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66
00166 후기/공지/개인지/인사 =========================================================================
안녕하세요. 작가 흰울타리입니다.
작가가 작가라고 하니까 어색하다 느끼는 당신, 그래, 당신말이야. 투잡을 뛰고 있던 흰울타리가 기장 사표를 냈으니 작가로 돌아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는 걸 받아들이시기를.
사족 생략.
는 막장로판이 기본 취지였습니다.
연재는 2월 13일에 시작했지만 첫 장을 쓰기 시작한 건 2월 7일부터이니, 3월 31일 완결 기준 52일만에 끝났습니다. 52일의 시간동안 후원쿠폰 3400여 장이나 받은 건 제게도 기분 좋은 기록이 되었습니다. 안 줘도 된다고 했는데 청개구리들은 어디에나 있더군. 고맙습니다.
퇴고나 점검이나 생각을 할 새가 없이 홀린 듯 쓰고 올리고를 개판인 부분이 많습니다. 재미있다는 말 이상의 찬사는 과분한 작품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기어코 3월 31일에 완결을 내는 데에 혈안이 되었던 이유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덧글란에 내용 궁예도 그렇고, 작가 일상 코난도 많았다. 예, 이달부터 저는 본래의 생업으로 강제 귀환 당합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글 쓰는 사람들에게 가끔 주체 못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저는 그걸 우스갯소리처럼 뽕이라고 말합니다만 고상하게 말하면 영감이겠죠. 문제는 제가 뭔가 떠올랐을 때 그걸 당장 쓰지 못하면 몹시 산만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충 시작했을 때 잉뽕이 금방 죽을 줄 알았지.
질리면 미련 없이 접어야지 계약 유보하고, 후원쿠폰 거절하고, 처음에는 페이스를 조절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계속 쓰게 되고, 양심이 찔리기 시작하고 목숨은 닳아가고, 그러는 사이에 내용은 무르익어가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는 멈출 수가 없었고. 연중이 아니라면 완결인데. 4월 이후 본업 때문에 더뎌져 흐름이 끊기는 것도 싫네. 외전은 메인스토리 흐름과 상관없으니 본편만 완결을 내야겠군.
위 문단이 지난 52일 동안의 제 의식의 흐름입니다.
성인 버전도 시간만 있었다면 한 번에 완성했을 텐데, 상황이 열악해 전부 생략했습니다. 일반란 최강의 미자 방패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미자들, 이 언니가 많이 고마워.
예전에 한번, 욕쟁이 입걸레도 빨아 쓴다는 걸 보여주는 게 최종 스테이지라고 말했었습니다. 그 말 유효합니다. 다만 그게 외전일 뿐.
후일담 조아라 연재는 없습니다. 리건잉가커플의 2세가 레오르드인지 헤일리인지, 다른 조연들은 어떻게 사는지, 남은 궁금증은 개인지 출간본 및 언젠가 있을지 모를 전자책 출간에서나 뵙겠습니다.
개인지에 관하여 간단한 설명. 개인지 카페 신설했습니다.
주소는 http://cafe.naver.com/whitefence123 (화이트펜스123)
아래 덧글에도 달아둡니다.
개인지 입금기간 동안 저는 본업도 좀 끝내고 착착착 진행을 하는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또, 그게 아니라도 연재 때 내용이나 문장 살피지 못하고 써내려간 부분이 너무 많아서 다시 살펴보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고로 선입금 기간은 5월 말까지로 잡겠습니다. 표지 및 기타 사항도 카페 위주로 올라갑니다.
앞으로 조아라 연재란을 이용하는 건 아마, 선입금 마감 직전/ 배송 시작 / 전자책 출간 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지 않을까.
오늘 하루 정리해보니 씬 제외, 외전 제외, 연재 분량 110만자 정도입니다. 10만자 정도 더 쓰게 된다 가정하면 120만자 전후, 부득불 4권 예정입니다. 3권이 적당하다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내용이 길군요. 개인지를 국어사전처럼 낼 수는 없잖아.
흰사슴 개인지는 이기 때문에 개인지에 관한 정보는 에 공지 알립니다.
개인지는 일반 출간본보다 가격부담이 있습니다. 고심해서 결정해주십시오. 참고로 개인지의 희소성을 전략으로 북테크 하시는 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작품 자체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북테크 될 만한 글도 아니니 그냥 그런 생각하시는 분 있다면 접어둬, 접어둬. 재미있게 보고 소장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더 좋습니다.
관련해서 오랜만에 궁예노릇 한번 해보겠습니다. 미자분 중에 분명히 ‘작가님, 안녕하세요. 미자예요. 하지만 내년이면 성인인데 그냥 파시면 안돼요?’ 하고 물어보는 사람 나옵니다.
미리 답 드립니다. 안 돼. 너무 유해해. 미자인데 여기까지 보게 한 것도 미안해.
미자분들은 지금 성인이 아닌 게 아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미자일 때가 참 좋았다고 느낄 거예요. 그러니 힘내요. 아름답게 마무리 해본다. 그런 질문 답 안 드립니다.
궁예노릇 두 번째. 흰울타리가 예전에 전자책 관련 공지를 한 적이 있는데, 계속 물어보시는 걸 보면 이번에 또 나온다. 전자책 나오냐고요? 이 유해물을 내주는 출판사가 있다면 나올 예정입니다.
마지막 자문자답. 나중에 나올 이북이랑 지금 신청 받는 개인지랑 내용이 같을까요?
다를 예정입니다. 몇몇 출판사와 이미 논의는 해보았습니다만, 역시 좀, 욕설이라거나 선정성 부분에서 걸리네요. 이북보다는 개인지가 더 거칠게 날뛸 것이 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외전도 이북보다는 개인지 구매자들에게 메리트를 드릴 생각입니다. 위풍당당한 흰울타리의 차별. 왜냐하면 개인지 구매해주시는 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혹은 중간에라도, 혹은 완결 이후라도 함께 달려주고 정발본보다 부담이 크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도 소장본을 택해주신 분들이시니까요. 그 정도의 대우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동의하실 거라 믿습니다.
아, 물론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함께 달리고도 전자책으로만 접하실 수 있는 분들께는 양해의 말씀 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지막까지 읽으신 분들을 위한 당부의 말씀.
1. 제가 개과천선 글을 쓰기는 했습니다만 현실에서 저렇게 개과천선 되기는 많이 힘듭니다. 불가능하다 믿지는 않지만, 기왕이면 처음부터 여성분들은 좋은 남성분 만나시고 남성분들도 좋은 여성분 만나시길.
2. 작중에는 부득불 세계관 내에 피임기구나 피임약 등이 존재하지 않아 질외사정을 그들 식의 피임방법이라고 서술해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지식을 받아들이실까 염려가 되니까 확실히 말합니다. 콘돔 써요. 남편도 아니면서 콘돔 쓰면 느낌 안 난다는 쫑알대는 남자는 내다버리세요.
3. 마약쟁이 남주가 행쇼하게 된 소설이니 노파심에 남깁니다. 마약 인생 말아먹는 지름길입니다.
4. 술 먹고 사람을 패거나 욕을 하는 꼬장 캐릭터도 있습니다. SM커플도 나옵니다. 난잡하게 노는 장면도 있습니다. 쌍욕은 기본인 게 남자 주인공이었다는 것부터가 좀 문제가 큰 이야기입니다. 불륜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하게 서술이 되어 있습니다. 글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대개 좀 웃기게 표현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술 먹고 사람 때리시면 쇠고랑 찹니다. 술꼬장으로 욕하는 건 최악의 주사입니다. 난잡하게 노는 것은 사실 좋은 게 아닙니다. SM플레이는 개인의 취향이니 존중합니다. 불륜은 빡이 칩니다.
여성분 중에도 불륜을 저지르시는 분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남성의 불륜을 옹호하듯이 세계관 내에서 암묵적 허용을 했으므로 남성 기준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혹 남성 승객분이 있으시다면 교제 상대가 작중 시대의 여자가 아니라 현대인이라는 걸 유념하시길. 길게 설명할 거 없이 남자 주인공이 선택적 고자가 되기 전까지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덧글만 보셔도 알 겁니다.
지난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즐겁게 기장놀이를 했습니다.
덧글 달아주신 분들, 메일 응원 보내주신 분들, 쪽지 격려 보내주신 분들, 팬아트 주신 분들, 후원쿠폰 주신 분들 등등……. 덕분에 저도 이번 연초에 좋은 추억을 하나 만든 것 같습니다.
비록 흰울타리는 바람처럼 사라지지만, 언젠가 쓰고 싶은 게 생긴다면 다시 만나 뵐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봅니다. 다시 뵐 그 날까지 모두 건강하세요.
그동안 흰사슴호를 이용해주신 승객여러분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이제 다른 좋은 여행지 돌아다니면서 관광하고, 감동으로 울고 웃으시며 행복하시기를.
흰 사슴 잉그리드 외전
외딴 역
5년 후, 엘뷔니.
웨인만 가에서 발송된 초대장들 때문에 온 엘뷔니가 떠들썩했다. 초대장은 엘뷔니 시가지 동마르커스 거리 너머에 위치한 웨인만 가의 저택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릴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연회가 뭐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세간의 주목을 끈 이유는 있다. 바로 웨인만 가의 사위인 대니얼 베이런이 엘뷔니 재무부장 보좌관이 되어 여는 승진 축하연이기 때문이다. 그 젊은 사위가 그 연줄을 끼고 승진했다는 소문은 호사가들의 악담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러나 세상사 늘 그렇듯이 오히려 그 사실을 반기는 이도 분명 있었다.
