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314
314화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로군
그렇게 진양은 왕이의 집에서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한 끼의 식사를 얻어먹게 되었다.
그리고 고혈도희는 그런 진양을 상당히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가 고혈도희의 사촌 오라버니라는 사실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반박한다고 한들 믿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식사와 뒷정리까지 모두 끝나자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일을 하러 나갔다.
고혈도희는 그제야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그녀는 대문 앞 나무 아래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진양에게 다가갔다.
“진양, 어서 돌아가. 가서 조용히 선장질이나 하라고. 여기 네가 원하는 건 없어. 네가 원하는 건 위층에 있다고. 이 마을을 나가서 강을 따라 똑바로 따라가도록 해. 만약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고. 네가 무슨 생각하는진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갑자기 변해버린 이유가 궁금한 거잖아?”
“응?”
의외였다.
스스로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을 줄이야.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시해 공법을 사용하고 난 뒤로는 경지도 많이 낮아졌고, 이젠 피곤해. 부도마교에선 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거든. 그런 삶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누군가 수련을 통해 득도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대황에 명성을 떨치던 절세의 강제도 결국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고. 지금처럼 안정적이고 나만 바라봐주는 남자와 함께 사는 게 좋아. 이러다 자식도 낳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거고…….”
그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하지만 여기서 의심을 거둘 진양이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한데.’
그러나 굳이 더 캐묻진 않았다.
“알았어. 그럼 앞으로 여기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게.”
그리곤 고혈도희의 손가락에 끼워진 청동 반지를 가리켰다.
“조용히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면 그것도 이젠 더 이상 필요 없겠지. 이만 내게 넘겨. 과거의 너와 완전히 작별하는 셈 치고 말이야.”
고혈도희는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청동 반지를 바라보았다.
꽤 오랫 동안 고민한 끝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빼냈다.
이어서 손을 가볍게 털자 빛이 일렁이며 그녀의 징표가 완전히 지워졌다.
“이건 열일곱 명이나 되는 경쟁자들, 나의 동문들을 베고 계승자가 되었을 때 내 스승님께서 주신 물건이야. 그래. 네 말이 맞아. 부도마교와 관련 있는 물건을 남겨둬봤자 좋을 건 없겠지. 가져가.”
진양은 다소 의외였다.
‘정말로 주다니. 놀랍군.’
반지를 받아들기 무섭게 습관적으로 습득 능력을 발동시켰다.
반지는 성공적으로 연화되었다.
잠시 후, 진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진짜로 준 거였어? 말도 안 돼!’
마지막 남아있던 의심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고혈도희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진양은 멍한 얼굴로 청동 반지를 든 채 그녀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강호를 떠돌아다녔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횡재라기보단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가자. 한시라도 빨리 이 괴상한 곳을 떠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진양은 곧바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떠나기로 결심한 이상 맛이 가버린 고혈도희 따위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마을을 나서려는 순간, 어깨에 괭이를 걸치고 있는 왕오가 나타나 진양을 붙잡았다.
“자네, 어디 가는 겐가?”
“아, 그냥 잠깐 산책 좀…….”
“그럼 산책은 나중에 하시게. 촌장님께서 자넬 찾으신다네.”
“촌장님이요? 왜요?”
“왕이네 집에 새로 온 새색시도 촌장님의 허락을 받고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된 거라네. 자네도 자네의 새색시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러 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촌장님을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지. 수상한 자들은 받지 않으신다곤 하셨지만, 내가 보기에 자네만큼 훌륭한 젊은이는 드물겠구만. 보아하니 책 좀 읽어본 것 같은 모습인데. 책, 얼마나 읽어봤나?”
“아, 꽤 읽어보긴 했습니다만…….”
“그럼 됐구만!”
왕오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책 많이 읽은 사람 치고 수상한 사람은 없는 법이지. 촌장님께서도 분명 자네가 이 마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하실 걸세. 허락만 떨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자네를 도와 집도 지어줄 것이고, 혼례식도 올려줄 것이야.”
진양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오의 손에서 느껴지는 힘은 상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저항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틀 동안 마주하며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능력을 사용해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는 즉 여기 있는 사람들이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뜻.
죽은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진양이 마을을 떠나려던 차에 밭에서 일하던 왕오가 갑자기 나타나 진양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진양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올 것이 왔군.’
그러나 왕오는 진양을 마을 안이 아닌 마을 밖에 있는 밭으로 데려갔다.
“촌장님, 외부에서 온 청년입니다. 책도 아주 많이 읽는 녀석이라고 하더군요.”
왕오가 멀리 보이는 촌장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맨발에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린 나이 든 농부가 밭 가장자리로 걸어 나왔다.
대륙 육십 정도 되어 보이는 새까만 피부를 가진 노인이었다.
