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386
386화 이래서 아직도 오락가락했구나
이번에는 지난번에 만났던 사람 좋은 흑여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진양은 가진 않았지만, 당시 노인은 추천서를 써주며 진양에게 오행산으로 가라고 했었다.
모든 것을 마친 진양은 신우 일행과 함께 무덤가를 빠져나왔다.
함께 뒤따르던 네 명의 귀신들도 각자 무덤 입구로 돌아가 그곳을 지키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신우가 조용히 물었다.
“자네, 무함경에 이미 입문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진양은 숨길 것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진양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수련을 멈추는 게 좋지 않을지 한참 고민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이곳은 무함경의 전승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무함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평생 흑여인들을 안 볼 것도 아닌데, 언젠간 들키게 되어있는 법.
괜히 숨겼다가 의심을 사는 것보단 차라리 시원하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훨씬 나았다.
추궁한다면 흑여 선배의 핑계를 대며 적당히 둘러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막상 와보니 아무도 신경 쓰거나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신우 역시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듯, 외부인이 무함경을 함부로 익혔다는 사실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앞으로 시간 될 때마다 들리시게나.”
말을 마친 신우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진양은 멍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이건 날 자기네 사람들로 받아들여 준다는 뜻인가?’
진양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얼굴에 철판을 깔고 흑여 장로들을 찾아가 수련에 도움이 되는 정보나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나 장로들은 조금도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진양이 묻는 건 무엇이든 대답해 주었고, 수많은 주의사항까지 알려주며 적지 않은 가르침을 주었다.
여족의 수행 방법은 정통적인 수행 방법과는 개념부터가 달랐다.
때문에, 직접적인 가르침은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진양은 고정적인 한 가지 수행 방법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기에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쉽게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에 장로들은 크게 놀라며 그를 ‘여족 공법의 천재’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진양은 이쯤 되어서야 어째서 신우를 포함한 그 누구도 진양에게 무함경에 대해 묻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두들 흑여 선조에게 남아있던 미세한 이성이 진양에게 무함경을 전수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별다른 불만이 없는 듯하니 진양은 한층 더 당당해진 느낌이었다.
‘호감도를 쌓아놓길 잘했군. 역시, 누구든 친해지면 도움이 되는 법이라니깐.’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진양은 흑여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마을을 떠나는 진양은 적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되었다.
우선 손바닥만 한 사람 형상의 나무 조각.
이것은 여족 고유의 체신신상(替身神像)으로, 소유자를 대신하여 한 번 죽어주는 물건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기괴한 기운이 느껴지는 흑목호부(黑木護符)였다.
이것은 흑여의 신물로 흑여 내에서도 성과 이름 모두를 가질 자격을 갖춘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했다.
진양은 산길을 걸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제 슬슬 종문에 한 번 들려봐야겠지?’
원래 목적이었던 무함경도 손에 넣었으니 한 번쯤은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다 나중에 종문에 새로운 거점이 생긴 것도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진양은 곧바로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종문에 다녀오고 나면 마침 유령호 경매가 열릴 시기였다.
간만에 수하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었다.
‘이 녀석들. 나 없이 잘 지내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너무 잘 지내서 살이 뒤룩뒤룩 찐 건 아니겠지?’
손목에 감겨있는 음패수를 보고 있자니 나귀 생각이 났다.
말도 잘 듣고, 웃기도 잘 웃고, 주인도 잘 따르고, 달리기도 잘하고.
무엇보다 용감한 녀석이었다.
사람을 보고도 잔뜩 쫄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다.
심지어 흑여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음패수는 이런 계속해서 이런 상태였다.
진양은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겁쟁이를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차라리 토막 내서 탕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하루 정도를 걷자 큰 도시가 나타났다.
진양은 그곳에 있는 도문 거점에 들려 남만 월보(月報)를 살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살펴본 진양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부도마교 녀석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쟁녕일맥의 상징인 쟁녕은 도망쳐버렸고, 월치 일맥의 월치는 제이검군에게 썰려버렸다.
거기에 윤전사의 강자들은 여전히 부도마교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상황.
마불일맥의 맥주는 그들이 그저 무력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회가 생겼다 싶으니 죽자고 달려들어 마불일맥의 맥주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불골금신을 내놓지 않는다면 곧바로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한편, 황천마종과 유명성종은 서로의 기싸움을 이어나가면서도 부도마교의 발목을 붙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만 마도를 대표하는 삼대 세력 전부가 심각한 혼란 속으로 엮여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세력들은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만에 있는 종문들 중에 마도 삼대 세력을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 비슷한 실력을 지닌 문파들 뿐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암암리에 움직이며 마도 문파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이간질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뒤에 앉아 벌어진 난리를 구경했다.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적당히 구슬려주면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달려들어 싸우기 시작하니 말이다.
