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415
415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진양은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방금 얻은 광구의 내용물을 살펴보기로 했다.
하얀색 광구에는 예상대로 쓰레기, 아니, 정보가 들어있었다.
월치 맥주의 젊은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기억 속에 나오는 장소는 남만이 아니었다.
성벽이 구름과 같은 높이만큼 솟아있고, 영광(靈光)이 잔뜩 모인 곳이었다.
도시 안에는 높은 건물들이 숲처럼 즐비해 있었고, 화려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성 밖으로는 어렴풋이 영산(靈山)의 모습이 보였다.
영기가 광막처럼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고, 하늘에선 빛줄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월치 맥주의 기억 속에 나오는 장소는 누가 봐도 남만은 아니었다.
상당히 부유한 곳으로 보였으며, 인구도 상당히 많고, 물자도 풍족한 곳인 듯했다.
게다가 단순히 넘쳐흐르는 영기 하나만 보아도 이곳은 남만이 아니었다.
사실 남만이라는 이름은 북방의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남쪽의 오랑캐들이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약간의 폄하가 포함된 이름이었다.
물론 오늘날 불리는 남만이라는 이름 역시 다소 폄하가 포함되어있긴 하지만.
어쨌든 기억 속에 보이는 이곳은 누가 봐도 북방의 최강자, 대영 신조였다.
대영 신조에서만 볼 수 있는 기상(氣象)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치 맥주는 본래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기억 속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죽기 전의 모습보다 훨씬 더 앳된 모습이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건 앳된 모습의 제이검군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동작과 함께 제이검군의 손끝에서 검광이 번쩍였다.
검광은 월치 맥주의 오른쪽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잘린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오른쪽 뺨부터 귀까지 이어지는 긴 혈선이 생겨났다.
이어서 잘린 오른쪽 귀가 벌어지며 선혈이 뿜어져 나왔고 그의 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하급 관리의 복장을 한 남자 두 사람이 허겁지겁 나서서 제이검군을 말렸다.
상당히 쩔쩔매는 듯한 모습이었다.
월치 맥주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월치 맥주는 겁먹은 메추리 새끼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이어서 화면이 바뀌었고.
젊은 월치 맥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한 그는 성 밖으로 쫓겨나고 있었다.
그곳을 떠나기 전, 그는 성문을 뒤돌아보았다.
현판에 쓰여있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글씨가 보였다.
‘이도(離都, 도시 이름)’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고.
이번에는 젊은 월치 맥주가 부도마교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보았던 장면들.
월치 맥주의 인생 중 가장 깊게 남았던 기억 장면이 분명했다.
이것들을 보고 나자 어째서 그가 제이검군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집착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의 인생 중 가장 깊게 남았던 기억 장면인데 친구나 가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직 숙적뿐이었다.
이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 삶이란 말인가.
화면 속에 나타난 제이검군의 모습은 준수한 외모의 귀공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도시 한 가운데에서 사람을 벨 만큼 흉포한 성질머리를 가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뒤늦게 나타난 하급 관리들은 감히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몸으로 막아서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바로 제이검군의 집안이 상당히 높은 집안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도는 대영 신조의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대영 신조의 사대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단순히 부만 놓고 따진다면 남부에서 따라올 곳이 없었으며, 심지어 신조의 대제조차 경도(京都)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이도에서 보냈을 정도.
이런 엄청난 곳에서 이 정도의 세력을 갖춘 집안이라니.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집안이 확실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도는 대영 신조의 도시 중에서 남만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다.
가까운 만큼 소식도 상당히 활발하게 오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이도 출신의 ‘제이’라는 성을 가진 가문이나 인물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진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더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기에 대영 신조를 돌아보며 이곳저곳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지인 중에 대영 신조에서 꽤 권세 있는 집안의 사람이 있었던 것이었다.
방금 본 장면으로 보아 제이검군의 집안은 결코 단순히 돈만 많은 집안은 아닐 것이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유랑 생활을 한 것은 단순히 자신의 아내를 위해 그랬던 것이지, 집안이 몰락하거나 여타의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었다.
잘하면 제이검군의 덕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은 일단 잡생각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이어서 두 번째 광구를 살폈다.
상고 문자로 ‘풍도(酆都)’라고 쓰인 영패였다.
연화시킨 뒤 잠시 살펴보긴 했으나 특별한 건 없었기에 주머니 구석 적당한 곳에 던져넣었다.
* * *
황천마종.
