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69
1169화 판을 뒤집어버리면 된다
영제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도기가 파괴되었고 신조의 주인이 바뀌었다.
다만 이제 막 파도가 가라앉으며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지난 윤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질 않았다.
지난 윤회 때 실패했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왜 실패한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지난 윤회 때의 문의 위치가 기억나지 않았다.
이는 곧 누군가 그의 문을 부쉈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 새로운 길을 택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대영 신조라는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그가 일념의 바다에 온 것은 족쇄를 풀고 신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였다.
현재 그는 최악의 방법을 통해 족쇄를 풀어냈다.
이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다만 다시 도군의 길을 걷는 것이니 마음을 굳게 다지고 의지를 강하게 세운다면 돌파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반드시 최상의 상태까지 힘을 회복해야 한다.
그다음 자신의 앞길을 막는 모든 것들을 압도하며 지나간다.
이는 곧 진정한 강자에게 가장 적합한 최고의 계획이다.
* * *
사방을 돌아다니며 살폈으나 영제와 관련된 단서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가 신조의 길을 걷지 않기로 했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봐도 그렇다.
영제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후기로 갈수록 신조는 그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족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강해지기 위해선 대영 신조도 덩달아 강해져야 한다.
물론 단순히 신조의 영토를 넓히는 방법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확장은 큰 의미가 없다.
사해황막 같은 불모지까지 영토를 넓혀봤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으로 신조는 더 이상 질적인 도약을 노릴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피해가 신조의 발전에 큰 방해가 될 것이다.
영제가 대연을 공격하지 않은 건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영제의 단서를 찾지 못하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중 최악의 상황이었다.
영제가 허악한 틈을 타 죽이려고 했지만 그게 불가능해졌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제와 관련된 단서 대신 혈라마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서쪽에 세워진 불국(佛國)이 엄청난 속도로 사방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벌써 몇몇 수도사들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 그곳을 떠나고 있다고 한다.
* * *
삼천 장 높이의 거대한 흰 코끼리가 산봉우리처럼 높이 뻗은 다리를 움직이며 산맥을 지나고 있었다.
그의 몸의 위쪽은 구름 위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구름 위로 희미하게 코끼리의 등이 드러났다.
그 위에는 상아처럼 새하얀 궁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궁전 앞쪽 바닥은 전부 황금이 깔려있었다.
이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평온한 얼굴로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었다.
인간부터 요족까지 다양한 종족들이 모여있었다.
불경 소리와 함께 여섯 겹의 후광이 궁전 상공을 뒤덮고 있었다.
궁전 내부 상석에는 깡마른 승려가 한 사람 앉아있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마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두는 입마에 빠진 듯했다.
몸에선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주위를 감돌고 있었고,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으며,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진 채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령 입마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다.”
맨발의 노승은 연꽃대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황금 연꽃이 피어나며 그의 발을 받쳐주었다.
노승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뻗어 마두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미련한 것. 언제까지 귀의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손에서 황금빛이 피어올랐다.
그러자 마두의 표정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다시 평온하게 펴졌다를 반복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와 황금색 불광이 서로 교차하며 뒤섞였다.
잠시 뒤, 불광과 마기는 어느 정도 평행을 이룬 듯했다.
그의 몸에선 어두운 황금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경건해 보였다.
노승에 의해 ‘성불’된 것이다.
성불 결과는 다소 뜻밖이었지만 노승은 크게 기뻐했다.
“호법장군이라. 나쁘지 않군.”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호법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뒤 뒤쪽에 있는 대열로 합류했다.
노승은 다시 연꽃대 위로 돌아갔다.
가볍게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은 한층 더 평화로워졌다.
이곳은 그야말로 꿈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힘이 회복되는 속도는 스스로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빨랐다.
그는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알지 못한다.
기억하고 있는 건 이성이 다소 깨어났을 때 진양에 의해 봉인되었다는 점,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노승은 눈을 감은 채 불경을 외웠다.
한편, 거대한 코끼리는 궁전을 등에 업은 채 구름이 둘러싸인 산맥을 지나 끝없이 이어진 평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뒤로 그와 같이 궁전을 등에 업은 거대 괴수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하늘 위로 수많은 비주와 빛무리들이 구름을 빠져나오며 코끼리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뒤에 있는 지면에서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며 따라오고 있었다.
