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465
1465화 정체불명의 괴한인 줄
“말도 안 돼. 겨우 몇 년 만에 봉호의 경지에 올랐다고? 언제 그런 건데?”
“작년.”
분신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대제가 세 번째 세계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을 때의 일이야.
그곳은 요괴와 괴수로 가득한 세계였는데, 그곳의 일부를 점령하여 대영 신조의 영토로 선포하는 순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상고의 대요가 깨어났지.
원정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어쩔 수 없이 대제가 나서게 되었지. 그 순간 봉호로 열반하여 상고 대요 녀석을 짓눌러버렸지.
살아있는 채로 경지를 불태워 아예 지능조차 없는 하급 요괴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더군.”
분신의 말이 끝난 뒤.
진양은 곧장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잘 들어. 난 아직 망자의 세계에 있는 거야. 알겠지? 절대로 내가 돌아왔다는 얘기는 해선 안 돼, 그랬다간 네 녀석을 흩어버릴 거야!”
“뭐,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알겠어.”
거슬리는 협박에도 분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양은 씨익 웃으며 흑검을 꺼냈다.
“아니, 미안하지만 널 못 믿겠어. 아마 돌아서자마자 날 팔아먹을 생각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말끝마다 대제라고 하진 않았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네 녀석들이 내 분신인데, 네 녀석들이 어떤 존재인지 모를 것 같아? 분명 진작 매수를 당했겠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진양은 분신의 기억에서 자신을 만났던 기억을 전부 도려냈다.
이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에 집중하고 있는 분신의 모습을 보며 흡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을 떠났다.
자리를 떠나려던 진양은 앞쪽으로 보이는 수백 장 정도 크기의 거대한 일구(日晷, 해시계)를 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젠장…….”
아무래도 이제 와서 입막음을 하기엔 너무 늦은 듯했다.
진양은 조용히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한편, 계속해서 책을 살피며 교안을 준비 중인 분신은 잠시 멍하게 있었다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게 전부였다.
진양은 미세한 조절 능력을 통해 정확하게 자신이 나타나고 난 뒤의 기억을 전부 베어냈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하게 기억을 베어낸다고 해도 기억 자체에는 단층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아주 잠시 동안 주의가 산만해지게 된다.
평소 고도로 집중력을 발휘하다가 긴장을 놓는 순간 잠깐 멍해지는 그런 것처럼 말이다.
어떤 고수든 진양처럼 항상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진양이 기억을 베어낸 대상이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더욱 평범한 바보 분신도 아니었다.
잠깐의 멍한 기운이 지나가고 난 뒤.
분신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일구를 바라보았다.
무려 수백 장에 이르는 크기였기 때문에 작은 눈금 하나까지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중간에 달려 있는 거대한 침에 생기는 그림자의 길이와 방향을 통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법보인데, 대영 신조의 흠천감에서 호량 학원의 개원을 축하한다며 선물로 보내온 물건이었다.
말은 그렇다곤 하지만 사실은 진양의 한 분신이 몽의를 대신하여 만들어낸 신조의 법보다.
신조의 힘이 더해지고 모든 신조를 참고하기 때문에 법보의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시간 계산 역시 찰나의 단위로 정확해지는데, 한 번의 밤낮에는 무려 사백팔십만 개의 찰나가 존재한다.
이것은 몽의가 수련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덤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일구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간은 귀하다’라는 등의 말을 하기도 했다.
때문에 모두들 그것을 정확하게 시간을 계산하는 용도 외에 별다른 용도가 있다고 느끼진 않았다.
기껏해야 호량 학원을 상징하는 구조물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분신은 일구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멍하게 있던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그가 멍하게 있던 시간은 대략 반 다경 정도였다.
꽤 긴 시간이었다.
분신은 머리를 긁적이며 피식 웃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온 세상을 통틀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본존, 진양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는 곧바로 옥부 하나를 꺼내 활성화시켰다.
은은한 빛이 감돌며 옥부는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분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비교적 평범한 축에 드는 분신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임무의 완성도만 보면 다른 분신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다.
하지만 환경이 강하면 인간도 강해져야 하는 법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대제는 봉호도군의 경지에 올랐다.
이건 겨우 그녀가 가진 본연의 경지에 불과하다.
여기에 대영 신조의 힘까지 더해진다면 무시무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굳이 이도에서 나설 필요도 없다.
멀리 신조의 끝에서 신조의 힘을 통해 이제 막 봉호의 경지에 오른 고수를 눌러 죽이는 것조차도 가능하다.
대제는 일전에 본존이 돌아오는 대로 곧장 보고를 올리라며 경고를 한 적이 있다.
만약 보고를 하지 않는다면 본존의 분신 신통력을 폐지하겠다며 으름장까지 놓았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상고 대요는 스스로를 매우 강하다고 여겼었다.
