하는 것보다 반 박자 빨리 남자가 말했다.
“살아 있는 그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나?”
그 말이 떨어지려던 뤼필의 발을 붙들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리센과의 사이는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 죽은 리센이 되살아난다 하더라도, 그건 그녀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다. 잘못 끼워진 톱니는 서로가 부서질 때까지 계속해서 잘못된 회전을 반복할 뿐이다.
뤼필의 단검이 남자를 꿰뚫었다. 시계를 관통하고, 사슬을 끊어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자는 멀쩡한 모습으로 그녀와 대치하고 있었다. 뤼필 또한 공격하기 전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차랑, 사슬이 부딪쳤다.
“적대할 의사는 없다고 했는데.”
“그의 시신을 원하는 거라면 포기하세요.”
“두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군. 첫째, 그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둘째, 나는 그를 모욕할 생각이 없다. 시간의 절대성에 걸고.”
얼핏 느껴지는 남자의 권능은 일개 신자 수준이 아니었다. 사도가 시간의 절대성에 걸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것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모욕이라는 모호한 단어에 절대성까지 걸면서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조율의 성인이기에 그녀는 맹세가 가지는 무게를 알았다. 저런 말을 하려면, 정말 자신의 행동에 리센이 모욕을 느낄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더욱 알 수 없었다. 대체 뭘 꾸미고 있기에 저렇게 강한 확신이 가능할까.
망설임 없는 사도의 맹세에 뤼필의 경계가 풀어졌고, 남자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차랑, 청량한 사슬 소리 한 번과 함께 남자는 사라졌다. 시계가 감싸고 있던 리센의 시신도 함께였다.
뤼필이 먼 하늘을 노려봤다.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은 난세 속에서 이제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
시간이 가장 유력하지만, 어쩐지 시간 하나만의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뤼필은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이 전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의도로 시작되었나?
가장 먼저 물었어야 하는 물음에, 그녀는 막 도달했다. 너무 늦은 시작이었고, 그 대가는 뼈아팠다.
리센이 흘린 피가 흥건한 자리에 눈길을 한 번 준 그녀는 몸을 돌려 아직 전투 중인 전장으로 돌아갔다.
승기는 이미 기울었다. 로열 나이츠를 견제하던 고블린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자유로워진 로열 나이츠가 권능 폭탄의 후폭풍을 억누르고 있었다. 잔당들도 빠른 속도로 쓰러졌다.
피해가 막심했지만, 결국엔 승리했다.
병사들이 내지른 승리의 포효에 땅이 진동했다. 무기를 던지며 기뻐하는 그들을 보는 뤼필의 심경은 복잡해져만 갔다.
게임판 위에서 따낸 승리에 기뻐해도 좋은 걸까?
그녀는 아직 이 게임이 뭔지도 몰랐다.
***
근원 세계 1년이면 대륙 지도가 바뀌는 시간이다. 각지의 전쟁으로 지형이 바뀌는 상황에서 현이 1년간 한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휘헌에게 오는 정보를 토대로 프로만 리슈타인을 추적했다.
성과는 거의 없었다. 뇌충(이 명칭조차 프로만 리슈타인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은 그들이 만든 여러 발명품 중에 가장 간단하며 가장 성가셨다.
뇌충은 프로만 리슈타인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조직의 모든 인원을 가장 효율적인 인형으로 만들었다. 남의 육체를 조종하는 방법이나 남의 육체를 잠시 빌리는 방법은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제약이나 단점을 동반한다.
적어도 관찰된 바로는 뇌충에 단점은 없었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으로도 변할 수 있으며, 죽어도 뇌충과 다른 육체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거기에 따르는 대가는 기껏해야 죽을 때의 고통이고,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근원 세계에 널리고 널렸다.
죽음을 반복하며 프로만 리슈타인과 그 일당들의 수법은 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폭탄이 세계 각지로 유통되었고, 자체적으로 폭탄을 만들어 사용하는 집단도 늘었다.
그즈음 현은 목표를 하나 추가했다. 폭탄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는 놈들이었다. 프로만을 잡을 수 없자 선택한 차선책이었고, 그놈들도 가만히 둘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권능을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신자 하나만 있다면 폭탄의 제조법은 그렇게까지 복잡하진 않았다. 폭탄의 밀폐, 압축 과정을 도와주는 조율의 신자가 있다면 더욱 쉬워졌다. 그렇게 만든 폭탄을 다양하게 활용해 세력을 키우는 기업도 있었다.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능력을 지닌 권능의 신자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니 근처에서 쉽게 건드리는 세력도 없었다. 바야흐로 권능의 신자들이 대접받는 시대였고, 그건 현이 봤을 때 지옥 일보 직전에 있는 세계였다.
근원 세계는 생지옥을 향해 한 발씩 내디디고 있었다.
“도시 안에 전염병이 도는 걸 보고만 있는 날이 올 줄이야.”
현은 지옥 속에 만들어진 작은 지옥에 있었다. 기업 국가의 도시 구획 하나였다. 계획도시인 듯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구역 하나가 전염병 소굴이 되어 있었다. 권능에 의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몰골에 1년간 전쟁의 참상을 몇 번이나 보아온 엘로렌도 버티지 못하고 헛구역질했다.
부풀어 오른 종기와 터진 피고름은 기본이었고, 어떻게 되먹은 건지 벌레가 살을 파먹고 뼈와 장기가 보이는데도 살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정상적인 돌림병에선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헌아, 이거 치료 못 해?”
