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22
1122화 늙은 생강이 맵다
진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면, 그가 대황에서 활동한 흔적을 진작 발견했다면 온갖 개고생을 하며 오지도에서 도망쳐 나오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괜히 도망쳐 나왔다간 또 한 번 상대에게 썰려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석은 있었다.
게다가 대황에 떠돌고 있는 전설에 따르면 과거 칠살비가 나타날 때 동굴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곳에는 언제 죽었는지 모를 수많은 시신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칠살비는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약한 성질머리를 가진 진곤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고, 이에 검둥이는 안심했다.
예전에 진양을 속였던 건 단순히 봉인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불이든 뭐든 전부 말도 안 되는 핑계에 불과했다.
그는 그저 진양을 사지로 몰아넣어 죽게 만들 생각이었다.
정말로 진양이 진곤을 찾아가길 바란 건 아니었다.
만약 진양이 진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검둥이의 존재가 밝혀져 버린다면 오히려 곤란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진양에게 진곤을 죽이라고 했던 것도 단순히 진양을 속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진양이 환생한 부군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력은 조금 약하긴 해도 설마 진곤이 부군을 베어버릴 리는 없었다.
그는 과거 부군에게 그 누구보다 충성을 다했던 인간 고수다.
단 한 번도 그의 명에 망설여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그에게 찾아가 자신이 부활한 부군을 곁에서 보좌하며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면, 과연 그가 검둥이를 벨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러지 못할 것이다.
검둥이는 그 누구보다도 진양을 잘 알고 있었다.
진양은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칼을 맞을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기 일 이외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다.
더 이상 진양에게 진곤을 찾아가라고 독촉하지 않는 이유.
어느 순간부터 문득 그가 부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부군만이 쓸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신통력 하나만으로 그가 부군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만약 진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이성을 잃은 채 진양을 베어버린다면?
그러다 검둥이까지 휘말리게 된다면?
그간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를 말로 하자면 상당히 복잡하다.
비록 모두 다 전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가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진양이 이런 작은 오해에 크게 매달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전부 지난 일이고 이젠 한 가족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에 반해 진곤은 철저한 외부인에 불과하다.
진양은 한참 동안 깊은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검둥이의 이런 마음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진곤 대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뭐라고?”
검둥이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비주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진양에게 끌려가는 신세였다.
“진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동안 내가 네게 해 준 게 얼만데! 난 이대로 진곤 그 녀석에게 죽고 싶지 않다고.
진양, 제발 날 믿어줘. 놈을 찾아갔다간 넌 분명 죽게 될지도 몰라. 나 역시도 말이야. 차라리 그 할멈 손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곤에겐…….”
검둥이의 징징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주는 멀리 모습을 감추었다.
비주가 사라지고 나자 유령호 식구들은 다시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진양이 나타나자마자 엄청난 압박이 느껴졌었다.
숨을 크게 쉬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압박이었다.
유령호 식구들 중 유일하게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건 선미에 있는 두 녀석뿐이었다.
흑피는 여전히 신나게 나무통에 들어있는 옥도를 퍼먹고 있었다.
진양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상관없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게 먹을 걸 주는 좋은 선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개의치 않은 건 흑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양이 완전히 미쳐버리지 않는 이상 그는 여전히 유일하게 흑구가 마음에 들어 하는 인간으로 남을 테니까.
나무 정령은 힘겹게 흑구의 머리 위로 올랐다.
그는 고개를 든 채 희미해져 가는 비주와 진양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무 정령은 씩씩거리며 양손으로 흑구의 볼을 잡아당겼다.
흑구는 가만히 엎드린 채 그가 마음껏 화풀이를 하도록 놔두었다.
지금 진양의 상태로 보아 왠지 나무 정령을 가까이 다가가게 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진양이 떠난 이상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도 안전한 곳이나 다름없다.
* * *
“진양, 그리고 보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진곤의 이름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분과 가까운 사이였던 한 뱃사공께 듣게 됐어.”
“진곤은 도대체 왜 찾으려는 거야? 녀석의 시신이 꼭 대황에 떨어졌다는 보장도 없을 텐데…….”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고심주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볼 게 있어.”
