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23
523화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다
진양은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한참 뒤에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대인, 솔직하게 말씀드리도록 하죠. 제게 인마의 행방에 대해선 묻지 말아주십시오. 어차피 백날 물어도 대답해드리진 않을 테니까요. 다만, 인마는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만 단념하시지요. 그리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설령 제가 죽어 인마를 제압할 사람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원마로 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진양이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어갔다.
“대인, 그러나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군요.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인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원흉을 죽인다면 인마의 원한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마가 될 일은 없을뿐더러 더 이상 인마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런데, 모든 죄의 원흉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원한을 갖고 태어난 어린아이를 죽이려 하신다뇨? 정말 너무 양심 없는 것 아닙니까?”
정곡을 찔린 한안명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라도 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그는 일부러 꾹 눌러 참았다.
진양의 말이 맞다.
원칙대로라면 인마를 태어나게 만든 주범인 헌국공은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도 가능하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원흉인 헌국공이 죽으면 인마까지도 해결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그걸 인정한단 말인가?
한편, 진양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헌국공은 그제서야 진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단 한마디도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순진한 놈. 계란으로 정말로 바위를 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무엇보다 진양이 계란을 던지고 있는 바위는 헌국공이 아닌 대제다.
대제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아무리 계란을 던져봐야 아무리 소용이 없는 법.
헌국공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진양은 자리를 떠나는 헌국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헌국공을 보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이어서 엽건중도 자리를 떠났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무슨 일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친구가 아주 마음에 드는군. 걱정하지 마시게나. 내가 책임지고 헌국공에게 중벌이 내려지도록 할 테니까.”
진양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엽건중은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다소 뜻밖이라는 듯 생각했다.
‘아직 본인을 암살하려던 자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멍청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순진한 건지. 무식한 만큼 용감한 녀석이구나.’
그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곧장 궁성으로 갈 채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헌국공, 이제 넌 끝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한안명은 그제서야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스승이 불참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진작부터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한안명은 어두운 표정으로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그때, 진양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한 대인, 저는 길 상가에 있는 장향각이라는 곳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혹여나 더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장향각으로 오시지요.”
“그렇게 하지.”
한안명은 포권을 취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장내에는 기록관을 제외하고는 진양과 사경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사경도 이만 나갈 생각인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진양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진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진양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젊은이, 이제 곧 하늘이 변할 걸세.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게나.”
진양은 미간을 찌푸리며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긴…….’
그때, 문득 일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신조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만한 힘을 갖고 있는 법이라는 말이었다.
사경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겉보기엔 아무런 권한조차 없는 힘없는 늙은이처럼 보이긴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르신, 좋은 말씀은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르신을 보고 있으니 예전에 있었던 일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어느 한 노인에 대한 얘긴데, 분명 왼쪽 머리를 다친 듯했으나 이상하게 오른쪽 몸이 말썽을 일으키더군요.”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젊은이, 많은 걸 안다고 해서 항상 좋은 건 아니라네.”
“뭐, 일단 지금까지는 괜찮았던 걸요.”
노인은 잠시 벙찐 듯 진양을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하며 나가버렸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똑똑히 보았다.
분명 처음에는 몸의 왼쪽이 불편해 보였었는데 지금은 오른쪽이 불편한 듯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연기력 하나는 장난 아닌 영감님이군. 보고 배울 게 많은 사람이야.’
다시 장향각으로 돌아온 진양은 제일 먼저 여심의 방을 확인했다.
아직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듯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하긴. 이제 겨우 반나절 지났는데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그녀가 살아남을지, 아니면 죽게 될지는 진양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운에 달려있다.
어쨌든 확인을 마친 진양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분신을 만들어냈다.
“그럼 잘 부탁해!”
진양은 분신을 놔둔 채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세 걸음쯤 걸었을 무렵, 진양의 모습이 갑자기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할 일도 모두 마친 만큼 더 이상 이도에 머물 이유는 없다.
