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64
00164 [스물한 번째 역]인정 =========================================================================
잉그리드는 정오가 지난 후에야 슬금슬금 방 밖으로 나섰다. 준비가 끝나고도 한참 있다 나왔다. 에드원과 엘자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던 데다, 혹시라도 에드원이 떠들고 다녔을까봐 한 시간이 넘게 이불 속에서 발만 파닥파닥 거리느라 시간을 전부 잡아먹은 탓이다.
떠날 준비를 다들 마쳤다는 이야기에 결국 크게 심호흡하고 나서니 하녀 엘자는 평소와 다름 없이 ‘다음 번에는 좀 더 오래 머물러주세요. 아가씨.’하며 평소의 작별때처럼 눈물만 글썽였다. 잉그리드도 갑자기 조금 슬퍼져서 엘자를 꽉 안아주었다. ‘고마워.’
밖에 나오니 이미 클레아는 파르네세 공작부인과 이미 작별사까지 나눈 후 마차에 탄 후였다. 요헨은 마차 바퀴를 점검하고, 꼼꼼하게 이곳저곳을 살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던 리건은 ‘저게 평민이랑 결혼하더니 평민 근성이 붙었다.’하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고 아스트리드라는 요헨의 부인이 싫은 건 아니었다. 아무 관심도 없으니까 싫을 리가.
“늦었네요, 정오 인사 드려요.”
잉그리드가 벤디트와 파르네세 공작부인에게 다소곳이 인사했다. 차마 제 가족들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잉그리드는 걸음걸이부터가 평소와는 달랐다. 언제 어느 때에도 주눅들 줄 모르던 여자가, 한 걸음 뗄 때마다 제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는 게 가여울 지경이었다.
리건은 목 안으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에드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 새끼가 나불거리지 않은 듯하니, 괜찮은 거다. 잉그리드가 슬며시 주위를 살피더니 ‘에드 오빠는요?’하고 물었다가 ‘모르지.’하는 벤디트의 대꾸에 반색했다. 잉그리드가 리건의 옆에 나란히 서자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
“보기는 좋구나.”
리건은 바짝 얼었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칭찬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아……’하며 잉그리드를 돌아보는데, 이미 잉그리드는 도도도 달려가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엄마, 받아줘서 고마워요.”
“받아주다니? 너랑 나는 아직 휴전이란다.”
“응, 저도 사랑해요.”
잉그리드가 능청스럽게 답하자 벤디트가 작게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
리건은 사이 좋게 웃는 파르네세 공작부인과 잉그리드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았다. 닮았다, 닮았다 했지만 저렇게 보니 정말 닮아서 잉그리드가 나중에 나이가 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건은 여전히 파르네세 공작부인에게는 자꾸 긴장이 되었다. 상상도 못했던 칭찬을 들은 후에도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왜 이런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강제 이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 조금 남아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느낌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잉그리드를 낳아, 저렇게 야무지고 사랑스럽게 길러준 여성이었다. 리건이 입술을 열었다.
“따님을 어떻게 키우신 건지 예전부터 한번 여쭙고 싶었습니다만.”
잉그리드를 고요한 보랏빛 눈동자로 응시하던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천천히 턱을 돌려 리건을 응시했다. 리건의 푸른 눈동자와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연륜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어느 허공에서 맞닿았다. 리건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그냥 보고 있으니 알겠군요. 달리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첫 아이를 잃었을 때,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잔인한 결단을 밀지 않았다면 그는 아픈 잉그리드에게 더 가혹한 짓을 했을 것이었다. 재활치료소로 들어갈 생각조차 않았을 터다. 어떻게 잉그리드를 두고서 떠나나. 인생에서 가장 썼던 시기의 제 정신 상태를 되짚어볼 필요도 없다. 그 스스로 잉그리드를 떠날 각오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만큼 밑바닥이었다.
잉그리드가 살짝 고개를 기울인 리건의 손을 슬며시 잡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약간 충혈된 눈으로 웃었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에스펜서 공도 다음에는 더 좋은 기분으로 만날 수 있겠군요. 안녕히 가시기를.”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마지막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치맛단을 살짝 들어 무릎을 굽혔다 펴는 것으로 에스펜서 공작인 리건에게 예우를 다해준 후 몸을 돌렸다.
“벤디트, 잘 배웅해드리렴.”
“예, 어머니.”
잉그리드가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꼴깍 삼켰다. 그러다가 벤디트에게 달려가 안겼다.
“오빠도 고마워, 에, 에드 오빠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벤디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요, 에스펜서 공작부인.”
얼마간 찡한 콧잔등에 입술만 당겨 물고 벤디트를 안고 있던 잉그리드가 한 걸음 떨어져 섰다. 잉그리드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무릎을 살짝만 구부렸다 펴며 아름답게 웃었다.
“다음에 뵈어요, 벤디트 경.”
그리고 리건의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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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방송]
이로써 ‘인정’, ‘인정’ 역이 끝났습니다.
다음 역은 종착지인 ‘흰사슴’, ‘흰사슴’ 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하차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