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335
1335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만 것
잔뜩 약이 오른 검둥이는 고함을 질렀다.
“부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네녀석들, 날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손쉽게 죽일 수 있었을 거야.
더러운 자식들! 날 이용하려고 일부러 살려둔 거 아니었어?
네 녀석이 풍도대제와 다를 게 뭐냐? 상고 천정의 신들과 다를 게 뭐냐? 각자 다른 신념과 이념을 가지고 있을 뿐, 결국 하는 짓은 전부 똑같잖아. 자신의 이념을 위해서라면 남의 희생은 서슴지 않는 거지.
그래도 신은 스스로 위선자인 걸 인정하기라도 하지. 네녀석들은 겉으로는 슬픈 척하면서 사실은 네 놈들을 믿는 사람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잖아. 남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이룬 거지.
더러운 놈들!”
“그 말이 맞다. 확실히 나의 본존은 널 이용해 먹었지. 허나 한 가지 틀린 게 있다. 때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선 희생은 반드시 필요한 법!”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둥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얼굴이 완전히 풍화되어버린 한 조각상이 서 있었다.
검둥이는 큰소리로 웃으며 조각상을 향해 거칠게 침을 뱉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걸 알게 됐는지 궁금하겠지?
너희처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었거든.
그때 비로소 깨달았지. 네 녀석이 본질적으로는 신이라는 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야.
난 네게 경고하러 찾아왔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만은 건드리지 마라. 만약 조금이라도 그를 방해했다간 나의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네가 남긴 대비책을 전부 박살 내버릴 테니까.
네가 어떤 기괴한 수단을 쓰는지는 전부 다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정말로 네가 남긴 대비책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말을 마친 검둥이는 차갑게 웃으며 자리를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조각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둥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부글거리던 분노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꺾이지 않을 듯한 의지가 가득 찼다.
마치 비장하게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검둥이와 조각상이 부딪치려는 순간!
검둥이는 조각상을 뚫고 지나갔다.
마치 조각상이 허상인 것처럼.
검둥이는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조각상은 제자리에 선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검둥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날 잡으려는 줄 알았다. 오랜 시간 숨겨왔으니 이제 본색을 드러낼 거라 생각한 거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본색을 드러내지 않을 줄은 몰랐구나.
왜? 설령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아직 망자의 세계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너도 알게 된 거냐?
네가 심혈을 기울여 모두를 속이고 마침내 만들어낸 바로 그 망자의 세계 말이다.
아니면 수지가 안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거냐? 내가 네 손에 죽게 된다면 네 신념과 이념이 철저하게 파괴될지도 모르니까.”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난 결코 그자를 노릴 생각이 없다.”
조각상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허…….”
차갑게 웃는 검둥이의 몸에서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누굴 바보로 아는 거냐? 이런 곳에 숨어있는 화신조차 내가 누굴 얘기하는지 알고 있는데. 이래도 부정하겠다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미동조차 하지 않던 조각상이 다시 입을 열며 침묵을 깼다.
“이미 말했다시피 넌 지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난 결코 그를 방해할 생각이 없다. 때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사정도 있는 법.
과거 신의 전쟁이 일어났던 이유, 그리고 결국 상고가 파멸의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만약 네가 인간이었다면 이 모든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거다.”
“모든 걸 단순히 혈맥 하나만 놓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법이지. 너희 인간들 중에 신의 편에 선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검둥이는 마치 상대를 비웃듯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종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혈맥만으로 따질 순 없는 법. 인간처럼 생겼다고 해서 모두가 인간은 아닌 것이고, 마찬가지로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지.”
조각상의 목소리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아주 먼 옛날 인간의 선조들은 생존을 위해 힘을 얻는 방법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만 수많은 길 중 어떤 길이 그들에게 알맞은 것인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지.
마찬가지로 선조들이 인간에게 맞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고 하여 후손들이 그들의 업적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미 사라진 익인(翼人), 마인(魔人), 수인(獸人) 등. 그 누구도 이들이 인간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허나 반대로 인간과 흡사한 존재이면서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자도 다수 존재하지.
마치 순수한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닮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너처럼 말이야.”
검둥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조각상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한 모습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 마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허나 때론 인간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 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선 상상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네가 나의 화신이 있는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순수한 인간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넌 변했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그와 내가 도대체 어디가 다르다는 거지? 물론 단순히 호기심에 물어보는 것이니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째서 내가 신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을 한 건지도 궁금하군.