“할 수는 있지만. 이 구역 전체가 역병의 영역이에요. 하면 바로 들켜요.”
“그래?”
에이네는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수긍했다. 어차피 그녀가 하지 않아도, 이런 광경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못할 위인이 있었다.
현이 엘로렌에게 물었다.
“신자들의 숫자는?”
“역병이 스물, 죽음이 셋. 모두 도시 중앙 쪽에서 반응이 있고, 죽음 중 하나는 인지도가 보통이 아닌데요. 사도인가?”
“역병을 방치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저 성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일반인은 죽으나 마나인 존재일 것이다. 다른 도시라면 최소한의 조치는 취했겠지만, 죽음의 사도가 있다면 그냥 언데드로 되살리면 된다.
지치지 않는 언데드는 가장 하급인 스켈레톤과 좀비라도 노동력은 레벨 100도 안 되는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났다.
“역병이면 그냥 돌격해보겠는데, 죽음이라 딱 잘라 말하기 힘드네. 일단 도시 내부에 보이는 언데드는 그렇지 많지 않은데 말이야.”
에이네는 뿌려둔 나노 머신이 보내온 영상들을 분석했다. 도시 내부에 언데드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단순 작업이 필요한 현장에 스켈레톤들이 일꾼으로 일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죽음의 사도가 거느린 언데드의 숫자가 이것뿐일 리는 없으니 나머지는 환계에 있다는 건데, 그러면 정확한 숫자를 알기 어려웠다. 막 덤볐다간 낭패를 보는 수도 있었다.
죽음의 사도가 다른 사도에 비해 만만한 건 맞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적이다. 도시 하나를 차지하고 언데드를 모아왔다면 그건 무시할 수 없는 숫자가 되었을 거고, 거기에 고위 언데드까지 섞이면 싸우기 성가시다.
근원 세계의 싸움에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그게 몸을 사리지 않는 불사의 병사들이라면 달랐다. 죽음은 근원 세계에서 수의 폭력을 가장 잘 활용할 줄 아는 재앙이었다.
현이 몸을 풀었다.
“탐색이 끝나는 대로 바로 공격할 거니까 준비들 해.”
“로한 가자.”
“또 죽음이야? 제길!”
엘로렌이 로한을 불렀고, 로한이 바닥에 쾅쾅 발자국을 찍으며 엘로렌의 뒤를 따랐다. 역병과 죽음, 둘 다 정신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언데드들에겐 권능이 먹히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역병도 같았다.
권능의 부산물이 아닌 권능을 사용한 신자에게 직접 밈을 사용하면 통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통할지 어떨지 확실하지도 않은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 재앙의 신자들에게 접근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죽음과 역병과 싸울 때 엘로렌과 로한은 근처 사람을 대피시키는 일을 했다. 로한의 전투력은 나쁘지 않지만, 무식한 그의 싸움법은 역병이나 죽은 같이 정면 승부를 피하는 재앙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또 엘로렌 혼자 내보내기엔 그녀 개인의 무력이 너무 떨어졌다.
엘로렌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도시에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끙끙대던 병자들이 입을 헤 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비 끝. 자세한 건 시계 확인해.”
“치료 시작할게요.”
에이네 특제 시계에 불이 들어왔고, 도시의 병마들이 휘헌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응은 바로 나타났다. 도시 중심에 있는 빌딩 위를 돌던 날벌레들이 사방으로 퍼졌고, 죽음의 권능이 빌딩 꼭대기에서부터 액체처럼 흘러내려 빌딩을 뒤덮었다.
현이 시계를 확인했다. 디지털시계에 문자들이 나타났다.
-도시의 지배자는 이미 언데드. 도시는 신자들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보임.
-역병은 모두 잔챙이.
-도시의 주인이었던 고위 언데드들을 조심.
깨알만 한 글씨였지만, 알아볼 순 있었다.
뒤쪽에서 마법이 날아왔다. 젭크의 지원이었다. 자기 암시와 이미지화. 마법에 특화된 권능 두 개를 가진 사람답게 그의 마법은 같은 수준의 마법사보다 두 단계는 더 뛰어났다.
사방으로 퍼지던 벌레들이 방향을 바꿔 불덩이 앞을 가로막았다. 벌레의 벽과 부딪힌 마법이 폭발하며 구름이 피어올랐다. 비처럼 내린 벌레의 체액이 현의 몸에도 몇 방울 튀었다.
현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철 덩어리 하나를 꺼냈다.
“지금 쓰게?”
“죽음의 사도를 상대로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달리던 자세 그대로 뛰어오른 현이 손에 든 폭탄을 있는 힘껏 던졌다. 다른 사람도 모두 쓰는데, 현만 폭탄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적에게 탈취한 폭탄의 숫자가 아공간 주머니 안에 제법 되었다.
한 번 발동하는데 한 명의 희생이 필요하던 폭탄은 현과 엘로렌, 젭크의 손을 거쳐 성능이 개선되었다.
이제 자살 테러가 아닌 미사일 용도로도 쓸 수 있게 되었다.
현이 던진 폭탄이 빌딩 중심에 꽂혔고, 폭주한 조율의 권능에 휘말려 빌딩이 산산이 부서졌다.
법칙이 미쳐버린 공간 안에서 검은 안개로 몸을 감싼 남자가 빠져나왔다.
남자가 들고 있던 커다란 보석을 부쉈고, 거대한 환계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