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65
00165 [종착역] 흰사슴 =========================================================================
벚꽃이 만개한 4월 중순의 밀로아. 봄 분위기가 만연하다.
대니얼은 지난 2월, 리사와 약혼을 했다.
재활치료를 마친 후, 리사와 옥신각신하며 가끔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왕왕 났었다. 대니얼의 네임밸류보다는 리사가 군무대신 가문의 차녀이기 때문에 난 기사였다.
대니얼은 늘 손을 저으며 ‘걔랑 나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했었다. 하지만 벤트리와 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부터 수상쩍더라니.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리건은 얼마 전 만난 그에게 ‘군무대신의 사위로 들어가 버렸으니 꽤나 고속 승진이 아니냐.’고 놀렸다. 대니얼이 팔짝 뛰었다. 대니얼은 아주 간사한 새끼다. 언제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더니 ‘난 트루러브거든! 내 평생의 사랑이거든!’ 하는 개소리를 한다. 양심도 없는 새끼. 리사에게 쳐맞아 세뇌라도 당했느냐 비웃자 쿵쾅대며 나갔다. 아니라고 말 안하는 게 아직도 리사가 손버릇을 못 고쳤나 싶어 저 새끼도 참 불쌍하지 싶었다. 뭐, 그들 사이의 일은 그들 사이의 일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 3월에는 군무대신이 로만뷔트 밤사교회를 완전히 파탄 내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리사가 로만뷔트 밤사교회에서 진탕 놀아난 걸 알게 된 후 벼르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고직자들의 자식들이 수두룩하게 연루된 로만뷔트 밤사교회에 손을 댈 거라고까진 생각지 못했다. 유력가의 영식들이 죄 체포되어 줄줄이 끌려가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한다. 리건은 로만뷔트 밤사교회를 떠난 지 꽤 오래 되었고, 그 후 다시 가고 싶다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 꼴을 구경하지 못한 것만큼은 아쉽다고 생각했다.
더 웃긴 건, 로만뷔트 밤사교회에 도시경비대가 들이닥친 것이 대니얼이 조잘거려서라고 와전이 되어 대니얼이 아주 욕을 처먹었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대니얼은 군무대신 연줄이 아니면 어디 발도 못 내밀 지경이 되었다. 리사를 잡아야지 제가 별 수 있겠어. 체포당한 섀디 제노스가 밤사교회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공식적으로 로만뷔트 밤사교회는 쫑이 났다. 남은 새끼들이 어디서 또 삼삼오오 모여 질펀하게 놀아날지는 모르겠지만 알 바인가.
아, 그리고 이달 초에는 작년쯤 세베루스의 왕비가 된 이사벨이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들의 왕비가 죽은 지 오래지 않아서의 임신이라 한동안 쉬쉬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왜 세베루스에서의 생활이 아주 좋다 말하나 했더니만, 꽤나 금슬이 괜찮았던 모양이지 싶었다. 아들이었다. 이사벨과 빌헬른이 낳은, 빌헬른의 첫 번째 왕자의 이름은 조금 특이했다. 아임나트라고 했다. 리건은 세베루스인들의 작명 실력이 참 거지같다고 생각했다.
또, 이달의 엘뷔니의 소식. 드디어 벤디트 파르네세가 약혼을 할 거라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스물아홉, 아주 늦은 나이다. 놀라운 건 의외로 한미한 백작 가문의 여자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벤디트가 여성들을 멀리하는 걸 조건 좋은 여자를 걸러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 아주 대단한 여자와 결혼할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모두가 의아해했다. 잉그리드는 ‘우리 오빠 그냥 결혼에 별로 생각이 없어서 안했을 걸요? 아빠가 허락한 건 좀 신기하긴 하네요.’하고 가볍게 답했다. 잉그리드의 말처럼, 세간에는 파르네세 공작이 이제 자식농사는 다 포기한 모양이다 하고 떠들며 웃음을 잣는 호사가들도 있다한다.
밀로아의 이야기를 하자면, 요헨은 얼마 전부터, 밀로아 성 밖에서 아스트리드와 단 둘이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스트리드를 싫어했던 클레아도 포기한 건지 ‘자식은 언제 볼 거니?’하고 은근히 등을 떠밀기도 했다. 잉그리드와 리건의 둘째 소식이 없은 지 꽤 되어 그런 듯했다.
