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697
697화 전설과도 같은 존재
전씨 가문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건 대장로다.
지금 당장 그를 보내는 건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다.
가주 한 사람의 힘으로는 현재의 국면을 뚫고 나가는 건커녕, 가문을 지켜내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진양에게 아무 말 없이 선물을 보낸 것이다.
진양이 아무 말 없이 선물을 받았다는 건 곧 대장로를 만나러 온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선물을 받았으면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는 게 예의니까.
다시 진양이 찾아온다면 대장로는 분명 기운을 차릴 것이다.
물론 어째서 진양과 함께 있으면 기운을 차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대장로가 기운을 차린다는 사실이기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가주의 예상대로 진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로를 찾아왔다.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는 물론이고 답례품까지 챙겨서 말이다.
진양은 준비해온 탕을 대장로에게 건넸다.
약불로 무려 보름 넘게 끓여온 진한 탕으로 조금만 마셔도 상당량의 기력이 회복되는 그야말로 보약 중의 보약이었다.
답례품을 건네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선물을 보낸 게 대장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 늘 그렇듯 알고도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선물을 받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온 겁니다. 자, 일단 한번 맛부터 보세요.”
대장로는 탕이 든 그릇을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마셨다.
‘선물이라. 가주가 보낸 모양이군.’
마음 같아선 조금이라도 더 버텨볼 생각이었으나 이내 단념하기로 했다.
며칠 동안 살펴본 결과 이런 식으로 진양과 줄다리기를 해봤자 크게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가주가 선물을 보낸 시기가 상당히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대장로는 선물을 자신이 보낸 것처럼 얘기했고, 진양은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의미 없는 인사말을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대장로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대제희께서 살신전에 대해 조사하실 때 황실 기록을 살펴보셨다고 들었소. 그중에는 아마 연회에 대한 기록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진양의 눈이 다소 커졌다.
‘꽤 예리한 노인네군.’
진양이 법상의 본존이 여자 수도사라는 걸 알았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그가 이 일에 대해 조사 중이라는 걸 유추해낸 것이다.
“맞습니다. 보는 김에 저도 같이 살펴봤는데, 신조 내에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여자 고수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중 세 분이 가장 크게 인상 남더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관직에서는 물러나신 상태라 행방에 대해선 알 방법이 없네요.
제가 듣고 싶은 건 이 세 사람에 대한 얘기입니다.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서 말이에요.”
“세 사람?”
대장로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겨우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 방대한 양의 연회 일지를 다 뒤져서 세 명으로 추린단 말인가?
게다가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대영 신조에 나타났던 이들이고, 또 황실 연회에 참여했다는 걸 알아낸 것일까?
“어떤 얘기가 듣고 싶은 게요?”
“그냥 옛날얘기죠. 수많은 남자 수도사를 꺾고 최정상에 오른 사람들인 만큼 흥미로운 얘기가 많겠죠. 설마 이렇게 오래 사시고도 그런 얘기는 단 한 번도 못 들어봤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허허, 그런 얘기라면 당연히 알고 있소.”
대장로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얘기 못 할 것도 없다.
이건 법상의 본존과는 다른 신분을 가진 자들의 대한 얘기이니 말이다.
한 번 시작된 대화는 무려 사흘이나 이어졌다.
대화를 마친 진양은 꾸벅 인사를 올린 뒤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대장로는 그릇에 담긴 탕을 한 모금 마시며 씁쓸한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이런 인재가 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그저 개탄스럽구나.’
지난 사흘간의 대화를 통해 진양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냈을지는 대장로도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전조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자가 대제희의 뒤를 밀어주고 있는 이상 전조의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일을 벌인다고 해도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
대장로가 머물고 있는 저택 밖.
가주는 대장로의 저택을 몰래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껄껄 웃으며 무언가를 마시고 있는 대장로의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만 해도 다 죽어가던 것과는 크게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가주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거처로 돌아온 가주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관가를 불렀다.
“일전에 황씨 장군이 진양의 저택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던데. 황씨 가문에서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더냐?”
“일단은 꿀 눌러 참고 있는 듯합니다. 허나 이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관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나의 이름으로 황씨 가주에게 초청장을 보내도록 하거라. 그를 만나야겠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초청장을 보내야 할지…….”