지금 시대에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자만에 빠져있던 탓인지 감히 쓸데없는 소리까지 지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대제로 하여금 화풀이를 할 곳을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고 대요의 혈맥은 불사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나 그는 대제에 의해 모든 경지가 불타며 손바닥만 한 일개 하급 요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처참한 말로가 아닐 수가 없었다.
본존은 위협 따위는 믿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대제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협한 것을 믿지 않을 순 없었다.
게다가 이건 본존을 속이는 게 아니다.
이건 그를 돕는 것이다.
분신은 책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생들을 가르치러 갈 시간이었다.
* * *
이도 궁성.
가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탁자에 올려진 옥부가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며 부서졌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이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분신으로부터 소식이 날아들었음에도 진양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즉, 다시 산 자의 세계로 돌아온 진양이 대황이 아닌 호량으로 먼저 갔다는 뜻이었다.
* * *
남해.
진양은 성은 신통력을 유지한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백 리 가까이 움직였다.
마치 화살처럼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조용히 남해를 관통하여 대황 육지에 도달했다.
한 바퀴를 빙 돌아 이도 북문에 도착한 진양은 재빨리 흑검을 꺼내 분신과 있었던 일들을 전부 잘라 몽경에 단독으로 보관해놓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진양이 기억하는 건 곧장 이도로 왔다는 사실뿐이었다.
소책자를 꺼내 해야 할 일 목록을 살폈다.
이 중에는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이 있었다.
‘우선 이도부터 들릴 것!’
진양은 소책자를 다시 집어넣은 뒤 성은 신통력을 유지한 채 조용히 이도 안으로 들어섰다.
이도 안으로 들어가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대영은 급속도로 영토를 넓히며 기반 건물에 대한 정비는 생각보다 소홀히 했다.
물론 성벽 등은 이전에 비하면 한층 더 강해지긴 했지만, 넓게 보면 크게 강해진 것도 아니었다.
궁성에 도착한 진양이 안으로 몰래 잠입하려는 순간.
무언가 느껴졌다.
진양은 성벽으로 다가가 성은 신통력을 통해 일부를 감쌌다.
사람의 머리만 한 크기의 황금용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진 대인?!”
큰 은혜를 입은 덕분일까?
녀석은 이전과는 달리 호칭부터 상당히 공손해져 있었다.
“이야. 날 발견한 거야? 그동안 꽤 많이 변했나 보네. 이 정도면 진룡이 될 날도 머지 않았겠는걸.”
진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칭찬을 들은 녀석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침입자를 감지하고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싹 잊은 채 말이다.
“이게 다 대인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대인께 직접 감사 인사라도 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대인을 찾을 수가 없어서 답답하던 참이었습니다.”
“인사는 됐어.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한 건 나잖아. 기회를 잡아 네 것으로 만든 건 전부 네 덕분이지.”
“진 대인께선 여전히 겸손하시군요. 허나 제가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서로 공을 밀어내는 훈훈한 모습이 이어졌다.
그는 대영 신조의 국운의 화신이다.
이제는 지능 수준까지 점점 높아지며 진정한 생명체를 향해 한층 더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때문에 그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진양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난 이만 들어가 볼 테니까 가서 하던 일 마저 해. 난 신경 쓰지 말고.”
말을 마친 진양은 모습을 감췄다.
국운 화신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진양이 도둑처럼 몰래 궁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진양의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더 이상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궁성 내부로 들어선 진양은 경비병을 피해 가희가 수련하고 있는 궁전에 도착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의 미모는 여전했다.
심지어 뺨을 타고 흐르는 곡선까지도 완벽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진양은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눈을 감은 채 수련을 하고 있던 가희는 자신의 앞을 향해 손을 날렸다.
그러나 그 손은 진양의 얼굴 바로 앞에 나타났다.
뜨거운 화염으로 둘러싸인 손바닥이 진양을 그대로 바닥에 짓눌렀고, 진양의 방어는 모두 무시한 채 그를 지면에서 절반 이상이나 움푹 들어가게 만들었다.
“자, 잠깐…….”
그러나 말을 모두 마치기도 전에 진양의 얼굴은 지면에 완전히 처박혀버렸다.
가희가 눈을 떴다.
차가운 그녀의 얼굴엔 금세 미소가 번졌다.
다소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놀란 그녀는 황급히 손을 거두며 진양을 다시 지면 위로 뽑아 올렸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침입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진양이었던 것이다.
마침 얼마 전에 상고 대요 하나를 묵사발로 만들어놓은 터라 녀석의 동료가 보복을 위해 찾아오기라도 한 줄 알았다.
상당히 기괴한 신통력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도의 궁성.
그녀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해 접근해오는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그에게 악의가 있는 것인지조차 분별해낼 수가 없었다.
황급히 진양을 일으킨 가희는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멀쩡했다.
강력한 육신 덕분이었다.
한 방에 묵사발이 나버린 상고 대요 녀석과는 아예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녀의 봉호 화염은 어째서인지 진양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겨우 도군에 불과한데도 이렇게 강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