잉그리드와 리건은 파블리아 저택에 머물고 있다. 올 해 있을 6월의 디어 축제 전에 밀로아에서의 대부분의 일을 마무리 하고 올라가자고 약속했다. 그 때문에 리건은 중요한 사업 문제를 6월 전에 매듭지어야 한다며 헤젠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헤젠은 처음으로 ‘나 사표낼 겁니다!’하고 협박해 밀로아 영주성을 뒤집었다. 리건이 잡지 않아서 잉그리드가 더 놀랐다. 정말 헤젠을 보내도 되냐 물었더니 ‘됐어, 알아서 기어들어올 거야.’하고 답하는 리건은 시큰둥했다. 그리고 지난 주, 헤젠은 일주일 만에 ‘아, 일 좀 주십쇼.’하고 돌아왔다. 리건은 거기다 대고 건들건들 ‘휴가는 잘 다녀왔냐?’ 답해 헤젠을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잉그리드가 헤젠을 달랬다. ‘헤젠 씨, 고생 많은 거 누가 모르겠어요…… 돌아와 주셔서 고마워요.’ 헤젠은 요즘들어 더 여성스러워진 잉그리드의 상냥함에 끔뻑 죽었다. 리건이 채찍이라면 잉그리드는 당근이다. 기분이 푹 풀어져 다시 일을 시작하다 문득 헤젠은 ‘이 인간들 찰떡궁합이었군?’하고 생각해버렸다.
요는, 헤젠이 사표타령을 할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건이 사업에만 열중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잉그리드와 여러 가지를 함께 했다.
피아노를 같이 치기도 하고, 가끔은 승마도 함께 했다. 몰랐는데 잉그리드는 승마를 할 때도 섹시했다. 저 여자 대체 못하는 게 뭐지? 대체 언제 안 예쁜 거지? 뒤태까지 완벽하다. 리건은 ‘흐음’ 잉그리드의 뒤태를 감상하며 말을 몰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낙마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목숨이 치명적일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했다.
또, 지난달부터 리건은 슬슬 책에도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활자와는 아주 관계가 없는 인생을 스무 해 넘도록 살아왔다는 걸 굳이 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그러나 잉그리드가 침실에 앉아 책을 보고 있을 때마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나 궁금해서 한 장, 두 장 들춰보다가 조금씩 읽게 되었다.
처음에 와이더스 와일더의 책을 보고 ‘대체 이게 뭐야.’했었던 것은 그 작가가 너무 뜻을 돌려 말하며 젠체 글을 써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작가의 책들 중에는 꽤 흥미로운 것이 여럿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두 사람이 함께 나들이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리건은 일찍이 근사하게 차려입고 소파에 앉아, 성의없는 손길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겨댔다.
고작 한 달 남짓의 독서에도 리건은 기고만장해졌다. 리건은 와이더스 와일더를 ‘말 똑바로 못하는 새끼’라고 평했다.
“얘는 말을 그냥 직구로 하면 손가락이 부러지나?”
노란 드레스를 입고, 푸른 끈으로 장식된 모자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허리 리본을 다시 정리하며 한껏 봄분위기를 내던 잉그리드가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잉그리드는 열정적인 문학도이다. 와이더스 와일더는 잉그리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그녀는 자신이 욕먹은 것처럼 발끈하며 ‘그렇지 않다.’고 쨍알쨍알 반박했다.
“원래 그런 문장들에서 함축된 뜻을 찾아내는 게 묘미라니까요?”
“늙은이같아. 내용도 무슨 지가 철학자라고. 이해가 되는 글이나 쳐쓰라고 하지. 리브롤타라 했나? 그 놈 책은 자극적인 게 재미있던데.”
“리건, 그 사람은 너무 상업적인 작가잖아요.”
“상업적인 게 왜 상업적이겠어, 응? 사람들이 더 많이 보니까 그런 거지. 응? 왜 많이 보겠어? 더 나으니까 많이 보겠지.”
“그렇게 나눌 수는 없어요, 그리고 와이더스는 고전풍으로 쓰는 작가라서 내용이 좀 어려운 것뿐이고! 그리고, 그렇게 별로라고 하면서 왜 와이더스 와일더 책을 보고 있는데요, 응? 응? 응?”