도망칠 길은 이미 진작 다 생각해두었다.
게다가 이전에 해관난의 모습으로 연기를 하면서 각 성문마다 어떤 규칙이 있는지도 완벽하게 파악해두었다.
그렇게 진양은 어느 한 귀족이 이끄는 상단 틈에 끼어 조용히 이도를 빠져나갔다.
* * *
같은 시각.
헌국공과 엽건중은 수많은 궁문을 지나 정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전에선 대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제는 심의의 결과를 들은 뒤 어떤 처벌을 내릴지 결정할 것이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정전 대문 앞에 함께 섰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헌국공, 그렇게 비웃을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다.’
‘엽건중, 비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두거라.’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예를 갖춘 뒤 대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먼저 엽건중이 심의 결과에 대해 보고를 올렸으며, 이어서 헌국공이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하며 땅에 엎드렸다.
“헌국공, 범인을 학살한 죄에 대한 댓가로 감봉 천 년과 십 년의 폐관을 명하노라.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시간을 갖도록.”
내시가 대제의 명이 적힌 종이를 읽어내려갔다.
겉보기엔 꽤 큰 형벌 같지만 사실상 아무런 피해도 없는 형벌이나 마찬가지였다.
“엽건중, 이번 일에 대한 공을 인정하며 상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모두 상투적인 내용뿐이었다.
그렇게 종이에 적힌 모든 내용을 다 읽은 내시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황명을 받드시오!”
두 사람 모두 땅 위에 엎드리며 동시에 외쳤다.
“신, 명을 받드나이다!”
그러나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폐하, 긴히 보여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순간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적지 않게 당황한 것이다.
이어서 상대가 무언가 들어있는 나무상자를 꺼내 드는 걸 발견한 순간,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동시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목여심! 네년이 감히……!’
하지만 인제 와서 깨닫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기 때문이다.
헌국공,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아무런 노력 없이 국공이라는 자리를 세습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조에서도 큰 공을 세우며 오늘날의 자리까지 왔다.
엽건중은 그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지 않으며 조용히 살아온 인물이지만 예리한 눈과 빠른 판단 덕에 형부의 상서라는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두 사람 모두 평범한 사람은 아닌 만큼 눈치가 매우 빨랐다.
때문에,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서로의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이미 눈치를 챘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늦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눈치도 빠르고 매사에 극도로 신중한 사람이었지만 결국은 같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실수는 바로 자신보다 아래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이다.
범인들의 경우 눈에 거슬리면 그냥 죽여버렸다.
수하의 경우 일부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범인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목여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목여심은 그저 언제 죽여도 아쉽지 않은 존재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되자 두 사람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감히 그녀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감히!
전혀 예상치 못 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상대의 나무상자를 발견하는 순간까지도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 목여심이 주화입마에 빠져 쓰러졌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한낱 하찮은 일들 따위에는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늘 충직한 모습만을 보여왔었다.
언제든 대인의 명령이라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길 상가로 팔려 가는 순간까지도 미련하게 두 사람 앞에 고개를 숙이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어찌 감히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두 사람 모두 당장이라도 목여심을 불러들여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눌러 내리며 냉정하게 상황에 대해 눈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두 사람 모두 함정이 빠졌다는 사실을 대제가 납득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미 상자를 꺼내놓은 이상 도로 주머니에 넣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내시가 상자를 여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상자를 열자 옥새가 들어있는 투명한 상자가 나왔다.
두 상자 모두 상자의 형상뿐만 아니라 내용물까지도 완벽하게 같았다.
보좌에 앉은 대제는 눈을 들어 두 상자와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하얗게 질린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외쳤다.
“위 경을 들라 하라!”
죽도록 치고받고 싸우던 두 사람이 같은 물건을 꺼내 들다니.
이제 옥새의 진위 여부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엄청난 금기를 그것도 대제의 눈앞에서 저지른 이상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여지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대제를 이용하여 서로를 제거하려고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대제 앞에서 금기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