베이지색의 연회용 예복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선 리건이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놈이 잘되면 나야 좋을 일이지.”
대니얼이 어디까지 재무부를 장악해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야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리건은 대니얼의 약점이라 할 만한 것들을 수백 가지는 더 알고 있다. 밀로아 영지 부흥에 필요한 국가적 지원을 최종 승인하는 재무부에 대니얼이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있다고? 그건 에스펜서 가의 축복이다.
신문이나 잡지사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웨인만 가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게 아니냐’며 염려 섞인 기사를 써발기지만 알 바인가.
“그렇죠, 대니얼 씨가 잘되었으니 당연히 우리도 축하해야죠. 그나저나 리건, 늦었어요. 단추가 비뚤어졌잖아요. 이리 와봐요.”
“아아.”
푸른 드레스를 차려입은 잉그리드가 그에게 다가와 가슴의 버튼들을 바로 매만졌다. 언제나처럼 예쁘지만 표정이 영 아니다. 잉그리드는 요 며칠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빤히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길도 주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하녀에게 부탁하라니까요.”
“그냥 하면 좀 어때.”
“하여간.”
“네가 이렇게 해주니까 더 좋은데.”
리건의 손이 단추에 집중하고 있는 잉그리드의 뺨을 쥐어 주물거렸다. 잉그리드가 ‘화장 지워져요’ 하며 질색하는 얼굴을 했지만 리건은 집요하게 잉그리드의 뺨과 입술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요즘 잉그리드가 자꾸만 거리를 두는 것 같아 불안했다.
“키스해서 그 화장까지 내가 다 먹어버리기 전에 얌전히 당하시지. 부인?”
“진짜 이럴래요? 우리 늦었다니까요.”
“기다리라고 해. 그거 대니 새끼 취미야.”
“웨인만 가에 가서도 그런 말투로 격의 없이 굴면 안 돼요. 멘데즈 씨는 아주 예의에 엄격한 분이신 거 알죠.”
“군인 출신이 그렇지. 거기 가면 아주 짜증 나는 녀석들을 많이 만날 거 같은데……. 그 전에 우리 섹스 한 번만 하고 갈까? 오늘 내 부인이 너무 예뻐서 이대로 나가기 싫은데.”
“리건, 좀.”
역시나 오늘도 잉그리드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깨끗하게 포기한 리건은 잉그리드의 잘 틀어 올린 머리칼에 눈길을 한 번 주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다 싶었다.
의상실 문 앞에 붉은 머리에 보라색 눈을 한 딸아이가 서 있었다. 털코트를 걸친 헤일리가 리건과 눈이 마주치고는 가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잉그리드도 헤일리를 알아차렸다.
“헤일리.”
“엄마아빠, 그게 뭐 하는 건데요?”
리건의 입매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잉그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리건의 가슴팍을 가볍게 때렸다. ‘당신, 진짜 말 좀.’ 대체 이걸 해명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해 머뭇거리는데, 잉그리드는 우아하게 턱을 들고 설명했다.
“좋은 거란다. 네가 신경 쓸 것 없어.”
아, 내 여자는 참 위기를 헤쳐나가는 모습도 도도하다.
리건이 외려 더 낯이 간지러운 기분이다. 잉그리드는 부끄러운 내색도 없었다. 헤일리는 눈치가 빨랐다.
아름다운 어머니는 아주 엄격하고 또렷한 잣대를 가지고 헤일리를 돌보았다. 대부인 헤젠도 ‘어린 애들이 다 그렇죠’ 하고 넘기는 일을 잉그리드는 그리 넘기지 않았다. 잘못을 하면 양팔을 들고 벌을 서거나, 회초리를 맞는 일도 있었다. 헤일리에게 만만한 것은 저만 보면 흐물흐물해지는 아버지인 리건이었다.
“아빠아, 나도 가면 안 돼요?”
“아니, 오늘은…….”
잉그리드는 리건이 헤일리에게 똑 부러지게 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리건은 이제 다섯 살 된 레오르드와 엘디스에게는 아주 무뚝뚝하고 냉정한 아버지였지만, 딸인 헤일리에게는 이도저도 못 하는 팔푼이가 되곤 했다.
“헤일리, 오늘 동생들과 함께 있어줘야지.”
“엘디스가 짜증 나게 해요.”
“그래도 너는 레오와 엘디스의 누나잖니? 동생들이 말을 안 들으면 혼을 내서라도 듣게 하는 법을 배워야지.”
가끔 리건은 잉그리드에게서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보여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지금처럼.
어쨌든, 잉그리드가 헤일리를 데려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명확했다. 오늘 있는 연회는 고관고직을 점하고 있는 귀족들이 대거 몰려들 일종의 전쟁터였다. 거래를 따내거나, 인맥을 만들거나, 발렌틴 내 정재계에서 필요한 정보들이 마구 떠돌 것이다. 그런 자리에 사교계 데뷔는 까마득하게 먼 여덟 살짜리 딸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빠……. 웅? 아빠아. 얌전히 있을게요.”
“헤일리. 오늘은…….”
“말 잘 들을게요, 응? 응? 아빠아, 응? 응? 응?”
헤일리가 재빠르게 리건의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한 하의를 붙잡고 칭얼거렸다. 턱을 세우고 그런 헤일리를 내려다보는 잉그리드의 보랏빛 눈동자에 따뜻함과 서늘함이 함께 어렸다.
“리건, 넘어가지 마요. 헤일리, 네 아버지의 옷차림을 망치고 있구나.”
잉그리드의 바늘도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철통봉쇄에 헤일리가 입술을 삐죽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헤젠이 상황을 들여다보기 위해 올라왔다. 똑똑똑. ‘들어갑니다?’ 헤젠은 고급품의 깃털이 달린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바깥 날씨가 추운 탓에 코끝이 살짝 불그스름했다.
헤젠이 헤일리에게 붙들려 있는 리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준비 멀었습니까. 밖에 있다가 얼어 죽겠습니다.”
“헤젠 삼촌, 술 마셨어요?”
“그럴 리가요. 헤일리. 왜요?”
“딸기코.”
조그만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콕콕 찌르는 시늉을 한다. 헤젠이 풀어진 얼굴로 피식피식 웃자 헤일리는 눈치 빠르게 헤젠의 코트자락을 쥐었다.
“헤젠 삼촌, 나도 데려가요. 응? 나도 데려가. 나 데려가라구!”
백금발의 다섯 살박이 쌍둥이들은 1층 응접실에서 요란을 떨고 있었다. 장남인 레오르드는 푸른 눈동자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쿠당탕탕 뛰어다니고 있었고, 차남인 엘디스는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지쳤는지 나무늘보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그들의 보모는 어질러진 응접실의 꽃병이나 액자 등을 다시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헨스은, 헨쓴!”
레오르드는 창문에 매달려 소리쳤다.
창 밖에서 이번 겨울의 정원 조경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헨슨이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었다. 엘디스는 그런 레오르드를 비웃었다.
“시끄러워.”
“야, 야, 엘, 이리 와봐. 저기…….”
엘디스도 장난꾸러기지만 그나마 비교를 하자면 엘디스는 차분한 편이었다. 레오르드는 아주 발랄하고 쾌활해 에스펜서 가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거의 대부분이 레오르드 때문에 벌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뜻이 좌절되어 축 어깨를 늘어뜨린 헤일리가 헤젠의 팔에 안겨 응접실로 들어왔다. 뛰다 뛰다 제 풀에 지쳐, 혀를 내밀고 개처럼 할딱거리던 레오르드가 눈을 반짝이며 헤젠에게 달려갔다.
“헤젠 삼촌이다!”
헤젠에게 안겨 있던 헤일리가 슬그머니 구둣발로 레오의 이마를 툭 걷어찼다.
“어디 여성의 치마 속을 보려고 하니?”
“아야야! 헤일리! 아프잖아!”
“건방지게, 응? 어디 이 누나한테 소리를 질러? 응?”
헤젠은 곤란한 표정으로 헤일리를 내려놓았다.
헤일리가 치맛자락을 탁탁 털더니 정수리를 감싼 레오르드와 소파에 누워 피식피식 비웃는 엘디스를 향해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눈알 안 돌려?”
리건은 아직까지 부정하고 있지만 헤일리는 여러모로 잉그리드보다는 리건을 더 빼닮았다. 나이가 먹을수록 보통 아닌 성격이 드러나는 건 물론이거니와, 말투까지도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았다. 잉그리드와 리건 앞에서만 순하게 구는 것도, 왕실 식구들 앞에서 순한 양이 되는 리건과 꼭 닮았다.
‘흐음.’
그 점에 대해서 얼마 전 잉그리드에게 슬며시 말을 꺼내보았지만 잉그리드는 귀엽지 않으냐며 웃을 뿐이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말괄량이었어요’ 하면서. 하지만 잉그리드는 말괄량이였을지언정, 리건은 개망나니였다. 그리고 헤일리는 리건을 더 닮……. 아니, 말이 씨가 된다.
‘큰일이군.’
헤젠은 주름이 생겨버린 코트를 부드럽게 당겨 펴며 헤일리에게 조언했다.
