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368
1368화 한동 여신
모든 흔적을 지운 사람들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무토종 대장로의 권력 계승 성공 여부는 더 이상 이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설령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그렇게 모두들 떠나고 난 뒤.
장포를 입은 남자는 여전히 제자리에 남아있었다.
“왜 안 가고 있는 거죠? 어떻게 될지 지켜보고 싶은 건가요?”
“아닙니다. 갈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남자는 마침내 가리고 있던 얼굴을 드러냈다.
평범한 중년인의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잠깐 사이에 한층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전 비록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결국 대신관을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은 죽고 말았죠.
이렇게 된 이상 전 의심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결국엔 죽게 되겠죠. 지금까지의 기억은 모두 사라졌지만 어쨌든 전 죽을 목숨인 겁니다.”
장포를 입은 남자는 평온한 얼굴로 모래로 둘러싸여 있는 무토종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다소 의외였다.
상대는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서사가 죽지 않았어도 제게 행복한 결말이 찾아오진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서사에게 용서를 받지 못했을 테니까요.
불가계 내에서 갑목행을목지법을 쓸 수 있는 건 천궁 사람을 제외하면 제가 유일합니다. 그는 신, 천궁 밖의 사람을 상대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듯한 일이죠.
대신관께서 저를 주목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제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겁니다. 언제든 천궁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그런 운명 말입니다. 다만 전 끝까지 저항하고자 마지막 희망에 모든 걸 걸어보려던 것뿐입니다.”
진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익에 눈이 멀지 않은 상태라면 누구든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굳이 진양이 뭐라고 말을 해 줄 필요도 없었다.
상대는 이미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상대는 진양보다도 훨씬 더 훤하게 상황을 꿰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망설이지 않았다.
단지 보여주기식의 태도를 취한 것일 뿐.
심지어 마지막엔 굳이 진양의 등에 칼을 들이댈 필요도 없었다.
진양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진양이 어떻게 하려는지 보려고 한다는 것을.
“정말 안 갈 겁니까?”
“갈 필요 없습니다. 곧 이곳으로 찾아올 신을 기다릴 겁니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계승을 이어나가고 있는 무토종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서사가 죽었으니 다음으로는 높은 확률로 을목 신이 나타날 겁니다. 을목청화(乙木菁華)의 권력을 쥐고 있는 신이죠.
서사가 숨을 거둔 이상 을목 신은 쉽게 이제 막 무진광사 권력을 계승 받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원하는 건 바로 그의 권력입니다.”
진양은 그를 훑어보며 끌끌 혀를 찼다.
‘그랬던 거군.’
그는 지금까지 진양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진양이 곧 이곳에 나타날 신을 죽일 만한 실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만약 이곳에 정말로 을목 신이 나타난다면, 진양의 손에 의해 그가 죽고 난 뒤 계승될 권력은 자연스럽게 장포를 입은 남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진양이 권력을 계승할 리는 없을 테니까.
‘대놓고 꿀을 빨겠다는 거군.’
그때, 남자의 손바닥 위로 작은 새싹이 하나 자라났다.
새싹에선 새하얀 서리가 뿜어져 나왔고, 이내 새싹은 부서져 버렸다.
남자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대신관께선 여전히 저를 경계하고 계시군요. 아무래도 을목 신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애초부터 서사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계승자를 죽일 생각도 말이죠. 단지 저를 함께 처리해버리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이만 가셔도 좋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신은 절대 대장로를 꺾을 수 없는 신입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남자의 발아래로 수많은 뿌리가 자라나며 온몸을 뒤덮었다.
이어서 남자는 천천히 지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며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진양은 사자결을 발동시켰다.
지하 모래 바다 입구 쪽 방향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뒤늦게 지원을 온 신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서사의 권력을 노리고 온 게 아니다.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장포를 입은 남자를 노리고 온 것이다.
오행상생상극지법(五行相生相克之法)을 쓰고 이런 한기를 가지고 있는 권력.
이는 장포를 입은 남자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힘이었다.
한편, 모래에 둘러싸인 무토종 대장로도 점차 모래 바다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계승의 일부를 마친 듯했다.
이 순간 모래 바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계승은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이다.
다급하게 떠날 것도 없었기에 진양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공기 중에 나타난 한기를 들이켜봤다.
순간 진양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설마…….”
천궁에 몇 명의 신이 있고, 각각 어떤 권력을 쥐고 있고, 또 이들이 권력을 내려놓게 된다면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의 경지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결코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신들이 자신의 권력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지배했는지는 비밀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핵심이자 실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각 속성마다 상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정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목(木) 속성이 토(土) 속성을 이길 수 있긴 하지만 토의 양이 많아진다면 목은 꺾이기 마련이다.
만약 서사가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권력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을 죽이러 온 모든 이들을 꺾었을 것이다.
천궁 내에 이 정도의 한기를 가지고 있는 신은 몇 명 정도 있다.