* * *
한 달이 지났다.
진양은 서쪽에서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혈라마를 피하기 위해 동쪽으로 몸을 피신했다.
처음에는 혈라마를 먼저 상대해 볼까 생각도 했었으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이곳엔 다른 강자들도 많은데 굳이 자신이 나서서 혈라마와 먼저 싸울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혈라마의 진짜 적은 영제다.
영제야말로 그에게 해탈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선 그 방법이 유일하다.
혈라마는 일전에 했던 것과 똑같이 영제를 찾아 돌아다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굳이 그를 방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가 기억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윤회가 시작되며 영제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념의 바다에 대해서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진양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해야 정체를 들키지 않고도 혈라마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진양은 어떻게 해야 그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지를 두고 큰 고민에 빠졌다.
최근 입수한 정보만 봐선 혈라마가 영제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만약 그가 지난번의 참패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설치고 다닐 리 없다.
회복조차 덜 된 상황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대놓고 영제에게 자신을 죽이러 오라고 위치를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시점을 살펴보니 어쩌면 혈라마는 아직 영제가 죽었다는 사실과 그의 실력이 크게 줄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났다.
그는 지난번 일념의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심지어 적의 존재조차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적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때문에, 진양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고 혈라마에게 이 세계의 진상을 전달하고 영제와 싸우게 만들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진양은 결국 냉정한 진양을 찾아가 상의해 보기로 했다.
이미 막다른 길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냉정한 진양은 눈과 귀를 닫은 채 오직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진양이 나타나자 그의 주위에 떠 있던 여러 장막들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무슨 일이지?”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알아서 살펴봐.”
냉정한 진양은 눈을 감은 채 기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우리가 일념의 바다에 온 가장 큰 목적은 영제를 죽이는 것, 그다음은 고심주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이 외의 일은 우리와 일절 관계없는 일들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이곳은 혼란한 상고 세계의 일각에 불과하다.
난 이곳의 변화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다. 게다가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내가 받는 영향은 거의 없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진양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거야? 그냥 간단하게 얘기해 봐.”
“어째서 일념의 바다의 진상을 비밀로 여기는 거지?”
“그렇군! 이해했어. 고마워.”
순간 진양은 가로막혔던 생각의 길이 다시 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진양은 탁- 하고 자신의 이마를 쳤다.
이렇게 간단한 걸 모르고 혼자 골골대고 있었다니.
답은 이미 나왔다.
그냥 판을 뒤집어버리면 된다.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정보를 흘릴 수 있게 된다.
설령 혈라마나 영제가 이를 통해 더욱 많은 것을 추측해낸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한층 더 나아가 진양까지 염두에 두고 고려한다고 해도 정작 진양 자신에게 돌아오는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다.
영제는 진양을 기억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혈라마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진양은 허약한 진양이 전부일 것이다.
만약 진양이 지난 윤회에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했다면 다시 허약한 진양이 되어 살아났을 거고, 빠져나갔다면 십중팔구 다시 일념의 바다에 모습을 드러낼 리 없다.
그리고 현재 일념의 바다에 들어온 건 진양이 아닌 계무진이라는 사람뿐이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건 전혀 어려울 게 없다.
이미 수도 없이 해봤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진양은 지금 유언비어를 퍼뜨리려는 게 아니다.
단순히 유언비어가 퍼져나가는 방식을 빌려 정보를 퍼뜨리려는 것뿐이다.
‘좋아. 그럼 곧바로 착수해 볼까?’
* * *
며칠 뒤, 어느 성지.
위험한 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영약을 받은 한 수도사가 흔쾌히 임무를 수락했다.
어느 한 미치광이가 평소엔 보기 어려운 자원을 가지고 몰래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신이 죽은 뒤 만들어진 일념의 바다이고,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사실 실존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만 년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가 찾아오면 모든 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충분한 보상을 챙긴 수도사는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다만 그는 이것을 임무로 받아들인 게 아니다.
그저 미치광이의 농담 정도로 받아들이고 사람들에게 퍼뜨린 게 전부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받았다는 귀한 자원을 자랑하기도 했다.
특히 이 미치광이가 사람들과 논쟁을 하다가 부끄러움이 분노가 되었는지 갑자기 무시무시한 실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한층 더 뜨거워지며 암암리에 더욱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