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562
1562화 이제야 좀 한가롭게 쉴 수 있겠군
진양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망자의 세계를 빠져나왔다.
생사간에 도착하고 보니 부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끝난 듯하군. 그럼 이제 날 환생시켜주시게.”
“그냥 살아있으면 안 됩니까?”
“아니,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진 않네. 언젠간 죽음을 맞이하는 진짜 인간이 되고 싶네.”
부군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요…….”
진양은 부군과 함께 망자의 세계로 넘어왔다.
부군이 망자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순간.
그의 생기가 완전히 꺼져버렸다.
그러나 부군의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그는 산 자의 세계에서는 무슨 짓을 당해도 결코 죽지 않았었다.
누군가는 이를 상당히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군에겐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시시각각 자신이 진양의 게임 캐릭터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사람은커녕 생명체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이다.
간절히 죽음을 찾아 헤매던 그는 이제야 비로소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망자의 세계라는 대세계의 힘을 빌어 마침내 죽음이라는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소멸된다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가능했다.
“나의 모든 기억을 깨끗하게 지워주시게.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네.”
“…….”
이런 요구를 해오는 손님은 부군이 처음이었다.
“절차에 따라 지금까지 당신의 일생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당신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안 남기면 안 되겠나?”
“그럼 절차는 왜 만들었겠습니까? 지키라고 만든 게 절차고 규칙이죠. 이건 당신이 사람이라는 흔적을 남기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모든 과정을 마친 뒤에는 깔끔하게 부군의 기억을 잘라냈다.
이렇게 잘라낸 것들은 진양의 소책자 안으로 스스로 흘러 들어갔고, 기억이 잘린 부군은 곧장 환생했다.
이것은 새롭게 얻게 된 능력이었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실수를 염려할 필요도 없었고, 귀찮은 일도 상당히 줄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볼일을 마친 진양은 환생부에 분신과 흑검을 남겨둔 채 지옥과도 같은 망자의 세계를 빠져나왔다.
마침내 대황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시골맥을 둘러보던 중에는 예전에 심어두었던 시괴를 발견했다.
어느새 꽤 거물급 인물이 된 그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여기까지 온 김에 너무 많이 먹어서 돼지가 되기 일보 직전인 음패수도 잡아 왔다.
이어서 호량을 통해 향계로 향하는 길.
갑자기 허공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손을 쑥 뻗어 잡아당기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누군가 끌려왔다.
“잠깐, 이거 상당히 낯이 익은데…….”
자세히 보니 예전에 함정에 빠뜨렸던 환해 일족의 사람이었다.
“이야,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흘러왔네. 운이 꽤 좋은 편인걸!”
진양은 그를 다시 대황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환사는 자신의 후손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그렇고 환사와 가까워진 것을 생각하여 과거의 일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향계는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영 신조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이후로 한층 더 안정된 모습이었다.
항계로 들어서기 무섭게 하늘 위로 일곱 빛깔의 구름이 몰려들었다.
이어서 뿌연 연기로 이루어진 띠가 하늘에서부터 지면으로 내려왔다.
연기는 지면에서 한곳으로 모여들며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했다.
백리칠이었다.
오랜만에 진양과 만나서 그런지 그녀는 곧바로 진양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저씨! 절 데리러 오신 거죠? 너무해요. 그동안 절 보러 오시지도 않고 말이에요.
지금까지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스승님께서 그러시길, 이 정도면 사의 경지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거라고 하셨답니다.”
진양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백리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동안 일이 바빠서 말이야. 그래도 일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널 보러 왔잖아. 자, 그럼 함께 돌아가 볼까?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지.”
“저, 정말요?”
백리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정말이지. 이제 할 일도 모두 다 끝났거든.”
대황은 이제 그 어떤 세계보다 안전한 곳이 되었다.
이젠 향계보다도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 대황이었다.
다시 백리칠을 데리고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다.
백리칠은 진양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 같은 존재.
그저 그녀가 평생 착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만 자라길 바랐다.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짐은 짊어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 어떠한 위험도 마주하지 않기를 바랐다.
천제든 뭐든 골치 아픈 건 진양 혼자 나서서 해결하면 된다.
굳이 그녀가 알 필요도 없었고, 불필요한 모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잠깐만요. 하나 확인할 게 있어요.”
백리칠은 무언가 떠오른 듯 진양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진양의 머리카락을 헤치며 무언가를 살폈다.
다행히 징표는 무사했다.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됐어요. 그럼 이제 출발해요. 아저씨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요.”
상당히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진양은 이때다 싶어서 말했다.
“그럼 이만 대황으로 돌아가자.
아, 그리고 보니 내가 혼인을 했다는 사실은 모르겠구나. 물론 일전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간단하게 혼례식만 올린 게 전부였지만.”