잉그리드가 조로로 달려와 리건의 손에 들린 책등을 톡 손가락으로 밀었다. 리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잉그리드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와이더스 와일더가 고전풍이라 그렇다……라는 부분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리건이 지금 와이더스 와일더의 책을 들고 있다는 의미에서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길을 걷는 법」
리건이 들고 있는 책명이다.
얼마 전, 밀로아의 철도 공사가 끝났다. 헤젠을 갈아 넣은 결과다. 끝. 드디어 끝.
오랫동안 진행해왔던 역이 완성되었다고 하니, 문득 메이슨이 떠올랐다. 재활치료소에서 나온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뭐 그 노친네는 어디서든 뻔뻔하게 잘 살 테니까 별로 걱정은 않고.
다만, 그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았다.
‘……조금 더 각하 당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심을 권하지요. 인생은 철도라 했습니다. 어느 역에 도달하든, 철도를 달리는 것은 결국 각하 본인이시니까요. 그 기차 안에 누구를 태우고 달릴지는 안전하고 단단한 기차가 철길 위에 세워진 후에야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구구절절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말의 요지는 ‘그냥 인생 똑바로 살라’는 거다. 하지만 희한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메이슨이 아주 철없던 시절의 그에게 말했던 것까지 상기하게 되었다.
‘와이더스 와일더의 소설 중에 ‘길을 걷는 법’이라는 작품이 있지요. 그 안에 그런 묘사가 있습니다. 철로는 인생이다.’
그게 지금 그가 성의없이 펄럭대던 책. 생각해보니 저도 다른 책에서 베껴와 읊어놓고 뭐 그렇게 잘난 척을 했나. 피식 비웃은 리건은 막 넘기던 책의 어느 글귀에 멈추었다.
‘우리의 기차가 멈추는 곳, 그곳은 목적지라 불리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의 요람이며 집이고 무덤이다.’
리건은 이상하게 눈길이 가서, 그 한 문장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잉그리드가 예쁜 꽃장식이 달린 모자로 바꿔 썼다. 리건이 벚꽃놀이를 가자고 한 후로 그녀는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요 근래 리건이 아주 바빠서, 함께 할 시간에 밤에도 많지 않았다.
“그보다 우선 나가야죠. 벌써 마차 기다리고 있어요. 정 읽고 싶으면 마차에서 읽어요. 가자, 가자, 응?”
잉그리드가 슬며시 리건의 옆구리를 손끝으로 찔렀다. ‘간지러워’ 하고 피식 웃은 리건이 찬찬히 책을 덮었다.
“벚꽃놀이, 좋지.”
*
무르익은 4월의 한복판, 바람은 따스했다. 잉그리드의 예쁘게 묶어 내린 백금발이 마차 창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졌다.
잉그리드는 두근거렸다. 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도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다. 그녀가 힐끔힐끔 리건을 돌아보지만, 리건은 정말로 마차에서까지 책을 보고 있다. 와이더스 와일더가 별로라면서도 꿋꿋이 잡고 있다. 좋은 걸 싫은 척 하는 데에 리건은 선수다.
멋들어지게 넘겨 올린 붉은 머리칼에 가슴이 콩닥콩닥 한다. 따분한 빛을 띠고도 활자 위를 훑는 푸른 눈동자는 그녀가 좋아하는 맑은 바닷빛이다.
그저께부터 잉그리드는 리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마땅히 기회를 잡지 못했다. 목 안쪽이 간질거리는 듯하다. 마차에서 도란도란 얘기라도 나누면 좋은데, 왜 하필 오늘 책을 본담?
평소와는 달리 조금 많이 들떠서, 잉그리드가 슬며시 그의 독서를 방해했다.
“벚꽃 나무는 저기 도나우 거리 외곽 도로 주위에도 많던데.”
“뭐, 거기도 나쁘지는 않지.”
“아, 리건, 저기 봐요. 어미 소랑 송아지 걸어가.”
송아지 한 마리가 느릿느릿 꼬리를 흔들며 풀을 뜯는 어미소에게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것이 차창밖으로 스쳐지났다. 잉그리드의 말에 리건은 흘깃 눈길을 주었다가, 피식 웃었다.
“잉가, 도착도 하기 전에 기운 다 빼겠어.”
“리건이 책만 보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꽃놀이를 하러 가는데 왜 이렇게 멀리 가요?”