“헤일리, 그런 말버릇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어머, 이제 삼촌도 나한테 잔소리하는 거예요?”
“잔소리로만 듣지 말고.”
레오르드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혼내라! 혼내라!’ 헤일리가 도끼눈을 뜨며 레오르드를 노려보았을 때, 레오르드는 이미 엘디스가 널브러진 소파로 조로로 달려간 후였다.
그러다가 소파 옆에 세워두었던 장식품을 와장창창 넘어뜨렸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와 벽걸이 장식들을 어떻게든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던 보모가 황급히 달려왔다.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도련님들?”
“아야야야! 내 발가락!”
“응, 베스, 괜찮으니까 가서 정리나 마저 해.”
요란을 떠는 레오르드와 다르게 엘디스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며 책을 집어 들었다.
책 제목이 ‘정략혼의 비밀’이었다. 인문서적이 아닌 소설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데 제목이 조금 희한하여 눈길이 갔다. 저런 책을 읽게 둬도 되는 걸까. 아니, 다섯 살 아닌가. 읽고 이해는 하는 건가.
엘디스는 정말 충격적일 만큼 영민했다. 글자도 금방 뗀다 싶더니, 이젠 책을 읽기까지 한다. 세간에선 저런 아이를 천재라고 부른다. 성격까지 아이답지 않아 헤젠은 내심 염려가 되었다.
레오르드가 엘디스의 등에 올라타 흔들었다.
“야, 그거 그만 보고 나랑 놀자.”
“흔들지 마, 좀.”
“나랑 놀자니까.”
“누나 있잖아, 쟤랑 놀아.”
“나 너희랑 안 놀 건데?”
헤일리가 쏘아붙이자 엘디스는 성의 없는 손길로 책장을 넘기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이쪽은 두 명이고 너는 한 명이거든. 혼자 놀고 싶으면 혼자 놀든가. 안 말려…….”
헤일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듣는 헤젠이 헛웃음이 날 정도로 오만한 꼬맹이가 바로 엘디스였다. 잉그리드의 차분함에 리건의 싸가지를 겸비한 녀석.
ⓒ 2017 흰울타리 / 대원씨아이
“여, 가자.”
헤젠은 복도 저편에서 울리는 걸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게 아니라, 웨인만 가의 연회에 가기 위해 출발해야 했다. 이미 예정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리건과 잉그리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헤젠은 대강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헤일리, 참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요. 레오랑 엘디스도 누나 괴롭히지 말고. 별일 없으면 늦어도 밤에는 돌아올 테니까.”
“삼촌! 누나가 나 때렸어! 내가 언제 괴롭혔어!”
“예, 삼촌.”
레오르드와 엘디스가 차례로 답했다. 헤일리는 분한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헤젠에게 칭얼거렸다.
“헤젠 삼촌은 왜 맨날 나더러 참으래요?”
“헤일리는 레오와 엘디스보다 더……. 음, 그래. 어른이고.”
“정말 삼촌도 미워, 삼촌은 우리 아빠 사업을 도와주는 사람이잖아요. 왜 나한테 쓸데없이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 아빠가 그러라고 돈 주는 게 아닐 텐데?”
레오르드가 발끈해 ‘누나, 진짜 삼촌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 소리치고, 엘디스는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헤젠은 말을 잃었다. 리건을 닮았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하긴 하지만, 가끔 저렇게 말할 때는 리건의 여자아이 판을 보는 것 같았다. 사고방식이 똑같아서 사실 충격도 없었다. 리건한테 좀 당했어야지. 다만 걱정은 좀 된다.
‘나이도 어린 게 벌써부터…….’
어느 새 응접실에 도착한 잉그리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일리 에스펜서.”
“…….”
“사과드리렴.”
잉그리드는 무례함에는 용서가 없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리건은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말버릇을 고스란히 읊어낸 딸을 신기하단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음.’
솔직히 잉그리드를 더 닮았다고 믿지만, 가끔 저런 모습을 보면 과연 제 딸이다 싶어 자랑스럽다가도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헤일리가 움찔하며 슬그머니 헤젠의 바지자락을 쥐었다. 헤젠은 자그마한 손가락이 고물고물 그의 종아리를 꼬집는 걸 느끼고 웃었다.
“아, 부인, 괜찮습니다.”
“아뇨, 헤젠 씨, 괜찮지 않아요. 헤일리, 지난번에 뭐라 그랬지? 세 번만 더 무례하게 굴면 파르네세 가에서 널 데려갈 거라고.”
레오르드와 엘디스는 파르네세 쪽 친척들을 아주 좋아했지만 헤일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헤일리는 어릴 때부터 파르네세 공작부인을 무서워하는 편이었다. 그 점까지 리건과 꼭 같다고 요헨이 놀렸다가 리건에게 얻어맞은 적도 있다.
한 번은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헤일리는 어떻게 대답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다른 외삼촌들과 외할아버지가 아무리 잘해줘도 외할머니인 파르네세 공작부인만큼은 어려워서. 파르네세 공작저에 갈 때마다 헤일리는 일주일도 전부터 긴장해 밤잠을 설치곤 했다.
“아, 아빠가 날 안 보낼걸! 그렇죠, 아빠?”
화살이 제게 돌아오자 리건은 움찔했다. 비딱하게 벽에 기댄 채 슬그머니 잉그리드의 눈치를 살폈다. 잉그리드는 미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이를 셋을 낳고도 여전히 그의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뻐서, 아, 씨, 욕 나오게 예쁘다. 평소라면 헤일리 편을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요즘 잉그리드가 데면데면하게 구는 것도 그렇고. 리건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헤일리를 외면하기로 했다.
“아니.”
“아빠아?”
애초에 그는 아이를 교육시킨다는 개념이 희박한 자신을 알고 있다. 제 방식대로 키웠다간 잘못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잉그리드가 다 맞다고 일단 합리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말 잘 들어. 안 그러면 파르네세로 보내버릴 테니.”
헤일리는 결국 울먹울먹 눈물을 머금기 시작했다.
“잘, 잘못했어요.”
“헤젠 씨, 저나 리건 눈치 보지 말고 무례하게 굴면 따끔히 혼내셔도 돼요. 제게 혼이 나는 것보다 헤젠 씨에게 혼이 나는 게 더 나을 테니.”
잉그리드가 헤젠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오늘 부인이 기분이 영 안 좋으신가.’
헤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소보다 더 냉정한 것 같다. 레오르드는 울먹거리는 헤일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헤일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누나, 울지 마. 누나가 못되게 굴어서 어쩔 수 없는걸. 할머니 댁에 가면 내가 놀러갈게.’ ‘레오, 너 진짜 죽을래?’ 헤일리는 레오르드의 머리를 홱 밀치는가 싶더니 다시 와락 끌어안고 훌쩍였다. 아이들이란.
“이제 가죠.”
잉그리드가 몸을 돌릴 때였다. 엘디스가 훌쩍대는 헤일리를 흘기며 들으란 듯 크게 중얼거렸다.
“아, 우리 누나가 빨리 좋은 형아한테 시집갔으면 좋겠다.”
잉그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오르드는 제 누이를 퍽 아끼는데, 엘디스는 여간 냉정한 아이가 아니었다. 똑똑하기까지 해서 무서워하는 게 없다 보니 잉그리드로서도 간혹 대하기가 까다로웠다.
헤일리가 코를 닦으며 말했다.
“난 왕자님이랑 결혼할 거야!”
“응, 누나. 얼른 해, 완전 했으면 좋겠어.”
제 남동생이 ‘이 집에서 꺼져버렸으면’ 하는 말을 돌려 하는 것도 모르고 헤일리는 금세 볼을 붉혔다. 헤젠은 영악한 막내, 엘디스를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건 나중에 큰일을 해낼 놈이 분명하다.
생글거리던 엘디스는 잉그리드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다시 책을 보는 척을 했다. 레오르드가 헤일리를 잡고 흔들었다.
“누나, 우리 숨바꼭질하자!”
“아, 싫어, 싫다고! 달라붙지 좀 마!”
보모에게 몇 가지 당부를 남긴 잉그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늦었으니, 가요.”
리건도, 헤젠도 뒤따랐다. 역시 오늘 잉그리드의 심기가 불편한 듯하다. 남자들은 숨죽일 때다.
◈ ◈ ◈
일단은 명예직이지만 헤젠도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은 귀족이다. 당당히 웨인만 가의 초대장까지 받은 귀족. 그의 체면을 위해 출발은 각기 다른 마차로 했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연회가 이어지는 내내 별달리 부딪칠 일도 없을 것이다. 각자의 용건을 위해 움직이는 건 당연한 거니까.
헤젠은 인맥 확장을 위해, 숨은 인재 발굴을 위해였지만 리건은 이미 연이 있는 고위직들과의 친분을 다시 한 번 정리하는 정도.
넓은 연회장의 샹들리에가 눈 아프게 반짝였다. 그 아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인파들의 고상하거나 호탕한 웃음소리가 떠돌았다.
“잘됐네.”
“그래요, 베이런 백, 축하해요. 그렇게 열심히 하시더니 성과를 얻으셨네요.”
작년 즈음 대니얼은 백작으로 승작했다.
“아하하하하! 부인,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셔라. 반하겠어요. 아, 이건 제 부인한테는 비밀입니다.”