이미 대국 속에 몸을 담고 있기에 때론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게 어려울 때도 있다. 사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과거의 수많은 문제점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다만 이미 굳어진 것들을 드러내는 게 불가능할 뿐이지.”
조각상은 차분하고 솔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모습도 조금씩 검둥이의 기억 속에 있던 부군의 모습과 같아졌다.
검둥이는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사실 오지도에 있을 때만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는 자신의 힘과 보물을 노리며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리고 봉인의 힘으로 삼을 수 있는 자들 역시 서슴지 않고 모두 붙잡았다.
그때만 해도 그의 마음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일말의 파장조차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많은 게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진양의 죽음으로부터 왔다.
진양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신의 장례를 치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슬퍼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까지 했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살아있는 걸 확인하며 안심하는 그 눈빛은 잊을 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 소멸되는 순간까지도 절대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이때부터 검둥이의 마음속에 깊게 뿌리박고 있던 생각이 완전히 뒤집히게 되었다.
사람은 서로 비교하면 죽고, 물건은 서로 비교하면 버린다는 말이 있다.
모두가 까만색이라면 그 누구도 서로 서로의 차이를 느낄 수 없지만, 돌연 어디선가 하얀색이 튀어나온다면 차이는 명확할 수밖에 없다.
빛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검둥이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조각상은 아무 말 없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한참 뒤.
검둥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르지. 확실히 본질부터가 다르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둥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등껍질을 바라보았다.
순간 머릿속에서 빛이 번쩍이며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홱 들었다.
그의 두 눈앞에 마치 기억 장면 같은 것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불멸의 이성이 조금씩 흔들리며 눈앞에 있던 장면은 소용돌이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소용돌이가 나타나며 그다음으로 흘러나왔어야 할 장면과 그 흔적들도 전부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져버렸다.
검둥이는 굳은 얼굴로 궁전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네 놈의 기괴한 수단은 이미 전부 다 꿰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내 앞에서 수작을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내가 언제 그가 순수한 인간이라고 했었지?”
“하하!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 없다.”
조각상의 웃음소리와 함께 주위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분위기는 순식간에 모두 사라졌다.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 이건 단지 내 추측에 불과해. 네게 큰 변화가 일어난 걸 보고 어쩌면 그가 순수한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다.
네 말이 맞다. 지금 이곳에 남겨진 건 나의 화신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내가 이곳에 있다고 확신하고 여기까지 들어온 건 네가 유일하다. 그리고 네가 말하고 있는 게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궁금하구나. 넌 모든 걸 버리고 다시 환생했다. 하지만 아직 과거의 실력조차 제대로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지. 과연 단순히 내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일까?
어째서 나의 존재가 네가 말한 그 사람에게 큰 해가 될 거라고 확신하는 거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나의 화신에 불과하다. 허나 나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 중에 네가 이렇게까지 찾아와 날 협박해야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네가 그들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올 리도 없고 말이야.
널 이곳까지 움직이게 만들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지 한참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내가 결코 그들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지.
그렇다면 일단 상고의 사람은 모두 제외일 거고, 남은 건 현세에 있는 사람 중에서도 순수한 인간뿐일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처음엔 변한 네 모습을 보고 어쩌면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은 인간 여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응룡 역시 인간 여인 때문에 큰 변화를 맞이했었으니까. 허나 네가 이런 모습으로 환생한 것을 보니 추측을 부정할 수밖에 없더군.
네게 이토록 큰 변화를 일으키면서도 활력이 넘치고 타협 따위는 없는 사람이라. 아마도 아직 진정한 무력감과 절망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젊은 사람이겠지.
널 이렇게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충분한 실력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네가 변화의 첫걸음을 내딛도록 만들려면 실력 없이는 불가능할 테니까.
진정한 변화란 네게 있어선 아마 충분히 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일 것이다. 순수한 인간, 현세에 있는 사람, 남자, 젊은이, 충분한 실력까지. 그렇다면 천부적인 재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을 터. 여기에 훌륭한 품성도 함께 지니고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연약하지도 않고 가식적이지도 않은 그런 사람일 거다.
현세에 있는 사람 중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은 별로 많지 않지. 현존하는 강자들을 떠올려본다면 금세 네가 누굴 말하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
검둥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행동이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화신이라고 해도 상대는 부군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