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59
559화 이제야 좀 끝이 난 기분
같은 시각, 신정이 있던 자리.
입마 상태가 되어버린 혈라마의 몸에서는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새빨갛게 충혈된 두 눈으로 하늘 먼 곳을 노려보며 광소하고 있었다.
“영제, 팔 하나를 대가로 나를 이곳에 묶어두려는 줄 알았거늘. 아직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좋다. 다음 생에 두고 보자. 과연 네가 먼저 성불할지, 아니면 이 몸이 먼저 성불할지를 말이다!”
팟-!
이어서 밀려온 밝은 빛에 휩쓸리며 혈라마의 형상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수많은 생명체들의 비명 소리가 대지를 가득 채웠으나 시간의 파도는 매정했다.
그저 멍하게 파도가 덮쳐 오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의 파도가 완전히 지나가고 난 뒤.
파도와 함께 휩쓸려갔던 일념의 세계가 다시 생겨났다.
그리고 사라졌던 생명체들도 하나씩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순조롭게 회복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진양의 회복 속도는 눈에 띄게 더뎠다.
어느 정도 회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는 여전히 갈라진 빙하와 같은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나마 단단한 육신을 가졌기에 이 정도로 끝났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소멸되어 사라져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천천히 회복하는 수밖에…….”
꿈속 공간.
도려낸 기억으로 만들어낸 몽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처음 대영 신조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엔 중상을 입어 회복을 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며, 아마 당분간을 좋아질 기미가 없을 거라고 떠들어대며 다녔었다.
그런데, 그 말이 씨가 될 줄이야.
‘이래서 말을 조심해야 하는 건가…….’
아무래도 회복이 될 때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시간의 바다가 휩쓸고 지나간 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이 모두 지나고 나면 다시 외부인이 일념의 바다로 드나들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아마 그때쯤이면 영제도 바깥으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일단 적을 구덩이로 밀어 넣은 이상 아예 바깥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게 상책이었다.
진양은 위풍이 이제껏 자신을 속이며 벌였던 일들을 떠올렸다.
이전에는 그저 헛웃음만 짓는 게 전부였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영제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로 자비를 베풀어선 안 된다.
영제를 완전히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기로 한 이상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기반을 박살 내버리는 것.
그리고 그 기반은 대영 신조였다.
즉, 대영 신조를 완전히 무너뜨려야만 영제의 기반을 박살 내버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을 쓰면 된다.
바로 영제를 보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영제의 기반을 완전히 박살 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주는 건 가능할 것이었다.
그런데, 혈라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쪽 팔을 잃은 영제가 일념의 바다를 벗어나기 위해 나타났다는 건 곧 혈라마를 꺾는 데 실패했다는 뜻.
그렇다면 혈라마는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렇게 되면 그저 혈라마가 조금이나마 더 힘을 써서 영제의 발목을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한쪽도 죽는 건 원치 않았다.
오랫동안 살아남으며 서로의 발목을 붙잡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진양은 책자를 꺼내 기억해야 할 점들을 몇 가지 살펴본 뒤 꿈 밖으로 나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느새 괴산을 돌고 있었다.
이제 이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야 좀 끝이 난 기분이 드는군.’
* * *
어느덧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가희는 거의 모든 힘을 회복한 상태였다.
이토록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일념의 바다에서 많은 양의 원기를 흡수해둔 덕분이었다.
이는 곧 진양이 지금까지도 시간을 질질 끌며 이도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다른 흔적들은 전부 지웠으나 원기에 관한 기억들은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을 끌며 원기를 완전히 소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만 원기에 대한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것과는 별개로 다른 사람이 느끼기엔 기반이 이전과는 다르게 훨씬 더 단단해졌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았다.
진원을 모두 소모한 뒤 다시 회복을 할 경우 그만큼 최대치가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큰 전투를 겪고도 기반만 멀쩡하다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지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때문에, 이를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진양의 상처도 어느 정도 호전이 된 상태였다.
완전히 좋아졌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목숨은 건진 정도로 볼 수는 있었다.
진양은 선수에 앉아 일출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며 지평선 너머로부터 강렬한 자기가 대지를 뒤덮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돌아온 뒤로 진양에겐 일출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매번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럴 때마다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잊었는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기억해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엄청난 일을 이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또 일출을 보러 나온 건가요?”