리건과 잉그리드의 축하사에 반질반질하게 차려입은 대니얼은 온 치아가 드러나라 크게 웃으며 말했다. 리건은 내심 조롱했다. 저 새끼가 한 거라곤 리사와 결혼해 출세의 욕망을 이글이글 불태운 것밖에 없지 않은가.
얼마 후, 리사가 다가와 그들에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했다. 중간에 리건과 눈이 마주치고는 피차간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들의 오만한 신경전이 잠깐 벌어졌지만 무사히 넘어갔다.
대니얼의 승진 축하연회이다 보니 그에게 쏠리는 관심이 지대했다. 관심병이 있는 대니얼은 그들의 호의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즐기며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
고상하게 앉아 엘뷔니 행정청장과, 같은 군권 계통의 고위직 인사인 로바움 후작과, 엘제스트라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는 군무대신 멘데즈 웨인만에게도 찾아가 간단히 인사했다.
‘당신의 딸이 아름답고, 당신의 사위가 참 괜찮은 사람이고, 발렌틴을 수호해 주시는 데에 참으로 감사한다.’ 뭐 그런, 진심은 1퍼센트도 섞이지 않은 인사치레였다.
헤젠은 이미 다른 인파 속에 섞여서 영업을 시도하고 있다. 저놈은 작위를 다나, 달기 전이나 똑같다.
‘흐음.’
리건은 시가 연기가 짙은 곳을 피해 섰다. 왕의 서자이자, 발렌틴 제일의 여자와 결혼했다 알려진 그는 유명인사다. 그런 만큼 그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이들만 해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온 지 30분도 되지 않아 이리 피곤한데, 어찌 버티나 싶다.
멘데즈 웨인만과의 인사가 끝나고 몇몇 이들과 안부를 주고받자마자 잉그리드가 말했다.
“리건, 일 보세요.”
“잉가.”
사실 내색은 않았지만 리건은 요즘 심기가 불편했다. 다름 아닌 잉그리드 때문이다.
“나는 저쪽에 있을게요.”
역시, 잉그리드는 부쩍 그를 귀찮아한다. 아닐 수도 있지만 리건은 그렇게 느꼈다. 딱히 서로 감정 상한 일도 없고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이런다. 결혼한 지 10년차. 그래서 그런가?
“나랑 같이 있지 않고?”
리건이 불퉁하게 중얼거리자 잉그리드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에게 입 맞출 뿐이었다. 리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며시 잉그리드의 엉덩이를 만졌다가 짝 소리가 나게 손등을 맞았다. 역시, 잉그리드가 저를 귀찮아하는 것이다.
◈ ◈ ◈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 청년 웨스턴은 자신의 차림이 후줄근하지는 않은지 걱정하느라 연회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가 가진 옷들 중 가장 고급스러운 것을 골라 입었는데, 이 연회에 참석한 이들과 비교해 보니 마부 수준에 불과했다.
‘하아.’
웨스턴 코벤. 스무 살. 그는 지난 달 시골에서 올라온 한미한 가문의 젊은 후계자였다. 코벤 가는 귀족이라 해봐야 재산도 많지 않고 인맥도 좁아서 근근이 명맥만 이어가는 정도다.
그가 이 화려한 웨인만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그의 가문과 웨인만 가문이 우연히 거래를 트게 되어서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차림만으로도 그의 수준을 재빠르게 가늠해 내는 이들로 꽉 찬 연회장에서 그는 홀대받았다. 여자들의 눈길은 그를 품평하는 듯했고, 어떤 여성 귀족은 ‘얼굴은 참 반듯한데……’ 하며 그를 위아래로 쭉 훑어보는 것으로 그를 대놓고 민망하게 했다. 남성 귀족은 ‘웨인만 가로부터 정말 초대장을 받았소?’ 하고 물어보며 그를 깔아뭉개기도 했다.
연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한 시간 만에 그는 자신이 있을 곳이 이곳이 아니란 걸 깨달아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한 시간이나 걸려서 깨달은 것이고.
‘힘드네.’
연회장 앞의 정원으로 나온 웨스턴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영지라고 하기에도 뭣한 그의 가문이 깃발을 박은 마을에서 살 때 그는 아주 잘생기고, 근사하다 칭찬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게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참 맥이 빠졌다.
엘뷔니는 시골의 여느 도시와 비교할 때 그 물이 달랐다. 달라도 아주.
일생의 사랑이 될 것이 분명한 여자를 발견한 건 그 때였다.
바닥을 보며 걷던 웨스턴은 길 한가운데에 누가 서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드레스자락이 보여 걸음을 멈추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웨스턴에게 밀쳐진 여자가 조금 놀란 것처럼 물러섰다.
“아.”
“아, 죄, 죄송합니다!”
이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인 빼고는 전부 다 그보다 높은 사람들이었다. 몸을 납작 낮추는 데에는 상대를 살피는 신경전조차 필요 없었다.
ⓒ 2017 흰울타리 / 대원씨아이
“아니에요.”
예쁜 목소리의 여자였다. 웨스턴이 슬며시 여자의 용모를 살폈다. 백금발에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두꺼운 코트 아래 늘어진 푸른 드레스의 하단 자수가 몹시 정교했다. 나이는 그와 엇비슷해 보였다. 웨스턴은 재차 사과했다.
“아, 제가 미처 보지 못해서.”
“괜찮습니다.”
잉그리드는 지나치게 당황한 청년을 향해 엷게 미소 지어주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 넋 놓고 서 있었던 그녀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잉그리드는 요즘 우울했다.
그녀의 슬하에는 벌써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아이 셋을 기른다는 것은 보모가 있다고 해도 신경 쓸 것이 몹시 많다는 소리다. 다른 생각 할 여력 없이 아이들을 기르는 데에만 노력과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리 바쁘게 시간을 지나보내고 잠시 숨을 돌리며 보니 장녀가 벌써 여덟 살이다.
리건과 헤어지는 꿈을 꾼 날, 잉그리드는 문득 잊었던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면 자신도 금세 나이가 들어버릴 터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계속해서 꽃처럼 피어나겠지만 이제 20대 후반에 이른 그녀는 곧 저물 터다. 리건은 갈수록 근사해지고 있지만 자신은 어떨까. 리건과 그녀가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남았을까.
잉그리드는 사랑의 영속성에 관하여는 회의적인 편이다.
리건은 놀라울 정도로 꾸준하게, 오래도록, 점점 더 극진히 그녀를 사랑해 주었지만 리건의 사랑이 클수록 잉그리드는 이런 고민에 빠지는 날이 잦아졌다.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이미 잊혀진 엘뷔니 디어였다. 이제 그녀는 온전히 리건만의 사슴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그와 자신 사이에 사랑이 아닌 추억과 정만 남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괜한 꿈 때문이라 생각하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여서 한동안 우울했다. 우울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서, 잠깐 바람을 쏘이러 정원에 걸음한 차였다. 연회 홀 안은 너무 복작거리고 아는 얼굴들이 많아 가식적인 미소를 그칠 수가 없어 피곤했다.
“아름다운 영애께서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십니다.”
잉그리드는 그녀도 모르게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영애’라니.
엘뷔니 내의 귀족 중 그녀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가만 보니 청년의 차림이 비교적 유행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말투에도 독특한 악센트가 섞여 있다.
잉그리드가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엘뷔니분이 아니시군요.”
청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다른 의도는 없어요. 억양이.”
“바셈에서 올라왔습니다. 이번에 웨인만 가문과 어찌 저찌 연을 트게 되어서…….”
“그렇군요.”
“저, 저는, 웨스턴 코벤이라고 합니다. 여…… 영애. 이런 말 많이 들으셨겠지만 정말 아름다우세요. 그런데 누구신지 혹시…….”
잉그리드는 어쩐지 횡설수설하는 웨스턴의 반응에 웃고 말았다. 엘뷔니 청년 영식들 중에 저런 자가 어디 흔하던가. 그러다 ‘영애’라는 말에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그 감상을 곱씹고 있으니, 청년이 어떻게 오해한 건지 재빠르게 물러나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귀한 분들의 면을 전부 익히지 못해서요.”
“아니에요. 그리 과하게 사과하시면 제 쪽이 더 민망해지네요. 칭찬이 기분이 좋아서 그랬어요. 사과하실 것 없어요.”
웨스턴의 눈에 잉그리드는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니 그보다 나이가 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눈도 마주치기 힘들었다. 눈앞의 여자는 그를 다른 여성 귀족들처럼 품평하거나 까탈스럽게 훑는 눈빛을 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오늘 만났던 그 어느 여성보다 귀해 보였다. 백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백금발? 보라색 눈?’
뭔가 생각날 듯 말 듯하다.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바로 생각 해내지는 못했다.
잉그리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먼저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면, 즐거운 연회 되시기를 바라요.”
퍼뜩 정신을 차린 웨스턴이 어디서 솟은 용기인지 모를 용기를 뱉어냈다.
“……저, 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 자태마저도 완벽했다.
“여, 영애! 에스코트해도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웨스턴은 제게 그런 용기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 ◈ ◈
리건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서 있었다. 잉그리드는 사교계의 유명 여성 귀족들과 몇 마디 말을 섞더니 밖으로 나가서 멍하니 서 있다.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지만 리건의 눈은 매처럼 잉그리드의 실루엣을 잡아채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리 리건의 신경이 난간 아래 정원에 집중된 와중에도 그를 쫓아 나온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짜증 나는 새끼들은 조잘조잘 잘도 떠든다. 이번에는 행정부처장의 차남인 론도 있었다. 론은 로만뷔트 밤사교회에서 매번 흐느적거리며 제 몸뚱이로 바닥을 쓸고 다니던 병신 중 한 명이다.