잉그리드의 목소리에 못내 배는 서운함을 알아차린 리건이 책을 덮어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잉그리드를 당겨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마차의 덜컹대는 바퀴소리 사이로 울리는 듯했다.
무릎 위에 앉아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의 부인이다. 리건은 새삼스러운 기분에 잠겨 잉그리드의 보랏빛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잉가.”
“응?”
“그렇게 고개 갸우뚱 하지 말고, 귀여워서 여기서 너랑 자고 싶어지니까.”
가감 없이 드러낸 욕망에 잉그리드의 뺨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잉그리드가 그의 무릎 위에서 내려오기 위해 바동거리기 시작하자 리건은 낮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더욱 꽉 당겨 안았다.
“놀아달라며?”
“아, 나 오늘 꽃놀이 간다고 해서 정말 열심히 차려입고 왔단 말이에요. 손 하나 까딱하지 마요.”
“알았어, 알았어. 농담은 아니지만 안 할 게. 그저께도 피곤하다고 빼더니, 요즘 시들시들해졌나보지?”
“아냐, 그런 거.”
잉그리드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리건은 부드럽게 잉그리드의 가슴께에 뺨을 기댔다. 드디어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자꾸만 웃음이 난다. 남들이 보면 대체 무슨 짓거리냐 할 테지만, 뭐, 내가 하겠다는데.
잉그리드의 손이 잘 넘겨 올린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감촉이 편안하다. ‘나도 머리 망가진다.’ 중얼거렸지만 사실은 상관없었다. 머리 좀 망가지면 어떤가. 오늘은 좋은 날인데.
잉그리드에게 기대어 있던 리건의 푸른 눈동자가 저 먼 창밖을 향했다. 잉그리드가 보았다던 어미 소와 송아지는 이미 지나친 지 오래다. 푸른 시선 끝에 구불구불 이어진 까만 철로가 보인다. 그들이 가는 방향으로 철로는 길게 뻗어 있다.
“잉가, 오늘 내가 네게 줄 게 있거든.”
“오늘 줄 게 있다니요?”
리건이 나직이 말하며 잉그리드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잉그리드는 꽃놀이를 가자고 해놓고서는 희한하게 무게를 잡는 리건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리건이 가볍게 고개를 기울여 잉그리드의 불그스름한 입술에 입 맞추었다.
어쩐지 그의 마음이 더 심란하다. 나쁜 의미의 어수선함은 아니다.
그저, 처음 이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리게 되고, 아주 엉망이던 시절의 자신을 상기하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는지를 기억하고, 그 끝에서 이렇게 그의 무릎에 앉아 자신을 마주보아주는 이 여자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대한 생각이 두서없이 널려 있던 탓이다.
잉그리드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사랑하는지 사실 리건은 아직 잘 모른다. 그는 틈만 나면 잉그리드에게 ‘사랑한다.’말했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이 적은 잉그리드는 늘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행동으로 그에게 애정 비슷한 것을 보여주니까. 그냥 지금처럼 이렇게 함께 있기만 한다면 아쉬움마저 모른 체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꽃놀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선물은 뭐예요?”
관심이 많은 얼굴로 보드랍게 캐묻는다.
“선물은 아니고, 돌려주는 거지.”
“뭘요? 오늘 리건, 정말 이해 안가는 말만 하네.”
리건은 낮게 웃으며 잉그리드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겼다.
“이게 다, 와이더스 와일더 저 새끼 책을 봐서 그래.”
잉그리드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욕하지 마요!’하며 금세 뾰로통 입술을 내밀었다. 리건은 기꺼이 그 입술을 삼켜주었다. 저렇게 삐족삐족 내밀어대면, 잡아먹어달라는 말밖에 더 돼?
*
검은 철로가 굽이굽이 깔려 있다. 멀리서 얼추 보면 한 마리의 긴 뱀처럼 보였다. 잘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 철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을 때, 잉그리드는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를 알아차렸다. 얼마 전에 역이 완공되었다는 이야기는 잉그리드도 들었다. 시운행이 어제 끝이 나서, 오늘부터 정상운행을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역이 완공된 직후 헤젠이 리건에게 줄줄이 불만을 터뜨리며 ‘봉급인상’을 외치는 걸 들어서 잘 알았다.
저 멀리 벚꽃나무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벚꽃길 사이로 뻗어나가는 철도의 끝은 지평선 너머로 감추어졌다. 하늘하늘, 벚꽃잎이 마차의 창문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꽃놀이는 꽃놀이인데, 리건의 사업상 방문과 겸해진 꽃놀이였나보다.