과정이야 어쨌든 목적은 이루었으니, 진양은 다시 마종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산문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분명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였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황천 일맥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나자 어디가 이상한 건지 알 수가 있었다.
분명 황천 맥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모두가 들었을 터.
대부분의 제자들은 비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사실 이는 전부 연기였다.
심지어 몇몇 제자들은 대놓고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만 봐도 황천 맥주가 평소에 행실이 어땠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특히 아랫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말이다.
진양은 산문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바쁘게 산문 바깥쪽으로 뛰고 있는 노촉인과 마주쳤다.
그는 진양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멈춰서 예를 올렸다.
“진 사숙님을 뵙습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천 맥주께서 돌아가셨는데.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신 겁니까?”
노촉인은 상당히 의외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뭐라고 말을 하려던 진양은 순간 제이검군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얘기 중 황천 종주에 대해 들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노촉인은 황천 종주의 제자로 제일 후계자였다.
규칙대로라면 그가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진양이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지요. 보책에 관한 소식을 듣고 저도 같이 갔었으니까요. 이제 막 흑림해 외곽에 도착했는데 황천 맥주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이거 참…….”
그러나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더 했다.
“이해해 주시지요. 비록 우리 문파의 실력자가 하나 사라진 건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후련한 건 어쩔 수가 없어서…….”
다시 고개를 숙인 진양은 웃음기 없이 잔뜩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고요? 황천 맥주께서 적의 흉수에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어찌 이런 흉보가…….”
진양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에 노촉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진 사숙, 그럼 전 이만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얼른 가보세요.”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눴고, 진양은 곧장 최양평이 기다리고 있을 산으로 향했다.
노촉인은 힐끗 진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사실 그의 스승은 그에게 진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고 조용히 명령을 내렸었다.
그런데, 굳이 알아볼 게 뭐가 있겠는가?
진양의 이런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가 있는데 말이다.
한 번 은원을 지면 절대로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스승님께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신 모양이야.’
설령 최양평이 일을 벌인다고 해도 진양에게 시키진 않았을 것이었다.
황천 맥주는 예상 밖의 습격을 당했고, 뒤이어 두 맥주 역시 연달아 죽어버렸다.
설령 누군가 뒤에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고 해도 결코 최양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었다.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잡다한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진 진양은 기분이 좋았다.
한편, 최양평은 마당 한쪽에 놓인 탁자에 앉아 천천히 차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그는 진양을 발견하고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무사히 돌아왔구나. 와서 차나 한잔하려무나.”
수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높게 쌓인 낡은 종이와 전적 사이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고, 탕에 대해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다니!
상당히 의외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진양 혼자 위험한 곳에 내버려 두고 연구가 손에 잡힐 리 없지 않겠는가?
“제자 진양, 스승님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송구합니다.”
진양이 몸을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된 거다. 그런 얘기 말거라.”
최양평은 차를 한 잔 따라 진양의 앞에 내려놓았다.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잡념을 사라지게 해 주는 명심차다. 어서 와서 한잔하거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진양은 차를 천천히 불어서 마셨다.
놀랍게도 차를 마시고 나자 곧바로 효과가 돌았다.
마치 머릿속을 깨끗한 샘물로 청소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맑아지고 가벼워졌다.
잔을 내려놓은 진양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스승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진양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최양평이 손을 뻗어 그의 말을 막았다.
이어서 심오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많은 걸 알게 되는 건 좋은 일이란다. 게다가 너까지 곁에 있으니, 이 늙은이는 더는 바랄 게 없구나.
황천 맥주가 죽었다고 들었다. 게다가 함께 있던 세 명의 맥주 모두 죽었다고 하더구나. 누군가 이 일을 꾸몄다는 소문이 돌던데. 보책이 어디 있는지,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 나는 이런 건 아무렴 상관이 없구나.”
그의 말은 상당히 함축적이었으나, 진양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지난번 모조품으로 사람들을 속이겠다고 얘기했을 때부터 최양평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를 이런 꼴으로 만든 장해비전 보책이 아주 정교하게 만든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벌써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그만큼 견식과 함께 눈치도 늘어나는 법.
그를 이렇게 만든 장해비전 보책의 모조품은 유령호 경매에서 사 온 물건이었다.
그리고 진양은 유령호의 선장이었다.
경매를 책임지고 있는 건 유령 해적단이었다.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
누군가 애초부터 모조품을 만들어서 유령 해적단에 제공했거나, 아니면 진양이 직접 모조품을 만들어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