물론, 지금은 아주 말쑥한 차림으로 고상을 떨고 있어 웃기지도 않는다. 론도 그를 보며 비슷한 심경인 모양이다.
“오랜만에 보니 정말로 다른 사람 같은데. 잘 지낸 것 같네.”
“아아, 그러게. 넌 왜 잘 지낸 것 같냐.”
짜증 나게?를 생략한 리건의 말은 론의 안부인사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뉘앙스가 정반대였다. 론이 헛헛하게 웃었다.
“그걸로 되냐?”
“충분해.”
리건은 약한 포도주 잔을 든 채였다.
이제 포도주 한두 잔 정도는 마신다. 그러나 양주나 위스키, 브랜디 같은 독한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리건이 시가도, 술도 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귀족이 없으므로 론도 딱히 권하지 않았다. 그가 발롬 시가로 보이는 시가를 물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들었어? 섀디 제노스가 체포되었다던데.”
“그 새끼 드디어 붙잡혔나?”
“테리아까지 도망쳤었다더라. 보석금 토해 내려면 먹고 날랐던 거의 한 세 배는 지불해야 할걸.”
군무대신인 멘데즈 웨인만이 로만뷔트 밤사교회를 작살냈을 때, 섀디는 간 크게도 그동안 로만뷔트 밤사교회를 운영하는 데에 사용되던 자금을 들고 날랐다.
몇 년 동안 잘 숨어 산다 싶었는데 이번에 잡힌 모양이다.
“잘됐네.”
“너 섀디랑 친하지 않았냐?”
“친해 보였나?”
“우리 따돌리고 둘이 따로 술도 마시고 그런 걸로 기억하는데.”
친하기는? 앙숙이었다.
그놈과는 태생부터가 성격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섀디 제노스가 잉그리드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후부터 리건은 매일 그 새끼의 인생이 패망하기를 기도했다. 정말 패망해 버렸으니 신은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속이 다 시원하네.’
론은 취기에 힘입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주절거렸다.
“넌 오늘 대니얼 때문에 온 거겠지?”
“아아.”
“파르네세는 불참했잖아.”
멘데즈 웨인만은 파르네세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엘제스트라 공작가와 더 각별한 관계다. 그러므로 군무대신 멘데즈는 파르네세 공작과 엘제스트라 공작을 한 자리에 두어 연회를 망치느니, 차라리 엘제스트라 가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것이 더 낫다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리건이야 파르네세 가와 긴밀한 에스펜서이지만 대니얼의 오랜 친구이니 초대받은 것이고.
“신기하지 않냐, 대니얼 인생이 이렇게 펼 줄 누가 알았어.”
“그러게.”
취기가 오른 론이 떠들어대는 걸 무시하고 정원을 노려보는 리건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어떤 남자 때문이었다.
리건은 바닥에 눈을 처박고 걷던 남자가 잉그리드와 부딪치는 순간 그도 모르게 미간에 깊은 주름을 팼다.
‘눈깔도 똑바로 못 뜨고 다니는 병신 새끼가.’
다행히 잉그리드가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빌미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짜증이 나서 정원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을 하는 참이었다. 테라스 문이 열리더니 나이 든 한 남자가 그에게 곧장 다가왔다. 귀찮은 날파리 새끼가 또 꼬였다.
론이 먼저 인사했다.
“아, 조나스 백작각하.”
“론 씨가 여기 에스펜서 각하와 함께 계셨군요.”
리건은 조나스 백작이라는 낯설지만은 않은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조나스 백작은 엘뷔니의 상업 유통망에 큰 영향력이 있는 자였다. 딱히 그와 교분은 없지만 왕궁연회에서 본 적도 있고, 이름은 자주 들었다.
리건이 가볍게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조나스 백, 오랜만입니다.”
대충 인사만 끝내고 잉그리드에게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다.
조나스 백이 슬그머니 론에게 눈짓을 했다.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보였다. 이야기가 길어지려나 싶은 짜증에 리건이 핑계를 생각하는데, 눈치 없는 론은 그것도 모르고 마구 웃으며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뵈니 또 색다릅니다? 조나스 백께서는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10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이거, 너무 대놓고 띄워주면 민망하지 않습니까. 하하.”
리건은 대놓고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러면 두 분 이야기 나누시지요. 저는…….”
“아, 바쁘십니까?”
“약간은.”
“각하께 조언을 청하고 싶은 게 있어서 굳이 찾아뵈었습니다만.”
대충 떨쳐내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조나스 백작은 희끗한 콧수염을 매만지며 리건의 발길을 붙잡았다. 론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궁금한지 ‘자리를 피해드릴 테니 두 분 이야기 나누십시오’라거나 하는 예의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조나스 백작의 눈빛이 강렬해져도 ‘헤헤헤’ 웃으며 모르쇠를 일관하는 모양새가 퍽 등신 같았다.
하기야 예의를 아는 녀석이었다면 로만뷔트 밤사교회에서 그렇게 오만 데를 굴러다니며 민폐를 끼치고 다니지도 않았겠지.
리건이 애써 다정한 목소리를 가장해 대꾸했다.
“그러시다면 당연히 시간을 내야겠지요. 말씀하시죠.”
“다른 게 아니라.”
조나스 백작의 눈동자가 힐끔 리건이 들고 있는 잔에 향했다. 리건이 말했다.
“포도주입니다. 한 잔째고요.”
“아, 예.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제 아들의 약물 문제로 각하께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
리건은 한숨이 나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 눌렀다.
리건이 성공적으로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발렌틴의 수많은 귀족들이 알고 있다. 꽤 오래 전의 일이라 지금은 잘 모르는 이들이 있기는 해도, 어느 정도 잔뼈 굵은 엘뷔니 귀족들은 ‘리건 에스펜서가 한때 심각한 약물중독자였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조나스 백의 고민은 그것이었다. 요 근래 아들이 안 좋은 무리와 어울려 약물을 복용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말리려고 해도 듣지 않아서 강제로 갱생시설로 보낼까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게 옳은지 옳지 않은지 경험자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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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건으로서는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조나스 백이 아주 좆같았지만 내색은 않았다. 그의 신경은 현재 반쯤은 요즘 들어 조금 멀어진 것 같은 잉그리드에게 있었고, 나머지 반은 지금 정원에서 잉그리드를 종종거리며 따라붙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새끼에게 있다.
‘씨발, 저 새끼 대체 뭐야?’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요.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 혹 밖에서 봉변이라도 당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대화의 주제가 주제다 보니 눈치를 보던 론이 몇 걸음 물러나 못 들은 체했다. 론도 약물중독자이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도 그는 밤사교회가 망한 후에도 변함없이 그리 살고 있다.
“전문가를 불러 상담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보다는.”
“에스펜서 각하쯤 되시는 분께서 혹 제 아들 녀석을 한번 만나 타일러준다면…….”
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음에 드는 녀석이 한 마리도 없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리건은 저게 용건임을 직감하고 단칼에 거절했다.
“근래 바빠서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나스 백께 개인적인 경험담은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아……. 그렇게라도 해주신다면.”
“반년 중에 석 달을 매일 내장이 뽑혀라 토하고, 1분이 1년처럼 길고, 진통제는 안 먹히고,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는 골방에 처박혀서 눈물 좀 질질 짜고 나면 정신 차릴 겁니다. 술 생각만 해도 죽고 싶을 만큼 처먹여보는 것도 방법이겠군요. 아니면 한 방울 마실 때마다 작신작신 패서 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 만큼 바닥을 한 번 치게 두시든가.”
“…….”
“전문가를 구하는 데에 필요하다면 제가 필로본의 스토기아 경에게 언질 둘 테니, 한번 가서 상담이나 받아보십시오. 개인적으로 그쪽 인간들 안 좋아하지만, 조나스 백께서 그토록 염려하시는 것을 보니 특별히 도움을 드리고 싶군요.”
리건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혔다.
리건 에스펜서가 잉그리드 파르네세와 결혼한 후 사람 되었다는 이야기는 자자하지만, 그게 그가 친절한 젠틀맨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여전히 리건은 왕의 서자이자 에스펜서 공작이라는 이름 위에 앉아 오만했고 제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조나스 백작은 엘뷔니의 귀족답게 당황한 내색을 지우고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그래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론도 처음으로 듣는 리건의 신랄한 경험담에 좀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럼 이만.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파블리아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당분간은 엘뷔니에 머물 생각이니.”
리건은 종래에는 조나스 백작이나 론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코트의 매듭을 고쳐 당긴 리건이 마지막으로 정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실례하지요, 급한 일이 있어서.”
잉그리드가 청년에게 웃어주는 것이 보였다. 정수리까지 따끔거릴 만큼 큰 짜증과 불안이 밀려왔다.
◈ ◈ ◈
함께 산책해도 되겠느냐는 낯선 청년에게 잉그리드는 예의 바르게 거절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게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잉그리드는 조금 전 제게 던져진 낯선 청년의 말에 몹시 당황했다.
‘영애께 처, 처, 첫눈에 반했습니다!’