“여기 벚꽃들은 전부 기찻길쪽으로만 있잖아요.”
그녀도 모르게 살짝 삐친 투가 나왔다. 리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가보면 알아.”
예전에는 하도 일을 안해서 헤젠이 속을 썩였다는데, 리건이 요즘은 너무 열심히 해서 섭섭하다. 이런 거에 섭섭하면 안 되는데도 섭섭하다. 밤에도 그녀가 잠든 후에야 돌아오고, 아침에는 자고 있어 얘기할 시간이 없고. 리건이 지금 이렇게 바쁜 것이 다 6월의 디어 축제 전에 밀로아에서의 일들을 일단락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실망감이 들 때였다.
잉그리드의 보랏빛 눈동자 위로 새하얀 벽돌로 쌓아 올린 플랫폼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잉그리드는 소문으로만 들었다. 공사가 한창일 때 와본 적은 없었다.
헤젠이 예전에 불만을 터뜨릴 때 그런 말을 했다. ‘아니, 붉은 벽돌에서 갑자기 흰 벽돌로 바꾸시면서 이번에 예산에 크게 출혈이 있었는데, 거기다가 마감재까지 바꾸라고요?’ 뭐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걸 들으면서 리건이 또 변덕을 부렸구나 했었던 것이 기억난다.
하얀 벽돌이 반듯하게 쌓아 올려진 플랫폼 주위로 벚나무의 꽃잎이 흐늘흐늘 휘날렸다.
“리건, 우와. 너무 예쁘다. 이렇게 완성된 거예요?”
잉그리드도 밀로아 역의 완공을 기대했었다. 밀로아 역의 기차를 타면 마차를 타고 이틀이 더 걸리는 엘뷔니까지 걸리는 시간이 8시간으로 단축된다. 리건은 예전에 그랬었다. ‘밀로아 역이 완공되고 나서 기차 운행이 시작되면, 가끔 하녀들 데리고 엘뷔니에 다녀와도 돼.’
잉그리드가 엘뷔니에서 사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아 해준 말이었다.
잉그리드가 리건을 돌아보며 웃었다.
“기차는 언제 들어와요? 우리 엘뷔니 가요?”
“오늘은 꽃놀이 날이라니까.”
“치, 일하러 온 거면서.”
잉그리드가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며 툴툴거렸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술을 비비며 웃었다. 그리고 얼마간 더 달렸다. 멀리에서 보았을 때부터 하얀 섬처럼 아름답던 플랫폼이 가까워졌다. 꽃놀이에 대한 실망감도 잠시. 바람 한 점에 한 잎씩 꽃잎을 떨어뜨리는 벚나무 사이를 가로지른다. 꽃내음과 벽돌내음이 한데 어우러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역의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하얀 석판에 또렷한 검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잉그리드의 눈이 무심히 그 글귀를 지나치다가, 붙잡혔다. 마차가 달리는 방향을 향해, 잉그리드는 서서히 눈을 크게 키웠다.
마차 문이 열렸다. 잉그리드는 모자를 덮어 누르며 리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커다란 정면의 표지판에 향해 있었다. 철길과 이어진 하얀 벽돌 건물의 앞에, 그 아름다운 하얀 벽돌 건물만큼이나 깨끗한 표지판이 그녀를 마주보았다.
흰사슴 역[The whitedear Station]
멍하니 그 정성스러운 글자를 눈에 담았다. 벚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진다. 소리 없는 눈물이 맺혔다. 리건이 입술 끝을 당겨 웃으며 잉그리드의 뺨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이게 뭐예요.”
잉그리드는 북받치는 기분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꽉 당겨 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걸린 잉그리드의 눈가에 입 맞추며 리건이 놀리듯 속삭였다.
“울어? 응? 내 부인, 겨우 이런 거에 우는 건가?”
“겨우가…… 겨우가 아니잖아요, 이거, 밀로아는……”
역의 이름은 당연히 밀로아가 될 줄 알았다. 그것이 밀로아에도 좋은 일이었다. 리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여기 네 지참금으로 세운 거야.”
“아닌 거 다 알아요.”
“네가 나랑 결혼 안 해줬으면 몇 년은 더 걸렸을 걸. 그러니까 맞아.”