진양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묻는 말에는 전부 다 대답을 해 주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헛소리를 하지도 않았고, 그를 협박하지도 않았다.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들긴 했지만 나쁠 건 없었다.
다만 고심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다소 의외였다.
“오호. 그 녀석이 고심주에 걸렸었단 말이야? 난 왜 몰랐지.”
그러나 순간 검둥이는 흠칫 놀라며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진양을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차가운 눈빛,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의 활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까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헙…….”
검둥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제야 모든 게 풀린 것이다.
“진양, 너……. 설마 고심주에 걸린 거야? 빌어먹을!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그런 건데?”
“악작이 그랬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죽었지.”
진양은 눈을 감고 수련을 하면서 대답했다.
“젠장…….”
검둥이는 한숨을 푹 쉬며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심주에 걸린 녀석과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굳이 고심주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묻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악작이 어디서 튀어나왔고, 누가 그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제발 진곤이 대황에 없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만약 진양이 정말로 그를 찾아낸다면 진곤은 두 사람을 모두 베어버릴 것이다.
비록 진곤은 오래전에 숨을 거두긴 했지만, 그는 이런 상태에서도 충분히 검둥이를 죽이고도 남을 만한 능력을 가진 녀석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진양의 고심주를 풀 방법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큰 문제였다.
“진양, 그래서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대연.”
처음 칠살비가 발견되었던 동굴은 대연 북부에서 발견되었었다.
소문에 따르면 칠살비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게 된 이후 그곳은 황무지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남아있던 살기가 흘러나오며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것이다.
검둥이는 한숨을 푹 쉬며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는 진양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찾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진양 저 녀석 성질머리는 조금 고약해도 썩 나쁜 녀석은 아니잖아.
악작이 죽었으니 고심주에 관한 저주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진양이 부군인지 아닌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할 것도 없어. 아니면 더 좋지. 상고 천정이나 지부 모두 되먹지 못한 녀석들 뿐인데. 그런 녀석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그런데 진곤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고심주를 해제한 걸까?’
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검둥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진양이 고심주에 걸렸다고 해도 물불 가리지 않고 다 같이 죽자며 달려들 사람은 아니다.
괜히 노심초사해봤자 지금은 도움 될 것도 없다.
* * *
대영 황실 비서고(秘書庫).
가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오래된 고서적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전설부터 상고 시대와는 전혀 관련 없는 기록까지.
그녀는 진양을 찾아가지 않았다.
지금 진양을 찾아가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마 여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가 고심주에 걸렸다는 것이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 틈에 누군가 진양을 모함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뿐.
그 외에는 고심주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이었다.
정확한 방법을 찾게 되지 못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대략적인 방향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지금으로선 큰 성과였다.
“폐하, 진 대인께서 동해를 통해 대연으로 넘어가셨다는 소식입니다.”
문 앞에 선 위흥조는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새로 들어온 소식을 보고했다.
“알겠다. 수고했다.”
“이 외에 황씨 가문 내부의 분쟁이 점점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그건 신경 쓸 것 없다.”
“잘 알겠습니다.”
위흥조는 조용히 물러났다.
밖으로 나온 위흥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가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희가 사라지기 전 대제희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현재 대제로서의 강한 실력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씨 가문은 이번 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대제가 한 건 직접 나서서 한 사람을 처형시키고 스스로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는 명목으로 황명을 내린 것뿐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건 어쩌면 황씨 가문에겐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벌어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선 내부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황 수습을 명분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제거하려는 자들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며 황씨 내부의 상황은 가희가 내린 황명과는 크게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황씨 가문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너무나도 뻔했다.
황씨 가문이 몰락의 길에 가까워지는 순간 수많은 이들이 숨겨두었던 송곳니를 드러낼 것이다.
설령 황씨 가문에서 이를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별다른 방법은 없다.
대세는 이미 급변하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싸우는 쪽을 택하면 결국은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말은 싸우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씨 가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영 제일의 가문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자리를 맡을 만한 가문은 지금으로선 전씨 가문뿐일 것이다.
궁성을 빠져나온 위흥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씨 장로가 상당히 영악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최대한 존재감을 감추며 살아왔던 것이다.
과연,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