웨스턴 코벤이라는 생판 처음 보는, 젊다 못해 어린 남자였다.
아무리 많이 쳐줘봐야 20대 초반. 골격은 사내답지만 아직 얼굴에는 앳된 분위기가 가시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뜸 첫눈에 반했다며 에스코트를 하겠다고 말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결혼한 후, 모든 사람들이 ‘잉그리드는 에스펜서 공작부인’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녀를 대우했다. 철없는 청년 영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런 식의 저돌적인 고백은 몹시 오랜만이었다.
“저는 여러 가지로 아직 많이 미숙합니다. 제, 제가 영애처럼 고귀한 분에 비하면야 하찮은 사람인 걸 압니다.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세상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분은 처음이라, 지금 많이 용기 낸 겁니다. 영애의 눈에 제가 많이 모자라더라도 잠깐만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저, 저 조금 더 알아갈 수도 있고…….”
잉그리드는 가만히 당혹을 갈무리하며 웨스턴을 응시했다. 듣고 있으니, 당황보다도 저 순진한 청년이 염려가 되었다.
잉그리드는 청년의 고백을 조심스레 물렸다.
“죄송해요, 저는 영랑의 마음에 응하기 어려운 입장이군요.”
“아! 혹시, 야, 약혼자가 있으신 분께 제가 이런 무례를……!”
“아니……. 약혼자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단어에 잉그리드가 다시 웃고 말았다.
보통 약혼은 10대에 한다. 명망 높은 귀족의 딸 중 약혼을 20대를 넘겨 하는 일은 거의 드물다. 간혹 계속해서 혼처가 파토 나는 바람에 시간을 끌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보편적인 상식은 그렇다.
대체 저 상대는 자신을 몇 살쯤으로 보는 걸까. 그녀는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고, 리건과 결혼한 지 10년이나 되었다.
“저는 이미…….”
결혼한 여자다. 막 그 사실을 일러주려던 찰나였다. 웨스턴은 급하게 잉그리드의 말을 가로챘다.
“다, 다행입니다! 제가 아직 예법에 대해 잘 몰라서 혹시라도 실수한다면 속으로만 언짢아 마시고 알려주십시오.”
“아니, 저는…….”
“정말, 이것도 인연이라고 한다면…….”
웨스턴은 무례를 의식할 새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눈앞의 여자에게 이유 모를 격렬한 감정을 느꼈다. 저 연회장 안의 아름다운 여성 귀족들을 보면서도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마음이었다.
백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성의 보랏빛 눈동자가 그에게 눈웃음을 치는 순간, 그냥 흠뻑 사랑에 젖는 듯한 기분이었다.
운명이 이런 건 아닐까 이 여자를 이렇게 마주친 건 운명일지도 몰라.
아무래도 좀 심각해지는 듯하자 잉그리드도 보다 강경해질 필요를 느꼈다.
“그만두세요. 어려 보인다는 칭찬은 고맙지만 딱 그 정도로만 해주세요. 그 이상은 제 바깥사람이 언짢아할 거예요. 그리고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엘뷔니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발언은 삼가시는 게 좋아요.”
목소리까지 황홀했다. 적당히 고상하고, 적당히 우아하고, 적당히 냉소적인 것 같은 말투에마저 시골 청년 귀족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조금 전 여자가 한 말 중에 ‘바깥사람’이라는 아주 중요한 어떤 단어가 포함되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웨스턴은 자신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을 질책당한 데에 황망해 고개를 저었다.
“죄, 죄송합니다. 영애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자꾸만 저도 모르게. 영애의 아름다움이 저를 초라하게 느껴지게 하는…….”
“어이.”
웨스턴은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움찔 뒤돌았다. 목소리가 사납고 공격적이었다.
초식남과인 웨스턴은 상대의 적의에 예민한 편이었다. 게다가 이 엘뷔니의 모두가 그보다 상위귀족이니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아, 참…….’
잉그리드의 입술 사이로 난처한 웃음이 번졌다. 리건이 잔뜩 성질이 돋은 얼굴로 다가와 웨스턴의 뒤에 섰다. 서슬 퍼런 벽안이 웨스턴의 얼굴에 똑바로 박혔다.
“이 새끼는 뭐야, 응?”
리건의 입술 끝이 비딱하게 말려 올라갔다.
리건은 이런 상황이 아주 짜증이 났다. 에스펜서 공작부인이라 알려진 잉그리드에게 추파를 던지는 간이 부어터진 새끼가 아직도 있을 줄은 몰랐다라거나 하는 말은 둘째치고. 잉그리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보잘것없는 새끼들을 상대해 주는 게 성질을 돋운다.
잉그리드가 사교활동에 적극적인 편이라 어지간한 불만은 홀로 삭이는데, 오늘은 저 새끼가 도를 넘었다.
‘영애? 아름다움? 인연?’ 오는 길에 다 들었다.
“이 얼빠진 새끼는 뭔데 이 한복판에서 개소리를 하고 있어, 응?”
웨스턴은 첫눈에 반한 운명의 상대인 여성 앞에서의 모욕만큼은 참지 못할 만큼 혈기 넘치는 젊은 청년이었다.
웨스턴의 비극은 왕의 서자인 리건 에스펜서의 이름만 알고 그 얼굴을 몰랐다는 데 있다.
“길을 막은 건 죄송합니다만 초면에 무례하십니다.”
“초면에, 뭐? 무례? 지금 나한테 무례라고 말했나?”
“그러지 말아요, 그만두세요.”
잉그리드가 천천히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웨스턴은 잉그리드가 그가 아닌 상대 남자에게 더 가까이 기대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한 눈을 했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턱을 들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오면서 들으니, 미혼녀 행세하고 다니는 데에 재미가 붙은 모양이야, 응? 요망한 부인?”
잉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닌걸. 코벤 가의 영랑분이 착각을 한 걸 어떻게 해.”
“저놈 이름도 알아?”
“리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며 눈을 끔뻑거리던 웨스턴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리건’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들었다.
리건이라면 유명한 이름이었다. 리건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웨인만 가에 참석할 만큼의 영예로운 귀족은 리건 에스펜서 그 한 사람뿐이었다.
왕의 서자!
리건이 잉그리드의 허리를 안아 당기며 웨스턴을 향해 흉흉한 눈을 치켜떴다.
“어이, 모자라게 생긴 새끼. 너 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접근한 건가, 응?”
잉그리드는 리건의 심기가 평소보다 더 뒤틀려 있음을 깨닫고 조심스레 그의 목덜미에 속삭였다.
“진정해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쩌긴 어째. 저 새끼를 그냥…….”
“리건. 그렇게 말하는 거 싫어.”
멍청한 표정으로 저와 잉그리드를 바라보는 청년이 짜증이 나 뒷목이 저릴 지경이었지만 리건은 풀이 죽어 기세를 꺾었다.
“이렇게 또 사람 미치게 하지…….”
잉그리드는 그런 그에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껙.’
웨스턴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만약 눈앞의 남자가 그 유명한 왕의 서자라면, 이 여자는 ‘그 여자’였다. 잉그리드 에스펜서다.
세상에!
그가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저 어려 보이는 여자가, 바로 그 잉그리드 에스펜서였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백금발에 보랏빛 눈을 가진 발렌틴 최고의 미녀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왕왕 들어왔다. 그가 10대 초반일 때 즈음 구설수에 떠돌던 여자였다. 그보다 나이도 일고여덟 살은 훨씬 많은 여자. 그런데 저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이라니 상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내 안사람에게 추파를 던져대는 걸 보니, 목숨이 한 서너 개는 되나 본데……. 웨인만이 뒤를 잘 봐주나 보지? 아니면 그냥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응? 내가 요즘 신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씨발, 이러면 욕이 나와, 안 나와? 너 어느 가문이…….”
진정은 아주 잠시였다. 말을 잇는 동안 또 다시 성질이 나기 시작한 것처럼 고양되는 목소리에 잉그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거 아니니 화내지 마요, 응? 내가 혼자 있는 걸 보고 좀 적적해 보였는지 말을 붙여준 거예요.”
“그러게 왜 혼자 있어? 나랑 같이 있자니까.”
“그냥……. 좀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당장이라도 웨스턴을 잡아 족칠 기세로 노려보던 리건의 시선이 맥없는 잉그리드에게 닿았다.
“대체 무슨 생각?”
“그냥.”
잉그리드가 이럴 때마다 리건은 불안했다. 짜증 나게도 잉그리드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눈이 뒤집힐 만큼 여전히 예쁘다. 잉그리드에게 추파를 던져대는 저놈을 용납할 생각은 없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이를 세 명이나 낳고도 잉그리드는 한창 때의 아가씨처럼 아름다웠고, 나이를 먹을수록 흉해지기는커녕 우아함만 더해졌다.
ⓒ 2017 흰울타리 / 대원씨아이
“그렇게 무섭게 화만 낼 거면 돌아갈래요.”
잉그리드가 그의 손등을 매만지며 속살거렸다.
잉그리드의 무섭다는 말에 리건은 또 금세 누그러지는 자신이 짜증이 났다. 악순환이었다. 멍청하게 경악한 눈을 한 청년은 떠날 생각도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 짜증 나.’
고개를 젖힌 리건은 테라스 위에서 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설상가상 흉흉한 표정으로 나간 리건을 알아차리고 따라 나온 불청객까지 있었다.