손에 잔뜩 굳은살이 박인 것으로 보아 평생 농사를 지어온 사람인 듯했다.
“왕계현이라고 하네. 이 마을의 촌장이지.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진가 양이라고 합니다.”
진양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마을엔 고혈도희가 있었기 때문에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이제 막 마을을 떠나려던 참이었거든요. 근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건가요?”
“어허, 어째서 떠나려는 겐가?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겐가?”
노인은 껄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곳 말입니까…….”
진양은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맑고 깨끗한 영초와 영약의 향이 몸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며 몸을 맑게 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저와는 맞지 않는 곳 같아서요.”
“뭐,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원한다면 언제든 돌아오시게. 잠시 쉬어가는 것도 환영일세.”
노인은 멀리 산 중턱에 보이는 약초밭을 가리켰다.
“가기 전에 약초라도 조금 뽑아가시게나. 우린 마을을 방문하는 외부인들을 배웅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선물을 조금 나눠준다네. 사양하지 말고 원하는 만큼 뽑아가시게.”
“괜찮습니다. 이미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괜찮대도. 이전에 왕이네 새 며느리와 함께 왔던 사람들도 전부 원하는 만큼 뽑아갔다네. 저 밭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곳이긴 하지만 우린 아는 게 없어서 말일세. 이전에 왔었던 그 장님 청년이 말하길 무슨 ‘명신과’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명신과요?”
진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신과는 독의 기운이 가득한 늪지대에 자라는 열매로 마음을 맑게 해 주고 영혼을 보호해 주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
영혼에 도움이 되는 몇 안 되는 영약 중 한 가지로 한때는 남만의 특산품이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명신과는 단약으로 제련할 필요 없이 곧바로 섭취가 가능했다.
수천 년 전부터 점점 모습을 감추다 지금은 거의 멸종한 것이 다름없는 귀한 물건이 이곳에는 널려있다니!
“그,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뒤, 촌장이 말한 밭에 도착했다.
과연, 그곳에는 수십 그루나 되는 명신과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무에는 보랏빛이 감도는 열매가 달려있었다.
“마음껏 가져가시게. 하나를 따고 나면 또 하나 더 심으면 되니 말이야.”
진양은 명신과 나무를 유심히 살폈다.
딱히 이상하거나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나무에선 은은한 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그 향을 맡는 순간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물을 앞에 두고 사양한다면 그것 또한 예의가 아니겠지.’
하지만 돌다리는 두들겨보고 건너야 하는 법.
“촌장님,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진양이 촌장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촌장이 ‘이게 뭔가?’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저희 고향만의 인사법입니다. 특히 연장자에게 선물을 받거나 은혜를 입었을 때 이런 식으로 손을 잡고 흔들어 감사 인사를 하게 된답니다.”
진양은 오른손을 내민 채 웃는 얼굴로 왕계현을 바라보았다.
왕계현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갑자기 난처한 웃음과 함께 손을 다시 거두었다.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구만. 얼마 전에 약초를 채집하다가 중독되어 독창(毒瘡)이 생겼지 뭔가.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독창이라…….”
진양은 노인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장난하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끗하던 손에 갑자기 독창이 생긴다고?’
그러나 진양은 태연한 척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왼손으로 하시죠! 왼손도 무방합니다.”
진양은 오른손을 거두고 왼손을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왼손에도 독창이 있다네. 왼손에 먼저 중독이 되고 그다음 오른손에도 중독이 된 거라 말일세.”
이렇게 된 이상 상대와의 악수는 물 건너간 듯했다.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마을엔 이상한 점 투성이었다.
고혈도희는 무려 영태 수도사다.
영태 수도사의 손바닥에 정면으로 맞고도 멀쩡히 살아난 것만 해도 대단한데,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멀쩡한 모습이라니.
한낱 시골 농부가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진양, 사양하지 말고 가져가시게나. 여기 말고도 또 다른 약초도 있으니 원하는 만큼 가져가시게.”
진양은 고개를 끄덕인 뒤 명신과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겉보기엔 크게 이상할 것도, 문제될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주머니에서 모종삽을 꺼내 명신과 나무에 툭- 하고 두드리자 채집 능력이 곧바로 발동되었다.
마음속으로 발동을 외치자 은은한 빛무리가 흘러나와 명신과 나무를 휘감았다.
빛이 잦아들며 작아진 명신과 나무가 진양의 손에 들려있었다.
진양은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 그곳에 명신과 나무를 챙겨 넣었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 계속해서 왕계현의 눈치를 살폈다.
진양이 채집 능력을 사용하는 걸 보고 다소 놀란 눈치긴 했으나 내색하진 않는 모습이었다.
‘뭐, 이게 영약인 것만 확실하면 그만이지.’
한 그루만 챙긴 진양은 더 이상 미련 없이 밭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