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33
1133화 들을수록 무섭네
멀지 않은 곳에 기절해있는 검둥이.
사실 그는 한참 전에 정신을 차렸다.
다만 일부러 기절한 척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실눈을 뜨고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펄쩍 뛰며 기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처럼 진양이 마음에 든 적은 없었다.
‘그래! 잘한다! 당장이라도 그 망할 대머리 녀석을 베어버리라고!’
이어서 모여든 검광이 대검의 형상을 이루며 진곤에게 날아드는 순간.
검둥이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하…… 하하하하!”
검광이 진곤을 덮치는 순간.
모든 빛이 사라졌다.
진양이 들고 있던 흑검도 사라졌다.
진곤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째서 손을 거둔 겐가?”
진양이 베시시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스승을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건 일종의 시험이잖아요. 일 검을 휘둘렀다가 찰나의 순간에 다시 거두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사부님도 아실 겁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설득이 됐겠죠?
어떻습니까? 제자 녀석의 검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검도 훌륭하고, 힘도 훌륭하네만 검법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하군. 다만 검에 대한 장악력은 매우 훌륭하네. 이대로 계속해서 정진해 나간다면 언젠간 완전히 자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걸세.”
“과찬이십니다.”
진곤의 몸에서 붉은 영패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 신물을 가지고 있으면 본존의 노화를 피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걸세.”
진양은 손을 뻗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영패를 잡았다.
영패에서 뜨거운 화염의 기운이 느껴졌다.
영패 앞면에는 장작을 패는 데 쓰는 칼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뜨겁게 불타오르는 화염이 새겨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인사는 됐으니 이만 떠나시게나. 부득이한 상황에 마주한다면 다시 찾아오게나. 아직 최후의 방법은 하나 더 남아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진양은 곧바로 그곳을 떠났다.
한참을 누워서 기절한 척하고 있던 검둥이도 슬금슬금 일어나 눈치를 보더니 힘없는 모습으로 터덜터덜 진양의 뒤를 따라갔다.
진양은 영패를 쥔 채 통로 앞에 섰다.
그러자 이성을 잃게 만드는 힘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어서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온 진양은 뒤를 바라보며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검둥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네가 다짜고짜 공격한 것도 아니고 진곤 그 녀석이 스스로 베어달라고 한 거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검을 거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그러나 진양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런 진양의 모습에 검둥이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나니 아쉬움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그렇게 일행이 노화로 가득 찬 구덩이를 모두 빠져나왔을 때.
진양은 그제서야 검둥이를 바라보며 미간을 팍 찌푸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대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뭘 몰라?”
검둥이도 지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진양을 째려보았다.
순간 진양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시 감정 없는 무표정으로 바뀐 것이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랐기에 검둥이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진양은 무표정으로 그를 힐끔 쳐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만약 내가 거기서 진곤의 정신을 베었다면 아마 평생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응?”
검둥이는 다소 가라앉은 모습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대머리 녀석이 일부러 그런 거라는 거야?”
“맨 처음 그가 떠나라고 했을 때 그냥 떠났다면 영패는 손에 넣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랬다면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제단 위에 올려진 옷을 입는 것뿐이겠지.
진곤은 내게 자신을 공격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일 검에 그의 정신에 남아있는 모든 기억들이 사라질 거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목표가 사라지면 남아있는 정신도 자연스럽게 소멸되겠지. 즉, 난 나의 일 검에 그가 죽을 걸 알고 있었다. 반대로 그 역시도 나의 일 검에 자신이 죽을 걸 알고 있었던 거지.”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줘.”
“우리 두 사람 모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의든 타의든 검을 휘둘러 결과가 벌어진 이상 시험은 더 이상 시험이 아닌 게 된다. 단순히 내가 그를 진짜로 죽인 게 되는 것이지.
그의 정신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가 정신을 남겨둔 목적도 자연스럽게 말살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 높은 확률로 영패를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 영영 그곳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게 무슨…….”
검둥이는 마음 같아선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냐며 다그치고 싶었으나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생각해 보니 진곤이라면 충분히 이런 수를 쓰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과거 전성기의 검둥이를 쓰러트렸던 인물이다.
결코 허술할 리는 없다.
“설마 단순히 같은 인간이고, 같은 진씨 성을 가졌고, 똑같이 고심주에 걸렸다고 해서 당연하게 날 도와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검둥이의 시선이 진양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양은 영패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선, 그것을 습득하는 대신 가지고 있는 재료를 꺼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봉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패를 해안으로 넣어 해안마석으로 봉인해버렸다.