하지만 주변의 날씨까지 변화를 일으키면서 조금도 숨김이 없이 행동하는 신은 오직 단 한 사람뿐이다.
진양은 계속해서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이곳에 오는 신은 단 하나.
영감의 흔적도 없었다.
이건 곧 상고 지부의 사람들이 모종의 수단으로 영감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뜻이었다.
‘전혀 쓸모없는 놈들은 아니었군.’
진양은 성은을 거둔 뒤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숨겼다.
그리고 이곳에 올 사람을 조용히 기다렸다.
* * *
반 다경 정도 후.
주변의 석벽에 새하얀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어느새 기온이 급격히 낮아지며 냉풍이 불어왔다.
진양은 고개를 들어 석벽 위쪽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리던 물방울이 얼어붙으며 긴 고드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엄동설한이 찾아온 듯했다.
잠시 뒤.
예상대로 한 신이 나타났다.
하얀 소복, 백발, 하얀 눈썹, 그리고 눈처럼 새하얀 피부까지.
인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여신이었다.
진양은 하마터면 소리를 내서 웃을 뻔했다.
‘한동(寒冬) 여신이군.’
천궁에 있는 신들 중 진양이 반드시 꺾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이 몇 명 있다.
한동 여신은 바로 그중 한 명이다.
천궁에서 가장 약한 권력은 일원중수나 무진강사같이 천지지간에 본래 존재하던 보물을 권력으로 삼은 경우다.
이러한 권력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한동 여신이 쥐고 있는 한동 권력은 사계절 중의 겨울을 관장하고 있는 권력이다.
본질만 따진다면 가장 약한 권력을 가진 자들보다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
장포를 입고 있던 남자가 도망친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한상(寒霜) 권력 정도라면 그의 힘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동 여신의 권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압도적으로 제압을 당하며 싹조차 제대로 피워내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진양의 경우는 정반대다.
진곤으로부터 배운 참동지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마침내 참동지법에 쥐약인 상대와 만나게 된 것이다.
물론 만약 진곤이 직접 나선다면 크게 힘을 들일 필요도 없이 검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한동 여신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목숨은 물론이고 그녀가 가진 권력까지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진양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은 채 성은을 사용하여 스스로의 몸을 감췄다.
그리고 한동 여신이 지나갈 길목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진양은 손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 진곤이 검을 휘두르던 장면이 피어올랐다.
그의 몸은 이미 당시의 그 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신의 본능이 깨어나며 한 자루의 벌목도(伐木刀)의 허상이 진양의 손에 나타났다.
한겨울의 한기보다도 더 차갑고 날카로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순간 성은의 범위가 백여 장으로 늘어나며 한동 여신을 안에 가둬버렸다.
한동 여신이 뒤늦게 진양을 발견했을 때, 발목도는 이미 그녀의 머리를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 일 검은 마치 겨울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듯 한동의 존재를 부정해버렸다.
강력한 육신의 힘과 진양의 힘이 더해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도군의 경지에 오르며 갖게 된 무시무시한 힘과 기반이 동시다발적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참동지법의 힘의 원천이 되었다.
게다가 한동 여신에겐 쥐약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위력은 평소보다도 한층 더 강력하게 나타났다.
진양의 검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벌목도의 허상은 모습을 감췄다.
한동 여신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동공은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다.
주변의 한기가 한곳으로 모여들며 새하얀 연꽃의 형상을 이뤘다.
이어서 균열이 일어나며 연꽃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진양은 두 손을 내밀어 부서진 연꽃을 모두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해안에 있는 봉신서에 집어넣었다.
물론 한동 여신을 성불시켜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도 두 개의 광구가 나왔다.
성불이 끝나자 그녀의 육신은 한빙지옥과 같은 냉기를 뿜으며 공기 중으로 홀연 듯 사라져버렸다.
진양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한동 여신의 눈빛은 이제까지 마주쳤던 다른 신들의 눈빛과 똑같았다.
아무래도 그녀도 태호에게 무언가를 완전히 빼앗긴 듯했다.
* * *
조용히 불가계를 빠져나온 진양은 안전한 곳을 찾아 수확물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 서사 암살을 계획하며 최악의 경우 영감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정면으로 싸우는 건 아니고 상대가 잘못된 정보를 퍼뜨렸을 때의 경우다.
그러나 예상외로 지부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한동 여신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두 명의 신을 성불시키고 총 네 개의 광구를 손에 넣었다.
우선 서사에게는 파란색 광구 두 개가 나왔다.
하나는 기억이었다.
예상대로 처음 신으로 책봉될 때의 장면이 들어있었다.
진양은 일전에 했던 것처럼 봐선 안 되는 사람은 베어버리고 서사만 살폈다.
일원 여신 때와 마찬가지로 태호는 서사로부터 무언가를 가져갔다.
또 다른 광구에는 비밀이 들어있었다.
대신관 영감에 대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다소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