“아니야, 이건, 너무.”
“결혼 선물. 늦었지만.”
끝내 잉그리드는 울음을 터뜨렸다. 과분해요, 이건 나한테는 너무 과분해요. 구두를 신고도 키가 모자라 까치발을 들어 리건의 목에 팔을 감아 안겼다. 리건이 슬며시 허리를 숙여주자 겨우 키높이가 맞았다.
관리감독관이 멀리서 잉그리드를 발견하고 화색을 띠며 인사를 위해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리건의 목에 매달려 있었고, 리건은 슬쩍 눈짓으로 그들을 밀어냈다. 벚꽃잎보다 보드랍고, 햇살보다 따뜻한 백금발이 따스한 바람에 흔들거렸다.
생각보다 잉그리드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리건은 마음이 좋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굳이 그가 먼저 안지 않더라도 답싹 안겨 우는데. 잉그리드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행복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리건, 나 지금 너무 떨려서 눈물 나, 나…… 고마워요, 나를 사랑해줘서.”
오래 전의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랬던 여자가 이제는 자신의 사랑이 고맙다고 말하니, 이보다 행복할 수가 있을까.
“사랑해요.”
잉그리드의 머리칼 위로 떨어진 벚꽃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려던 리건의 손이 멈칫했다. 정정한다. 더 행복할 수 있었나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신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잉그리드가 그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우리…… 둥글이가 찾아왔어요. 브릭 선생님이, 나 다시 아이를 가졌대요.”
리건은 그 자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잉그리드를 놀라게 해주려고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정작은 잉그리드가 그를 더 놀라게 했다. 잉그리드가 부끄러운 듯 팔을 풀고 손수건으로 뺨을 톡톡 문질러 닦았다. 수줍게 열이 오른 뺨이 벚꽃처럼 연한 분홍빛으로 젖어들었다.
그들 사이로 팔랑 또 하나의 꽃잎이 떨어진다.
잉그리드는 리건의 반응을 기다리듯이 물끄러미 아름다운 보라색의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서야 조금 긴장한 기색이다. 리건은 그때까지도 굳어있었다.
“리건?”
리건이 떨리는 손을 들어 턱과 입술을 가렸다. 씨발, 울지 마. 이 새끼야, 울지 마. 그냥 애를 가졌다는 말이잖아. 기다렸던 애를 가졌다고. 하지만 그게 뭐라고, 이렇게 감동인 건가. 터놓고 말하면 그보다는 잉그리드가 더 아이를 바라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찡한 건데.
리건이 애써 눈을 깜빡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잉그리드가 그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다정한 미소를 그려냈다.
“리건, 있죠…… 나는 지금 당신 덕에 많이 행복한데.”
리건은 다시 정정했다. 더는 이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거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잉그리드는 위대한 여자였다. 매일을, 매순간을 보다 행복하게 해주는.
“…….당신도 나만큼 행복할까요?”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다.
흉하게 맨 목으로 고백했다.
“네가 있어주기만 하면 오늘보다 내일 더, 내일보다 모레가 더 행복할 거야.”
크게 눈을 뜨던 잉그리드가 별안간 작게 웃었다. 리건에게 그 웃음은 언제나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잉그리드가 ‘형제는 형제인가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리건은 뒷말은 제 입술로 삼켜버렸다.
흰사슴 역.
남자는 세상이 한 여자를 알아주길 바랐다. 한 남자의 일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위대한 여자를 알아주길 바랐다.
그 여자는 남자의 기적이었기 때문에.
*
꽃비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밀로아 령의 흰사슴 역 전역으로 부우우 우렁찬 경적 소리가 울렸다. 기차가 하얀 벽돌로 반듯이 쌓아 올린 플랫폼에 도착했다. 더 이상 갈 곳 없어 멈춰선 기차의 문이 열렸다. 남색의 작은 모자를 쓴 차장이 내려 호각을 분다. 승객들은 그 차장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차장은 환한 얼굴의, 지친 얼굴의, 다른 생각을 하는 듯이 눈을 내린, 혹은 동반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하차하는 승객들을 향해 팔 벌려 인사했다.
길고 길었던 기차의 여정을 함께 해주어 감사하다고.
모두가 원하는 목적지에 이르길 바라며,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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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제목관련/에필관련/외전관련/개인지관련/등을 정리해서 한번 더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