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22
522화 저 자식이?
흘누는 진양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의식을 거행하는 건 어렵진 않겠네만. 살아있는 사람에게 사망의식을 써 본 적은 없어서 말일세. 잘 알고 있겠지만 사망의식을 거행하고 나면 더 이상 그 이름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네. 자네 역시 더 이상 계무도라도 불리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자네의 공법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다시는 계무도의 모습으로는 변할 수 없을 걸세.”
진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계무도라는 신분으로 이도까지 와놓고 이제와서 버리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계무도가 죽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작전이라서요. 도와주실 거죠?”
“뭐, 그런 거야 어렵진 않네만.”
진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마디 덧붙였다.
“어르신, 괜찮다면 한 사람만 더 추가해도 될까요? 목여심이라는 여인입니다.”
이어서 진양은 귀신령에 기운을 불어넣어 목여심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부탁드립니다.”
“자네, 사망의식이 그렇게 쉬운 의식인 줄 아는 겐가? 죽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또 생기가 약해져 있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건데…….”
흘누는 돌연 말을 멈추며 진양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들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허나 사망의식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진양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어르신, 당장 설명드리기엔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습니다. 원래는 제게 큰 원한을 산 여인인데, 최근에 계무도의 모습으로 지내면서 그녀에게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결심이 서질 않더라고요.
어차피 벼랑 끝에 내몰린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그냥 목여심을 죽이고 아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원한과 은혜를 동시에 갚게 되는 셈이니 서로에게 이득 아니겠습니까?”
흘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알겠네. 허나 아직 단 한 번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의식을 거행해 본 적은 없다네. 혹여나 그녀가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 책임은 아닐세.”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두었으니까요. 이래도 죽는다면 그건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죠.”
이건 한참의 고민 끝에 진양이 생각해낸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사실 진양은 이도로 오기 전부터 계무도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건 바로 여족의 사망의식이다.
사망의식은 진양에겐 그저 또 다른 신분을 하나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체에 사망의식을 사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진양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다소 불확실하긴 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헌국공과 엽건중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와는 상관없이 죽을 목숨이었다.
이중으로 첩자질을 하였기 때문이다.
“휴…….”
진양은 깊게 숨을 내쉬며 굳게 다짐했다.
‘내가 앞으로 또다시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내나 봐라…….’
진양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그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한 눈빛이었다.
이제 삼사 협동 심의가 시작되면 계무도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된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협동 심의 따위는 이미 큰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이 이상의 발버둥은 더 이상의 의미가 없었기에 헌국공은 이미 단념한 지 오래다.
사실 헌국공 같이 높은 자리에 올라있는 사람이 범인 몇 명 죽인 것쯤은 큰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대규모로 학살을 벌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삼사 협동 심의가 열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인마 때문이다.
때문에, 엄벌을 피하는 건 어려울 듯했다.
하지만 상관은 없다.
이 정도로 목숨에 지장이 가는 형벌이 내려지진 않을 테니 말이다.
진양은 일 년 넘게 이도에서 지낸 만큼 이곳의 규칙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천하를 쥐고 있는 대제가 겨우 이 정도 일에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일을 벌인 것이다.
천천소는 여느 때와는 달리 매우 점잖은 모습이었다.
이곳은 대리사.
진양을 바래다주러 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천고를 울린 곳에서 심의를 여는 것이 관례이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엽건중과 헌국공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일들이 커다란 파급력을 가져오게 된 바람에 형부에서 심의를 열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대리사는 이도에서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는 곳이다.
원칙대로라면 대리사는 누군가를 하옥시킬 수 있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기관이다.
물론 이건 말 그대로 ‘원칙적인 틀’ 안에서만 고려했을 경우다.
대영 신조에는 대리사와 같은 일을 하는 기관이 두 곳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곳이 바로 형부와 정천사다.
이도 밖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선 형부가 관할권을 갖는다.
그리고 이도 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대리사가 관할권을 갖는 게 맞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통 작은 일의 경우 사건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된 아문에서 처리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귀족이나 이름 있는 가문의 인물이 연루된 사건의 경우에도 대리사는 아무런 관할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명목상으로는 최고 집행 기관이지만, 실제로는 기껏해야 상담만 해주는 상담소 같은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긴 지는 백여 년도 더 된 얘기다.