소식을 읽다 보니 최양평의 소식도 들을 수가 있었다.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진양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거지?’
최양평은 최근 적지 않은 사람들과 싸움까지 벌였다.
그중에는 유명성종과 황천마종의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다 상처까지 입은 듯했다.
한 번은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함정에 빠졌는데, 제이검군이 나타나 그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제이검군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가 언제부터 최양평과 이렇게 친했단 말인가?
진양은 고민에 빠졌다.
최양평을 도와야 할지, 아니면 말아야 할지.
진양의 시선이 반지로 향했다.
황천마종과 유명성종이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고 하는 물건, 황천보책은 반지 안에 고이 잠들어있었다.
이제 적당히 소문을 퍼뜨리고 다음 경매가 다다음 경매에 황천보책을 팔아버리면 될 것이었다.
신용도가 만점에 가까운 제삼자의 입장이었기에 소문을 퍼뜨린다 해도 대부분 진양의 말을 믿을 것이었다.
물론 진양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겠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쑥 진양을 찾아와 귀찮게 구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적어도 최양평을 쫓는 사람은 크게 줄어들 것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 이득도 볼 수 없는데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미치광이를 건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진양이 선택의 기로 앞에 서게 된 것만은 확실했다.
고민하던 진양은 직접 가보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양은 정보에 적힌 대로 남만 중부로 곧장 이동했다.
도착하고 보니 전체적으로 매우 경직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모든 성지의 경비가 강화되었고, 심지어 개중에는 몸수색을 하는 성지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성지에 소속된 세력은 직접 사람을 보내 그곳을 지키게 했다.
동부, 그리고 남부와 가까운 곳일수록 혼란은 더욱 심해져 갔고, 덩치 큰 고래들 싸움에 새우의 등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건 최근 들어 물가(物價)가 단숨에 배로 뛰었다는 점이다.
특히 마도 삼대 세력에 생산하는 물건들은 공급이 거의 전무하게 되어버렸고, 일부 전략 물자 역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진양은 수소문 끝에 삼 일 전에 최양평이 근처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진양은 마지막으로 최양평이 목격되었다고 알려진 곳으로 향했다.
장기(瘴氣)가 짙게 깔린 산맥 너머로 누군가 싸움을 벌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진양은 전투 흔적을 따라 하루 정도를 걸었다.
그때, 음패수가 기겁을 하며 소매 안으로 몸을 움츠렸다.
진양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숲속에 짙게 깔린 장기가 요동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의 형상이 드러났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산을 뛰어넘어 진양의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양평.
그토록 찾아 헤매던 최양평이었던 것이다.
그의 왼팔은 사라지고 없었고, 얼굴은 이전보다 수십 년은 더 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가슴에는 커다란 손바닥 자국과 함께 뼈가 함몰되어있었다.
물론 멍한 모습은 여전했다.
“스승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놀란 진양이 기겁하며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최양평은 씁쓸하게 웃으며 남은 오른팔로 진양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여전히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이 뼈가 박살 나는 듯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명철아, 네가 살아있을 줄 알았다. 그럼 그렇지. 네가 죽었을 리 없잖니. 그 녀석 자꾸 네가 죽었다고 저주하길래 이 스승이 아주 혼꾸멍을 내주었단다……. 쿨럭!”
다소 격분한 최양평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피를 토해냈다.
“스승님!”
다소 황당하기까지 했다.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황천마종의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단 말인가?
“명철아, 이것 좀 보렴.”
최양평은 무언가 떠오른 듯 주머니를 뒤져 조심스럽게 조롱박을 꺼냈다.
그리고 진양의 손에 쥐여주었다.
“나의 기특한 제자가 스승께 효도하려고 준 걸 어찌 아깝게 한 번에 다 마실 수 있겠느냐? 자, 절반은 네 몫으로 남겨두었으니 사양하지 말고 모두 마시도록 하거라.”
뚜껑을 열자 특별한 향기가 풍겨왔다.
진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건 분명 암야우담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분명했다.
‘도대체 왜 절반밖에 마시지 않은 거냐고……. 이래서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거구나.’
진양의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