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16
216
꿈.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전쟁, 그 속에서 뤼필과 리센은 같지만 정반대인 길을 택했다. 우선, 둘 다 거점에 얽매이지 않았다.
리센은 그레이트 다운타운을 과감히 포기했다. 위원회의 압박은 유의미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을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레이트 다운타운이 오랜 시간 만들었던 거래 루트가 모두 사라졌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은 무역도시다. 도시 안에서 만들어지는 마약은 세계로 퍼져나가고, 처리하기 까다로운 모든 장물이 모여든다. 세탁된 장물은 다시 팔려나가고, 그건 다른 장물이 되거나 생필품이 되거나 한다.
무역이 끊어지며 그레이트 다운타운의 유지에도 문제가 생겼다. 리센은 범죄자들을 내보내 그레이트 다운타운의 규모를 최소로 줄였다.
절대 자기 이득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던 범죄자들을 설득한 건 리센이 아닌 인터넷이었다. 호르스를 시작으로 생겨난 스트리밍 열풍은 범죄자들의 자기과시욕에 불을 지폈다.
과시욕은 넘치는데 풀 곳이 없다. 범죄자들의 발길은 그레이트 다운타운 바깥으로 향했다. 리센은 그들에게 이동용의 공간이동 스크롤만 제공했다. 그러면 범죄자들은, 바깥으로 나가 범죄를 저지르고 그레이트 다운타운으로 돌아와 장물을 팔았다.
현재의 그레이트 다운타운은 그렇게 유지되었고, 리센은 그레이트 다운타운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그레이트 다운타운을 지배할 수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호르스가 그레이트 다운타운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국가로 돌아간 뤼필은 로열 나이츠를 비롯한 병사들을 소집했다. 그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소집령이 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종족의 언의 존재가 알려졌고,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 이상의 로열 나이츠가 죽었고, 국력도 반 이하로 떨어졌다.
어설픈 국가는 없느니만 못하다. 국가 해산을 선언한 뤼필은 자신을 따르는 병력만 데리고 난세로 나섰다.
뤼필과 리센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말로, 난세를 휘저으며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저지하며 세력을 모았다.
뤼필은 질서를 원했다. 난세의 종식을 원하는 자들이 뤼필의 아래에 모였다. 뤼필과 그녀 휘하의 조율의 신자들이 가진 힘은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 대부분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군세는 남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대군이 되어 있었다.
리센의 바람은 한결같았다.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층의 말살. 그를 위해 리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리센 휘하에 모인 자들에게 대의는 없었다. 리센도 그들에게 대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바라는 건 힘, 필요한 건 힘. 힘을 위해 리센은 약탈을 묵인했고, 혼란을 방관했다. 그렇게 모인 불한당들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힘이 없으면 양아치도 못 해 먹는 게 근원 세계다. 난세에서 약탈을 일삼으며 살아남으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했다.
리센도, 뤼필도, 지향점은 같았다. 서로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을 위해.
모난 것 없이 조화롭게 돌아가는 세상과 이상적인 지도자에 의해 통치되는 세상. 두 가지 이상은 서로 비슷하거나, 어쩌면 같을지도 몰랐다.
같은 이상을 공유했지만, 그 이상을 위해 한 사람은 빛을 택했고, 한 사람은 그림자를 택했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두 사람의 투지는 후퇴라는 단어를 가슴에서 지운 자들의 것이었다.
뤼필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쫓겨나고 무슨 짓을 벌이나 했더니, 겨우 이런 거였나요?”
“겨우 이런 짓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겨우 이런 짓으로 십여 명의 위원회 임원을 갈아치웠지. 반대로 너는 뭘 했지? 떠들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저건가? 마법 몇 번에 쓸려나갈 오합지졸들을 모으는 것?”
“당신이야말로, 그렇게 원하는 세상을 만들면, 그 세상에서 당신은 떳떳할 수 있나요?”
“내 세상에 내가 있을 필요는 없다. 나의 죽음이 이상으로 이어진다면, 그건 반대로 바라는 바다.”
“그 손으로 잘도 이상을 논하는군요.”
“이 손 하나 더럽히지 않는다면 누가 나서 손을 더럽히려 할까.”
리센의 지팡이에 마력이 모였다.
“제1군은 후방을!”
뤼필이 소리치기 무섭게 지평선 저 멀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하늘까지 솟은 불기둥이 바람에 흩어지며 불꽃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불비가 내렸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날 수 없다고 봐도 좋았다.
뤼필이 리센을 노려봤다. 리센의 지팡이에 다시 마력이 모였다.
“마주칠 때부터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리센의 지팡이에 모인 마력이 조율의 권능에 의해 흩어졌고, 리센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뛰쳐나갔다.
병사의 숫자는 리센 측이 적었지만, 개개인의 기량은 리센이 거느린 범죄자들이 더 강했다. 범죄자들은 뛰어서, 달려서 뤼필의 군대 사이로 끼어들었다.
로열 나이츠를 필두로 한 정예들이 난입을 막으려 했으나, 그들은 모두 봉 하나에 저지되었다. 자유자재로 늘어났다 줄어드는 봉 앞에 로열 나이츠가 나가떨어졌다.
뤼필은 범죄자들이 자기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리센에게 쏠려 있었다.
초월자와 성인. 가진 힘을 비교하면 단연 그녀가 위다. 하지만 뤼필은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리센의 특기는 화력.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수만 단위의 사상자가 나온다.
견제하는 사람이 없다면, 리센은 여기 있는 군대를 혼자서 모두 정리할 수 있다. 혼자서 로열 나이츠를 가지고 놀고 있는 고블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초월자가 한 명만 더 있었다면…….’