백리칠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진양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많이 위험한 일이었나요?”
“그런 건 아니야. 처음에는 오래 걸릴 줄 알고 단단히 각오를 했었는데, 예상외로 겨우 천 년 만에 모두 끝났어.”
“휴, 그럼 다행이네요.”
백리칠의 반응에 진양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혼례식에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따지거나 서운해하는 모습은 없었다.
향계를 떠나기 전.
진양은 백리칠과 함께 함향종에 들러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함향종 종주는 펄쩍 뛰며 날뛰었으나, 결국은 눈물을 흘리며 백리칠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백리칠이 완전히 향계를 떠난 것은 확인한 뒤…….
함향종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그리고 사당 내부.
종주는 눈물을 머금은 채 선조들의 위패에 절을 올렸다.
“스승님, 제가 대신 받아주었던 사매가 드디어 이곳을 떠났습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 아이는 향사의 후계자였잖아요. 진심으로 너무너무 아쉽습니다…….”
이어서 함향종 깊은 곳에 있는 어딘가.
소식을 들은 보리수나무 요괴는 긴 한숨과 함께 그동안 아껴두었던 을목정기 결정을 아낌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한 번에 무려 수천 개나 되는 결정을 뱉어낸 그는 함향종 사람을 불러 이것을 가져가 잔치에 쓰도록 했다.
애초에 이곳으로 오겠다고 한 게 아니었다.
안전하다느니, 도문의 분파를 세우겠다니.
전부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 *
한바탕 행차를 마친 진양은 다시 대황으로 돌아왔다.
가희는 진양을 만나자마자 어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진양, 갑자기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혹시 당신이 한 건가요?”
“맞아요. 저와 관련된 몇 가지 기억들을 지웠죠.
앞으로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꼭 지워야 할 내용이었어요. 비단 저와 소저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가희는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진양이 직접 결정한 일이라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이어서 사흘 뒤.
대영 신조는 공식적으로 대제가 진양과 혼례를 올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소식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미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진양은 미지근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십방계 어딘가에 있는 작은 성지 내부.
언예, 가복덕, 무언자, 그리고 장하는 함께 이곳으로 와서 외부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방이 대제의 혼인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이건 십방계 내에 퍼진 몇 안 되는 좋은 소식 중 하나였다.
이로써 대영 신조는 당분간은 더욱 많은 관용을 베풀게 될 것이다.
언예가 장하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황으로 돌아가서 직접 살펴보고 싶어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장하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
모두들 뭐라고 한마디를 하려고 했으나, 장하가 황급히 한마디를 보탰다.
“말 그대로 살펴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그를 살펴보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세요.”
“그래, 이제 슬슬 돌아갈 때도 됐지.”
* * *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진양은 마침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누워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뜨겁지 않은 햇볕을 쬐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꿈 세계에 있는 십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협.”
“아, 십이구나. 어때? 그쪽에선 지낼 만해?”
“물론이죠. 화신 상태로 십방계로 건너가는 것도 가능한걸요. 하지만 대황엔 갈 수가 없죠. 그래서 말인데요. 저도 환생하고 싶어요.”
“뭐? 너도?”
“환생하고 나면 지금처럼 스스로 인간으로 여기는 애매한 존재가 아닌 진짜 인간이 될 수 있잖아요.”
“무슨 소리야? 넌 인간이라니깐. 굳이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
“아니에요. 그래도 환생하고 싶어요. 절차는 대충 알고 있어요. 하지만 소협을 잊고 싶진 않습니다. 가능할까요?”
진양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한참 뒤.
“알겠어.”
때로는 예외도 있는 법.
무엇보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십이는 선초 부분은 놔둔 채 자신의 이성만 환생하기를 원했다.
선초는 진양에게 남겨두기로 했다.
그녀는 정보 쪽으로 특화된 선초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기에 점점 갈수록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가 그녀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십이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모든 상황이 잠잠해졌기 때문에 말을 꺼낼 용기가 생긴 건 아닐까?
진양은 망자의 세계로 넘어가 십이를 환생시켜주었다.
기억, 감정, 자아 등은 모두 남긴 채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십이를 보내고 나니 마음 한쪽 구석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이쯤 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소설가가 쓴 이야기라면 어땠을까?
아마 이쯤에서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다소 아쉬움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끝을 맺었고, 해야 할 일도 모두 마쳤다.
앞으로 가희와 금슬 좋은 부부로 지내며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다음부터는 다음 시대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양은 다음 시대의 거물급 인물이라는 배경이 될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너무 완벽한 것보다는 다소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니까.
이젠 진양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더 이상 진양이 직접 남은 문제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
다음 시대의 일은 다음 시대에 맡기면 될 일!
‘이제야 좀 한가롭게 쉴 수 있겠군.’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