“야, 각하!”
술을 거나하게 한 대니얼이다.
리건의 손을 잡고 있던 잉그리드가 슬며시 놓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리건은 그조차도 짜증이 나서 더욱 세게 깍지 끼어 잡았다.
“야야, 각하, 뭐 해. 무슨 일인데 그런 얼굴로 나가? 사람 놀라게.”
“대니, 너는 빠져.”
웨스턴을 노려보는 리건의 눈빛이 살기로 등등해지자 대니얼이 눈치 빠르게 정리했다.
“여기서 싸우면 안 된다! 오늘 주인공은 나라고! 스포트라이트는 다 내가 받을 거야!”
대니얼의 큰 소리에 건물 곳곳의 테라스에 나와 있던 이들의 눈길이 그들에게로 쏟아졌다.
리건은 대니얼이 요란하게 이목을 끌어대는 모습에 속이 더 울컥했다.
‘지랄을 하네.’
빡치는 건 대니얼은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취한 체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다. 저놈을 본 지가 몇 년인데 진짜 취한 것과 그냥 취한 척하는 걸 구분하지 못하겠나.
리건은 지금 웨스턴이라는 청년이 잉그리드에게 접근해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바닥이었다. 대니얼의 병신 짓을 웃음으로 넘겨줄 만큼의 여념은 없었다.
“꺼져, 멘데즈 웨인만 앞에서 네 행실 다 까발려버리기 전에.”
“야아야아, 오늘따라 왜 이리 까칠하게 굴어?”
웨스턴이 말라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가련히 사죄했다.
“……저 때문인 것, 가,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 연회의 주역인 대니얼 베이런 백작과 저런 격의 없는 사이이기까지 하다니. 제 무덤을 팠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니얼이 그제야 그를 알은 체했다.
“어, 당신은.”
“코벤 가에서 왔습니다.”
“아아, 그래요. 이야기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무슨 거래를 텄다던데.”
웨스턴 코벤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황급히 잉그리드와 리건에게도 사과했다. 목소리는 울 듯 떨렸다.
“대, 대니얼 베이런 백작각하, 에스펜서 공작각하, 공작부인, 미,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잉그리드가 상냥하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리건, 또, 또 이런다. 그냥 몇 마디 이야기 나눈 것뿐인걸.”
잉그리드는 다정하게 리건의 뺨을 당겨 입 맞추어 달랬다.
리건은 픽 웃더니 금세 기분이 풀린 것처럼 잉그리드의 코에 그의 코끝을 비볐다.
“너 이제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아, 응?”
그 때, 연회장 안쪽에서 리사가 ‘대니, 어디 갔어?’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홱 고개를 돌린 대니얼은 리사의 손에 들린 술잔을 발견하고는 ‘안 돼!’ 소리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을 누그러뜨린 리건이 순진한 청년 웨스턴이 허물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돌아보며 서늘히 경고했다.
“이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접근했다니, 거지 같은 꼴로 여자 꼬실 생각일랑 때려치우고 귀족들 초상화부터 사 얼굴을 익히는 게 나을 거다. 그리고 잉가, 넌 따라와, 너 혼자 안 둬.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리건이 잉그리드의 손목을 끌고 몸을 돌렸다. 따라가기 전 잉그리드는 순진한 청년 웨스턴에게 살짝 턱을 까닥여 인사한 후 말했다.
“……고마워요.”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웨스턴은 그저 머엉, 발렌틴 사교계의 가장 유명한 부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운명의 사랑은 그렇게 바람처럼 찾아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 버렸다. 아니, 찾아온 적도 없었다.
구멍 난 것처럼 가슴이 휑했다.
밤 없는 경제도시 엘뷔니는 시골 청년 귀족에게는 정말 무서운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집 가고 싶다…….’
◈ ◈ ◈
그 후 리건은 연회가 이어지는 내내 예민하게 잉그리드를 시야에 두려 했다. 오죽 노골적이었는지 잉그리드가 난감할 정도였다. 불쾌해하지 않아도 된다 설명을 했는데도 리건은 뒤끝이 남아 불편하게 굴었다.
중간에 헤젠이 찾아와 ‘리건 님 심사가 왜 저렇게 꼬였습니까?’ 하고 눈치 빠르게 물었지만, 눈치 빠르게 두 번 묻지는 않았다.
잉그리드는 몹시 피곤했다. 웨스턴이라는 청년을 만나고 난 후 리건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무리를 한 건지 발도 많이 아팠다.
자정에 이르기 전, 리건과 잉그리드는 웨인만 가의 일원들과 대니얼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했다. 리건은 신경질적으로 옷깃의 단추를 끌러냈다. 내내 참았다는 듯이 거칠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잉그리드는 다소곳이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앉은 잉그리드를 바라보던 리건이 말했다.
“잉가.”
“응?”
“요즘 너……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딱딱한 표정에 비해 기가 죽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잉그리드가 오늘은 어쩐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중간 중간 그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혼자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혹 그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때문인 건가 잠깐 의심했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리건이 할 수 있는 건 언제나처럼 잉그리드가 먼저 입을 열어줄 때까지 보채고 조르는 것뿐이다.
“아니, 없어요.”
“아까도 생각할 게 많아 나갔다더니.”
“생각이야 늘 하는 거잖아요.”
잉그리드가 엷게 미소를 그리며 말을 돌렸다.
리건은 번듯하게 정리해 넘겼던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어 문지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잉그리드는 이상하다. 내색은 않지만 은근히 그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기도 했다.
리건이 손을 내밀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잉그리드가 갸웃하며 손을 내어주었다. 리건은 확 잡아 그녀를 끌어당겼다. 놀란 잉그리드가 휘청이며 그의 허벅지에 기대어 앉았다.
리건이 불안으로 잠긴 목소리를 속삭였다.
“알려줘. 응……?”
“…….”
“잉가, 응? 알려줘.”
리건의 입술이 잉그리드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잉그리드가 반응하지 않아 조금 더 길게 입술을 눌렀다. 결국 참지 못하고 혀로 가르고 들어가 헤집어 핥았다. 잉그리드는 능숙하게 그의 키스에 응하며 웃었다. 키스의 농도가 조금 짙어지고, 숨소리가 밭아질 무렵 잉그리드가 먼저 입술을 뗐다.
“아……. 음, 정말 그냥, 별생각 안 했어요.”
“별거 아닌 거면, 말해 봐.”
“……시간이 참 많이 지났구나. 그런 생각?”
10년이면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10대 후반에 그와 결혼을 했던 잉그리드는 이제 20대 후반이 되었고, 20대 초중반에 그녀와 결혼했던 리건은 30대 초중반이 되어 있다.
“그래서, 아가씨 때로 돌아가고 싶었나? 응? 그래서 그 새끼랑 시시덕거렸어?”
“그렇게 말하면 나 돌아가 앉을 거야.”
“잘못했어.”
기분 좋게 미소 지은 잉그리드가 고개를 틀어 리건의 입술에 쪼오옥 길게 입술을 눌렀다 뗐다.
“있지, 리건. 나 아까 웨스턴 코벤 영랑을 만나고.”
“이름까지 외우…….”
“나 말 안 해.”
“아, 알았어, 그만 물고 늘어질 테니까 말해.”
“오랜만에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어요.”
리건의 입술이 서서히 다물렸다.
잉그리드와 그의 첫인상은 피차간에 서로 좋지 않았다. 리건은 잉그리드에게 수많은 실수를 했다. 그들이 지금 이토록 행복할 수 있는 건 전부 잉그리드가 모든 걸 묻어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리건이 잉그리드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잉그리드도 리건의 목에 팔을 둘렀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무심한 체 중얼거렸다.
“그랬어?”
잉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잉그리드는 대뜸 ‘첫눈에 반했다’라고 말하는 웨스턴의 마음이 특별히 고맙거나 불쾌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사람들의 그런 사랑을 받아왔다. 그녀를 알지 못하는 이들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사랑을 고백해 왔다. 한때 저 먼 이웃나라의 왕비가 될 뻔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선택했던 건 그녀를 하찮게 대하는 유일한 남자였다. ‘네가 아름답기는 해도 내 취향이 아니다’라거나 ‘볼만하네’라거나. 하는 식으로 그녀를 대했던 이 남자.
“생각해 보니 우스워서요.”
“뭐가.”
“내가 결국은 정말 당신이랑 결혼해서 이렇게.”
“…….”
“‘과분하게 사랑을 받는구나’ 하고……. 나중에 당신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리건과 자신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꿈을 꾸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것은, 아니,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건강한 세 명의 아이가 있으니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지 못할 터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은 어떻게 될까.
리건의 마음이 닳고 자신의 마음이 닳아버리면. 그때는 이런 불안이나 슬픔조차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두려웠다. 그만큼 사랑이 커지고 믿음이 커져서.
사랑과 믿음이 남지 않은 그와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우울한 건지 기분 좋은 건지 모를 미소를 띠고 있는 잉그리드를 빤히 응시하던 리건이 손끝으로 그녀의 등허리를 문질렀다.
“……잉가, 네가 다른 새끼랑 눈이 맞았는데 내가 이혼을 안 해주면 말이야.”
“그런 말 하지 마요.”
“우리 영리한 부인은 이혼녀보다는 차라리 미망인이 되는 게 낫겠다 할 여자란 말이지. 그래도 부탁이니 내 목숨은 살려줘. 너랑 눈 맞은 새끼는 찢어 죽이러 가야 하니까.”
