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494
1494화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자
대머리가 주루를 빠져나가자 진양도 조용히 그의 뒤를 밟았다.
그는 서쪽 성문을 통해 성지를 빠져나갔다.
이어서 한 산봉우리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서쪽을 향해 세 개의 위패를 꺼내놓은 뒤 영향을 피웠다.
그리곤 공손하게 절을 올리며 잔뜩 목이 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어머니, 누이. 벌써 백 년 가까이 지났지만 제 실력으로는 여전히 상대를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나 마침내 오늘 천 년에 한 번 마주할까 말까 한 기회를 손에 넣어 세 분을 대신하여 복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부디 편안하게 잠드시길…….”
멀리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진양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깊은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그때, 대머리가 모습을 감췄다.
진양도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여 위패가 있는 곳에 나타났다.
대머리의 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무표정으로 진양을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날 따라왔다는 건 알고 있소. 무슨 목적으로 날 따라온 것이오?”
“별것 아닙니다. 그냥 흥미로운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 따라온 것뿐입니다.”
진양은 한걸음 물러서며 자신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매염이 성지까지 들어와 날뛰고 있는데도 아무도 이 사실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더군요.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 그에 대해 얘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겁대가리 없는 멍청한 녀석이 떠들어대는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당신이 함정을 판 것이더군요.
그는 멍청하게도 당신이 진심으로 그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에 술을 사겠다고 한 거라고 믿었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낯선 이의 술을 받다니. 이 정도면 죽어도 싸다고 할 수 있겠죠.”
대머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 보잘것없는 일개 하급 수도사였던 시절 그가 우리 집을 지났던 적이 있소. 그는 집안에 특별한 영기가 보관되어있다는 것을 느꼈고, 무자비하게 나의 부모와 누이를 향해 살수를 뻗었소.
황급히 집에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은 뒤였소. 심지어 가족들의 시신조차도 제대로 수습할 수가 없었소.
그는 종문에 속한 수도사로 나보다 한참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자였소. 천부적인 자질이나, 재능이나, 실력이나, 배경이나. 그 어느 하나도 난 그를 꺾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이름과 정체를 숨기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소.
그리고 마침내 복수의 기회를 쥐게 되었소. 힘겹게 기회를 얻은 이상 당연히 그냥 날려버릴 순 없는 법.”
진양은 포권을 취했다.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당신의 인내심에 진심으로 탄복했습니다.”
굳이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털보를 흑철면구에게 찌른 건 대머리가 분명했다.
매염은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자신에 대해 떠드는 사람을 용서해 줄 만큼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어차피 죄목이야 얼마든지 씌울 수 있으니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체포해버리면 그만이다.
흑철면구를 쓴 자들은 아마도 대영 신조로 치면 정천사 외후와 같은 자들일 것이다.
다만 잔혹함만으로 따진다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한 수준은 아니었다.
마땅한 배경조차도 없는 일개 영태 수도사 따위 하나 죽인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아마 매염도 그를 죽이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릴 것이다.
작은 사건 속에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물을 것도, 조사할 것도 없다.
대머리는 위패를 다시 거둬들인 뒤 진양에게 물었다.
“혹여나 내가 했던 것처럼 나를 매염에 팔아 한몫을 챙기기라도 할 생각인 게요?
내 평생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다고 여겼던 원수는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소. 난 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배후에 있는 문파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수집해왔었소.
계율사(戒律司)라면 아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게요. 특히 목사가 엮여 있는 이상 그의 배후에 있는 종문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만약 나의 목을 가져가 출세를 할 생각이라면 조금만 기다려주지 않겠소? 놈이 죽는 것, 그리고 놈이 속한 종문이 패망하는 것을 보고 난 뒤에 내 직접 나의 목을 그대에게 넘기도록 하겠소.”
평생을 품고 있던 원한을 모두 갚았기 때문일까?
상대는 당장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전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단지 흥미로운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알아보려고 온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도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고 말이죠. 그러니 당신의 목은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설령 매염이 당신이 뒤에서 모든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둘 다 죽였으면 죽였지, 결코 당신의 원수를 살려둘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착각에서 벗어나시지요.”
진양은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저는 조윤이라고 합니다. 귀하께선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대머리는 진양의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애초에 털보조차도 하찮게 여기는 매염이 아무 배경도 없고, 실력도 없는 대머리를 눈여겨볼 리 없다.
지금까지 그는 복수에 완전히 눈이 멀어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마침내 복수를 하며 한층 더 정신이 맑아지긴 했지만 오히려 머리가 더 멍해진 기분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가장 큰 목적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목적이 사라진 지금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양은 멍하게 서 있는 대머리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만 정신 차리세요. 벌써부터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면 어떡합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요.
혹시 모르죠. 매염이 갑자기 기분이 좋아서 당신의 원수를 살려줄지도 모르잖아요.”
대머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진양을 쳐다보았다.
그게 어딜 봐서 좋은 쪽이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최대한 원한을 품지 않는 게 좋은 겁니다. 설령 원한이 생겼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풀어야죠. 그 자리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골치 아프게 되는 겁니다.”
진양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이 대머리에게 흥미를 가졌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자신과 꽤 닮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진작 십방 대제를 죽일 수 있었다면 수백 년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며 개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십방 대제를 죽인다 하더라도 인생의 목표를 잃은 대머리처럼 허탈해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너무 질질 끄는 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설령 그토록 바라던 목표를 이룬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에 빠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던 대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아무래도 직접 봐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소.”
만약 누군가 자신의 손을 빌려 복수를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안 매염이 갑자기 다른 마음을 품기라도 한다면?
매염이 광기로 가득한 사람인 걸 감안해 본다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이상할 게 없다.
“…….”
진양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상대는 이미 주화입마의 가장자리까지 접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 정 확인해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되고요.”
“그나저나 조윤이라고 했소? 그런 이름이라면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다 알면서 괜히 찔러볼 것 없습니다. 제가 바로 재수 없게 죽었던 구곡종의 제자니까요.”
이번에는 대머리가 할 말을 잃었다.
상대의 입에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누가 봐도 상대의 신분이 훨씬 더 위험했다.
진양은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물론 아무리 제가 떠들어도 믿는 사람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겠죠. 조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두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 넓은 십방 신조에 조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더 있겠습니까?”
진양은 애초에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설령 누군가 자신에 대해 뒷조사를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조윤이라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무엇을 하려는 게요? 귀하도 복수를 하려는 것이오?”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순수하게 호기심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고요. 누군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이상 먼저 일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대머리는 그런 진양의 말을 단 한 마디도 믿을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또 구곡종이 무슨 짓을 했길래 조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정말로 당시 변고를 당했던 조윤이라면 이처럼 남 얘기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즉, 단순히 동명이인이 불과한 게 분명했다.
“난 묘배라고 하오.”
묘배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조윤이라는 자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상대가 미친놈이라고 해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신분 따위도 중요한 건 아니었다.
묘배는 다시 성지로 돌아왔다.
함께 돌아온 진양은 여전히 상황을 구경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서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털보 녀석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계율사로 끌려간 뒤로는 아예 소식이 끊어진 것이었다.
마치 더 이상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처럼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도 알 방법이 없었다.
털보는 매염에 대한 험담을 하다가 계율사의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붙잡혀갔다.
이렇게 된 이상 그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확률은 거의 무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진양이 했던 쓸데없는 말들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때문에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선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며칠을 수소문 해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식조차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묘배도 더 이상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털보가 속한 종문으로 향했다.
어쩌면 작은 단서라도 하나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천 리나 되는 길을 지나 마침내 종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