진양은 이 모든 걸 마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어떤 이유로도 당연하게 날 도와줄 이유는 없다.”
진양이 노화가 타오르고 있는 불구덩이 쪽을 가리키자 앞에 몇몇 사람의 허상이 나타났다.
“꿀타래라고 불렸던 그 소녀도 그렇고, 안에 있던 다른 다섯 사람도 마찬가지다. 비록 세월에 의해 기억도 잃어버렸고, 자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각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우린 선입견에 빠져 그들이 한때 인간들 중에서 천재라고 불리던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심주에 죽지 않기 위해 초록색 옷을 입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삼계절에 스스로 갇힌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과연 그게 진실일까?”
검둥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진양이 다시 한번 손을 휘젓자 도표가 하나 나타났다.
이어서 도표에 여러 숫자들이 떠올랐다.
“진곤이 한 말 기억나? 초록색 옷을 입으면 평생 삼계절 속에 영원히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고심주가 풀릴 거라고 했었지.
삼계절을 이백칠십 일로 잡고 한 사람이 구십 년을 산다고 가정하고 계산해 봤어. 삼계절 속에 갇힌 사람들이 고심주에 걸렸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들의 사흘은 우리에겐 일 년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이곳이 존재한 시간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이십만 년 이상이라고.
즉, 삼계절에 갇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천사백만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거지.”
도표에 적힌 복잡한 숫자들이 바뀌며 최종적으로 하나의 결과를 내놓았다.
진양은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고심주에 걸렸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 고심주가 계속해서 그곳을 겨울인 상태가 유지되도록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이천사백만 년이면 무조건 자연스럽게 고심주를 풀기엔 충분한 시간일 거야.”
“그러니까 그 말은…….”
검둥이는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진곤이 거짓말을 한 거지. 아니면 무언가를 숨기고 얘기하지 않았다던지. 그곳에 갇혀있던 사람들도 단순히 피신을 한 게 아니라 죄수처럼 그곳에 갇혀있는 거일 수도 있고. 심지어 난 아직까지도 그들이 인간인지조차 모르겠어.
설령 인간이 맞다고 치자. 그래도 이들이 인간을 배반한 자들이라고 해도 크게 놀랄 건 없다고 봐.”
다시 고심주에 걸린 상태로 돌아온 진양은 냉정하게 분석과 판단을 이어갔다.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일 리는 없다.
특히 선입견에 빠진 상태라면 더더욱 진실을 볼 수 없다.
검둥이는 기가 모두 빨린 것처럼 한숨을 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알았어.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들을수록 무섭네. 만약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진곤이 내게 난도질했던 것도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웠던 걸지도 모르겠어.”
“난 그저 지금 손에 있는 정보를 토대로 추측을 한 것뿐. 이게 반드시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진곤이 날 놓아준 건 어쩌면 단순히 날 도와준 게 아니라 내가 그의 생각과 잘 맞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어서 진양은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있던 묵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은 한참 동안 묵양을 살펴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네가 마치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방금 돌연 네 존재가 느껴졌어.
특별히 공법이나 수단을 사용해서 존재감을 감춘 것 같지는 않은데. 어째서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던 거지?”
“나도 몰라.”
여전히 아는 게 없는 묵양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진심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어째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존재감이 사라진 건지, 네가 왜 진곤을 피한 건지 묻는 게 아니야.
내가 알고 싶은 건 스스로의 존재감을 지우는 공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배울 수 있는지다.”
묵양은 한참의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했던 건지, 그리고 어떻게 한 건지는 정말 모른다.
묵금(默金)이라고 불리는 희귀한 재료가 있어.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건지, 어떻게 생긴 건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내 몸의 일부가 묵금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해.”
“좋아. 내 질문은 여기까지다.”
진양은 과감하게 호기심을 접었다.
공법이 아니라면 진양이 배우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묵양이 왜 존재감을 낮추는 방법으로 조용히 진곤을 피했던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묵양이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묵양이 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이상 굳이 몰아세울 생각도 없었다.
일단 방금 그가 만난 진곤은 절대 진짜 진곤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가 했던 말들 역시 진곤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서로가 모른척하며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을 뿐이다.
때론 너무 많은 걸 아는 척하면 오히려 함정에 걸리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 * *
지하 동굴.
진곤의 정신은 다시 석벽으로 향했고, 그의 몸은 다시 진흙으로 바뀌어 갔다.
앞으로 걸어가며 머리를 뺀 나머지의 몸이 모두 진흙이 되었을 때.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묵양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 있었던 곳이다.
진곤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군. 방금 저기 서 있던 녀석은 누구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