답지 않은 농담이지만 그 농담마저 리건다워서 잉그리드는 조금 전까지의 진지함을 잊고 웃어버렸다.
“당신은 가끔 너무 살벌한 농담을 해.”
“정말, 아까 그 새끼도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농담 같아?”
리건의 눈동자에 어린 불안과 갈망이 뒤섞인 뜨거운 감정에 잉그리드는 웃고 말았다.
이런 열렬한 사랑은 아마 리건이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을 만큼 난폭하고 다정한 사랑에 익숙해져서, 그녀는 이제 이 사람을 잃은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추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사랑.
아마 마지막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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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벌써 10년이나 지나버렸어요.”
“…….”
“언젠가 우리가 지금처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슬프겠죠? 당신도 슬퍼할 거죠?”
리건은 잉그리드가 사랑의 유효기간을 믿는다는 걸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잉그리드는 사랑을 받는 동안의 행복보다 그것이 떠나간 후의 빈자리를 더 두려워했다. 사랑을 두려워했다.
나아진 줄 알았는데, 아직 조금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리건은 잉그리드를 이해한다. 그 역시도 사랑이 그를 떠났을 때의, 제 밑둥까지 송두리째 뜯겨나가는 상실감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그 사랑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써왔고, 애쓸 것이었다. 그는 사랑을 두려워하는 잉그리드가 두렵다.
잉그리드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 당긴 리건은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말했다.
“……잉그리드 에스펜서, 내 눈 봐.”
사선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던 잉그리드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리건은 그녀의 눈꺼풀에 살포시 입술을 맞춘 후 말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힘든 일을 직면했을 때 넌 밀로아에 나를 두고 떠났지.”
“…….”
“그때, 내가 제 정신이 아니기는 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바랐어. 사랑하기 싫다고, 너를 사랑하기 싫다고. 정말 미친 듯이 싫어서, 엿 같아서, 토할 거 같고,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계속 빌었거든. 씨발, 이 여자 좀 안 사랑하게 해달라고. 나 좀 살려달라고.”
그렇게나 아프던 시절에는 다시는 이 여자가 제게 돌아와 주지 않으리란 비참함에 절어 있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아파 몸부림치며 대상 없는 누군가에게 애걸했다. 제발, 그만 좀 사랑하게 하라고. 이대로면 난 정말 죽는다고. 하지만 아무리 끊어내려 해도 끊어낼 수가 없었더랬다. 빗물처럼 스며든 애정은 그의 양분이 되어 이미 그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 받아들일 수밖에.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제 평생의 일이라는 걸.
“난…….”
“그런데 안 되던데. 그렇게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 빌어도 안 됐다고. 내가 오죽하면 필로본까지 제 발로 기어들어 가 처박혔겠어, 응?”
“…….”
“그런데 10년이나 되었는데도, 나는 아직 너만 보면 미치겠다고. 그때보다 지금 너를 더 사랑하게 되었는데 네가 생각해도 답 없잖아. 안 그래?”
“…….”
“난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를 버릴 준비를 하는 것 같아서 두려워.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내가 싫다고 할까 봐. 그러면 가만 안 둘 테지만.”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요.”
그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멈칫한 리건이 툴툴대는 투로 중얼거렸다.
“빌어야지 뭐. 내가 우리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겠어. 그냥 제발 나 좀 봐달라고 또 질질 짜면서 빌겠지. 이런 말 하는 거 쪽팔리니까 놀리지 마, 좀.”
웃음을 터뜨리는 잉그리드의 고개가 흔들렸다. 잉그리드의 뒷머리를 어루만지는 리건의 손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이렇게 이 여자가 도망갈 생각을 할 때마다 리건은 더 애가 탄다.
잉그리드의 팔이 그를 더 꽉 끌어안는 것을 느낀 후에야 리건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러면 이제 슬슬 말해 봐, 혹시 내가 뭔가 서운하게 했어? 응? 내가 부족하게 대해줬어? 왜 그래, 응? 다해줄게.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리건, 고마워요.”
“뭐가. 갑자기.”
“사랑해요.”
10년이나 함께 산 남녀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은 별것 아닌 고백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너무 많이 입 밖으로 내어 가치가 없어진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설레고 말문이 막힌다.
“그렇게 촉촉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하면, 나 또…….”
“싫어.”
잉그리드가 눈치 빠르게 거절했다. 마차에서 한 번 하는 게 뭐 어때서. 많이 했잖아. 그렇게 농담하려 했으나 마음을 바꾸어 잉그리드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미소 지은 리건은 그녀의 목덜미를 깊이 들이마셨다.
“진짜 싫은 거 맞아?”
“비밀.”
가끔은 잉그리드가 그를 한 번 쥐락펴락해 보려고 이러는가 싶다.
‘요망한 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파블리아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그들의 집, 그들의 요람, 어쩌면 그들의 무덤이 될 곳이었다. 마차가 멈추고도 리건과 잉그리드는 미동 없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앉아 있었다.
잉그리드가 고개를 돌리고 리건이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마차의 창밖으로 백금발의 소년을 업고 그들을 마중 나온 헨슨과 붉은 머리칼의 여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손을 쥐고 깡총대는 또 다른 소년이 보였다. 잉그리드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져들었다.
“도착했네요.”
둘만의 세계에서 나갈 시간이다.
또 다른 세상이 저 앞에 있다.
리건은 미동 없이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었다. 잉그리드의 표정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여자의 미소라기엔 보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미소.
이제 그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잉그리드 같은 여자가 자식을 두고도 이유 없이 그를 버릴 리 없으니, 어쩌면, 그의 바람은 저 세 명의 아이들을 통해 이미 완성되었는지 모른다.
리건도 그의 자식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그의 인생을 뒤바꿔준 이 여자를 향한 사랑보다 크지는 않다. 이기적인 아버지라 불릴지라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늘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아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고 했지.”
“응, 이제 내려요.”
리건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잉그리드에게 물었다.
“……만일 네가 열여덟 살일 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나와 결혼해 줄 건가?”
잉그리드의 움직임이 멎었다. 예기치 않은 순간 날아온 질문은 그들 관계의 본질을 더듬는 어떤 관념적인 것이었다.
열여덟, 스물셋.
철없던 시절의 첫 만남은 그들의 삶을 바꾸었다.
잉그리드의 입술이 다물린 짧은 시간 동안 리건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 그 입술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 리건의 가슴도 미약하게 박동했다.
“열 번, 백 번, 천 번이라도 장미꽃을 들고 당신을 찾아갈게요.”
고개를 저으며 웃은 리건이 마부가 연 마차문 저편의 풍경으로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자연스럽게 잉그리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잉그리드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리건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응.”
“그때로 되돌아가면 그때는 내가 먼저 청혼하는 게 낫겠어.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두 번 청혼받는 건 그렇잖아?”
잉그리드는 그날의 소녀처럼 웃었다.
여전히 잠들지 않은 저택에서 아이들이 달려 나온다. 헨슨은 고롱고롱 곯아떨어진 레오르드를 업고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다.
‘다녀오셨습니까.’
‘레오는 잠들었나요?’
‘예, 기다리시다가.’
‘엄마, 오늘 재미있었어요? 난 레오랑 숨바꼭질을 했어요! 착하게 잘 있었어요!’
‘엄마, 누나 언제 결혼해?’
‘응, 난 왕자님이랑 언제 결혼해요?’
‘일단 들어가자.’
그들의 앞에 선 잉그리드는 다시 어머니가 되었다.
‘아빠, 안아줘요.’
‘아빠, 누나 결혼 언제 해요?’
그런 잉그리드의 뒤에 서서, 리건은 다시 아버지가 되었다. 헤일리를 안아 든 리건이 엘디스의 머리를 헝클며 헤일리의 뺨에 입 맞추었다.
◈ ◈ ◈
만일 시간을 거슬러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3왕자의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던 날. 그날이 제 삶의 가장 위대한 기적이 찾아온 날이라는 것을 남자가 알고 있었다면.
‘리건 에스펜서 공, 인사드려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았을 때.
‘저는 파르네세 가문의 막내딸, 잉그리드라고 해요. 일곱 살에 엘버튼 공자와 약혼 관계에 있었으며, 열여섯 살에 비올라 가의 영식과 1년간 약혼 관계를 유지했고, 지난달…….’
한 송이의 장미꽃이 그들의 이야기에 시작점을 찍는 그 순간에. 처음 눈을 맞춘 그 순간에.
‘다 됐고, 잉그리드 파르네세 영애.’
‘예?’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공께서 어째서요?’
장미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의아쩍게 묻는다면 남자는 웃으며 답할 터다. 아마도 이렇게.
‘글쎄요, 이번에는 처음부터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공께서는 저에 대해 잘 아시나요?’
‘그냥……. 어차피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니까.’
사슴을 잃은 사슴치기는 그 무엇도 아닐 터이니, 저만의 사슴이 되어줄 여자를 위해.
남자는 그렇게 또 한 번 마법 같은 기적을 붙잡을 것이다.
흰 사슴과 사슴치기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해, 이렇게 끝이 난다.
‘그리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어쩌면 흔한 이야기.
◈ ◈ ◈
흰 사슴 잉그리드 외전 외딴 역 완결
ⓒ 2017 흰울타리 / 대원씨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