조정을 드나드는 고위 관리부터 하급 관리까지.
심지어 친왕들조차 대리사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규정대로라면 대리사의 수장인 사경(寺卿)은 육부의 상서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시골구석 관아의 수장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
때문에, 이날 열리는 삼사 협동 심의도 그저 대리사의 부지를 빌려 연 것일 뿐, 대리사는 아무런 발언권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느 백발의 늙은이가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눈빛으로 천천히 정당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대리사의 사경이었다.
그는 형부 상서 엽건중과 정천사의 대표로 나온 일품 외후 한안명에게 가볍게 견례를 올린 뒤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그는 누가 봐도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
한안명은 견례를 올리는 그를 곁눈질로 힐끔 바라보기만 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엽건중도 마찬가지였다.
대리사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리사 사경 역시 단순히 허물 뿐인 자리에 앉아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삼사 협동 심의는 애초에 큰 의미가 없는 자리다.
그러니 대리사의 사경이 오건 말건 관심조차도 없다는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잠시 뒤.
심의 시간이 다가오자 헌국공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뒤이어 진양도 안으로 들어왔다.
진양은 내부 분위기만 봐도 대충 어떤 자리인지 알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너무 형식적인 거 아니야?’
정천사의 사장은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리사 사경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몸이니 죽기 전에 시원하게 말이나 하고 죽으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양은 앞으로 나아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이들에게 차례로 견례를 올렸다.
익숙한 얼굴 한안명부터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대리사 사경, 그리고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는 엽건중과 헌국공에게까지.
진양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견례를 올렸다.
견례가 끝나자 엽건중은 두터운 두루마리를 허공으로 던졌다.
허공에 둥둥 뜬 두루마리가 헌국공 정면에서 펼쳐졌다.
“이건은 죄상(罪狀, 죄목이 적힌 고발장)입니다. 헌국공, 꼼꼼하게 읽어보고 이의가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이 자리에서 신중히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죄상을 보여주고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디까지 인정하지 못하는지를 얘기한다.
그리고 이의가 있다면 그에 대해 모두가 함께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규정에 있는 순서 그대로였다.
그러나 헌국공은 그저 곁눈질로 대충 살펴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적혀있었는데, 기껏해야 범인 학살과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적힌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모두 인정합니다.”
헌국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했다.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이런 일 따위에 힘쓰는 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대제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이 아니라면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죄를 인정하는 게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형벌이 내려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무거운 벌은 아닐 테니 크게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한편, 그건 엽건중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앞으로 갈 길이 먼데 겨우 이런 일에 발목을 잡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엽건중이 손을 뻗자 두루마리가 다시 접히며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헌국공이 별다른 이의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 내용 그대로 폐하께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꾸벅꾸벅 졸던 대리사 사경이 힘겹게 눈을 뜨며 한마디 했다.
“폐하께 보고를 올린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설마 이대로 심의가 끝이란 말입니까?”
사경은 반쯤 눈을 감은 채 장내를 둘러보며 씁쓸히 웃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포권을 취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체력이 달려서 말입니다.”
“부 대인, 너무 개의치 마시지요.”
이때, 한안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이어서 엽건중에게도 예를 차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엽 대인, 소인 감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증거도 확실하고 당사자도 더 이상 아무런 이의가 없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단 말입니까?”
엽건중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네놈이 갑자기 왜 거기서 나오는 게냐?’
“엽 대인,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다름 아니라 아직 인마를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소인 이 자리를 빌어 계무도에게 몇 가지 묻고자 하는 것이 있사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편하게 물어보시지요.”
정천사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온 만큼 한안명에게도 심문을 할 권한은 있었다.
무엇보다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일어난 게 아닌 만큼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다.
엽건중의 인상이 다시 펴졌다.
“계무도, 한 가지만 묻겠소. 인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오?”
한안명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양을 쏘아보며 물었다.
“녀석이 원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소. 인마가 존재하는 걸 알면서도 그냥 방치할 순 없소이다.”
느긋하게 심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진양에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저 자식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거야!’
여기 앉아있는 모든 이들이 오늘의 심의는 그저 형식적인 자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안명 혼자 나서서 저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