한 가문의 가주는 아무나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니 그에 맞는 명분이 필요한 법.
전씨 가주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장로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가문 안팎으로 퍼져있을 터. 그렇다면 어느 정도 반응을 보여야겠지.’
“대장로께서 손아랫사람들을 그리워하신다고 하고, 올 때는 부인도 함께 동석하라고 전하거라.”
대장로의 상태가 진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건 이제 확실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 대장로를 기운 차리게 만든 건지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장로 역시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그도 간접적으로 진양을 돕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진양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말이다.
황씨 가문은 겉보기에는 화를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같은 대가문을 거느리고 있는 가주로서 그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가주는 어떻게든 참고 있을지는 몰라도 가문 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전씨 가문까지 나서서 입장을 낸다면 황씨 가주도 어느 정도 아랫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진양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진양에게도 도움을 주는 것.
그리고 이는 결국 대장로를 지키는데도 도움이 되고, 또 전씨 가문을 지켜내는 데도 큰 보탬이 될 것이다.
* * *
같은 시각.
다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진양은 얼마 전 살펴보았던 자료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한참 자료를 살펴보던 진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놀랍군. 의심 가는 세 사람 중에 황씨 가문 사람이 있긴 해도 가장 가능성이 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되면 법상의 본존은 십중팔구 황씨 가문의 사람인 게 확실해지는 거잖아.”
생각할수록 더욱 확신이 들었다.
당시 여자 수도사는 분명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법상을 포궁(胞宮, 임신한 여인의 자궁)에 심었을 것이다.
황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그만큼 재력도 있고 기반도 튼튼하니 다른 사람에 비해선 훨씬 더 넉넉한 환경을 갖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규모가 큰 가문인 만큼 내부에서 일어나는 의견 충돌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씨 가문은 근 수천 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수의 탁월한 인재들을 배출해냈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 백 년에 하나는 배출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부분 완전히 성장하기도 전에 요절해버리거나 어디서 객사하여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중 절반 이상이 황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
아무리 부유하다고 한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제한적이고, 그만큼 양질의 자원은 더욱 제한적이다.
어차피 대가문의 후손들인 만큼 대부분이 탁월한 재능을 가진 천재들뿐이다.
서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 사라진다고 해서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입이 하나 줄어들면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자원의 양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주어지는 기회 역시 마찬가지다.
정상의 문턱까지 가서 돌파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만큼 작은 기회라도 절대로 놓칠 순 없다.
오직 범인을 조상으로 두거나 운 좋게 기연을 통해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산수들만 재능을 가장 중요한 수행의 요소로 여길 뿐, 규모가 큰 세력에 소속된 수도사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들에게 자원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공법, 영석, 영단, 법보, 그리고 윗사람의 가르침까지.
이 모든 것이 자원에 속한다.
대형 세력에 속한 수도사들에게 재능은 그저 초석에 불과하다.
실전에 뛰어들게 되면 단순히 재능만으로는 비빌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양은 황 장군이 도중에 죽지 않고 순조롭게 오늘날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 덕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여자 수도사가 황씨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황씨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법상을 심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 이후로도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황 장군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설령 접촉이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없었다.
만약 전씨 대장로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진양은 끝까지 황씨 가문의 여자 수도사는 배제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전설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그녀의 이름은 황영.
한때 황씨 가문의 주맥에 속했던 인물로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자 운 좋게 혼인 도구로서 이용당하는 운명을 피했던 극소수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이도 곳곳에 명성이 퍼져있었고, 심지어 같은 또래의 젊은 수도사들 사이에서는 ‘선자(仙子)’라는 다소 과장된 명칭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가끔 외출을 하긴 했지만 수련을 하거나 경지 돌파를 위한 기회를 찾으러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일생 동안 시집을 가지 않았다.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해 본다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보다 재능도 기회도 부족한 사람조차 시집을 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세대가 바뀌는 동안에도 황영은 계속해서 조용히 지냈고 조금씩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갔다.
때문에, 그 누구도 황영이 시집을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사라져갔을 것이다.
황실의 기록이나 대장로의 이야기를 통해 들을 필요도 없다.
당시 황영은 분명 황씨 가문 내에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경지에 오른 게 분명했다.
법상 강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누구도 감히 그녀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