난세의 끝을 원한다는 명분 아래 모였지만, 그들 중 초월자는 없었다. 초월자라는 존재는 그렇게 쉽게 만날 수도 없을뿐더러, 곧 죽어도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건 눈앞의 리센 또한 같았다.
“한눈팔면 안 되지.”
말이 닿았을 때는 이미 리센의 마법이 뤼필의 눈앞에 있었다. 리센에게 원거리 대단위 마법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잡졸 수백만을 죽여도 초월자 하나를 죽일 수 없다면 전쟁을 근본적으로 끝낼 수 없다.
리센의 진짜 장기는 중거리에서 쏘아내는 살상 마법. 보법과 마법으로 거리를 유지하며 쏘아내는 마법으로 전사들을 괴롭히는 게 그의 특기다.
뤼필은 세계를 조율해 날아오는 마법 자체를 없앴다. 리센의 마법이 연달아 날아들었고, 차례로 지워졌다. 그녀는 잡념을 털어냈다. 그를 죽이든 살리든, 이기는 게 우선이다.
뤼필이 허리춤에서 한 쌍의 단검을 꺼냈다. 그녀는 조율의 성인인 동시에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그녀가 합격진에 정통한 것은 조율의 신자라는 것에 더해 그녀 자신이 무인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단검이 허공을 찔렀고, 리센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 단검의 끝부분이 불쑥 나타났다.
뤼필은 무기의 길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짧은 무기도, 긴 무기도, 조율의 권능 앞에선 모두 같았다. 뤼필이 단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단검이 길어졌고, 그녀와 리센 사이의 거리가 급격히 줄었다.
리센은 빠르게 뒤로 가고 있었지만, 그보다 땅이 앞으로 가는 속도가 빨랐다. 쏘아낸 마법은 뤼필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리센이 땅을 밟았다. 마력이 한 차례 소용돌이쳤고, 줄어들던 땅이 늘어나 원래대로 돌아왔다. 뤼필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성인은 성인인가.’
싸우면 진다는 건 리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약속이고 맹세였다. 부패한 경찰 때문에 가족을 잃은, 마약 카르텔의 총알이 가족을 관통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멕시코 국경 도시 멕시칼리의 약골이 자신과 한 맹세.
일그러져버린 맹세에 정의를 부르짖던 약골의 모습은 없었으나, 리센의 바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는 정의가 지켜지는 사회를 바랐으며, 자신은 이미 정의가 아니었다.
“좋은 범죄자는 죽은 범죄자뿐이다.”
리센의 전방, 뤼필의 후방에서 몇 개의 폭발이 일어났다.
수십 번은 보았을 권능의 폭발. 저주스러운 폭탄.
뤼필은 뒤쪽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리고 리센을 보는 눈에 살기를 더했다.
생화학 폭탄에서 시작해 본능, 죽음, 조율까지 다루기 시작한 권능 폭탄은 해당 권능의 신자나 현실 자체를 바꾸는 조율만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다. 몇 개나 되는 폭탄에서 쏟아진 권능을 제어하기 위해선 로열 나이츠나 그녀가 직접 나서야했다.
그러나 그녀도 로열 나이츠도 발이 묶여 나설 발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폭탄이 만들어낸 참상이 귀로 들려왔다.
뤼필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리센의 주변에 수십 개의 왜곡이 나타나 공명했다. 왜곡의 공명에 땅이 뒤틀리고 하늘이 구부러졌다.
방향 감각이 말을 듣지 않고 마력도 제멋대로 흐르는 공간에서 뤼필과 리센만이 멀쩡했다.
뤼필은 리센의 주위를 떠도는 알 수 없는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안으로 수렴해 사라지는 괴이한 움직임의 마력들, 저 마력들이 조율의 효과를 상쇄하고 있었다.
비장의 수단이 통하지 않았지만, 뤼필은 실망하지 않았다. 리센의 주변에 펼쳐진 마력의 양은 보통이 아니었다. 리센이라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후퇴만을 반복하는 리센 탓에 두 사람은 전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졌다. 리센과 뤼필은 두 사람만의 공간에서 두 사람만의 싸움에 집중했다.
조율의 성인은 끊임없이 현실을 조율했다. 조율 앞에 보편적인 법칙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늘과 땅이 몇 번씩 뒤집히고 거리가 의미를 잃는 세상에서도 리센의 마법은 힘을 잃지 않았다.
가장 빠른 무인도 피하지 못할 속도를 가지고 쏘아져 오는 마법을 막을 때마다 뤼필은 적지 않은 정신력을 소모했다.
그녀는 리센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리센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리센이 가진 지도자들에 대한 혐오에 반감을 나타내면서도, 내심 리센의 사상에 이끌렸다.
놀라웠다. 희망을 잃는 게 당연한 세상을 살면서 이상을 간직한 사람이 남았다는 것이.
처음이었다.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 중에 그런 꿈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수백 년 인생에 있어 최초.
그건 아마, 첫사랑이라 불러도 되는 감정이었으리라.
“당신과는 잘 지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유감이군.”
심장을 관통한 단검을 타고 피가 흘러 떨어졌다. 뤼필은 쓰러지는 리센의 몸을 받아냈다. 강기로 안을 휘젓고, 조율로 그 상태를 고정했다. 마력을 소모한 리센은 치료할 수 없는 상처였다.
단검을 타고 떨어지는 피가 점점 줄었고, 리센의 손에서 지팡이가 떨어졌다.
“…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뤼필이 단검을 뽑으며 물러나자, 리센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왜곡된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뤼필은 뒤를 한 번 확인하고, 리센의 시신이나마 수습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거기까진 허락하지 않았다.”
허공에 거대한 시계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