붉은 치마를 입은 가희가 선실에서 걸어 나와 진양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두 사람은 함께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걸 잊어버린 모양이에요. 마치 어째서 갑자기 일출을 보는 걸 즐기게 됐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가희는 분명 웃고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눈빛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잊어버렸으면 잊어버린 거죠. 오히려 너무 많은 걸 기억하고 있으면 머리만 아플 뿐인걸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굳이 기억나지 않는 것까지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진양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희 역시 진양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출이 끝나자 가희는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
진양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뭐든 찰떡같이 알아들어서 참 편하단 말이지.’
만약 청란이었다면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부터 시작해서 일일이 하나씩 설명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기억을 지워야 했을 테고, 또다시 설명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수도 없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을지도 모른다.
피식-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니지. 청란 소저라면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겠지.’
* * *
이도 근방에 도착한 진양은 가희와 청란, 그리고 자란과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진양은 그녀들과 함께 이도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직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희는 일단 싫어도 이도로 돌아가야만 한다.
지금처럼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너무나도 위험했다.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건 곧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도에 남은 제군법상이 무슨 난리를 피우게 될지 모른다.
다시 이도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가희는 대제희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이었다.
제군법상이 영제이긴 해도 본체에는 못 미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진양은 방향을 틀어 이도의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부에서 중부로 들어서며 괴산 근처에서 멈춰 섰다.
일전에 상고 문자가 적혀있던 양피지에서 익힌 풍수 공법에 대한 연구는 이미 모두 마쳤다.
양피지에는 단순히 공법 외에도 또 다른 숨겨진 무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상고의 풍수사와 관련된 단서였다.
검둥이에게도 물어보았으나 그도 모른다고 했었다.
그가 살았던 상고 시대는 일념의 바다에 존재했던 혼란의 시대보다도 훨씬 더 먼 옛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피지에 적혀있는 고대 문자들은 조금이라도 달라도 그 뜻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아무리 검둥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결론을 지을 순 없었다.
묵양에게도 보여주었으나 그 역시도 상고 풍수사가 남긴 흔적이라는 것을 추측하기만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결론짓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한 글자 차이로 뜻이 크게 바뀌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모자랐었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풍수사를 찾아가 뭐라도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었다.
그나마 남가일몽의 전승 덕분에 기반을 갖추게 되었긴 하지만, 입문 상태였기 때문에 몇 년에 거쳐 간신히 기억에 새긴 것이 전부였다.
이 정도 속도로 남가일몽 정도의 경지에 오르려면 아무래도 한참은 더 걸릴 듯했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가 아닌 ‘어쩌면’이라고 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남가일몽을 성불시키며 획득한 황금색 기능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능서에는 ‘대몽진경(大夢真經)’이라는 공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신해, 영혼, 그리고 이성을 수련하는 공법이었는데, 남가일몽의 모든 것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기능서였다.
때문에, 남가일몽이 아무렇게나 가르쳐준 것보다 훨씬 더 정확했다.
최근 며칠 동안 진양은 아예 처음부터 새로 공법을 익히며 대몽진경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공법을 배울 수 있었다.
잘라낸 몽경을 평소에는 연결이 끊어진 상태로 놔뒀다가 원할 때만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공법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원할 때만 그것을 연결하여 기억해낼 수 있었다.
대몽진경의 내용은 매우 방대했다.
지금까지는 접해본 적 없는 아예 새로운 수련 방법으로 봐도 무방했다.
때문에, 전부 배우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진양은 신해를 튼튼하게 만들고 이성과 영혼을 단련시키는 공법만 익혔고, 나머지 운용 공법들은 이해만 하고 넘어갔다.
전부 다 익히기엔 시간이 없었다.
일단 필요한 것만 골라서 익히고 남은 건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익히는 수밖에.
한편, 일전에 대제주에게서 얻었던 보라색 기능서가 남아있긴 했으나, 막상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보라색 기능서인데!’
이딴 걸 도대체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다소 실망스럽긴 했지만 이런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장은 지식을 넓힌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보라색 기능서인데, 언젠간 어디서 써먹을 수 있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